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우에노 지즈코 지음, 나일등 옮김 / 은행나무 / 2012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먼저 정말 웬만하면 이런 글은 쓰지 않는데, 자제하고 자제하다 시국이 하도 악화 일로로만 치닫고 있고, 이 책이 그 학문-사상사적 위치에 비해 국내에서 대중들의 (특히 東京大에 대한) 뿌리 깊은 사대주의로 과대 평가가 증폭되면서 상황 악화의 일원인을 제공하고 있다는 판단하에 올리게 되었으니 널리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각론 상도 많은 오류 사항들이 있지만 각설하고 전체 Frame을 지탱하는 기반 논리축들의 핵심모순 중 정세에 심각한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사항들에 한정해서만 집중 언급키로 하겠습니다.

 



별로 진지한 서평의 가치도 없는 이 책은 일부 무비판적 독자 계층을 구닥다리 2세대 무뇌 페미니스트로 만들어 줄 강력한 입문 장치입니다.




1. 과장된 강경 Gender 2분법의 진영논리


원저자 우에노 지즈코[=上野 千鶴子]는 학문적으로 이미 너무 낡았으며, 따라서 치명적으로는 정체성( 구성(요소들))(에서)의 ’교차(성)[=intersection(ality)]’ 개념{*a} 등을 새로운 방법론과 개념틀로 제공하며 핵심적 발전과 기여를 해 온 Judith Butler 주도 3세대 feminism 등의 연구 성과들을 전혀 뼛속 깊이 체화하지 못한 채 낡고 오형성된 범주적 진영 논리만을 전형적으로 반복 재현하며 모든 주체들을 성별로만 분할해 균질화하는 단순 2분법적 사고를 전개, 강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깊은 슬픔과 고통, 그리고 그 말할 수 없는 억울함을 층분히 이해하고 또 최선을 다해 함께 싸우려 노력하고 있지만, 이 책은 독자로서의 당신과 한국 사회를 GENDER 2분법에 갇힌 범주적 남녀갈등과 성대결의 진영논리로만 몰고 갈 것이며, 이 낡디 낡은 paradigm의 외국서적을 이제야 읽고 있는 것은 그야말로 명백한 퇴행에 불과한 행위이고 우리( 사회)를 불필요한 극단적 성대립으로 몰아 넣을 뿐입니다.



그 억울한 속풀이, 한풀이와 푸닥거리는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이 책은 그것이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의롭다 하더라도 지적이나 비판 등 여성에 대한 모든 부정적 견해는 아무리 사소한 것도 전부 혐오로 받아들이는 등 대화 자체를 원천적으로 불가능하게 만들 정도로 과도한 편집증적 피해망상과 증오심만 갖게 할 뿐, 얄팍한 사이비 정신분석을 넘어서는 진지한 궁극적 원인구조 분석과 대안 제시가 전혀 없어 그냥 문제의 근원은 남성성(의 증명/인증 (행위)) 자체이기 때문에 모든 남성들이 다 구제불가능한 악마들이라 그 어떤 연대나 협력도 불가능하고 노화나 Gay화 등을 통해 더이상 남자이기를 포기할 때에만, 그때 가서는 어떨지 모르겠다는 식의 황당한 관점을 퍼뜨리며, 당신 주변의 모든 남자 사람과 친구들에 대한 밑도 끝도, 무엇보다 출구도 없는 증오와 적개심에 휩싸이게 만들어 우리 모두를 괴롭힐 것입니다. 이런 책을 그렇게나 판매하고 성대결 사태를 이 지경까지 만드는데 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면 최선을 다 한, 최소한 조금이라도 책임있는 대책과 답변을 내놓아야 했지만, 최근 방한강연에서조차 선생에겐 정말 답이 없었습니다. 그나마 mirroring에 공식적 반대입장을 강조하고, 비폭력(의 학습)과 평화를 주장한 정도를 다행이라 해야 하다니.....




2. Gender 이기주의


반면 다른 gender들에 대하여는, 물론 비교는 전혀 안 되겠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절대 눈물을 보여선 안된다는 등 자신들의 gender규범 때문에도) 구구절절 표현하지 않고 있을 뿐 나름대로 겪어내고 있을 저마다의 고통들에 완전히 눈 감게 만들면서 "남성도 가부장제의 희생자"라는 구닥다리 2세대의 표준 이론조차 제대로 충실히 구현해내지 못 하고 있는 그야말로 값싼 선동 서적에 불과합니다.



(이런 무책임한 편집증적 선동가에게, 여타 gender들에 행한 여성의 가해 상호성에 대한 자기 성찰 따위까지를 기대한다는 것은.....

그의 Frame에 입각하면 여성에 대한 어떠한 지적과 비판도 모두 심각한 여성혐오이자 폭력인 것은 두 말 할 나위도 없고, 심지어 여성의 자기성찰이나 반성 또한 여성들의 여성혐오이기 때문에 골수 Gender-Narkissist{*b}(로서)의 절대적, 무조건적 자기옹호만이 권장되어야 한다는 meta-messege를 퍼뜨리고 있습니다.

이런 방법으로 동성의 모든 추잡한 욕망과 술수, 거짓말과 가해 행위 등은 전부 삭제하고 사상시켜 완성해낸 여성-gender에 대한 순수 피해자 표상, 즉 순(전무)결의 피해자로서(/)만의 자기 표상은 결국 전도된 (gender) Narkissism으로서의 자기연민입니다.)


이것은 모든 문제의 원인을 남성 전체에게만 돌리는 그저 체계화된 남성혐오사상일 뿐입니다.



上野선생은 강연에서, 일본에서는 이미 1982년부터 그리고 근래엔 한국은 물론 세계 많은 국가들에서 뚜렷하게 나타나는 여아선호 현상에 대해 그 원인으로 첫째, 남아에게는 교육[과 취업]의 실패가 [사회적으로] 절대 용납되지 않는다는 막중한 육아 및 교육부담과 둘째, 초고령화에 따른 부양에서의 기대용이성 2가지를 언급했는데 제2원은 아직 ’출가외인’ 문화가 지배적인 한국실정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고, 제1원은 양날의 칼이라서 반대로 남성들이 교육과 취업에서 받는 사회적 압박과 고통의 비교불가능한 비대칭성을 동시에 웅변해주는 분석이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기서 반드시 발생할 수 밖에 없고, 또한 앞으로 더욱더 가속점증할 이들 교육이나 취업에 실패하는 많은 수의 남성 문제와 대책에 대해서도 (더구나 사회학자로서는) 당연히 관심을 기울여야 하지만 上野는 시종일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그에게 이들은 그저 적군이고 경쟁자들일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런 식의 태도가 독자 대중들을  통해 계속 확대된다면 이들은 곧 극우 폭력세력이나 미치광이 범죄자, terrorist가 되어 우리 곁으로 되돌아올 수 밖에 없는 우리 공동체의 이웃이자 가족이고 친구들입니다. 이런 식의 GENDER 이기주의{*b}적 태도가 계속 된다면 우리는 급증하는 흉악(/)보복 범죄와 그로 인한 극도의 hysteria적 불안과 공포의 일상적 만연, 이를 빌미로 한    테!러!방!지!법!   등 기만적 안전을 표방하는 파쑈 치안경찰국가, 수용소국가의 도래라는 악순환을 결코 막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본격적인 생지옥, 헬조선은 아직 오지도 않았습니다.



삼풍백화점, 성수대교와 끊임없이 반복되는 각종 공사장 붕괴 등 사건사고와 산재 및 인재들, ...세월호, 가습기 살균제 등등 도저히 예상조차 할 수 없는 우리 생활 주변 곳곳에서 호시탐탐 우리의 목숨 자체를 노리며 도사리고 있는 탐욕적 자본의 손길들과 천안함, 연평해전, 일본의 극우보수화 및 재무장 추진과 미국의 적극 방조, 각국의 핵무장 시도와 해상 영토분쟁, 제주 강정 해군기지, THAAD배치, 그리고 이 모든 (동북아) 국제질서의 핵심에 놓여있는 세계경제위기와 그로 인한 미중 갈등 및 폭력화 등등 날로 고조되어만 가는 전쟁 위기 상황 속에서 어느 지정성별이 조금 더 특혜를 받고 있는 것 같다고 시기와 질투에 사로잡혀 타자의 성 전체를 악의 근원으로 마녀사냥하는 것은 지혜로운 사유라 보기 정말 어렵습니다. 그들은 어차피 전쟁 한번 나면 가장 먼저 끌려나가 이유도 모른 채 개죽음 당할 존재들이기도 한 것 역시 사실입니다. 더구나 날로 심화되어가는 신자유주의 양극화와 경제위기 속에서 우리 모두는 정도만 조금씩 다를 뿐 그 누구도 차별에서 자유롭지 않고 Gender 상관없이 나날이 한발한발 자살로 인도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저 체제의 희생양이고 구조의 꼭두각시에 불과합니다.

성/gender 차별을 조장하고 지속적으로 재생산함으로써 여러 이득을 보고 있는 배후의 숨은 구조와 진정한 지배자를 찾아내 함께 힘을 합쳐 저항하는 작업이 정말 그 무엇보다 중요한 시국입니다. 어느 한 gender의 힘으로는 그야말로 어림도 없는 일인데다 소모적 상호자기파괴와 더욱 심화된 억압이라는 역효과만 가져 올 2분법적 성대결 사고는 상황을 파탄으로만 몰고 갈 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모든 문제의 원인을 언제나 다른 Gender에게만 돌리면서 비난을 일삼거나 그들의 고통은 철저히 무시하고 심지어 다른 소수 gender들은 그 존재 자체도 부정{*c}해버리는 등등 순혈 여성을 제외한 모두가 여성혐오세력(일 뿐)이라면서, 모든 Gender간 협력과 연대를 불가능하게 만들 뿐 아니라 너무 무책임하게 그런 문제엔 아예 관심도 없는 이러한 극단적 Gender 이기주의 frame의 폐해는 아시는 바와 같이 한국에서도, 전형적 주류남성들에게 뿐 아니라 언제나 고통받는 대표적 성소수자 집단이어왔던 Gay들에 대하여까지 최근 ’똥꼬충’이라는 극악하고 반인권적인 무차별 공격을 감행해댄 일부 자칭 ’페미니즘’ 집단과 이로 인한 내부분열 및 자기붕괴로 잘 드러난 바 있습니다만, 上野선생 자신도 본서에서 이와 매우 유사한 입장에 미련을 두고 있어, 이것이 설령 모든 남성이 Gay화되어 더이상 ’남자’이기를 포기하게 된다 하더라도 연대와 협력은 모르겠다고 말해버리는 너무나 무책임하고 자가당착적인 자기모순{*d}의 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 ’8. 上野 대책의 비판’ 절 참조




3. 정신분석학적 시대착오


上野선생의 이 책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오류들을 야기한 원인들 중 다른 한가지는 그가 정신분석학을 본격적으로 따로 공부하지 않고 이 책의 핵심 idea의 거의 모든 것을 그대로 빌어 온 Eve Sedgwick의 저작 속 낡은/초기 Freudian 정신분석학의 껍데기 일부에만 간접적으로 입각하고 있어 이런 Gender 2분법의 오류를 그나마 극복, 수정할 수 있는 정신분석학 상의 사회(학)적 표상인 ’대타자’ 등의 개념이 대부분 도입되어 있지 않고 사안에 따라 서로 다른 체계와 계열의 정신분석학들이 혼종되어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대타자’는 주체의 성별과 관계없이 주체의 지평을 완전히 초월해 있는 MASTER이자 지배자이기 때문에 어리석게 이들 간의 강력한 지배-피지배와 억압-예속 관계, 그리고 철저한 위계와 서열 관계 등은 전혀 보지 못한 채 동일 평면 상에서 뒤섞어 혼동해버리면서 모두 지배자 group으로서만 추상한 ’남성 연대[; homo-social]’ 같은, 비현실적 상상을 차단해 주는 필수적 개념틀입니다. 사회는 이 대타자가 지배하는 상징계에 의해 질서지어지는 것이지 上野계에서 생각하듯 "서로를 남자로서 인정한 남성들의 유대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더욱 놀라시겠지만 이 ’대타자’는 인격체조차 아닙니다. 도처에 무수한 권력망들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복잡계 Network의 시대에 차별과 폭력의 Cartel로서의 권력체계는 원시부족 때처럼 그렇게 단순하게 작동하지 않습니다.{*a}


Levi-Strauss 인류학은 현대사회에서 allegory로 해석하면서 (고도)추상화 등의 변형작업을 거쳐야지 단순하게 직접대입하면 본서에서와 같이 우습고 황당한 결론으로 빠져버리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j}




4. 성차


이 외에도 생화학적 성차와 정신분석적 성차, 사회문화적 gender차 간 (엄밀한 구분과) 괴리, 불일치에 대한 골화된 사유감각이 부족하고 복잡한 주체의 성차화 mechanism에 대한 숙고도 없어 (주로 일본어 해설소개서들을 통해 파편과 일단을 전혀 접하지 않은 것은 아닌 듯 보이지만) 결국 본서 전체를 관통하는 기본관점은 해부학적 생물학주의 2분법과 실질적 차이가 없이 성별은 그냥 의심할 수도 변경할 수도 없게 주어진 사고의 출발점이자 대전제로 지나치게 과장되어 있기에 성차(화)는 주체 간 작은 switch에 불과{*e}하다는 식의 Lacanian 정신분석학과 그에 기반해 전면화된 3세대 feminism{*f}의  진보와 발전의 흔적이 실제적으로 용해되어 있지 않음으로써 이렇게 극도로 과장된 고정성별관념이 2분법적 성대결 구도를 끊임없이 촉발, 자극하고 고착, 강화하는 전형적 2세대 사고의 답습을 보여줍니다.




국제 Feminism 운동이 일찌감치 2세대를 넘어 ’여성 없는 feminism’을 표방하는 3세대로 대체된 데에는 치열한 실천과 절실한 이유들이 있었고, 이러한 2세대 feminism이 몰고 왔던 각종 폐해들에 대한 나름대로의 처절한 반성과 피땀흘린 극복 노력이 있었던 결과인 것입니다.




5. ’혐오’ 개념


사실 이 책의 핵심적 방법론은 다른 게 아니라,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종국적, 영구적 추방과 축출을 목표로 하는 격렬한 극단 감정으로 정의되어 있는 ’혐오’라는 개념을 그와 전혀 상관없이 ’비하’나 ’차별’ 정도를 의미하는 매우 느슨한 자의적 정의만으로 출발해 수시로 은밀한 재정의를 반복하며 무책임하게 남발하다 결국 ’타자로서 대우하는 행위 전체’라는 배후 의미로 최대(한) 일반화시켜 ’남성성 (증명)’과 동일한 의미로까지 확장함으로써 모든 gender간 관계들을 전부 ’여성혐오’로만 환원하고, (권말에 이르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은 결국 ’남성성’ 그 자체라는 결론으로 치닫고 마는 ’개념 마법’ 뿐입니다.




6. 무동기-무조건적 여성혐오 model과 현실-현대적 수정 model


이 외에도 이 책이 기만하고 있는 현실관계들로는 모든 여성들과 특히 여성성이 그 자체로 배제되는 것처럼, 또는 적어도 대다수의 여성들이 그러한 것처럼 묘사하고 있으나, 사실은 ’이 model과 실제 사회( system)’ 내부로 결합/편입/수용되고 있는 여성들의 인구가 이 책이 과장하고 있는 묘사에 비해 너무나 많다는 점, 이 Sedgwick-上野 model에선 결정적으로 왜 동성(성)은 선택되고 이성(성)은 혐오, 배제되는지 필수, 필연적 동기와 이유도 전혀 설명되지 않는다는 점, 또 실제/실재적으로도 사회가 전혀 여성들을 배제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전고에서도 누누히 밝힌 바와 같이 오히려 필수적으로 더 많은 여성들에 의존해서 그들(의 유/무급 노동(력))을 적극적으로 착취, 수탈해야만 유지될 수 있다는 점 등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에 대해서도/이 때문에도 이 model은 다음과 같이 결정적으로 수정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즉, 여성이라는 사실이나 여성성 때문에 배제되는 것이 아니라 실은 여성이 자신의 여성성을 (극대화하여) 증명하거나 또는 반대로 (上野가 ’출세전략’이라 칭한, 그러나 ’(명예)남성화 전략’이라 칭해야 하는 바) 자신의 여성성을 억압하고 대신에 (남성성,) 특히 노동력과 생산성을 증명하는 전략으로도 얼마든지 받아들여지는 것이 현실이기 때문에 본서에서처럼 아무 이유없는 성별에 따른 (무조건적) 배제 모형, 즉 남성성은 수용하고 여성성은 혐오하여 배제시키는 모형보다, system이 그 편입 조건이자 관문과 채널로서 남녀 공히 각 gender들에게 서로 다른 편협하고 차별적인 gender 규범, 편견과 고정관념, 이상형을 부과, 요구하고 있는 모형으로  이를 통해 그 구체적 규범과 (선입)관념들을 밝혀내고 위계와 차별성을 비판하며 해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론 체계입니다. 이 긴급 수정된 model이 그나마 훨씬 더 현실적일 뿐 아니라 3세대의 발전(내용)에도 근접합니다.



따라서 이 수정 model을 위 §3절의 대타자에 의한 상징계 model과 통합하면, 이 강고한 상징계 지배질서에서 자리/’의자’ 하나를 어떤 주체에게 할당해 줄 때 그것은 막연히 그 성별에 의해서만 낭만적이고 자동, 범주적으로 편입/배제로만 결정되는 게 아니라 철저한 계산에 의해 개별 주체 하나하나를 최대한 이용하고 뽑아 먹을 수 있도록 복잡하고 중층적인 자리들의 체계 안에 배정하는 것으로 보아야 하며, 정말로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이 계산서의 내역과 계획, 그리고 그 (작성 등의) 절차와 mechanism을 규명하고 해체나 대체할 방법을 찾아내는 작업이지 동기도 해명 안되는 성적 연대와 배제라는 뿌연 안개 속 낭만주의 원경화 한 장 손에 들고 분노와 적개심에 치떠는 광기가 아닙니다.




7. 중간 요약


이상의 모든 문제점들은 Gender 2분법과 그에 기반한 여성-Gender 이기주의 및 Narkissism(의 결합)으로 요약되는데 이것, 특히 여성-Gender 이기주의야말로 결과적으로 분리주의 등 대부분의 2세대 feminism들을 포괄적으로 기타 세대 feminism들과 대별시켜 주는 가장 큰 특징이 되어버렸고 후사건적 역사해석에서 2세대 feminism의 가장 결정적 퇴행의 핵심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당연하지만 이 이기주의와 Narkissism은 분리불가능한 동일체의 양면에 불과한 개념쌍이고 자신의 모든 욕망과 술수, 잘못 등은 전부 사상시켜 만들어낸 여성-gender의 순수 피해자 표상은 결국 전도된 (gender) Narkissism으로서의 자기연민입니다.




8. 上野 대책의 비판


이 엉성한 이론은 자연히 대책에 있어서도 남성(성)-포기 등 그 자체 도저히 실현 불가능한 망상적 요구로만 귀결될 뿐 아니라 설령 모든 남성들이 남성되기를 포기한다고 해도 문제가 결코 해결되지 않는, 논리적으로 해가 있을 수 없는 Frame이기 때문에 이것이 바로 東京大교수라던 그가  이렇다 할 대안을 전혀 제시하지 못하고 있는 근본적 이유인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망상 속에서나마 모든 남성들이 남성이기를 포기한다 해도 이번엔,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어머니에게서 물려받은 여성혐오가 이미 모든 여성들 속에도 깊숙이 내재해 있고 사회 전체에 공기처럼, 중력처럼 퍼져 있는데 우리가 무슨 짓을 한들 도대체 어떻게 없앨 수가 있단 말입니까!! 이것이야말로 전형적인 편집증적 피해망상이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이 어설픈 염세주의적 세계혐오 정신분석이 말하지 못하고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진실이 있는데 그것은 대타자와 (남아/남성) 주체 간에는 동일평면에서의 유대가 불가능한 지배- 예속 관계일 뿐 아니라 또한 그 예속 주체에게는 대타자-살해라는 강력한 욕망도 동시에 존재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대타자에 의한 인구 대다수의 주체화 과정은 ’남성’이라는 "성적 주체" 로서의 인증과 homo-social에의 편입을 통한 유대/연대가 아니라 ’거세’ 후 상징계에의 진입/배치를 통한 예속/식민-주체화입니다. (따라서 Freud에서도 이미 자궁 속에서 거세되어 나온 것으로 상정되는 여성/여아와는 본질적으로 별 차이도 없습니다.)

그런데 上野가 남성들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매우 ironic하게도 남성(되기) 포기하기, 역시 거세입니다. 이것이 새로운 대타자, 즉 가모장(주의 fascism)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이란 말입니까? 게다가 이 가모장주의 fascism과 여성-gender 이기주의에서 더 황당한 건 이 거세가 가부장 대타자에겐 ’상징적 거세’일 뿐인데 上野선생은 그야말로 ’실질적 거세’, 생물학적 거세까진 아니지만 화학적 수준의 거세를 요구하며, 더구나 이런 거세남들이 ’초식남’ 등의 이름으로 현실에 출현하자 선생 스스로 증언했듯 "아..막상 실제로 보니 남자답지 못해 별로 (성적) 매력을 못 느끼겠네"라며 (여성들이) 외면하고 무시하며 돌아서버렸다는 사실입니다. 선생도 자신의 이론적 요구가 그대로 이루어진 이러한 사태와 그 미래에 대해선 (그래서) 너무나 무책임하게 "그것은 어떨지 모르겠다"고 말해버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 上野 이론이 퇴행적인 이유는 동계의 분리주의 등 여타 2세대 feminism 분파들에서는 Sedgwick처럼 여성들의 homo-social과 homo-sexual 연속체로서의 Lesbian 공동체 같은 탈주/도피 노선이나 여성권력에 의한 남성권력의 견제와 균형 (또는 초극단주의에서 ’대체’) 등 그래도 현실적 대안을 추구하는데 반해 上野는 바로 이렇게 오분석된 문제의 근원으로 인해 남성성 자체의 포기 등 황당한 요구를 무책임하게 전개하고 있기 때문이라 할 수 있습니다.




9.  삼각구조의 회전과 바꿔치기


문제는 동일한 (신)성가족 3각형의 구조 자체에서 끊임없이 파생되어 나오고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 구조는 그대로 둔 채 구조 내에서 요소와 인자들의 성별이나 자리 바꾸기만 반복하려는 (이런 2세대적) 사고방식으로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고, 이것이 한 columnist가 언급했다는 " 무뇌아적 Feminist들이 구조는 그대로 둔 채 남성들만 공격해 권좌에서 끌어 내리려 한다"는 지적의 또 다른 숨은 해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유명한 3각 구조도 사실은 어머니, 아버지와 중성/무성적 자식으로 구성되나 上野(계) model에선 아무 이론적 근거도 없이 이 3각 구조가 은밀하게 회전하거나 모두 동료/동년배들로 혼합(/)대체되어 있는 것도 문제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아버지는 여전히 준거점=권력자(이자 동료로서 결합된 2중체)이면서, 그와 함께 내부/중심의 상위에 있던 어머니만 어느새 완전히 사라진 채 처음부터 언제나 항상 외부 하위에만 있던 타자 여성으로 대체되고 이것이 논점의 은밀한 일탈을 은폐합니다. 이러한 눈속임을 통해 도대체 왜 아버지가 자신의 연인이자 아내인 어머니를 쫓아내고 아들만을 선택한다는 것인지, 아니면 그 소문난 딸바보들이 너무나 애지중지하는 딸자식은 왜 내쫓고 아들만 남겨 놓았는지 등등을 설명해야만 하는 책임으로부터 도망쳐 숨는 것이 가능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현대/후기근대 핵가족의 회전 3각구조에서는 특히나 오히려 돈-벌어-오는-기계로서 친밀한 가족관계와 소통에서 소외된, 손님같은 실각한 아버지가 아니라 가족/가정 전체의 총지배인인 어머니가 이 3각형의 최상위 정점을 차지하고 있거나 적어도 최소한 ’아버지-어머니’쌍이 수평-대등한 윗변을 형성하는 평행4변형이나 능형 등 4각((형)을 구축하는) 구조가 대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반면, (만약 권력자 없는 완전한 동년배 모형이나 (친모계) 융합 2중체 모형이었다면) 딸의 3각 구조에서는 역으로 자신과, 준거 동성이나 동료/친구 , 그리고 외부 남성으로 구성되어 역전된 거울 권력 구조가 되므로 반대로 그 남성 1인이 끊임없는 여성집단 내 공동평가와 비교, (뒷)담화의 객체와 대상이 되고 종국적으로 선택 또는 배제 당하는 약자의 위치가 됩니다.)

▶{ 연구자용 Memo 3 (((& *j))) }




10. 따라서 남겨진 우리의 전략적 과제라면 차라리 다음과 같은 문제를 다루는 것이어야 할 것입니다.


오히려 gender/성별 2분법의 공고화와 대항/거울 성별부족 결집이라는 심각한 역효과를 감수하면서 여성부족 (/) Network 강화 결행을 통한 체제 내 불평등만의 보정을 시도할 것인가, 아니면 보편주의 성평등 교육과 성범주교란 교육에 집중하면서 아예 성별 체계 자체와 동성 부족들을 뒤흔들고 해체하는 작업으로 직접 이행할 것인가?

양자 모두 (각 세대의 합리성을 대표하며) 각자의 장점과 단점들을 가지고 있는 방안이라 할 수 있습니다.




11. 식민주의 지식유통


마지막으로 이 낡아빠진 사이비 정신분석과 그에 기반한 2세대의 극단주의 feminism이 어떻게 Sedgwick과 上野를 거쳐 2016년까지 살아남아 한국이라는 변방에서 때늦은 돌풍을 일으키며 이렇게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었는지는 정말 탈식민주의 지식생산양식 연구 상에서도 흥미로운 주제가 아닐 수 없다고 보여집니다.

이제는 제발 지금 여기의 우리를 우리의 힘으로 분석한 사유들이 bestseller가 되고 행동의 제1준거가 되어야 할 때입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2010년대 중반에 갑자기 다시 심화된 여성공격은 원시부족사회와는 완전히 다른 원인과 구조, 작동 기제에 의거해 직접적으로는 경제위기에 의해 추동되고 있으며 따라서 막연하고 초역사적인 추측과 대책이 아닌 정밀한 고유의 해법이 요구되는 문제임은 너무나도 명확하고 이것은 그리 어려운 분석도 아닐 뿐 아니라 이미 많은 결과물들도 안 나와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 결론 >>


1. 총 요약


요약하면 이 글은 여성과 (성)소수자들에 대한 만연한 폭력과 차별, 무시비하라는 현실을 부정하는 글이 전혀 아닐 뿐 아니라 그 심각한 구조적 성차별과 물리적 폭력, 문화적 비하 등의 현실에 대하여는 더욱 강조될 필요가 있음을 전적으로 인정하지만, 그럴수록 막연한 연민과 공감/동정이나 광적 분노, 반사적 증오보다 문제의 가장 빠르고 확실한 실질적 해결을 위해 적확한 대응책을 도출(가능하게 )해 줄 정밀한 원인구조분석이 더욱더 중요하다는 견지에서, 그러나 본서와 같은 접근법은 낡은 전형적 gender 2분법에 기초한 여성-gender 이기주의 및 Narkissism의 진영논리로 성대결만을 부추길 뿐, (그로 인해 더욱) 숨은 구조의 원인분석, 현실적 대안 창출을 통한 문제해결과 무엇보다도 이를 위한 성/gender 간 대화와 협력을 어렵게 하고,  게다가 피해를 강조하기 위해 ’혐오’라는 개념을 무책임하게 남발하며 모든 gender간 관계들을 전부 ’여성혐오’로만 환원하고 있는 등의 문제점들 때문에, 결정적으로 책임감있는 현실/실질적 대안(제시)도, 검증도 불가능한 상상적 추측에 불과해 차라리 신화나 신앙에 가깝다는 점 등은 또한 반드시 지적되어야만 할 본서의 치명적 오류들 중 일부임을 밝히고 있습니다.



오해를 방지하고자 논지를 더욱더 간명화하기 위해 비유로 예시하면, 전라도가 체계적 지역차별에 고통받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부정하지 않을 뿐 아니라 오히려 더 강조될 필요조차 있음을 적극 주장하지만, 그렇다고 문제의 모든 원인이 ’경상도민 연대’로서의 화랑도이고, 경상도 (사람들) 자체이니까 중앙정부나 권력구조, 사회체계 재편이 아니라 경상도민들 전체와 그 하나하나에 대해 경상도민이기를 그만둘 것[=경상도에 거주하지말 것~경상(스)플레인{*g}이며 아주 공격적이고 화난 것처럼 들리니 경상도 사투리를 쓰지 말 것 등등]을 강요하면서 시장통에서의 개싸움을 부추기는 것도 모자라 전라민국 (분리)독립운동을 선동하(거나 만나본 적도 없는 서양인들을 일방적으로 이상화한 싸구려 fantasy를 퍼뜨리면서 이들과 손잡고 경상도를 물리치자{*h})는 식의 시대착오적이고 생각없는 유사과학에는 반대해야 한다는 것입니다.{*i}

이러한 상황은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차별관계에서도, 원청노동자와 하청노동자, 좀 거칠게 말해서 남성화된 유급노동자와 모든 여성화된 무급노동자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특정시기 가부장제 하의 개별가정에서 완전히 실권했던 일부 비참한 극단적 가정주부들은 최종고용주의 무급하청노동자라 할 수 있음.) 

이 모든 경우에서 차별과 불평등의 원인이자 최종 책임자인 고용주는 화살을 피하기 위해 어떠한 경우에도 절대 전면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것이며, 어차피 구조조정이란 미명하에 대대적인 인원감축도 해야하는 마당에 그들끼리 서로 싸우다 죽어버리기를 바라지 함께 단결해 자신에게 도전할 것을 언제나 가장 두려워하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 장막 뒤에 숨어서 점잖게 중요한 순간 마다 상호 분열과 대립을 조장할 고의적 차별 장치들 몇가지만 신설 배치 조정하고 있는 MASTER PUPPETEER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은 이런 현실을 전혀 보지 못한 채 결국 공기나 중력처럼 세상(을 채우고 있는) 모든 것이 다 ’여성혐오’일 뿐이고 반면 ’남성혐오’ 같은 건 있을 수도 없다는 식의 초극단적 여성이기주의에 불과한 잘못된 사상이기 때문에, 이런 어설픈 주장을 계속 하면 당연히 사회 곳곳으로부터 이를 지적하고 수정, 반대하려는 반발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데 이 上野적 세계관에 의하면 이것이야말로 다시 ’여성혐오’이기 때문에 (이번엔 진짜 극우여혐세력 뿐아니라 중도나 상당한 우호집단들까지 여혐세력으로 만들거나 몰아감으로써) 결과적으로 이런 주장을 하면 할수록 여성혐오가 줄어들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더 심해질 수밖에 다른 가능성이 없게 되는 그런 논리구조에 빠져 있는 것입니다.



2. (무뇌페미를 넘어선) 대안적 feminism들


따라서 이와 같은 치명적 오류들을 내포하고 있는 본서에 비한다면 신간 서적들 중에는 차라리 약간의 비판을 가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한두 편을 제외하면 진지한 서평의 가치가 충분하고 gender ’혐오’ 문제를 둘러싼 최신 Feminism들의 다양한 경향들과 관점들을 보여주고 있는 『여성 혐오가 어쨌다구?』가 낫고, 그보다 『젠더와 사회』나 『현대 페미니즘의 테제들』은 더욱 훌륭하며, 그러나 이상의 문헌들이 FEMINISM을 구성하는 여러 관점과 입장의 feminism들을 망라해서 보여주는 장점 때문에 동시에 낡은 2세대적 관점들도 여럿 혼합되어 있으므로 이후 반드시 Judith Butler의 여러 저작들, 『젠더 트러블』{*k}과 특히 최신 번역서인 『젠더 허물기』 등은 어느 분파이든 필히 읽어야만 할 필독서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물론 이 서적들도 완벽한 해답은 못 되고 여러 난점과 문제들을 안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며 또한 3세대 feminism도 벌써 그 생명력을 다 해가고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최소한 이것들을 비판하고 극복하면서 우리 모두를 위해 더 나은 대안과 살 길을 발명해내려는 협력 작업은 현재="동시대"의 국제적/지구적 사유 최전선에의 동참은 될 것입니다.


그리고 여력이 되신다면 설득력도 떨어지며 지나치게 광범하고 평면화된 과도한 일반화를 넘어서, 이런 (검증도 안되는) 어설픈 관념적 정신분석{*j}보다는 (문화)정치경제학을 전투적으로 연구하는 것이 여성권력강화를 위해 훨씬 실질적인 도움을 제공할 것이기에 이를 적극 권장합니다.
특히 탈식민주의 제3노선이라 할 제 생각과 너무 똑같아 정말 깜!!놀!!했던 Maria Mies[=마리아 미즈] Sylvia Federici[=실비아 페데리치]의 책들은 가사노동과 성노동 등 여성경제의 거의 모든 문제도 다 포괄하고 있어 여성과 Feminist들을 위한 정치경제학 입문으로는 너무나 훌륭한 성경이 되어 줄 것이며{*l}, Gibson+Graham[ 현재까지 국역서는 깁슨-그레엄으로 『그따위 자본주의는 벌써 끝났다』, 깁슨-그레이엄으로 『타자를 위한 경제는 있다』 ]도 (개인적으로는 최선이라고 생각진 않지만{*l}) 역시 이런 점에서는 실질적 대안 경제학 입문으로 좋고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m}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여성해방론』은 그 연장선에서 포괄적 문제들에 대한 종합적 입장을 안내해 주고 있어 반드시 검토해 주시기를 강력히 권장드립니다.
특히, 최신간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은 가부장제, 정체성-정치, 특권 이론, Queer 이론, 이중체계론, 교차성, 사회재생산 등 현대 Feminism의 다양한 이론들과 임신중절권, 가사노동, 외설 문화와 영상, 성매매 등 쟁점들을 포괄하며 Feminism의 역사와 현안들에 대한 Marxism계열로부터의 최신 분석과 대안들을 알기 쉽게 제시하고 있는 가장 따끈한 Guide Book이기에 필독을 권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P.S.1}



3. 무엇을 할 것인가? 대안-품행들을 위한 첫걸음 

동시에 이를 바탕으로 목표도 전략전술도 전선도 그야말로 그 무엇도 없는 (Online) 백병전, 아니  진흙밭 개싸움 같은 개별 이성들을 향한 소모적 욕설전쟁을 멈추고, 『여혐혐』처럼 (그 이성들도 반대로 훨씬 더 한 역피해도 충분히 겪어 봤을 법한) 시시콜콜하고 편집증적인 피해의 고문서고들과 뒤섞인 평면화된 피해목록 말고, 가장 심각하고 실제적인 여성들만의 피해와 그 해결을 위한 통일된 구체적 요구를 남성들과 사회에 반드시 달성해야 할 전략적 목표로서 (제도적, 정책적 과제를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제시하기 위해 (내부적으로) 서로 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적극 협조하겠습니다. 

이 욕설전쟁은 서로에 대한 증오감정만 더 증폭시켜 SNS 상 여혐발언이 ’mirroring’ 이후 오히려 연간 9배 폭증한 것으로 조사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이런 거울관계의 어설픈 Vulgar feminism은 일베충들의 여성공격이 현재의 feminism을 결정적으로 자극했듯이, feminism이 싫어 ISIS/L로 떠났다는 김군처럼 다시 일베 등을 구심으로 똘우남들을 모아 단결시키는 역효과만 가져 올 것입니다.
부디 누구보다 악바리[ <악발이]지만 결국엔 (아무도 그 소리를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는) 너무나 무력하고 왜소한 양아치(,) 욕쟁이 할머니가 아니라  지혜롭고 용감해서 저절로 믿음이 가는 Feminist 전사들이 되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이 모든 것들을 위해선 무엇보다 먼저 인기도서 한두 권의 개인적 독서가 아니라 주변의 친구, 동료들과 함께 On/Offline에서 지속적 (Feminism) 학습, 토론, 강의, 활동을 위한 모임들을 결성하고, 모임들 간 Network과 연대를 조직해 여성-(성)소수자 정치권력화를 향한 대장정으로 부단히 나아가야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장 시급하고 절박하며 또 강력한 첫 번째 고지는 권력, 특히 제반 사회변화를 위한 권력의 핵심 중 핵심이라 할 입법권력의 장악을 위해 (먼저 각 지지정당들에 대한 압박으로부터 출발하여) 최소 50% 이상으로 육박해가는 ’국회의원 및 각급 지자체 의원(후보) 여성 및 성소수자 (/) 성평등 강제할당제 ’ 도입 등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우선 당장 한 표가 아쉬운 야권 내의, 사활적 대당관계에 있으면서 특히 여성 친화적인  두(세) 정당만을 대상으로 더욱 경쟁을 유도하여 더 많이 더 빨리 할당제를 구현하는 정당에 합심 몰표로 판도를 바꿔주는 방법을 반복하면 높은 수준의 할당제가 정당 체계 전체로 확산되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물론 여기서 성패와 속도를 결정하는 것은 당연히 여성 투표의 결집도가 되겠지만 요즘같은 Online 백병전의 열정과 energy라면 아주 불가능한 일도 아닐 것입니다.{*n}








그럼 건투를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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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  석  >>



{*a} 

개인을  구성하는 다양한 요소들의 교차와 그에 따른 소속집합(/)범주들의 동시 중첩에 의해 복합적으로 구성되는 하나의 매듭으로서의 정체성의 양태.

사회 전체에 촘촘히 얽혀있는 복잡한 거미줄 같은 차별과 폭력의 그물망이 바로 이 ’교차( 정체)성’에 대한 검문의 체계를 통해 중층적으로 행사됨.



{*b} →$’7. 중간 요약’ 절 참조.



{*c} 강경한 gender 2분법

上野 (2012 : 37~39) 



{*d} Gay 공격의 근거 사상




{*e} 

Freudian 정신분석학에서는 ’남근’이 문자 그대로의 생물학적 남근을 가리킨다면, Lacanian에선 상징적 남근, 즉 상징 자지를 지칭할 뿐이며 남녀 간의 생물학적 성차 또한 무시되고 ’주체’ 개념으로 통일되는 근본적 시대상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f}

실제 Judith Butler의 debut작이랄 수 있는 Gender Trouble에서는 표피적으로는 Lacan 계열의 ’여성 가면론’에 대한 부분비판과 Freud 부활을 시도하는 장이 있는데 이는 그야말로 부분적 시도일 뿐 드러나지 않은 3세대 paradigm의 거대한 심층 기저에는 (최근작 중 하나인 『젠더 허물기』에까지 계속되는  이러한 현대적 전환(으로서의 (특히) Lacanian paradigm)에 대한 노골적 검토(와 대결시도의 gesture)가 놓여있음을 부정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불가능한 일이다.



({*g} 경상(스)플레인

이 주제엔 별 관심도 없고 이하는 경미한 제언 정도에 해당하나 잠깐 관찰한 바에 의하면, 최근 대부분의 gender 간 대화와 협력을 파탄내고 있는 남성 공격의 제1 menu가 ’(여성) 혐오’라면, 제2 menu로 거뜬히 등극한 것은 단연 ’(mans)plain’이라 할 수 있는데, SNS에 거의 상주하고 있는 듯한 한 여성의 정리에 의하면 남자와 여자가 SNS 대화를 하고 있으면 다른 여성이 나타나 "그건 mansplain!"이라 지적하고, 이에 남성이 발끈하며 대화가 종료되는 예외없는 pattern이 계속 반복되고 있다 하므로, 말 나온 김에 짧게만 첨언하면, 그 훨씬 이전부터 많은 사람들이 강조해왔듯, (몰-화자적인) 정보-지식 및 사실의 보고 취합과 교류, 그리고 직설적 문제해결은 대부분 남성화법의 제1목적이고 여성화법과 달리 여기서 공감과 동의[; 소위 ’우쭈쭈’]는 거의 언제나 전혀 고려대상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이것이 권력관계에서 자유로운 현상은 전혀 아니지만, 그렇다고 feminist들의 오해처럼 완전히 지식-권력 과시와 상대 비하로만 보기도 어려운 측면도 있다고 생각됩니다.

우리의 인식은 전체로서도 본원적으로 불완전할 뿐 아니라 개인들의 인식은 너무나 제한적이고 분산돼 있기까지 하므로 우리는 모두가 서로를 더 열심히 가르치고 모두가 서로에게서 더 열심히 배우는 방향으로 나아가야지 가르치려는, 또는 보고 행위 자체만으로 거부감을 갖고 차단하는 것은 종국적으로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여겨집니다. mansplain이 기분 나쁘다면 욕하고 싸우기 보다 대신 더 줗은 지식과 지혜를 더 열심히 가르치려 하는 방법이 서로의 발전을 위해서도 더 나을 것으로 보입니다. 야만적이고 파괴적인 욕설과 개싸움이 아니라 이렇게 형성된 설득과 동의, 인정에 기반한 대안 Hegemony가 여성 gender와 소수자 권력의 강력한 토대가 될 것이 너무나 확실하기 때문입니다.)



{*h} ’양남’ 찬양론 

서양백인들은 그 십자군전쟁과 남북 America 원주민 말살, 반인간적 흑인노예무역, 제국주의와 세계대전 등등이 잘 보여주듯 인류역사 상 가장 폭력적인 남성성의 현신이었으며 이들은 이미 Viking 등 게르만 제민족의 시절 때부터 거의 언제나 약탈강도와 강간, 살인을 일삼는 전쟁 상태에 있었고, 현재도 上野선생이 방한 시 전한 ’160519일 발생 20세 오키나와 여성 납치강간살해 사건처럼 미군에 의한 현지여성 강간살해사건들은 주둔국들 최대의 사회문제 중 하나이어 왔음을, 미국 본토 내에서도 총기난사 사건들과 더불어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는 심각한 인종차별은 흑인차별이 아닌 유색인종 차별이라는 사실을, 그리고 그 점잖기만 한 듯 했던 독일인들이 순식간에 유색인종 말살에 혈안이 될 수 있음도, 역시 Fascism의 고향 Italia에서의 최근 이별통고 여성에 대한 차내/차체 방화살인사건과 함께 늘 상기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너무 웃프게도 ’양남’ 찬양론자들은 자신들을 결코 유색인종에 포함시켜 생각지 못한다는 공통점이 있음. 이런 Meta 인지 능력은 자기 객관화와 타자화를 통해서만 도달할 수 있는데 上野류에 따르면 이런 객관화, 타자화 자체가 곧 혐오이므로 자기객관화란 여성의 자기혐오만을 뜻하게 되기 때문에 금지되어야 하고 따라서 이런 Meta 인지는 발달하지 못한 채 결국 항상 다시 Narkissism으로만 인도되어 자신에 대해서는 언제나 예외적인 유아 사고만을 하게 되며 그 고질적 역사 건망증과 복합돼 바로 자기 자신이 양남들에게는 이런 경멸과 폭력의 표적이자 장본인이란 생각을 도저히 할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설령 그 폭력의 화신들이 매우 기적적으로 개과천선해 요즘 좀 신사흉내를 내느라 용쓰고 있다 쳐도 전혀 아무런 근거없이 막연하게 그들이 백인여성들을 대할 때와 자신을 대할 때 완전히 동일하게 행동할 것이라는 fantasy의 fantasy를 상상하고 있음.

그러나 만연한 길거리 성폭력 현실을 다룬 인기도서 『악어 프로젝트』가 소위 문화의 세계중심이라는 FRANCE를 고발한 책이란 걸 잊지 않는다면, 당신이 전해 들은 짧은 Europe 여행 경험담 속 신사들은 단지 그 여행객이 유색인이라 쳐다보지조차 않았던 것일 수 있음.)




((({*i}

또한 ’꼴페미’란 바로 이런 류의 주장들을 너무나 무책임하게 남발하거나 아무 생각없이 적극 동조하는 사람들과 그 vulgar feminism을, 응급상황에서 충격적 효과가 필히 요구될 때만 극히 제한적으로 비칭하는 수사적 용어임.)))



{*j}

(실패한) 정신분석은 현대의 세속종교에 해당하고 특히 上野 분석의 이 경우는 그야말로 점쟁이 보살이나 무당의 살풀이 굿판에 불과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上野 Text를 되살려낼 수 있는 유일한 CPR[=심폐소생술/인공호흡법]은 뒤집어 이 책을 allegory로서 역독해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저자의 의도를 배반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남썽"과 "여썽"으로 읽고, 소수의/상위 ’지배자( 동맹)’ 대 ’(모든 )피지배자’로 해석하는 방법입니다.



{*k}

2세대 feminism(의 폐해)에 대한 반성과 그 전복 및 해체를 직접적 주요 동기로 하여 저술된 『젠더 트러블』은 이런 점에서 그 파괴력이나 전복력이 가장 크고 또 그만큼 가장 유명세를 떨친 출세작임이 분명하지만, 입문자들에겐 꽤나 난해할 수 있기에 이해가 보장되지 않고, 내용에 대해서도 이후 많은 논의 전개가 있었으므로, 명징성과 파괴력은 다소 떨어지나 논의에 대한 Butler의 답변과 이후의 발전 및 자기정정을 담고 있으며 가독성도 좋아진 『젠더 허물기』도 입문용으로는 적극 추천됨.



{*l}

단, Maria Mies 등은 대안경제에 있어 지나치게 자립과 자급만을 강조하면서 결과적으로 고립주의노선을 강화해 나가는데 이는 Foucault에 관한 졸고들에서 강조한 바와 같이 명백한 anarcho 경향으로 (재생산의/을 포함한 포괄적) 사회화와 공통되기 노선을 완전히 망실한 편향에 해당한다고 보며, 인식론에서 반과학주의와 반기계론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eco-feminist 일부의 입장은 James Lovelock과 같은 낭만적 물활론(hylozoism)의 아류에 포획된 결과이며, 저의 기계론은 고전적 mechanism이 아닌 Deleuze-Guattari의 machinism 계보를 잇는 것으로 특히 ’인식론적/전략적 기계주의’로 새롭게 불려야 하며, 모든 신비주의 해체를 (제1)목표로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밝힙니다.



{*m}

▶{연구자용 Memo 4}



(({*n}

이게 달성만 된다면 농담삼아 전남성 대상 DNA지문 등록제 등도 도입추진할 수 있을 것입니다. (다만, 방법으로는 (주민등록증 (조기)발급, 재발급과 일제갱신 시) 모발말단이나 구강상피세포 채취등이 활용되고, 전체 Genome단위 정보가 아니라 Y염색체 상 그야말로 일부 특정 지문정보만 추출 후 전체 폐기 등을 필수전제로 하며, 그래도 역차별이라며 반발할 남성들이 많아 우선 전국민 등록제로 설득해야만 할 상황이 될 수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결정적으로는 BioData 전유, 누출에 인권문제 뿐 아니라 일부/소수율에서 오히려 단순강간의 살인 및 사체유기 사건화를 유도하는 부작용이 우려될 수 있음.)

))











{P.S.1}

(그리고 만약 지금까지 이 글에 혹시라도 불쾌한 분이 계셨다면, 일단 상기 도서들 중 최소한 단 한 권이라도 더 (특히, 많이 언짢으셨다면 Butler를) 학습하시고 나서 그 감정을 다시 한번 내성해 봐 주시기 바랍니다.)



{ P.S.2}

이하, 특히 입문자들 중에 혹시 작성자의 지정성별을 섣불리 추측하면서, 당사자도 아닌 것 같은데 개입한다는 식의 편견과 감정에 사로잡혀 상호경청과 상호비판 등의 진지한 논의를 간단히 회피해 버리려는 듯한 있을지 모를 일부 소수 반응에 대하여 우선 전혀 그런 성격의 문제 상황이 아님을 보이고, 또 뒤늦게 발견했지만 그 자체만으로도 매우 훌륭한 논변일 뿐 아니라 무엇보다도 신중하고 실천의지와 책임감 강한(,) 조직 속에서 단련된 의견이기에 진심어린 경청의 가치가 충분하다고 판단되는 다른 서평을 소개드립니다.

  ¶  최미진,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서평] ‘여성 혐오 사회’ 담론은 여성 차별에 맞선 운동에 효과적인 수단이 될 수 있는가?"

  ¶  이현주, "남성은 여성차별로 득을 보는가?"


(다만, 기타의 전체적 관점과 입장들을 공유하는 관계는 아님에도 불구하고, 어려운 시기들을 모두 헤치며 오늘날까지 돌파해 왔다고 알고 있는 그 견실한 실천과 투쟁의 역사에 따뜻한 애정과 사랑을 전합니다.)




{P.S.3}

((물론 좌파 bloc 내 약간의 이견도 존재하나, 이 이견 group도 심각한 오해를 범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입장이 단지 과도하게 낭만주의적으로 일반화된 여혐혐론과 mirroring 전술에 대한 부분적 비판일 뿐, 모든 좌파는 (특히 한국사회에서) 가장 억압받고 있는 (내부)식민주체이자 무급하청 노동계급이나 비정규 노동계급인 여성들의 완전한 해방과 평등을 최대강령의 핵심으로 진력을 다해 추구한다는 점에서 기본적으로 공통됩니다. 따라서 본 글에서도 누누히 강조한 바와 같이 폭력과 차별, 특히 물리적 폭력과 구조적 차별의 현실에 대하여는 더욱더 강조되어야 할 필요성이 있고, 이에 맞선 분연한 저항과 투쟁은 언제나 지지되어야 마땅하나, 다만 그 복잡계 내의 혼란스런 정치적 효과에 대하여는 주도면밀한 예측과 전망이 거의 언제나 사활적으로 중요하고, 이를 위한 정밀한 상황 및 원인구조 분석, 방법론과 전략전술의 냉엄한 평가는 당위적, 심정적 지지와는 철저히 분리되어야만 함에도, 해방연대의 단문은 이러한 점들을 오해하면서 결여하고 있는 정서적 원론주의에만 머문 것으로 보여 아쉽지만 그 심정과 취지는 십분 이해하며 여전히 따뜻한 사랑을 보냅니다. 일반 독자와 입문자분들께는 이러한 일부 견해들에도 충분히 유념하면서 앞으로 더욱 책임있는 (좌파) 내부의 성찰적 상호 논의와 적극적 협력/지원 방안 강구를 계속해 나갈 것을 약속드립니다.))




{P.S.4}

그리고 항상 진심으로 죄송하게 생각하는 것은 일베 등등의 소위 ’여혐’ site나 통상적으로 기사 댓글들은 거의 확인/열람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그들의 각종 혐오발언들을 직접적으로 접한 바가 거의 없어 그 심각성을 너무나 과소평가하고 있을 충분한 개연성이 있습니다. 이들의 담화에 대하여는 대응방법에서 mirroring과는 견해차가 있지만, 이들이 만약 본격적으로 사회적 물의를 일으키기 시작할 경우 강력한 물리적 조치 등을 포함한 모든 방안을 적극적으로 강구하도록 하겠습니다.

(일명 ’여초’ site들도 접한 바 전무함은 매일반이나 이들의 발언은 SNS, 특히 Twitter 상에서 워낙 넘쳐나 원치 않게 그 일부에 노출되었음을 알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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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하는 연구자들을 위한 memo입니다. >>




1.

이 글은 예외적으로 Feminism 및 Gender/여성학 입문자들과 일반 독자들(만)을 대상으로 극히 짧은 순간 작성되었고 가독성과 전달력을 위해 논점과 구조, 어휘, 어투 등을 모두 단순화했으며 문단들도 되도록 짧게 절별로 나누고 절제목 등 여러 요약장치를 두었으며 촛점에도 잠정적 이동이 있었습니다. 




2.

학술적으로는 연구사적 정위와 세대규정에 있어 저자의 전 저작들 및 Eve Sedgwick과의 연관을 포함하는 종단 기술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이 글의 목적도 아닐 뿐 아니라 실제 독자 대중의 독서 pattern이 전혀 그렇지 않기 때문에 본서의 단독 독해시 발생할 효과를 고려하여 현 시국의 특정국면에 관련, 보정을 시도한 것입니다. 

간략히만 언급하면, 원시부족을 연구대상으로 해 (특히 가족3각형 중심) 구조 동일/동형성을 강조하는 원형 구조주의 Levi-Strauss 인류학과 이에 공명하는 가족주의적 Freudian 정신분석학( / )해석에 기반하여, 2세대 분리주의 Lesbian Feminism 계열에서 출발, 특히 Levi-Strauss의 여성 교환론을 계승한 「여성 거래」 Paradigm의 Gayle Rubin과 Eve Sedgwick 등은 같은 Queer (Studies) 전통 안에서도 Butler(의 "QUEER  THEORY")와는 달리 2세대 (분리주의) Queer feminism으로 명명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이와 달리 현대사회 전체를 주연구 대상으로 하는 Lacanian 정신분석학과 이것[=Lacanian]이 계통적으로 연결/매개함으로써 탄생시킨 후기구조주의 및 탈구조주의에서는 model이 되는 ’기본구조’가 복잡해지고 거대해져 점차 가족구조 model에서 이탈하면서 대신 구조(들) 전체를 통괄하는 중심의 대타자가 중요해지고 나아가 구조간 ’차이’와 ’다양성’, ’복잡성’, ’중층성’=’교차/중첩성’, 그리고 ’개별성’을 강조하는 ’탈중심화’가 이론화되어 이를 기반으로 3세대 feminism이 출현하는 것으로 봅니다. 이는 또한 일괄적 성/gender 차별보다 다른 여러 요인들에 의한 차별의 중층화가 훨씬 더 중요해지는 현대사회 변화의 불가피한 반영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원시부족 및 가족model에 기반한 Sedgwick과 뒤늦게 그를 수입 원용한 上野의 2세대 분석이론과 강경한 2분법(적 분리주의)의 ’핵심을 구성하는 근본 오류’는 대부분 이러한 사정으로부터 기원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남성들의 homo-social(ity)에 의한 지배 model은 원시부족사회 이후로 자원과 권력, 그리고 ’향락’에 대한 ((극)소수)독점 강화가 전사(全史)를 통해 지속적으로 관철되어옴에 따라 여권과는 관계없이 남성의 절대 다수가 배제되어 지배-피지배와 주인-노예 관계로 재배치되었다는 변동사실을 무시하고 있습니다.


종단적으로도 上野는 본서 역자후기가 규정하고 있는 Marx주의 feminist는 전혀 아니고, 본인 스스로도 방한강연에서 어느 여성분의 질문에 대해 밝혔 듯 Marx주의 feminism에는 다소 거리를 두고 있으며, 자본주의와 가부장제를 동시연구한 전작들만을 보면 (광의의) 사회주의 feminist로 분류될 수 있으나, 이런 퇴행적 문제작들까지 전체를 고찰하면 2세대 (범)좌파 feminist로서의 성격이 그 골간을 이루면서 가족제도를 중심으로 care(노동) service로의 연장연구를 축으로 시류에 따라 약간의 Post주의 연구도 병행했던 것으로 규정함이 타당할 것입니다.




3.

그런데 이 (Sedgwick-)上野계 model은 이렇게 현대 사회 전체를 통괄해 설명하는 일반 model로는 여러 한계를 보이지만, 사회 내의 현대 종족/부족들로서의 특수/하위/소-집단들을 분석하는 데에는 약간의 설명력을 여전히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도 보입니다.

단, 이 대상 집단들은 다음의 조건들 중 하나를 만족해야 하는 데 첫째, 집단 내에서의 ’연애, 결혼, 가족 관계 등 대부분의 안정된 지속적이고 친밀한 성적 결합’을 모두 억압, 금기하는 집단/조직일 것.

이런 조건이라면 여성성으로서의 여썽은 그 자체로 (억압과 금기를 위한) 배제의 대상이 될 수 있음. 왜냐하면 이 경우 여성성은 성적 결합과 sexuality 또는 그 환유로서의 성적 대상(/(여자를 포함하는, 즉 유혹자로서의) 주체)(성)을 상징하고 남성성(으로서의 남썽)은 (성적 주체(로서의 자기증명)성이 아니라) 노동력과 생산성, 성과 등을 의미하게 됨.

그런데 이 조건을 만족하는 집단은 의외로 많아서, 언제나 성적 결합과 결혼동맹 등도 모두 포함해야만 하는 사회 전체는 될 수 없지만, 대표적으로는 사회 내 특수집단으로서의 대부분의 2차 집단, 이익 집단인 공적 조직들이 포함될 수 있음. 다만, 이 경우야말로 남성/여성이 남자/여자 자체가 아니라 남썽/여썽, 즉 남성성/여성성을 의미해야 함.


이 첫 번째 유형은 여타 사회집단들에 비하면 사회적 권력과 자원의 점유지분도 상대적으로 큰 편일 수 있지만, 반드시 실질적 (극)소수 지배자만을 의미하지는 못하는 다소 포괄적 범주이고, 특히 sexual connotation을 갖는/으로 해석되는 협의의 여성성(과 (동시에) 남성성)만을 억압-배제하는 집단들이지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는 여자들 자체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는 난점이 있고, 더욱 결정적으로는 여성성만을 성애 code로, 남성성만을 노동(-)생산성으로 치환하는 것 자체도 전형적인 gender 고정관념의 반복에 불과해, 결국 이 공적 조직들에서 억압-금기되는 것은 협의의 여성성이 아니라 성썽 그 자체, 즉 sex(ual) code/형질들로 보아야 하고 이렇게 해서 중성/무성화된 남자와 여자는 일개미, 일벌 같은 ’거세’된 (예속)주체들이라는 것을 보여 주면서 Homo-social model은 최종적으로 다시 폐기되고 Lacanian Paradigm으로 복귀하게 됩니다. 이 과정을 통해 우리는 이 Lacan 체계 안에서의 ’거세’의 진정한 숨은 의미가 노동 수탈과 착취를 위한 일개미 노예 생산이었다는 통찰을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두 번째 유형은 좀 민감한 사안이 될 수 있겠지만 학문적 솔직성을 위해 그냥 언급하면 앞서 밝힌 원시부족들 외에도 인류의 호전적 근친으로 알려진 Chimpanzee group들과 매우 폐쇄적 배타성을 심리적 특성으로 하며 거의 공범조직화된 광적 "동성" 친교/우애 집단들로 광의의 사춘기 전후 청(소)년 집단이 대표적으로 testosterone rush에 의해 지배/장악된 집단무의식의 조종을 받고 있는 듯 보이는 group들, 그리고 이 연장형태로서의 특수 공식 집단들의 밤문화, 접대문화를 중심으로 한 비공식적 유대들이 있으며, 이것은 매우 동물적 정동적 얽힘 관계라는 공통차원에 해당되며 주로 지배받는 뇌의 부위 자체가 다른 하위 문화라 할 수 있음. 원래는 포유류들의 전투, 사냥용 소조직 형성과 유지를 위해 발달했던 형질들로 보이나 현재 Sports 소집단과 군사조직 등에 잔재가 보존돼 있다고 할 수 있음. 그리고 Chimpanzee group에서조차 수컷연대는 성적 주체로 인증된 개체들 간의 동맹이 결코 아니고 그저 철저한 서열과 위계에 기반한 사냥/전투용 성별분업 조직일 뿐이며 여기서 배제된 암컷들 전체는 우두머리 α-male 하나가 완전히 독점하는 체제이기 때문에 Sedgwick 도식과는 본질적이고 결정적인 차이가 있고 더구나 이 전투소조직 외부의 암컷들도 동성 내 서열관계를 형성하며 상위서열 암컷이 수컷 일반보다, 특히 수컷무리 내 하위서열들보다 열위에 있는 것도 전혀 아님.

))



4. 『페미니즘, 왼쪽 날개를 펴다』는 주로 제2세대에 기반하고 있다는 한계는 있지만 사회주의 feminism 계열의 이론들을 역사적으로 망라한 총서라는 의미에서 좌익 Feminism의 계보학을 완성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필독서가 아닐 수 없다할 것입니다. 또한 매우 고무적이게도 2세대 이론을 최대한 확장하고 일반화함으로써 Nancy Fraser의 복합-교차 모형과 거의 유사한 결론에 도달하고 있어 여전히 현재적 대안으로서도 많은 시사점을 주고 있기까지 합니다. 


이 책의 의미에 대한 심광현 선생님의 평가에 대하여는 다음 서평을 참조.

  ☞ http://www.kyosu.net/news/articleView.html?idxno=25719




5. (특히, 적록보라 실현을 위해 노력하는) 연구자와 활동가들에게 남겨진 과제는 먼저 좌익/좌파bloc Feminism 계보 내에서 각 세대 이론들의 합리성을 보전-취합하면서 동시에 각 세대의 고질적 문제와 단점들을 극복한 구체적 통합이론으로서의 반자본주의 (범)좌파 제4세대 feminism (이론) 개발/발명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를 위해 거칠게 요약하면, Marxist feminism 계열은 대표적 1세대 좌파 feminism, 사회주의 feminism 계열은 2세대 좌파 feminism, 2세대였던 영미권의 급진적[=radical] feminism과 달리 France발 postmodern(ist) feminism과 poststructuralist feminism을 포괄하는 급진(민주)주의 feminism은 3세대 좌파 feminism 이라 할 수 있는데, 핵심 쟁점은 가부장제를 둘러싼 주적 체계론, 그리고 주체 정체성 문제로 우선 최대 압축 가능할 것입니다.

이들 중, 주체 정체성 문제는 교차(성) 이론이 워낙 강력해 (근대적 가부장제 전성기라는 특수조건에 대응하기 위한 응급한 보정으로서의) 선험/선천적 여성 gender 이기주의 (극단화)로의 퇴행이란 측면이 강했던 2세대 정체성 정치를 교정, 극복하는 도구로 큰 문제는 없어 보이나 3세대 교차(성) 이론의 핵심 문제는 정체성을 구성하는 중층(/)복합적 다원요소들을 명백히 관념론적으로 무차별 평면화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질량과 중력이라는 결정적 요소를 고려하지 않은 아동 공상화와 유사해 반복적 미시분할에 의한 만인의 소수자-피해자( 코스프레)화와 동반해 실종되는 실제 가해자 문제 뿐만 아니라 부문운동들 및 주체, 주제의 무차별 수평화에 의한 전선의 혼란 문제( 산출)로 연결되지 않을 수 없으며, 중력장 내에서는 동일 평면 상에서도 물질적 요소인 질량에 따라 평면 공간 자체가 휘어버리고 이에 의해 질량 차에 따라 위성, 행성, 항성과 은하 중심이라는 비대칭과 불균등이 형성-결정된다는 사실들을 완전히 무시-은폐함으로써 궁극적으로 신자유주의와의 착종-교란이라는 고질적 문제로 귀착-함몰하게 되었기 때문에 이를 교정하기 위해서라도 먼저(/) 1차적으로 소위 ’Marx주의의 귀환’으로 잘 알려진, 그리고 그 핵심으로서의 ’유물론적 전환’이 불가결하다고 생각됩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Marx(ist femin)ism에 의한 (3세대( / ))Post주의의 교정’이라는 세계사상사 상의 큰 흐름과도 그 궤를 같이 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이후 남은 문제는 좀 민감한 가부장제를 둘러싼 주적 체계론 문제인데, 우선 이중체계론으로 알려진 이원론 대 일원론 쟁점이 있을 수 있지만, 자본주의 체계론이 소실된 (초역사적) 가부장제 일원론(과 그 변형으로서의 가부장제 주적론)이란 Sedgwick과 上野로 이어진 본서에서 잘 보여진 바와도 같이 대개 멀쩡했던 저명학자들도 일순간에 황당한 주장을 남발하게 만들 정도로 그 위험성이 잘 입증되었기에 진지한 논의의 가치가 없을 뿐 아니라, 좌파적 정치성조차 심각하게 훼손시키며 기껏해야 Womad같은 정치적 백치나 (극)우파( 강화)로 투항/귀착하기도 쉬운 terrorist들을 양산할 수 있을 뿐이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유의미한 선택지는 자본주의 주적론 대 가부장제(+)자본주의 2원/2중 체계(주적)론이라 할 수 있는데, 솔직히 말하면 원래 대중의 직관과 자생적 의식은 즉물-즉자적인 생활 대상들에 대한 일상적 자기경험으로 부터 발생하기에 처음엔 육안으로 제일 먼저 식별가능한 가정 내 성별 서사인 가부장제 일원론이 가장 직접적이고 강력한 소구력을 발휘하며, 이후 고도의 추상과 이론적 분석, 과학적 검증 과정 등을 거쳐가면서 1차 체험하는 생활 대상들 너머 그 배후의 은폐된 구조와 장치들에 대한 인식에 도달할 수 있게 되므로 그 결과로 가부장제론의 비중이 점차 줄어들면서 보다 근본적인 사회 system 전체에 대한 통찰의 비중이 강화되어 나가는 과정을 밟게 됩니다. 따라서 가부장제 1원론→2원/2중체계론 중 가부장제 주적론→자본주의 주적론으로의 발달 순서를 거치게 되는데, 이들 중 과학적 가치가 없는 가부장제 1원론과 주적론을 제외하고 남은 양자 사이에선 2중 체계론이 오히려 자연발생적이고 대중적인 직관에 잘 부합하는 것이 현실이므로 적록보라의 실현은 가부장제를 얼마나 이론적으로 그리고 대중적으로 잘 융합-해소시켜 (설명해 )내느냐 하는 노력과 성패에 달려 있기 때문에 이를 상당 부분 성취한 Marxist feminism 진영과 급진(민주)주의 진영을 주축으로 앞으로 당분간은 이의 해명과 정리, 대중적 설명 작업에 집중해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또한 자연발생적 대중 직관에 의해서 뿐 아니라 현실 정세적 여성 차별 및 여성 공격 정도에 따른 함수로서도 가부장제론(의 위상)은 부침을 거듭할 것이나 이론적 개입에 의한 양제의 관계 해명 (성공) 정도에 따라 양 운동의 중첩 및 공통-일치도와 결집-집중도는 결정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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젠더 허물기 우리 시대의 고전 22
주디스 버틀러 지음, 조현준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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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본서는 주체라는 기계(/)장치의 system*에서 결정성 문제를 성차화(= (정신(분석)적 )sexuation 및( 사회문화적) gender(-mold)ing/genderization**) 문제와 뒤섞어 ’미결정성’, ’불확정성’ 등의 엄밀하지 못 한 개념을 남용하고 있기에 우선 이 점에 대하여 유감을 표하는 바입니다.


원래 비결정성이나 불확정성이란, 주체의 system 내/외부 모두에서 그 system의 작동/행동에 관해 어떠한 요구나 지시도 하지 않거나 못 하고 있는 상태를 말하는데, 이러한 상황은 실질적으로 발생하지 않고 대개는 내/외적 요구 간 간섭적 과잉결정의 불일치나 모순상태를 과장한 문학적 rhetoric에 불과하고, 특히나 Judith Butler는 거의 언제나 이것에 관해서만 말하고 있습니다.


매우 예외적인 특이개체의 정신(분석)적 성차화와 사회문화적 판별/판정이 모두 오류나 괴리, 모순에 빠지거나 실패해 판단중지에 이른 상태에서조차도 Biochemical process는 나름의 조절 mechanism에 의거하여 독립적으로, 그리고 거의 언제나 굳건하게 자기운동을 전개해 나가고 있으며, 이 경우 ’미결정’이나 ’불확정’이란 곧 system 정지를 의미할 뿐입니다.


주체 system의 이러한 지평은 정신분석적, 사회문화적 범주와 판단의 경계들을 모두 넘어서 있는 실재의 차원이기 때문에 상기의 판단중지 상태에서도, 아니 역설적으로 오히려 이 판단붕괴 상황에서만 드디어 순수한 ’단일결정’의 실현이 가능하게 되므로 이 지평의 내적 요구에 충실히 따르면 되고 그때에야 비로소 자신의 ’몸’이 (번역되지 않은) 자신의 말을 하게 될 것입니다.


이 경우 전거( ¶ http://blog.aladin.co.kr/705625157/7699565 )한 바와 같이 대개 system의 hormone 종별 농도의 수리통계적 모형에 따라 기본적으로는 결정되겠지만, 잠복-성의 경우는 사회적/일시적 오해에 불과할 뿐 성소수자로 보기도 어렵고 (굳이 따지자면 표현적/잠정적 성소수자일 뿐이며), transgender나 transexual은 오히려 여타의 (특히 물질적) 제결정을 모두 전복하는 초과잉결정이라 할 수 있고, 간성의 다수는 과잉결정이며, 극소수의 ((XO적) 일부 간성이나) 무성도 생각하는 것처럼 ’미결정’이나 ’불확정’은 전혀 아니며, 이는 오히려 이 소수자들에 대한 인권적 모욕이기도 합니다. 이들도 나름대로 하나의 완전한 개체로서 완결된 결정상태에 있는 것으로 보아야만 할 것입니다.

이러한 실재의 지평은 생(-)화학적 장과 사회문화적 장 간 적응적 기제( / )interface로 발명돼 온 임상의학적 진단 규범과도 다른 것입니다.





[이하 경어 생략]






 즉물적 ’가부장제 주적론’류의 성/gender-의식 과잉을 넘어 여성없는 feminism으로, 보편주의적 소수자 연대(/)공동체론으로 진화해 나아간 후기 Butler의 사상은 분명한 발전으로 평가받기에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다음과 같은 문제들은 여전히 해결되지 못 한 채 남게 된다.




1. 결국 탈Gender화를 통해 (보편주의) (범)소수자-정치(론)의 급진민주주의 도식으로의 뒤늦은 수렴이라는 본질적 한계를 노정하면서 오래된 급진민주주의론의 문제와 난점들 또한 고스란히 떠안게 되지만 이를 하나도 해결하거나 인식하(려들)지도 않은 채 갑자기 윤리철학으로 도피해 버리고 만다.




2. 시대적 과제와 문제 설정의 퇴색으로서의 parachronism

  ; 세계사적 시대/정세 변화에 따른 문제계의 이동


현재 남한사회에서 (소위 ’mirroring’등 vulgar feminism 진영의 잘못된 감정적 과잉 대응으로 오히려 여혐 mention량 연간 9배 이상의 증폭을 계속하며 폭발로 치닫고 있는)  ’이’성혐오와 성대결 현상의 숨은 근인인 경제 위기와 사회 양극화에 대해 과연 Queer feminism은 이런 현상적 갈등들을 넘어 어떤 결정적 해법과 대책을 제출할 수 있단 말인가? 결국 Queer feminism은 호황기의 한가하고 표피적인 작은 문제 설정이란 측면이 강하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어 보인다.

 

이는 또한 더 본질적으로는 Queer feminism과 3세대 feminism의 신자유주의와 동성애/Queer 제국주의에의 착종-교란 및 역이용 문제로 귀결된다.

원래 한국의 Queer (Pride) Parade와 Culture Festival은 여타 진보 단체들의 행사와는 달리 매우 이례적으로 철저한 경찰력의 비호 아래 치러져 왔고, 경찰들은 항상 Queer 진영을 입장시부터 호위병들처럼 도열하여 환대해주거나 행사 내내 참가자들을 등 뒤로 보호하며 기독교 세력에 맞서는 대형으로 진을 쳐 제반 관련 행사들을 도와 왔고, 뿐만 아니라 그 유명한 전지구적 미래산업 전략기업의 해마다 계속되어 온 대대적 후원 등은 이미 익히 알려진 바이나, 이에 더하여 최근의 주목할 변화는 영미권 주도 구미 강대국 대사관들의 적극적 후원과 참여라 할 수 있다. 아래 사진에서 보는 바와 같이, 동아시아 질서와 정치군사전략의 판을 짜고 그 실현 관철을 추진하느라 눈코 뜰 새없이 바쁜 대사들을 많은 시간 아낌없이 할애해 그 많은 위험부담을 무릅쓰고 등 뒤로 보이는 경호원들까지 대동한 채, 언론 interview 요청들은 거부/차단하면서 저토록 열심히 참가할 수 밖에 없게 만든, 저 미소 뒤에 가려진 고도의 치밀한 정치경제적 계산은 도대체 무엇이었을가를 Queer진영은 반드시 숙고해 보아야만 한다.





3. 이러한 결정적 대안은 고사하고 Feminism bloc 내부에서도 극소수에 불과한 queer (feminism) 진영은 과연 bloc 내부에서의 정치력조차 (주도적으로) 행사할 수 있으며, 그러한 (극)소수성의 한계를 넘어 실질적/거시적 주요 사회 변화를 실현시켜낼 수 있는가?





4. 현미경적 미시분할과 근시안에의 편집증적 집착과 매몰 대신 망실하는 장기적 거시관점


현재 Queer진영은 Gender binary를 극복한다면서 자신들의 성정체성과 지향성, 그리고 관계성[!!!], 취향 등의 서로 다른 차원들을 뒤섞어서, 정립된 분류 체계도 없이 나름 광적으로 미시분할을 반복하며 종족 분류학에 현미경적 편집증을 보이고 있다. 현재는 Bi-sexual이 독립범주로 성립 가능한지 연성 Homo-sexual로 통합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둘러싸고 또 예의 그 "혐오!!" matador를 휘두르며 분열하고 있는데 이 갈등이 가까스로 봉합되어 봤자 다른 분류 단계마다 이와 유사한 문제는 계속 반복 출현할 것이다. 이들은 이 모든 것들이 Binary(체)계의 문제점이 아니라 언어(적 사고)체계 자체의 본원적 한계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사실을 전혀 이해하지 못 한다. 이는 기본적으로  (정규분포의) Spectrum계이기 때문에 수리통계적 사고체계인 (Cognitive) System IV***로 도약하지 못한 채 언어적 사고체계인 (Cognitive) System III*** 수준에 갇혀 있는 한 아무리 이러한 미시분할을 반복해봤자 결코 분류의 최종단계에 도달할 수조차 없는 것은 물론, 게다가 더욱 치명적으로는 이런 언어적 구획과 분류에는 항상 "어떻게든 금을 그어 봐!! 삐져나와 줄테니까!!!"하고 벼르는 종자들이 기다리고 있기 마련이어서 구축해 온 모든 분류체계는 곧 마디마디 분기점마다의 저항과 반론에 흔들리게 될 것이다. 


한편 이들에게는, 몇 계단의 섬세한 분할을 통해 도달한 범주인 Asexual 안에서도 가령 Demisexual과 Grey-Asexual 사이의 차이점 등은 매우 중요하지만 예를 들어 자유주의와 신자유주의의 차이 등에 관해서는 별반 관심을 보일 정도로 중요한 게 없다. 왜냐하면 Carol Hanisch 이래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정치적인 것[; Personal is Political]"이라는 신앙 때문이다. 설령 정말 만의 하나 그 말이 진리일지라도 이들이 왜 자신의 개인적 경제생활 상의 문제 같은 중요한 것들에 대하여는 함께 고민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개인적 성/gender, 그것도 취향 문제에만 집착을 보이는지는 설명되지 않는다.


또한 (정체성(의 구성)이 교차하는) 각 분야 전 방면에서 이런 광적인 미시분할을 계속해 나간다면 그 누구도 소수자가 되지 않을 도리가 없게 되는 문제도 있다. 결국 모두가 언제까지나 영원히 고독한 소수자로 남을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실질적 지배자는 인식의 장막 뒤편으로 사라지고 남는 것은 자칭 소수자=피해자들 간의 고통-전시-"쇼당"[show-down]( / )battle 뿐이다. 누가 누가 더 아픈가?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그럼 누가 누구에 맞서 싸워야 하고, 누구의 편을 들어줘야 하는가? 결국 실제로 도래하는 것은 소수자들의 연대(/)공동체가 아니라 역사 상 한번도 실재한 적 없고 단지 고전적 자유주의자들의 상상 속에만 존재했었다고 주장되는 바로 그 자연 상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상태로서의 무한 이기주의 Narkissist들의 전쟁터 뿐이다. 왜냐하면 장막 뒤에 숨은 실질적 지배자는 결코 죽지 않고, 그로 인해 현실의 적대적 구조와 갈등 관계, 목숨을 건 생존경쟁 등은 계속 심화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욱 큰 난점은 이것이 Queer 정치(학)만의 문제가 아니라, 몫(소리) 없는 존재자들, 유령적 존재들의 가시화를 위한 (감각의) (재)분할을 추구하는 급진민주주의론( / )진영 일반의 한계로 완전히 확대될 수 있다는 점이다. Queer진영은 이를 단지 예시해 주고 있을 뿐인 것이다.

본질적으로 근원의 적대적 모순을 해결하지 못 하는 한, 아무리 감각의 재분할과 episteme의 인지적 해체 및 재구성을 반복해도 결코 평화와 연대는 도래하지 않을 것이다.






S.


묻고 싶다.


아직도 보수 개신교를 "가부장제", 혹은 "젠더체계"(라는 현실)의 제1계급이라도 된다고 생각하는가?

그래서 그들만 무너뜨리면 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아니면 아직도 정말 (숨은) 지배자들이 그 보수 개신교의 Anti-queer운동을 바라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는 이제 (현실의) Queer 정치학에 도대체 어떤 정치성을 바랄 수 있단 말인가??




(이 질문들을 직설적으로 좀 더 정련하면 다음과 같은 뜻이다.

"젠더체계"나 "가부장제" 붕괴시도실험을 했을 때 도출되는 data값은 계속해서, 당신들의 주장과는 완전히 다르게 그 열렬한 수호자들이 실질적 지배세력과는 거의 상관이 없고, 실질적 지배세력은 그에 대해 (더이상) 별로 개의치 않고 연연하지도 않으며 더군다나 "근본적" "체제" 위협 따위로는 전혀 조금도 생각하고 있지 않을 뿐 아니라 발빠르게 이미 다른 견적서들을 얼마든지 뽑아 놓고 기다리다 이제는 조급해져서 눈치고 뭐고 본색을 드러내며 오히려 발벗고 나서서 부추기고 있다는 사실이다. 물론 특정 자본주의 단계에서, 그리고 지금도 일정 정도는 지배세력이 (잔존하는) 가부장제를 통해 특히 성별 임금차별과 무급 재생산 노동 수탈 등으로 대표되는 이익들을 취해 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부장제 정도가 붕괴한다고 해서 차별적 임금-승진체계나 ’무급 재생산( / )돌봄 노동체계로서의 가족제도’ 자체가 붕괴하는 것도 전혀 아닐 뿐 아니라 설령 이것까지 붕괴해 버린다 해도 그런 이익이나 효과를 대체할 새로운 경제 및 지배 양식들은 얼마든지 있으며, 오히려 선진국들은 이런 Queer(/)Feminism을 적극 이용한 선도적 Pinkwash(ing)를 통해 미처 전환/적응하지 못 한 주변국들에 대해 압도적 경쟁력을 강화하면서, 위협적 압박을 강화하는 데 동원하고 있다.

이 모든 것들이 후기의 Judith Butler조차 아직도 극복하지 못 한 채 허우적거리고 있는 소위 "GENDER 체계 근본주의"같은 종교가 얼마나 허황된 허구인지를 보여주는 극명한 data들이다.


이 "견적서"에 대하여는 상기 전거 후단($ ’X.S. 최종 결론과 남겨진 문제’ 절)을 참고할 것.

)







’2016.06.12일 Florida주 Orlando의 한 LGBT club에서 ISIS/L에 동조하는 미국 국적의 자생적 Muslim terrorist에 의해 49명의 사망자와 53명의 부상자를 낸 미국사상 최악의 총기난사 사건이 발생했다. 무엇보다 우선 먼저 그 희생자들에 말할 수 없는 깊은 애도를 드린다. 국내 뿐 아니라 국제 정치적으로도 극도로 미묘한 시점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한편 이것이야 말로 Queer와 갈색 feminism이 post-Fordism기반 (미래 인간자원산업과 시장창출, 그리고 2,3세계 주변부 적대국가와 경쟁기업들의 압박을 위한) 신자유주의-신제국주의의 총알받이 (문화) 돌격대로 역이용 당한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 아니면 도대체 무엇으로 해석되어야 한단 말인가****.

이런 점에서 Queer는 선주민/현지인들에게 살해 당하는 21세기 선교사들에 다름 아니다. 그 자체로는 일정 정도 진보적인 평등 사상도 대변하고 있고 또 때로는 숭고하기까지 하지만 대개는 너무나 탈맥락적이고 Naive하며 그 뒤에는 언제나 열강들의 제국주의 군대와 거대 상단들, (척식) 기업들이 역시 "견적서"를 뽑아 들고 계속 치밀하게 검토하면서 바짝 따라 붙을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 대답해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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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식론에서 반과학주의와 반기계론에 대해 이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의 기계론은 고전적 mechanism이 아닌 Deleuze-Guattari의 machin(e-)ism 계보를 잇는 것으로 특히 ’인식론적/전략적 기계주의’로 새롭게 불려야 하며, 모든 신비주의 해체를 (제1)목표로 의도적으로 설계된 것임을 밝힙니다.


** 불과 10여년 전에 출간된 이 책 원서의 제목은 Undoing Gender인데, 왜 Judith Butler는 그 멀지 않은 당시에 좀 더 창의적으로 Ungendering이나 Degendering같은 단어를 그 스스로 착안해내지 못 했을까하는 의문이 드는 것은 나의 과문 때문일 뿐인가? 어쨌든 다소 거슬리고 거추장스러운 word-formation이 아닐 수 없다.


*** 학계의 공식 용어는 Cognitive없이 그냥 System II와 System I으로만 명명, 통용되고 있는데 여간 딱한 일이 아니다. 이에 대하여는 기회가 되면 다른 곳에서 상술하기로 한다.


****오늘(’160615) 자로 가해자가 10년 이상 스스로 동성애자 성향이었다는 새로운 증언들이 쏟아지고 있고 FBI는 이것이 금번 terror를 위한 치밀한 사전준비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을 조사하고 있다는 바보같은 입장을 표명했는데, 이에 대한 합리적 추론은 다문화 자녀의 (문화)정체성 갈등과 분열적 동요 속에서 증폭배양되어오고 하층이민자 유색인종 식민주체, 특히 Muslim들에 대한 만성적 일반 혐오의 누적 속에서 어떤 결정적 계기로 임계폭발한 자기혐오적 붕괴의 극적 대반전이자 외전투사로서, ’귀향한 탕자의 심/종(=회개)적 보복 성전’이라는 해석이 되아야만 할 것이다. 








[초고 memo 작성중]


[당분간 좀 긴급한 중기적 사정이 발생해 당분간은 본격적 서평 작성이 곤란한 상황이 되었습니다. 혹시 예기치 않은 시간이 생길 때마다 조금씩 추가해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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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 혐오가 어쨌다구? - 벌거벗은 말들의 세계 우리 시대의 질문 2
윤보라 외 지음 / 현실문화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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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우선 ’루인’(의 글)에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여러 독자, 평자들의 지적에 공감하면서 이 글을 시작한다.

나의 개인적 관찰로는 이것이 그의 잠재력으로부터 뿜어져 나오는데 그 가장 강력한 기반은 말미에 다시 후술하게 될 유서 깊은 계보의 솔직성과 그것이 약속하는 깊은 (자기) 성찰의 가능성이다.

((질문에 대한) 이해력은 좀 떨어지시는 듯해 다소 실망ㅠㅠ)




1. 상상계의 폭력 대 실재계의 폭력


1.1.1. minor minority에 대한 가해자로서의 major minority의 폭력 문제

  ☞ 이에 대하여는 본서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중 루인의 글 「혐오는 무엇을 하는가 ; 트랜스젠더퀴어, 바이섹슈얼 그리고 혐오 아카이브」에서 (주로 gender minority들 간 문제에만 제한된 한계는 있지만) "(시스플레인[ ; cisplain=cisgender+explain으로 nontrans(-여성)들이 trans(-여성)들에게 훈계하려드는 태도], )비트랜스 페미니스트의 트랜스 혐오, 동성애자의 바이 혐오"로 명시된 문제에 대한 detail한 경험례들을 발견할 수 있으므로 참고할 것.

미국 사례는 Jillian Todd Weiss를 참조.

(대표적으로는 Jillian Todd Weiss, "GL vs. BT: The Archaeology of Biphobia and Transphobia Within the U.S. Gay and Lesbian Community", Bisexuality and Transgenderism: InterSEXions of the Others, Ed. Jonathan Alexander & Karen Yescavage, Harrington Park Press, 2003. (: 상기 루인에서 재인용))


이러한 통찰 방식은 대중 현실에 있어 여성(주의자)들의 transgender와 양성애, 동성애자, 남성 혐오 및 차별 문제 등등으로 더욱 복잡하게 확장될 수 있음.


1.1.2. 정체성 혼란 : Identity의 가변-중첩교차성과 다수vs소수의 난첩한 중층(적 위계)성 


(이하의 예시는 논제를 아주 조야화하는 역효과가 매우 크지만 논제 자체만 제시할 경우 의미 이해에 어려움을 겪을 수 있는 일부 일반 독자를 위한 시도로서 아주 극단적으로 단순화할 경우 예를 들어, 
못 생긴 고학력의 중산층 feminist 한국 여성과 장애인 부자 남성, 미모의 고졸 여성, 볼품 없는 단신의 고졸 남성(+만약 운 좋게 대기업 노동자일 경우와 아닐 경우), 중상층 흑인 여성White trash 즉 백인 빈민(층) 남성, 부자 백인 남성 동성애자나 transgender queer.......
(등등이 서로 뒤엉켜 다투고 있다면)
이들 중 누가 진정한 약자이고, 소수자인지 대체 어떻게 결정할 것인가의 문제

더구나 이들의 identity 구성 요소들은 의-과학 기술등의 비약적 발전과 사회의 유동화에 의해 (상향이든 하향이든) 점점 더 가변(화)한다.

애초에 순수한 (추상적) 남성과 여성의 형태로 존재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인데, 바로 이런 동일한 이유로 또한 "’여혐’은 가능한데 ’남혐’은 (보편 주체라서, 또는 혐오와 분노는 다르기 때문에 등등) 불가능한 사회이므로 문제"라는 식의 주장은 오류가 되나 추가 논의는 ☞"$S.2.=2.S." part 중 ’남혐’ 불가론 비판 참조
)


1.1.3. 폭력의 상호성과 개별성

계층-진영 범주적 절대가해자 및 순수피해자 사고의 전형적 2분법 편향과 오류


우리는 폭력의 상호성과 관련하여 가장 시사적인 case의 하나로, cisplain 대신에 sisplain이나 shexplain 같은 걸 개념화해 볼 수 있는데 sisplain=sister+explain으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여자들은 자꾸 나를 가르치려 든다. "니가 뭘 잘못했는지 도대체 알기나 알아?!"나 심지어 대부분 "오빠가 뭘 잘못했는지 알기나 알아?!"로 시작해 잔소리꾼 엄마가 되면서 본격화하다 마침내 가모장의 왕위에 오르면 완성됨. 실재의 많은 가정들에서 남편은 그냥 철딱서니 없는 큰아들일 뿐이며, 돈-벌어-오는-기계로 전락한 지는 더 오래되었고, 많은 경우 딸들도 아빠를 가르치며 한 여성 (가족)상담심리전문가의 지상파 방송을 통한 공언에 의하면 한국의 가족들에서 아버지는 어떤 경우에도 절대로 딸을 이길 수 없고, 그녀들은 어디 가서도 말싸움, 감정싸움으론 결코 지지 않는다고 스스로 자부하고 있다.



1.2.1. (문제의 근원으로서)

폭력의 일반성과 편재성,

중층성 및 (분리불가능한) 유착-착종성,

근원적 회피불가능성 문제



인지 폭력

    비의도적 인지 폭력

        특히 인간 인식(능력)의 숙명적 한계로부터 근원하는 인지 오류의 필연성

    의도적 인지 폭력

         ex. 지식-권력 연계의 episteme 설계-관리에 의한 지배와 통제 등

그에 기반한 비논리-비약적 과잉증폭으로서의 감정 폭력, 혐오

행동화된 물리적 폭력

구조화된 사회적 폭력 : 취업-승진 제한과 임금 차별, 가사-육아 등 인간 (재)생산 노동에 대한 (완전)부불, 무급제 등등



1.2.2. 일반 전략으로서 환대와 적대, 평화와 폭력의 문제


1.2.2.1. 

The Golden Rule & The Silver Rule의 필연 : 

종교적( 차원)으로 승화된 숭고한 절대적 평화주의-인도주의의 (불)가능성과 난점들

Levinas식 환대의 불가능성에 대한 Derrida의 비판처럼.


1.2.2.2. 

인식과 판단의 근원적 불완전성, 오류-항상성과 그에 의한 판단 및 실행 (영구) 중지 요청으로의 귀결 문제 A

"침을 뱉어라!", "분노하라!", "광신"! 등 열정적 행동주의 계보와의 (정교한) 양립 (불)가능성 문제

  : 이 절에서 제시된 논제에 대하여는 여성주의자들에 의해 (명확한 구체적 대상과 원인-근거가 없는) 혐오와 ((그에 대한 정당한 반응으로써?) 명확한 구체적 대상과 원인-근거가 있는) 분노의 차이를 강조하려는 답변 시도가 있는 것 같은데 약간의 오해가 있는 듯해 추가 설명을 제공한다. 

이런 류 답변의 핵심적 문제는 크게 3가지인데,

첫째, 본절 논제의 핵심적 문제의식은 혐오( 반대)와 분노( 반대)의 구별 (불)가능성이라기 보단 절대적 평화주의-인도주의 노선과 분노의 열정적 행동주의 노선 간의 정교한 양립 (불)가능성이다.

둘째, 감정(/) 폭력의 중층성 및 (분리불가능한) 유착-착종성 문제는 해결하지 못 한다.

인지, 감정, 물리, 구조 등 완전히 층위가 다른 이종 폭력 간 분리도 개념 상으로만 가능할 뿐인데 하물며 동일한 감정 폭력의 층위 내에서 유사한 감정들을 실제 대중들의 생활 세계에서 분리해 낸다는 것은 오직 관념적 사변일 뿐 "그들"은 커녕 자기 자신도 결코 그렇게 통제되기 쉽지 않을 것이다. 

셋째, 현 상황의 양측이 (이미) 정의된 혐오와 분노라는 술어로 정확히/정밀 기술될 수 있는가라는 시작점의 문제도 여전히 남는다.

이 문제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일단 다 양보하고 혐오, 분노 개념 적용을 인정하고 시작한다 하더라도 범주-진영별 2분법적 과잉 일반화-단순화의 문제가 발생해서 모든 남성의 행위는 다 혐오이고, 메갤 등을 포함한 모든 여성들의 행위는 다 정당한 분노인가를 반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작성중]

 

Frantz Fanon의 폭력론과 post-colonialism의 비폭력론의 의미



1.S. ☞ S.S. 참조



2. "천상천하 유아독존!!"


(자기) 성찰 계기로서의 부정과 비판을 원천 불허하는 Narkisism적 자기 숭배로의 귀결 문제


2.1.

자신에 대한 모든 비판과 지적을 좌절한 열패남, 찌질이 무능력남들의 엉뚱한 화풀이 아니면 세련/은폐된 교묘한 혐오로 처리해 버리는 (망상적) 방어 기제와 무조건적 자기 옹호

☞ $3.2.2. 소위 ’김치녀’의 어원을 참조할 것.


(자기) 혐오를 통한 (자기) 성찰 경로와 가능성의 차단, 봉쇄를 통한 고립과 퇴행


예를 들어, ("[여성(주의)은] 까도 내가 까!!"를 외치며 살아 온 결과,) [그 의도와 속내를 알 수 없(고, 더 나이 들어도 계속 붙어 있을지조차 의심되)는, ’간신’ 계보의 ㅡ인용자]  "(극)소수 무비판적 yes-man들을 제외한 대다수 남성들을 anti-feminist로 만들어 아예 담을 쌓거나 등을 돌리거나 떠나게 만들었다"는 feminist의 고백 : 여왕님과 간신배

 


2.2. 무한 이기주의 Narkisist들의 전쟁터



2.3. 가모장(적 여성)주의 fascism의 맹아와 개연성

원거리에서 침묵으로 권위를 형성하고 주체 내면의 죄의식을 통해 간접 지배하던 부성적 초자아와 달리 초근접하여 잔소리를 퍼부어 대며 micro-control을 하는 가장 잔인한 지배자로서의 모성적 초자아

Margaret Thatcher로 대표되는 그 모든 혹독한 Tiger-mom들의 계보




3. 그러나 "그들은 자기가 하는 일을 알지 못 하나이다"


  :  그토록 무조건적으로 옹호하고자 하는 자기( 욕망)의 주인은 과연 자기 자신일까?



3.0. 

인식과 판단의 근원적 불완전성, 오류-항상성과 그에 의한 판단 및 실행 (영구) 중지 요청으로의 귀결 문제 B

특히, 자기 안의( / )내부 타자들 : 자기 자신에 대한 무지와 무의식, (자기) 기만성( ; 종특적 허언증), 항상적 동요와 변심, 자기 회의, 자기 혐오 문제들




(절대 진리의 붕괴와 도달-불가능성, 그리고 언제나 모호한 진실들


유일한 진리(/)기준으로서의 자기 자신

무한 이기주의 Narkisist들의 전쟁터

자기 안의 타자들, 공백과 결여들 : 자기 진리의 부재와 허구성

Postmodern 시대 확고한 자기 진리로 상정되는 주체의 욕망에 대한 회의와 비판)


3.1. 도미야마 이치로[富山一郞]류의 일본판 post-colonialism(만)으로는 정당화될 수 없는 ’대타자의 욕망을 열망하는 주체’의 식민성, 또는 식민 주체의 (일반성) 문제


특히 ’(major )minority로서의 식민지/식민집단’ 내 ’minor minority( 분파)로서의 자발적 친일파, 부역자와 백인 닮기를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유색인종들, Transgender 등’(의) FLUNKYISM(에 대한 집단 내 혐오) 문제.

더구나 이 분파가 여성일 때 혐오 문제의 복잡성

예를 들어 피부미백과 획일화된 서구지향적 화장술, 성형술에 목숨[!!!!!] 거는 여성들.

그리고 Michael Jackson case가 보여주듯 만약 이런 행위가 의식있는 타 인종 내에서, 더구나 남성에 의해 실행되었을 때의 혐오 비교.



3.2. 그리고 그들의 (자기) 기만성 문제와 해결의 최소-출발점으로서 Fanon적 솔직성의 고통, Parrhesia

  : 식민 주체(로서)의 (매판/기생적) 노예 근성에 대한 완전한 몰지(각)와 부인, (자기) 기만


3.2.1.

여담이지만 가장 실망스러운 건 청중들인데, 소위 얼치기 ’꼴페미’를 대표 전형하는 듯한 한 여성은 애초에 질문을 이해 못 한 건 물론이거니와 질문 당시에는 실재계의 폭력과 (절대) 평화주의/인도주의로의 귀결 등 혐오반대 전략틀의 난점이 주촛점이었고 여성 성형이나 여성(주의) 비판은 거의 주제가 아니었을 뿐 아니라, 끝까지 매우 공손하고 호의적으로 기계와 의료기술에 의한 신체변형을 반대하는 게 전혀 아니라고 재차 밝혔음에도 불구하고, Michael Jackson은 백반증일 뿐이고 여성들이 성형수술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취업때문이라며 심지어 뭘 좀 알고나 지껄이라는 둥 자기 말 끊지 말[고 닥치고 듣기나 하]라는 둥 공론장에서 (더구나 여성에게 행해졌다면) 상상도 할 수 없는 폭언을 쏟아 내며 역겹게 광분하시던데,  미국 연예인의 사생활엔 관심도 없지만 그 알량한 media의 노예같은 인식에 한가지만 묻고 싶다.

그럼 Michael Jackson의 칼날처럼 날카로운 오똑한 콧대와 송곳처럼 뾰족하게 치켜 올라간 코끝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리고 백반증과는 상관 없는 여성들의 경우, 전에는 [대부분의 feminist 여성들도] 남( 특히 男)에게 보이려는 게 아니라 자기 만족을 위해서일 뿐이라거나 눈썹([<눈섶])이 자꾸 눈을 찔러서라는 게 단골 변명이더니 요즘엔 취업을 위해서라고 바뀌는 추세이던데, 그러나 취업에 성공한 이후에 월급 모아 성형하러 달려 가는 여성들과 취업 의사가 조금도 없는 중상층 중장년 여성들의 성형 행렬, 초등 고학년생들로까지 확산된 세계 최상위 빈도의, 그리고 가장 짙은 화장 등 얄팍한 변형술의 만연과 당연화는 또 뭐라 설명할 것인가?

더구나 본인이 지적하고자 했던 바는 성형 자체가 전혀 아니라 변형이 실천될 때나 심지어 고려, 상상될 때의 지향 ㅡ 쌍거풀과 안검 지방 제거, 높은 콧날과 하얀 피부로 표상되는 그 미적 가치와 기준의 획일성이 가지는 의미이다.

(자기 만족론자들 또한) 순수하게 자기 만족을 위한 미의 추구라면 각자의 개성들이 만발하는 기기묘묘하고 기상천외한 다양성의 꽃밭이 되어야지 왜 구별조차 힘든 비슷비슷한 외모로 획일화 되어가고 있는 것인지를 반드시 설명해야만 한다.


(이하 근거 문헌 :

"[Michael Jackson] went through various image changes. Starting in the mid-1980s it became clear that Jackson's appearance was changing dramatically. The shape of his face, particularly his nose, triggered widespread speculation of extensive cosmetic surgery. His skin tone also changed, becoming much lighter. Although Jackson was diagnosed with the skin disorder vitiligo, it was also widely speculated that the change was due to skin bleaching. 

.......Jackson's skin was a medium-brown color throughout his youth, but, starting in the mid 1980s, his skin gradually grew more pale through what was widely considered to be skin bleaching and changing of his features to appear European. According to Jackson biographer J. Randy Taraborrelli, Jackson began making his nose smaller around the same time his skin became very gradually lighter and that he was using the over-the-counter skin-bleaching cream called Porcelana to achieve the lighter skin. Taraborrelli reported that Jackson's sister La Toya used Porcelana too, and that they had crates of this cream stored at their family home Hayvenhurst, "hoarding it as the most valuable beauty product ever produced."Jackson's physical changes gained widespread media coverage, and provoked criticism from the public. African American psychologists argued Jackson was "a lousy role model for black youth". Dr. Dennis Chestnut said Jackson gave "black youth a feeling that they can achieve", but also may encourage some people to think they've got to be esoteric and idiosyncratic to be successful. It was also presumed that Jackson bleached his skin just to boost his career. Dr. Halford Fairchild stated Jackson and other African American celebrities would try "to look more like white people in order to get in films and on television".

According to Taraborrelli, in 1986, Jackson was diagnosed with vitiligo, which Tarraborrelli noted was sometimes considered by doctors to be a consequence of damage done by bleaching chemicals over the years.


.......New York plastic surgeon Dr. Pamela Lipkin, who has never treated Jackson or reviewed his medical records, said, "when you look at the other features, the skin bleaching sort of goes along with what I think was his quest for beauty, so I have to wonder what came first? Vitiligo or lighter skin?" Noting that Jackson had even skin tone when he was younger, Lipkin's interpretation was that "probably he's trying to look Caucasian: His skin is whiter. His nose is getting thinner every six months. His lips are getting thinner. His eyebrows are getting higher. His eyes are getting wider every time. His cheekbones are getting bigger."

When producer Quincy Jones who worked closely with Jackson at the time Jackson's skin transformation began, was asked about Jackson's facial transformation he stated: "It's ridiculous, man! Chemical peels and all of it. And I don't understand it. But he obviously didn't want to be black...You see his kids?"

According to the affidavit of Sergeant Deborah Linden found by Vanity Fair reporter Maureen Orth in the Santa Maria courthouse complex, Jackson told his maid Blanca Francia "that he bleaches his skin because he does not like being black and he feels that blacks are not liked as much as people of other races." Orth was also informed that Jackson referred to blacks using unique names like "spabooks.""


이 자료의 이후 부분들에선 백반증의 촉발 인자[=trigger]로 지목되는 지속적 피부 탈색, 그리고 (코 이외의 눈, 패인 턱[ 일명 턱보조개], 각진 돌출 턱윤곽 등등 서구 사회에서 흔히 백인 남성의 전형적 특징들로 간주되는 부위들의) 성형에 대한 Michael Jackson의 강력한 ’공식적!’ 부인들ㅡ예를 들면, 호의적인 Oprah Winfrey Show에서의 "피부 탈색이요? 제가 아는 한 그런 건 없어요. 전 그런 걸 한 번 본 적도 없고 그게 뭔지도 몰라요."[".....In 1993, Jackson told Oprah Winfrey "there, as I know of, there is no such thing as skin bleaching. I've never seen it, I don't know what it is." It was in this interview that Jackson stated he had a skin disorder(=vitiligo)....."] 라거나, "제 안면 골격이 변한 건 사춘기 [자연적 생체 변화] 때문"이라며 "제 아버지도 원래 이런 턱을 갖고 있었어요." 등등ㅡ이 대부분 거짓이었음이 부검소견서와 형제자매들의 증언을 통해 밝혀지고 있으므로 ’관심있는 분들’은 참고할 것.


¶ "Michael Jackson’s health and appearance" @ http://en.wikipedia.org/wiki/Michael_Jackson%27s_health_and_appearance)


3.2.2.  소위 ’김치녀’의 어원

말 나온 김에 밀련하여 한마디만 더 첨언하면, 많은 공주님들이 분개하시는 ’김치녀’란 개념도 실은 그들의 상상과 달리 무능하고 찌질한 한국 남자들이 만든 게 아니라, 근래 국제 교류와 체류 외국인 급증으로 한국에 오게 된 서양 남성들이 자신의 실제 경험들을 기술해 낸 [민간 민족지적(ethnographical!)] 내부 술어였던 게 귀국 유학생들이나, 어학 수강생 남성들과의 허물없는 교류 과정에서 흘러 나와 확산된 단어로 원래는 훨씬 더 모욕적이고 성(행동)적( 맥락)으로도 매우 비하하는 의미였을 뿐 아니라 한국 내에선 널리 애호되는 ’애교’ 등에 대해서까지도 끝까지 원하는 것을 얻어내기 위해 나이에 안 맞게 아주 인위적으로 어리고 귀여운 척하며 징징거린다고 very annoying, cheesy, immature 등의 부정적 평가를 connotation으로 담고 있던 게 국제 비교 경험이 거의 없는 일반 ’한국 남성들’에게 확산되는 과정에서 그나마 완화되고 토착 변용을 거친 결과에 불과하다.

서양인들에겐 가장 인상적인 대표 표지이기에 ’Korean ([adj., n.])’과 완전한 동의어로 널리 쓰이고 있지만 정작 한국인들 본인에겐 너무나도 익숙하고 당연해서 결코  자기 자신을 추상하는 함축 수사로 쉽게 도달할 수 없는 고도 환유가 바로 ’kimchi’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개념은 대상의 이러한 특성들이 전세계 명품백들을 다 빨아들이는 독보적 최대 소비자이면서도 본사나 본국으로부터 전혀 존중받지 못 하는 동북아 3국 여성들의 천박한 과시적, 경쟁적 소비주의의 토대( 중 일부)임을 계시해 주는 (전도된) 합리성 기표로서의 기능도 갖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하 통계 자료 :

’세계 명품 시장의 국가별 점유율’에 관하여 국내에 출현한 거의 최초의 통계 수치는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2012), “명품 브랜드의 성공요인과 시사점”에서 인용 소개된 세계명품협회 (2011), “2010~2011 World Luxury Association Annual Report”의 자료였다 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르면 2010년 당시만 해도 세계 명품 시장의 국가별 점유율은 일본이 34%로 1위, 중국 25%로 2위의 순이었다. KB금융지주경영연구소 보고서에서도 초반 연구를 통해 밝히고 있지만, 자료명들의 비교에서도 그 차이를 알 수 있듯, 일단 세계적 표준어[ ;국제 통용어] category는 ’명품’이 아니라 ’사치품’이다.

그런데 이후 세계 명품 소비 시장에서 한국, 중국이 대약진을 계속하며 (특히 명품백에 대하여는) 2013년 통계로 이미 한, 중, 일이 각각 전세계 명품백의 30%씩을 구매하고 있었는데 이후 세계 경제에서 Europe의 몰락과 중국의 독주, Abenomics의 성공과 한국의 상대적 선전으로 한국에서만 지난 3년간 약 3배 규모의 매출 성장이 있었다고 전해지므로 현재 시점에서 구매 비율로는 각각 거의 35~32% 내외의 소비가 이루어지고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여기서 특기할 점들은 먼저 인구 규모를 동시에 고려하면, 공식 통계만으로도 최소 13억 인구를 자랑하는 중국은 차치하고라도 1억 3천만 명의 일본을 기껏해야 5천만 인구밖에 안되는 남한이 적어도 2015년 통계로 이미 추월했다는 것.

둘째, McKinsey&Company (2011)의 보고에 의하면 2010년 국내시장에서 명품 판매량의 약 91%가 여성용이고 남성용은 9% 정도라는 사실. 

셋째, Date 비용 지불 pattern과도 연관해 독일, Netherlands 등과 함께 남녀간 철저한 50% 분담률을 엄수하는 일본과 달리 한국 여성들은 그 세계 명품백 32~33% 수량의 구매 비용 실부담자가 상당 부분 남친과 남편들이라는 것 등이다.

)


『데이트의 탄생』에 대한 오해들

국가 유형들이 결정하는 Dating pattern

『데이트의 탄생』 독해에서의 parachronism

[추가작성중]



3.3. 현대 식민주의론

   이상에서 ’식민(성)’ 개념은 (상품을 통한 임노동 ’착취’를 본질적 기반으로 하는 순수 자유(시장) 경제의 예외(상태)로서 정치군사-문화를 동원한,) 자본주의 태생/발생(기)부터의 시초 축적 등 상품화 과정 자체 및 초과 이윤 추출의 전과정, 가사-육아로 대표되는 전통적 여성 노동 등 모든 그림자 노동, (완전) 부불 노동, 무급 노동의/과 각종 내부 식민지까지를 포괄하는 (특히 비상품(경제)적) ’수탈’(과 그를 위한 (그래서 결국) 폭력 및 차별) 관계의 총체.

(거칠게 도식화하면 노동 ’수탈’을 주목적으로 하는 정치군사적 폭력과 문화적 차별( 및 기만) 관계.)

근대체제/체계의 정상상태로 가정되는 의식영역이 소위 ’근대성’으로 지칭돼 온 (표현적) 보편성과 평등성 간 자유계약과 동의에 기반한 ’착취’ 양식이라면,

(노골적) 차별과 폭력에 의한 억압과 은폐가 정당화/당연시 돼 온 예외상태로서의 무의식영역이 ’식민성’으로 그 본질은 ’수탈’ 양식이며 지배-복종 관계를 구현하는 이러한 두 차원은 탈식민주의자들의 주장처럼 동전의 양면이라기 보다는 의식과 무의식의 관계처럼 빙산 pyramid의 상-하부로 협소한 중심 상부를 꽃피우고 유지하기 위해 이를 떠받치며 수면 아래 은폐된 채 희생하고 있는 내외(부)의 거대한 주변 하부.

특기할 점은 독점자본주의는 저하된 이윤율을 회복하고 초과이윤을 추출하기 위해

 a) ’액체화된 토지로서의 금융’화를 통한 (중세(적)) 지대 경제로의 회귀,

 b) 탈산업화와 외주화[=Outsourcing, 특히 Crowdsourcing] 등등을 통한 내부 재식민화

를 적극 추진하는 강력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독점자본이야말로 다름아닌 탈근대[사실은 후기근대!]의 monarch이고, 동시대 인구 대부분을 植民-臣民화하면서 연명하기 때문에 독점자본 초과이윤과 식민지 초과이윤은 결국 본질에 있어서, 그리고 폭력과 차별 등의 경제 외적/비경제적 (강제) 요소들을 동원하는 작동방식에 있어서 완전히 동일하며 식민성은 또다시 탈근대의 시대적 핵심 문제로 부상한다. (굳이 정밀한 차이점을 찾는다면 다만 그 강도차, 그리고 외부식민지에서의 노골적 폭력과 차별에 비해 내부식민지에서 ’기만’에 좀 더 의존한다는 점 뿐이다.)


이때 금융화된 독점자본주의, 즉 금융자본주의 하에서 인구의 대부분은 부채와 임차를 기반으로 모든 생활과 자영업을 포함한 각종 사업등등의 경제활동을 꾸려 나갈 수 밖에 없게 되는데 이러한 모든 채무자들은 본질적으로 현대의 ’소작농’들에 다름 아니다. 건물주와 그 임차 자영업자들은 가장 직접적인 ’지주 대 소작농’ 관계의 직계 재현자로서 갖은 고생해가며 피땀 흘려 불모지에서 일궈놓은 옥토를 지주의 간단한 변심으로 한순간에 잃고 쫓겨 나던 소작농들의 비애가 홍대 주변 등에서 ’gentrification’이란 개념으로 정확히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부동산 임차인들 뿐 아니라 액체화되고 추상화된 토지로서의 금융자본에 포획된 모든 채무인들 또한 ’확장된 소작농’들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따라서 동시대의 지배적 인구 형태인 ’채무자’들을 현대/후기근대의 보편적 예속 주체로 보고 "만국의 채무자여 단결하라!!"고 외치는 새로운 기획-노선은 (사민주의를 포함한) 소위 정통 좌파 또는 구좌파 성원들 대다수가 피상적으로 생각하는 것보다는 훨씬 더 현실적으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는 것이다. 다만 이 기획은 필연적으로 소작쟁의, 극적으로 성공해서 대규모로 폭발해도 결국 농민전쟁 형태로 밖에 귀결하지 못 할 가능성이 너무나 크며 이것이 소위 ’다중[=Multitude]’의 ’경제적’ 실체이기 때문에 획기적으로 새롭고 혁신적인 현대적 전략 체계 발명과 그리고 근본적으로 노동계급 재급진화 등과 반드시 결합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경제적 ’식민(성)’관계는 보다 일반적으로는 사회문화적, 정신심리학적으로 대타자와 주체 간, 궁극적으로는 모든 주인-노예 간( 관계)에 발생, 성립하는 ’종속성’이 된다.

따라서, 19~20세기 초 구-제국주의기 nation-state 간 관계라는 전통적 역사 술어로 협소한 고전적 이해에만 고착된 채 식민성의 문제를 



이러한 식민 주체들의 매판-기생적 노예 근성과 선망[=envy]이 또한 언제나 여성들이 (잠재적) 최종 결정권을 가진 압도적 (다수) 소비주체였던 TV, 영화 등 주류 Media 시장들에서조차 남성주의 문화상품들만이 넘쳐남으로써, 여성주의자들의 음모론적 문화(/)비평이론이 주장하듯 마치 시장내 악의적/악마적 소수 남성주의 ideologue들과 문화생산자들이 시장을 완전히 장악하고 모든 것을 결정하며 대다수 여성 문화소비자/소비지들을 마음대로 조종하고 그들의 심리까지 교묘하게 계획/의도적으로 조작하여 그렇게 된 것처럼 보이게 만드는 진정한 숨은 원인이다.



3.S. 

3.S.1. 문제의 순환 회로 1

         : 정체성 혼란→망상→혐오의 순환 회로


        (신체변형등)        Narki적      순(전무)결의

          재정체화    →    과대망상 → 피해망상과 코스프레

                ↑                                          ↓

          자기혐오    ←    세계혐오←(가해)타자혐오

                                                ▲우에노 치즈코


3.S.2. 문제의 순환 회로 2


절대 진리의 붕괴와 도달-불가능성, 그리고 언제나 모호한 진실들

유일한 진리(/)기준으로서의 자기 자신

무한 이기주의 Narkissist들의 전쟁터


그러나 자기 안의 타자들, 공백과 결여들 : 자기 진리의 부재와 허구성


다시, 토대로서의 외부 공통 기준 ; Game의 규칙과 공생, 협력

탈-post를 향하여!!



(잠정 방법적 일제언 : 

혐오에 대해 피해 망상적 hysteria로 과민 반응하거나 정반대로 (원인까지) 완전히 무시하지 않으면서, 직접적 자기 이익보다 성찰과 공적 목표 및 문제(로서의 共敵과 主敵)에 집중하기.

(☞행간 읽기에 익숙치 않은 일부 독자를 위한 명시적 요약은 본고 최하단 ’$X.X.’절을 참고할 것.)


그런데 문제는 여성(주의)의 주류가 자기 방어와 여성 권력을 위한 통합 기반으로서의 무조건적 자기 옹호, 그리고 남성공격과 성대결 외에는 별 다른 관심이 없어 보인다는 점이다.)




S. 왜 이런 문제가 반복되는가?


S.1. Gender 체계 근본 가설과 성 범주-진영적 2분 사고 및 성대결 관점 반대


S.1.1. 가장 강력한 일원인은 feminism 진영의 근본 가설인 Gender 체계/체제 frame이 결코 근원적이지 못 하고 지극히 현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다양하게 제기되는 개별 사안들의 고유한 발생과 작동 원리 및 구조 해명을 위한 성실하고 수고로운 작업 대신 간편하지만 무리한 환원 작업의 반복을 통해 언제나 성대결로 끌고 가는 경향이 있다.

이 ’무리’는 그 가설의 현상성으로 인해 기원하고 증폭된다.



S.1.2. 성차라는 기호학적 표지? Gender Trouble is trouble!!

성차 강조 전략 대 성차 무시/무화 전략 간 충돌 문제

gender 체계가 근본임을 강조하는 feminism 전략 대 gender 체계가 허구임을 폭로하는 feminism 전략


성차의 악용과 오용

가장 원시적인 파충류 뇌 [=R complex]에 직접적으로 소구하는 가장 악질적 인지 편향


그러나 ((성차 무화/해체) 전략 bloc 내) Post주의의 고질적 언어-문화(중심)주의(적) 관념성 문제

Derrida의 오른쪽, 또는 그 이상 : 그들 자신의 믿음이나 소망과 달리 기호체계로’서’ 세상을 재구성하고자 하는 경향은 Post주의 (전통) 내 우파를 형성할 뿐이다.

 소위 ’포스트모더니즘’의 汚名과 포스트자유주의

이에 기반한 성차 무시/해체 전략이란 결국 지겨운 자유주의의 표현적 보편성, 평등성의 반복에 불과

딸각발이 골수 인문주의자들의 의-과학적 무지, 또는 위장한 남성들


만약 세계 내의 모든 것이 언어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면 반드시 그 언어와  문화는 무엇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는지도 함께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그런데 이 때 만약 그 무엇이 ’gender 체계’처럼 생각된다면, 당신은 더러운 이름의 ’포스트모더니스트’도 못 되는, 그냥 Levi-Strauss를 뒤늦게 따라 하고 있는 낡은 원형-구조주의자일 뿐이고 그것도 아주 열등한 epigonen일 뿐이다. 왜냐하면 이 낡은 원형-구조주의의 질 나쁜 여성주의 판본의 논리에 따르면 gender는 언어와 문화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일 뿐이고 그 언어와 문화는 다시 gender가 만들어내고 있다는 순환 논법이 되기 때문이다.


Deleuze & Guattari 계보의 유물론적 univocity theory에 대한 ’포스트모더니즘’적 epigonen으로서의 관념론적 univocity theory는 차라리 현명한 2원론보다도 열등한 인식론적 퇴행이 될 수 있음.

다만 특정 이론의 인식론적 존재론적 진리치와 문화적 자유도 및 급진성/화 효과는 (특히 잠정/한시적으로는 더욱더) 별개일 수 있음.

(그러나 이 경우 문화적 급진성이 곧 정치적 급진성과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며 (대개 (특히 성적) Libertarianism (쯤)으로 귀착하기 쉬울) 뿐만 아니라 역사가 수없이 증명하듯이 이러한 관념적 (주의주의) 급진성이 반드시 실재적, 궁극적 승리와 행복을 보장하는 것은 거의 언제나 아니며, gender 수행성 실천에 있어서도 그 필수불가결한 핵심 행위가 hormone 주사 투여 등 의-과학기술적 의존이 되어버리는 comic irony로 귀결될 소지가 큼.)

.........

[작성중]



S.2.=2.S. 무비판적 옹호 대 비판적 옹호

무엇보다도 중요하게는, 권력 관계의 현실적 gender 불평등성과 일상화된 (물리적, 구조적) 폭력 피해의 압도적 비대칭 및 비등가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면서, 발생하는 모든 심각하거나 응급한 성대결 국면과 구조적 진지전에 있어서 여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다짐한다.


그러나 한편 인문주의적 주류 feminism(과 그에 포획된 무비판적 지지자들)의 무지가 완전히 탈각하고 있는 가부장제와 가부장주의, 그 대립물로서의 여성주의의 흥망성쇠를 배후 기저에서 결정하는 또 하나의 물적 토대가 있는데, 세계의 각 지역별 사회에서 해당 단계별로 초기 경공업 자본주의기 사회경제 활동에 여성 노동력의 동원 및 그를 위한 여성 교육으로 발화하기 시작하는 여성 운동을, 이후 근력 위주의 (중화학공업 및 건설산업 중심) 발전/개발(도상)기 산업자본주의로 이행하면서 절정에 달하는 (완화된, 핵가족 기반) 근대 가부장제가 다시 억압함으로써 잠시의 잠복기가 있게 되나 결국 다음 단계에서 탈산업적 후기자본주의의 변성 및 경제 위기와 그에 맞물린 여성(주의)의 대약진 등이 복합되어 가부장제는 (특히는 세대교체 과정을 통해) 급격히 와해 또는 최소한 결정적으로 완화되고 있다는 이러한 현실의 변화 운동 또한 절대로 경시되어서는 안 되며, 또한 가부장주의를 포함한 모든 남성중심주의를 철저하게!!! 반대하지만 그 궁극적 대안이 곧 (숙명적 거울 관계의 (모순과 문제를 몰고 올)) 여성주의라 생각지 않고, 여성(주의)에 대한 모든 비판과 지적은 즉 여성 혐오나 폭력이므로 원천적으로 금지되어야 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덧붙여 물리적, 구조적 폭력 피해의 비대칭성 때문에 여성(주의)의 그 모든 죄가 사하여지 듯 모든 잘못과 오류, 한계가 정당화되고 그에 대한 어떠한 발언과 지적도 자제되어야 한다는 식의 경향신문 등 일부 견해를 포함, 심지어 신자유주의 상품화/시장화를 선도할 총알받이 돌격대를 자청하고 나선 갈색 feminism까지 오히려 반색하며 적극 환영하는 자유주의자 등 소위 ’진보진영’ 내에 만연한 (무조건적 무비판적 여성(주의) 옹호가 곧 ’신사적’ ’진보’의 표지라는) 얄팍한 온정주의적 위선과 강박은 그 자체로도 논리적 상호 연관을 결여한 오류이지만 운동사에서 각 시대마다 ’경제주의’, ’조합주의’ 등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끊임없이 지목되어 온 지겹도록 뿌리 깊은 즉물-즉자적 (대중) 이기주의에 다시 빠진 여성(주의) 주체들의 대주체로의 승화와 결합 발전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그 외 여러 이유로도 재고돼야 할 소지가 있어 보이며, 더구나 이러한 (피해의) 비대칭이 개별적 현실의 인지 갈등과, 혐오 등 감정 갈등 상황에 있어서도 아직까지 여전히 관철되고 있는지는 다소 의문이 아닐 수 없다.



(’남혐’ 불가능론 비판 : 남성주체의 보편성 현실, 혐오와 분노의 차이 등을 강조하면서 ’여혐’은 가능한데 ’남혐’은 불가능한 사회이기에 불평등하다는 식의 일부 주장은, 상기 초두의 "$1.1.2. 정체성 혼란" part에서도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애초에 순수 추상적 남성과 여성의 형태로만 존재하는 인간은 없기 때문에도 그러하지만, 이상과 같은 가부장제 와해와 gender 관계 변화에 의해서도 여러 형태의 지독한 ’남혐’ 행위들이 실제로 얼마든지 있어 왔다는 몇가지  예를 열거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반증된다.

그런데 정작 문제는 ’남혐불가능론’이 완전한 상상과 허구라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동물적 암수 관계에서는 물론 인류학적 원시 단계로부터 mirroring이라는 미명하의 바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고래의 그 모든 남혐 행위들이 대부분 불쌍한 하층 계급 남성들, 특히 그들의 사회경제적 처지와 신체적 complex들을 target으로 하고 있는 비열하고 비윤리적인 행위라는 점이다. 단신남들에 대하여는 오래 전부터 한국사회 중추신경 중에서도 핵심 중추 각성 (의)식역에 해당하는 prime time 지상파 TV에서 "키 180cm 이하 남성들은 loser"라는 테러적 공언이 있었던 것은 물론이고 이후 어좁남 등을 거쳐 현재의 혐오에 대한 혐오라는, 진정한 여성 억압 및 차별과 비하, 혐오 가해자가 혐오의 혐오 피해자[=target]와 일치한다는 어떠한 보장조차 전혀 없는 또 하나의 가해 행위에 불과한 한심한 대응 하에 행해지고 있는 대부분의 남혐 행위들 뿐 아니라 우에노 치즈코[上野 千鶴子] 등의 혐오의 혐오 이론들까지 찌질남, 비인기남, 결혼 못 하는 남자 등등.....지목하고 있는 모든 남혐 대상들은 다 우리가 끝까지 보호하고 해방시켜야 할 바로 그 하층계급 성원들이다. 쉽게 말해 그동안 뚱녀들을 비웃어 온 것이 정말 단신남, 어좁남, 찌질남, 실**남들이기라도 하단 말인가?!

이 모든 문제의 근저에는 땀에 찌든 노동에 대한 혐오와 공포, 하층/노동 계급 남성을 멸시하며 따돌리고 ’최소한’ 중간 계급 이상 남성을 일방적으로 이상화하고 선망하는 여성들의 역겨운 노예 근성과 무의식이 똬리를 튼 채 도사리고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이 한심한 사고방식은 비단 남혐site들에서 인생을 허비하고 있는 무뇌아적 여성대중들 뿐 아니라, 이무리 초고학력의 feminist라 할지라도 거의 예외없이 동일한 pattern으로 발견되는데, 예를 들어 下記 ’$X.2.’절의 대상 text나, 또는 본서 『여성혐오가 어쨌다구?』 중 여성혐오에 대한 정신분석학적 ’시도’ 등에서도 어김없이 반복된다. 특히 이(런) 불완전한 정신분석의 치명적 결함은 완전히 동일한 구조(/)pattern으로 대타자-주인-지배계급 남성 강자를 상징하는 ’아버지’에 대하여 (예속)주체-노예-피지배 하층계급 남성 약자를 형상하는 아들

여성혐오는 거의 언제나 여성숭배와 동시에 존재해 왔으며 모계사회등에선 그 존재여부도 미미하나, 그에 비해 이 열등남 혐오와 하층계급남성 혐오는 항상적이며 일관되게 거의 자연사 전체를 관통할 정도로 유래가 깊고 장구한 것이기도 하다.

)



따라서 오히려 상황들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여성(주의)에 대해서도 자유롭고 건강한 비판적 공론’장과 회로’, 소통 ’공간과 channel’을 보장하고 건설해 나가는 작업은 반드시 필요하다.

다만 적대와 분리가 아닌 협력과 단결 지향을 절대적 전제로 한 우애적 비판 수준과 담화 방식은 적극적으로 (동반)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인지갈등과 감정갈등의 분리를 구현하는 실질적 방법이기도 할 것이기 때문이다.



S.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지적과 비판이 적대를 의미하는 것은 전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세심한 구분과 각성(의 필요성)을 필수적으로 요청/전제하면서, 장차 발생할 모든 심각하거나 응급한 성대결 국면과 구조적 진지전에 있어서, 권력 관계의 현실적 불평등성과 일상화된 (물리적, 구조적) 폭력 피해의 압도적 비대칭 및 비등가성을 전적으로 승인하며 여성을 절대적으로 지지하고 적극적 동참을 진심을 다해!!! 강력하게!!!! 재차 다짐하는 바이다.



S.S. 

마지막으로 이 모든 질문들의 핵심 취지는 의도적, 비약적 폭력들 전체에 맞선 철저한 반대 및 금지 조치와, 비의도적 인지 오류로서의 인지 폭력부터 맞서 시작하는 치료적 인도주의~(post)구조주의 인지 전쟁에의 집중 필요성을 전제로, 예상되는 몇가지 난점들에 대한 점검과 그에 따른 여타 (대안적) 전략들의 가능성을 모색해 볼 여지는 없는지 검토해 보기 위한 것이었음을 다시 한번 명확히 강조하고자 한다.

이상의 전제된 동의와 달리 혐오 반대와 금지를 위한 우리의 모든 노력은 그다지 (큰) 효과가 없을 것으로 보이나 인지 전쟁에 대한 집중은 우리가 극도로 열심히 임한다면 남녀 대중의 폭발할 분노와 혐오에 그 올바른 대상을 찾아 줌으로써 쉽게 보이지 않고 뒤에 숨어 있는 진정한 주적에로 방향을 전환시킬 수는 있을 것이다.




X. 반응 평가

최근 본고에 대한 사회적 반응들 중 가장 유의미한 답변의 하나는 역시 존경하는 《문화/과학》지 최근호(no. 83), 특히 "페미니즘 2.0"이라는 제하의 특집기사로부터 나왔는데 그 주신 가르침들에 대하여는 앞으로 진심을 다해 심사숙고해 나갈 것을 약속드리나 이중 몇가지는 본고에 대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사료되어, 그에 대한 짧은 해명을 여기에 첨부키로 한다.



X.1. 우선 무엇보다 feminism의 정치경제학 ’비판’ 관점의 잠재성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Marx주의 정치경제학 비판 체계와의 통합발전을 시도하는 정정훈 선생님의「페미니즘 이후의 정치경제학 ‘비판’을 다시 생각한다―맑스주의 정치경제학비판의 전화라는 문제설정 속에서 페미니스트 자본주의 분석을 읽기」는 작성자의 근본 입장과 전혀 대립하지 않고 오히려 상당 부분 일치하기에 본고가 feminism 전체와 Marxism을 완전히 대립시키(면서 후자만을 배타적으로 옹호하)고 있다는 식의 오해는 이를 계기로 다른 분들도 일소해주시기를 부탁드린다. 이 통합 체계의 구축은 적록보라 강령 실현을 위한 이론적 핵심 과업이기에 또한 작성자의 제1순위 작업 과제의 하나이며 이에 대한 요지는 약술된 상기 3.3절에서 단초를 확인할 수 있음.



X.2. 그런데 대만정치대학교 류진희 교수님의 '무기 없는 민족'의 여성이라는 거울: 해방 전후 탈/식민 남성성과 여성혐오를 단서로 하여」는 첫째 ’식민성’ 개념 사고에 있어 역사상 특정 시기에 국한된 nation( - )state 간 특수한 국제 관계라는 고전적 외부식민지 개념에 고착됨으로써  post-colonialism과 de-colonialism 등 현대 (탈)식민주의의 귀환과 그 의미, 중요성을 별로 깊이 이해하고 있는듯 보이지 않고, 둘째 그 필연적 결과로 더 중요하게는 보편근대성에 대한 절대적 확신에 근거해 모든 반/비근대적 저항을 역사의 일회적 해프닝 정도로만 간주하고 (식민지) 근대화/서구화를 적극 수용한 주체에만 정당성과 면죄부를 부여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식민지 근대화론을 주장하는 ’뉴라이트’ 진영과 정치적 차별성의 실질을 구할 수 없으며, 셋째 ’근대성’ 개념 이해에 있어서도 서구중심성과 세밀히 구분하지 못 함으로써 결국 근대화=서구화로 완전히 등치시키고 있어 결과적으로 적극적 서구화 (수용) 세력만이 가장 정당한 역사적 주체로 상정되어 버리고 있는 듯 보임. 넷째 이 문제는 남성성과 여성혐오라는 하위범주에 국한되는 문제라기보다는 위 3절, 특히 ’(major )minority로서의 식민지/식민집단’ 내 ’minor minority( 분파)로서의 자발적 친일파, 부역자와 백인 닮기를 열정적으로 실천하는 유색인종들, Transgender 등’(의) FLUNKYISM(에 대한 집단 내 혐오) 문제로 접근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고 사료됨. 다섯째 얼핏 고상해 보이는 이 주장의 입론이 얼마나 말이 안 되는지는 그냥 간단히 ’무기 있는 민족’의 지배계급 등 강한 남성들이 이집단, 특히 적대집단이나 ’무기 없는 민족’ 등 하위집단들의 남성과 교제, 추종하는 자기집단 내 여성들, 이를 테면 (특히 흑인노예제 시대에는 더욱더) 흑인남성과 교제하는 백인여성, 중세 조선에서 ’종놈과 놀아난 마님’ 등을 어떻게 대했는지만 잠깐 생각해 봐도 누구나 금방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류의 입론들은 그 본질에 있어서 상기 ’$S.2.절’ 중 ’남혐불가능론 비판’에서 밝힌 남혐site에 모여드는 여성대중들의 즉자적 대응심리인 약자인 하층/노동 계급 남성을 멸시하며 따돌리고 ’최소한’ 중간 계급 이상 남성을 일방적으로 이상화하고 선망하는 여성들의 역겨운 노예 근성과 무의식에서 조금도 나아가지 못 한 것으로 보인다.

여섯째

[작성중]

이상에 대하여도 본고 3.3절의 ’식민성’ 개념 논의를 참고할 것.



X.3. 손희정 편집위원 선생님의 박사학위 논문에서의 Media 시장 결정자 문제와 이후 수정된 《문화/과학》지 83호의「페미니즘 리부트―한국영화를 통해 보는 포스트-페미니즘, 그리고 그 이후」에서 소비주체로서의 여성관객 문제에 대한 비평적 comment도 같은 절( 최하단)을 참고할 것.


무엇보다 선생님의 백미는 입론 자체보다도 그것을 압도하는 영화 text적 예증 능력에 있다고 보여진다는 점을 전제하면서, 다만 Postfeminism에 대하여는 저술 과정 상 절차적 문제가 좀 있지 않나 싶어 보여도 원 논의 그 자체는 숙고의 가치가 너무도 충분하나 결정적으로 feminism과 postfeminism의 역동적 관계에 대한 역사적 이해, 특히 역사적 개념화와 역사이론 (model) 구성에 실패함으로써 feminism과 특히 postfeminism 계보들을 각각 세대 구분없이 뒤섞어 평면화시키면서 몰역사적으로 대립시키고, 초창기의 anti-feminism적 부정어법에만 매몰/고착됨으로써 너무 협애하게 일면적으로만 파악한 개념 기준으로 다시 feminism과 postfeminism을 뒤섞어 모든 선과 정의는 feminism으로, 악과 불의는 postfeminism으로 재편집하는 등 결국 세대 (간) 구분과 세대 내에서의 이후의 변화 발전까지를 포괄한 종합적 이해와 평가에 이르지 못 한 듯 보이는 아쉬움이 있고, 무엇보다도 절대적 단일 불변의 feminism 관점에만 입각해 역사화 상대화된 통찰없이 feminism 사조의 세대 교체기마다 나타나는 역사적 일반 현상으로서의 기성 세대 feminism 비판을 모두 반feminism으로 받아들이는 피해 의식을 반복하고 있는 측면은 없는지 검토해 보아야 할듯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논의틀이 최근까지의 정세정황과 역사를 관통하는 전면적 종합 고려로 확대되어, (본고 후단에 검토된 의미의 (((급진) 좌파 feminism의 주류라 할) 바로 그) 3세대 feminism에 대한 본격 비판과 차세대 feminism의 발명으로 이어진다면, 또 반드시 그래야만, 현재의 여성혐오 문제를 돌파하는 가장 현명한 출구가 될 것이다.

( 그 이유는 다음에 매우 자세히 명시되어 있으므로 참고할 것.

¶  @http://blog.aladin.co.kr/705625157/5914507 )


이에 대한 논의는 본고 최하단 $X.X절에서 최종 결론으로서 상술한다.



X.4. 이하는 《문화/과학》 편집위원회에 올리는 답변들인데, 우선 이하에 좀 더 상술할 국제적 관점을 고려할 때 우리의 발명 과제는 "페미니즘 2.0"이 아니라 (제)4세대 페미니즘이 되어야 하지 않나 생각된다.


X.5. 그리고 인식론-존재론과 관련해서는 위원회의 우려처럼 ’gender’ 개념을 비판하면서 생물학적 ’sex’ 개념으로 회귀하려는 시도가 전혀 아님을 명확히 밝힐 필요가 있어 보인다.


작성자가 Simone de Beauvoir 이래로 여성주의에서 의심(할 수) 없는 정설로 받아들여져 온 소위 ’사회적 구성주의’를 지배하는 언어-문화( 중심)적 구성주의 가설, 그 중에서도 특히 Judith Butler류의 gender univocity를 폐기하게 된 결정적 계기였던 실험 결과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동들의 혈중 성 hormone 농도 수치와 선호 장난감 유형 간 관계에 관한 것으로 Simone de Beauvoir의 바로 그 주장을 정면으로 뒤집는 이 실험에서 성 hormone의 종류별 농도를 조작하면 총기류와 인형류 같은 선호 장난감의 유형이 변화한다. 여기서 극적으로 보여지는 바와 같이 2(~4, 광의의 외성기 개념을 적용해 세분시 최대 8)종의 성기 구성에서 연역하여 모든 성차나 gender, 그리고 세계를 2(~4)분법으로 설명하려는 보수주의 규범은 분명 전복되어야 하지만 그렇다고 성차를 부정하고 n개의 수평적 gender 분포로 사회를 설명하려는 시도 또한 못지 않은 허구적 상상에 불과하며 진실은 다음과 같아 보인다. 

인간의 gender(별) 행동의 많은 부분은 성기 (구성) 종류가 아니라 혈중 hormone 종별 농도차에 의해 설명되며 이때 농도 수치는 인구 모집단에서 n개 점의 수평선 분포가 아니라 쌍봉형 정규 분포 곡선을 이루고, 이는 연령 변화 등의 여러 요인에 의해 끊임없이 유동한다. 다만 작성자의 정확한 입장은 이러한 설명 체계와 언어-문화(중심)적 구성주의를 배타적 택일 관계로 보지 않고 매우 긴밀하게 유착하여 간섭하는 과잉결정 관계로 보나 두 원인이 서로 직접 침투적 상호 작용을 하는, 대칭 관계로(서) 고정된 변증법적 과잉결정 model이 아니라 연령별, 생애 주기별로 그리고 역사적 사회-문화 구조별로 끊임없이 구체적 역관계=결정관계가 유동하는 간섭적 과잉 결정 관계이다.

이 ’간섭적 과잉 결정 관계’란, hormone signal system에 의해 정교하게 작동하는 기계 장치로서의 주체의 신체라는 장에서 언어-문화가 지속적으로 내삽적 간섭을 일으키는 교란 신호로 작동한다는 의미이고,

유동하는 역관계=결정관계란 ’상상 임신’ case에서처럼, 극단적인 경우 때때로 언어-문화 등 신경-정신적 요소에 의해 내분비계가 완전히 압도, 장악되는 관계까지를 포함한다. 

이러한 설명 체계만이 그동안 gender univocity theory 진영을 핵으로 하는 여성주의( 분파)가 눈 감아온 또 하나의 핵심적 모순인 중년기 이후 남성성과 여성성의 역전 또는 중성화 현상까지를 유일하게 온전히 이해시켜 준다. (특히 갱년기 이후 가속되는) 급격한 중년 여성들의 남성화와 중년 남성들의 여성화는 모두 언어-문화적 성규범이나 교육지침이 중년 이후만을 대상으로 혁명적으로 일거에 전변하거나 혹은 이들이 인생 경험을 통해 얻은 깨달음으로 급진화되어 의지적 수행에 의해 남녀 모두 ’동시에’ 도달한 목표가 아닐 뿐 아니라 오히려 이들은 대부분 이것을 ’인간 구실의 상실과 종말’처럼 받아들이면서 ’반동 형성’ 등의 방어 기제 등도 동원하여 가능한한 이에 저항하고 있으나 결국 성공하지 못 한다.


가장 극명한 반례로서의 배설강 외번증 환자 Joe(lla) Holliday case



뿐만 아니라 원형-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을 계통적으로 연결/매개함으로써 현대 관념론 계보를 부활시키는데 핵심고리 역할을 한 (특히 후기 이전 (/) 언어학적 구조주의) Lacanian 정신분석 중 그 성차화 공식(에 대한 독해(법))에 있어, Butler를 정점으로 하는 ’급진주의 feminism’*( 일파)로서의 queer (feminism) 진영이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결정적 오류는 ’자신이 무엇인가’와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리고 ’타인들이 자신을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의 결정적 차이를 망각하는 것이다. 이 중 ’자신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가’는 자아(의/라는 (Narkissism적)) 환상으로서 상상계의 핵심을 구성하기 때문에 여성주의는 이러한 오류를 통해 실재계로의 도약 대신 상상계로의 퇴행을 선택한다.


단, 이러한 내분비계의 biochemical process를 포함한 정신(분석)적 및 사회문화적 성차화 process는 주로 성적 정체성에 영향을 주고, 성적 관계성의 지향과 취향은 이에 기반하는 한편 그 외에도 (특히 성적) 경험 요소, 특히 모험과 탐구/탐색 활동 등에 의해 좀 더 복잡하게 교란됨으로써 정체성 형성(에서) 보다 (훨씬) 더 많은 상대적 자율성 하에 놓이게 되며 이러한 복합교란은 일반적으로 남성보다 여성에서 더 강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고 이는 여성의 hormone 구성이 좀 더 복잡하고 후천적 정신-문화 영향을 더 많이 받기 때문인 것으로 추정된다.





(* : 여기서 ’급진주의 feminism’은 주로 현대 France 급진주의 철학을 주요 이념적 기반으로 하는 여성주의를 중심으로 그 세력장/영향권 주변의 연관 운동과 사조를 통칭하는 개념으로 3세대 feminism 좌파 (bloc) 정도에 해당하며, 엄밀히는 2세대 feminism 좌파인 미국 기반의 영어권 ’급진적 feminism[=radical feminism]’과는 구별된다. 
애초에 한국 여성주의는 진영 간의 이론적 불명확성과 미분화 및 (특히 시간적) 혼종성 등으로 분석에 결정적 애로가 있고, 동일한 이유로 한국 여성주의 현실에선 솔직히 별 차이점도 그리 크지 않을 뿐 아니라 뒤섞여 있는 경우도 흔하지만 그래도 원래는 postmodern feminism과 post구조주의 feminism 등을 포괄하여 post(-)feminism 등의 명명도 시도될 수 있었겠으나 이 용어야말로 역사적으로 거의 주류 feminism의 세대 교체가 있을 때마다 애용되어 이미 1920년대 전후 이래로 여러 맥락과 세력에 의해 다양하게 채색되어 왔기에, 《문화/과학》지 손희정에서와 같이 본고에서 지칭하는 대상과 관련없는 과거 부정어법으로도 많이 사용되므로 오해의 소지가 너무나 많은 반면, ’급진주의 feminism’은 무엇보다도 이 진영의 가장 두드러진 이념적 지향과 태도, 정서 상 특징 중 하나가 근본적 해체로 표현되는 급진성( 추구)이기에, 더 적절한 (한국) 사회적 명명이 이루어지기 전까지 맥락과 국면에 따라 이 용어를 당분간 계속 사용키로 한다.
)


X.S. 최종 결론과 남겨진 문제
근래의 여성혐오 현상/국면 해석과 대응에 있어 핵심 문제는 이것을 단순히 여성(주의)의 약진에 위협을 느낀 한국 찌질남들의 극우적 반동으로 볼 것인가, 여성주의 세대교체의 신호이자 요청으로 볼 것인가이다.

(선량한 (유대인) 이웃에 대한 끊임없는 음모론적 혐오라는 비유적 예시도 지극히 타당한 고견임은 분명하나, 이 국면에서 여성주의 비판은 단순히 혐오 문제 해결만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 것은 아니며, 여성(주의) 주체들의 대주체로의 승화와 결합발전, 그를 위한 여성주의 세대교체에 요구되는 비판과 성찰의 필요성을 보이지 않게 만드는 frame이란 점에서, 그리고 미래 예측 방식에서 다소 극단적인/대담한 비관이란 점에서도 수용엔 무리가 없다 할 수 없지 않나 싶어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는 매우 유용하게 준거할 만한 반복되는 역사적 pattern을 추상해 낼 수 있는데, 그 양상은 시간축을 따라 여성주의 내부의 세대교체가 진행되면서 그것을 관통하는 직교축으로 분리주의를 포함하는 여성중심주의적 경향[=n세대 feminism]과 협력주의적 경향[=n세대 postfeminism]의 주도권이 교차반복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이 pattern은 2차원 평면의 역사공간 상 파동형(, 확장된 관점에서는 3차원 공간에서 시간축을 따라 회전하는 나선형(의 정사영)) 순환 gragh처럼 형성되는데 각 세대의 파동이 발달하여 절정에 도달하면 논리와 운동이 극단화하여 여성중심주의 경향의 이기주의가 강화되면서 그 세대/사조는 점차 문제에 봉착하고 모순이 심화되어 그에 대한 사회적 저항과 반발에 부딪히며 위기에 빠짐으로써 파동이 쇠퇴하게 된다. 이때 이러한 사회적 저항을 무시하거나 배척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끌어 안으면서 기성 세대 feminism의 문제와 오류를 본격적으로 비판, 해결하며 등장하는 새로운 파동이 발생하는데 이들의 비판성 때문에 초기에는 자칭/타칭 post(-)feminism으로도 불리고, 또 자신의 feminism만을 불변의 유일하고 절대적인 일괴암적 feminism으로 상상하는 기성 세대 feminism의 기득권 세력에 의해 anti(-)feminism으로 오해도 되지만 이내 차세대 feminism으로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다. 따라서 이 파동에서 n세대 post(-)feminism의 핵심(정신)은 n+1세대 feminism과 거의 유사하거나 계승된다.
그런데 이러한 파동 연속에서 (특히 교체기에) 그 기(축)선이 여성중심주의-분리주의 경향 대 협력주의 경향의 대립으로/처럼 현상하는 이유는 기성세대 feminism의 모든 문제와 모순들이 심화되면서 그에 대한 사회적 저항이 거세질 때 기성세대 feminism이 가장 손쉽게 취할 수 있는 간편한 방어기제가 바로 도피적 분리주의(의 강화)이기 때문에 이로 인해 오히려 더욱 가속된 모순이 집중적으로 표출되는 가장 표면/표층적인 쟁점이자 파열구이며 차세대 feminism의 가장 두드러진 초(창)기 차별점이 되기 때문이다.
이 통찰을 상기의 경제사적 통찰과 통합시키면, 경공업기에 출현하는 것이 1세대 feminism이고, 중화학 공업기에 출현해 그 (Fordism) 말기에 (본)격화하는 것이 2세대 feminism이며, 신자유주의기에 등장하는 것이 3세대 feminism이 된다. 그러나 이 3세대 feminism은 그 paradigm의 신자유주의와의 본원적 유사, 착종성 때문에 결과적으로 그에 대한 굴종과 투항으로 귀결되며 2008년 세계금융위기와 함께 도래한 신자유주의 (자폭) 위기와 함께 재급진화한 4세대 feminism model로의 도약 모색을 강제받게 되는 것이다.
여기서 특기할 점은 1세대 feminism은 주로 여성 대중 교육 시대( 개막이)라는 환경에서 구좌파의 지도하에 그에 대한 기대와 믿음을 기반으로 각성, 촉발되나 위에서 이미 밝힌 바와 같이 근력 위주의 대규모 중화학 공업 및 건업 위주의 산업자본주의기에 오히려 근대 가부장제는 절정에 달하기 때문에 이 시기에 탄생해 잠복하다 그 시대말/위기기에 격화하는 2세대 여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조직 노동(자) 계급( ideology)에 대한 실망, 불신과 절교이다. 이에 따라 gender체계 근본주의와 가부장제 주적론으로의 대전향/퇴행이 일어나고 극단주의 분파에선 1세대 여성중심주의를 넘어선 2세대 분리주의로의 격화, 분리주의 분파 내에서도 2세대 초기[ 1970년]의 일시적-전술적 분리에서 이후 (철학적-ideology적 차원으로 고양된) 전생애적 분리주의로의 격화도 진행된다.
이 세대의 (본)격화는 서양에선 60년대에 한국에선 (80년대(말)~)90년대에 나타나는데[ 권인숙 (1991) ; 공지영 (1993)] 그나마 이들은 (탈계급(선상이나마)) 나름대로의 정치( 지향)성을 유지했다면, 그에 반해 서양에서 80년대에( 발생해 90년대 본격화하고), 한국에선 (90년대(말)~) 2000년대에 등장한 3세대 여성(주의)의 가장 큰 특징은 바로 (여성) 집단(/)동일성 의식의 해체 및 원자적 개인주의 탈정치화와 급진주의 성(애) 문화(적 수행(성))에의 몰입, 그리고 무엇보다 (신)자유주의 ideology에의 착종적 포섭/교란에 의한 (post)liberal~libertarian(ism)화라 할 수 있다. 체제가 (성적) 존재 및 지향/취향의 다양성과 급진/노골적 성(애) 문화에 겁먹고 이들을 애써 부정하거나 억압/탄압에 앞장서고 있으며 따라서 자신들이 gender(라는) 근본체계를 뿌리부터 뒤흔드는 혁명적 급진주의 정치의 선봉에 서 있다는 queer feminism과 갈색 feminism 진영의 자기 착각과는 달리 실은 그들은 추락하는 이윤율을 회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신상품과 나아가 틈새시장을 비롯, 새로운 시장과 새로운 산업 자체의 개발/발굴(을 위한 내외 (신)신식민지 개척)에 사활을 걸고 있는 다품종 소량생산 체계로서의 post-Fordism과 신자유주의에 총알받이 돌격대로 적당히 이용당하고 있을 뿐이다. 그들이 공격대상으로 뭉뚱그리고 있는 보수집단은 결코 간단한 단일세력이 아니며, 이러한 가미가제식 자살 돌격을 통해 가까스로 얻을 수 있는 거라곤 이미 스러져가고 있는 봉건잔재로서의 종교 및 유교 세력의 失權( 가속화) 정도일 뿐, 배후의 진정한 지배권력인 신자유주의 자본가계급은 절대 건드릴 수 없을 뿐 아니라, 지배집단 내에서 상호 경쟁 관계에 있던 일방을 대신 제거해 줌으로서 그간 이 잔재 세력들의 보수 봉건적( 생명)윤리에 견제 받고 눈치보느라 머뭇거리고 있던 성산업과 (난자, 성/생식기관 등의 각종 장기, 배아, 태아/신생아 등을 포함하는) 생체 (Data[ Foucault가 지적한 인구통계학은 그 작은 시작에 불과했다], 이식, 변형 및 매매)-의료민영화 산업, 우생학적 유전공학 산업, TRANS-human/post-human(화) 산업 등이 본격화할 공산도 매우 크다. 성산업과 Bio산업을 양대 축으로 하는 노골적 원액 생명/생체 자본주의는 인공지능 및 Robot공학 자본주의 시대에도 유일하게 살아남을, 자본가 계급이 절대로 포기할 수 없는, 고이윤(율)의 마지막 인간자원 산업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소위 ’동성애 제국주의’, ’Queer 제국주의’같은 개념들이 부상하는 숨은 이유이다. 이 최점단 제국주의가 선도/후원하는 새로운 국제 표준으로서의 Queer 문화 ideology와 그에 의해 폭증할 다양한 가족 형태의 가정들은 전지구적 환경파괴 및 저출산 고령화에 의해 가속점증할 불임가정, 상실가정, 사별가정, 비혼 및 독거 가정 등등과 함께 유전공학적 난자, 수정란, 배아, 태아/신생아 산업의 넓은 선도 시장을 창출해 줄 것이고 (전신) 성형과 성전환이나 (단순) 성기변형/이식 수술 등은 TRANS- 및 post- human(화) 산업의 초기 형태를 예비한다.



이러한 급진주의 sexuality( feminism)들)은 이미 근대 태동기 Boccaccio의 『Decameron』에서부터도 끊임없이 이어져 온, 근대에 던져진 발명품으로서의 인간(중심)주의(~개인주의~이기주의)라는 동전의 양면이자 근대의 두 얼굴로서의 ’이성/욕망’-중심주의의 한 측면에 불과하기에 그들의 바람과 달리 전혀 탈근대적이지 않고 그냥 퇴행기에 접어든 후기근대를 지배하는 전형적인 ’억압가설’의 아주 뒤늦은 반복일 뿐이고, 이런 맥락에서 Gayle Rubin의 『일탈[Deviation]』은 이미 매우 낡았으며 Foucault는 아주 일찌감치 이 모든 것들의 너머에 도달한 현대의 예언자였다.


소수자 인권과 평등을 위한 투쟁은 너무나 중요하고 그 당위성은 의심의 여지가 없으나, 다만 다양한 문화정치경제학적 맥락들이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사회권력장의 시공간에서 하나의 실천 행동은 다층적인 다중 효과를 산출하게 되므로 신중에 신중을 기하지 않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결을 더이상은 미룰 수도 없는 소수자들의 고통에 대한 (잠정적) 일대책은 아마도 극우개신교파 또는 인사에 대한 정밀타격과 민주/자유주의적 기독교 세력으로부터의 분리고립화 전술이 아닐까 한다.)





(그리고, 여기서 4세대 feminism model 발명 과제와 함께, 한국 여성주의 (분포) 지형 분석을 적록보라 구현을 위한 시급한 운동/연구 과제이자 남겨진 또 하나의 문제로 촉구하면서, 중약 가설로 현재 반발과 저항의 주요 대상으로 한 축이 되고 있는 한국 국가 feminism( 진영)은 (anti-sex적) 가모장주의 fascism 성향의 2세대 feminism 보수연합이, 이와 구별되는 비정부[=Non-Governmental] sector에선 전통적 여성단체들은 2세대( 보수/중도/좌파)와 1세대가, 신생 여성단체, (소장) 학계와 인권 운동단체들은 (pro-sex적) 3세대 좌파 ( 특히 post구조주의) feminism이 주도하고 있다는 주장을 투척해 보면서 본고를 마무리하고자 한다.
결어 삼아, 이 사회적 저항 및 반발과 관련해서도 한국 여성(주의자)들은 그들의 약진에 위협을 느낀 못 난 한국 찌질남들의 호들갑 정도로 처리하고 있지만, 다시 한번 국제적 관점에서 고찰하자면 서양판 ’(신)남성연대’에 해당하는 전통의 ’Men’s Rights’ (movement)는 말할 것도 없고 요즘은 2013~14년부터 ’Women Against Feminism’ (movement)이 극성을 부리고 있다. 거의 대부분이 여성인 이들은 한국에서 "#나는 페미니스트입니다" campaign이 유행하고 있을 때 매우 유사하나 더욱 확대된 방식으로 각종 blog 등을 포함한 모든 social media를 통해 "#I don’t need feminism" campaign을 대대적으로 전개했다. 한국 여성(주의자)들이 성찰과 혁신에 눈감을 때 그 멀지 않은 미래를 예시해 주는 중요한 현상일 뿐 아니라, 절 초두에서 제기했던 현 국면의 해석과 대응에 관한 핵심 문제에서 후자 입장이 지지되는 강력한 근거 중 하나가 아닐 수 없다.
)
이에 존경하는 《문화/과학》지 83호가 천명한 차세대 feminism의 발명 원칙을 음미하면서 문을 닫는다.

   "예컨대, 우리가 상상한 ‘페미니즘 2.0’의 언어는 이런 것이었다. 눈앞의 혐오와 폭력에 붙들려 ‘계몽’과 ‘(반)비판’만으로 에너지를 소진하거나 퇴행하지 않을 것, 페미니즘을 부분운동으로 국한.고립시키는 기왕의 오해와 거리를 두면서 페미니즘 논의를 일신 혹은 (재)활성화시킬 것, 페미니즘의 역사성과 정치적 가능성을 급진화할 것, 페미니즘을 둘러싼 국내 안팎의 현상과 담론, 이론과 실천들을 두루 다룰 것, 현재 페미니즘 지형에 상관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여러 흐름의 참여적 가능성 및 그 조건으로서의 미디어환경을 고민할 것. 요컨대, 우리는 ‘페미니즘 2.0’이 기존 페미니즘의 문제의식과 성과를 유지·계승하면서도, 새로운 흐름을 일으킬 수 있는 ‘확장과 전환, 참여와 가능성’의 이름이기를 바랐다."









[본고의 주 약점은 작성자가 여혐, 남혐 site들에 직접 노출된 바가 전혀 없어 혐오 실태를 다소 부정확하게 과소 평가하고 있을 수 있기에 이에 고지함. (그러나 전체적 고려의 구도 상 본질적 결함으로 사정되지는 않음.)]



[아울러 저작 동기는 (현실) feminism, 특히 주류 feminism( 내 가모장주의 fascism 성향과(/의) 극단(적 분리)주의 분파 등)을 중심으로 자기 성찰 능력을 상실한 채 즉자적이고 무조건적인 자기 옹호와 방어에만 급급하고 있다는 문제 의식 때문이었지만, 전체적 작업 구도와 정치 전략 체계에 비추어 여성(주의) 비판에 과촛점화된 측면과 (무뇌아적 남성주의 극우파 등에 의한) 악용 우려도 있어, 진지한 자성을 촉구하기 위한 중기 게재 후 자진 삭제 고려 중]



[덧붙여, 문미의 ’갈색 feminism’이란 용어에 다수 대중은 물론 feminism 외부의 정치, 운동 단체들도 오해가 있는 듯하여, 거명 당사자들의 입장을 고려해 더 이상의 상술은 않겠으나 문맥상 비교적 명확히 드러나는 바, ’제3세계 feminism’ 같은 의미로 사용된 건 결코 아님을 추기함] 


[[그리고 장구한 탄압(/)독재기로 특징지어지는 한국사의 특수성 때문에 약간의 수정도 필요한데, 70년대에야 (재)출현한 일반 model 1세대 이전까지 압살적 탄압에서 비롯된 긴 공백기를 (기독교 중심의) 종교단체 산하 ((특히 Mission School들과 직/간접 연계된)) 여성단체들이 메꾸어 왔다는 점이 반영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들은 주로 서울 위주의 중앙집권적, 형식적 조직체계에 기반한 소수 중상층 여성 지도자 중심 단체들로 활동도 주로 사회봉사나 소극적 사회참여 정도에 그쳐 그 한계가 명확하며 결정적으로 대규모의 대중적 참여를 특징으로 하는 여성(대중)운동 1세대의 지위를 대체하기에는 난점이 많고 같은 종교단체 여성운동이라 하더라도 70년대 (말)~80년대에 본격화한, 구좌파 주도 사회운동의 대격변 속에서 그 영향 하에 자극-촉발되거나 질적으로 변성됨으로써 (범)1세대로 분류되어야만 하는 민중불교, 기독민주 단체 (연계) 여성운동 등과는 상호간에 질적 차이와 불연속을 보일 뿐 아니라,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세계사적 추세 속에서 앞으로 더욱 가속 활성화될 (여성운동) 국제교류협력을 위한 국제표준이란 측면에서도, ’0세대’ 정도로 정위하는 방안을 적극 고려해 볼 만하다 하겠다. 돌이켜 보면, 서양사에서도 본격적 여성대중운동으로서의 1세대가 등장하기 이전 계몽주의~자유주의 여권(신장)론 상간에 이에 해당하는 유사한 시기가 없었던 것도 아니건만 현재 통용되는 주류담론의 표준model에서 이들이 독자적 1세대로 명명을 인정받지 못 한 것은 약간 의아한데 아마도 그 ’대중성’ 규모에서의 결격으로 흡수통합된 것이 아닌가 싶다.


[(현 문단에의)  추기]

  본고 작성 약 1년여 후 Nancy Fraser에 의해 시도된 참신한 수정 분류 model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포함한 Nancy Fraser solution 전체에 대한 본격 검토는 다른 공간에 할당키로 하고 여기서는 본고, 특히 그 역사( / )분류 model과 밀련되어 가장 아쉬운 부분인 매우 독특한 Nancy Fraser식 Feminism 분류법에 대한 평가와 관련단상들만을 간단히 추기해 두기로 한다. 

그는  2세대 1막, 2막, 3막이라는 명명을 창안하고 있는데 그 세부 내용을 검토해보면 그가 말하는 2세대 feminism이란 사실상 좌파 feminism으로 1막은 좌파 feminism 1세대로서의 Marxist feminism을, 2막이 그에 대한 반동/반발로서 가부장제 주적론과 정체성 정치로 발화한 RF[ =Radical feminism( ≠Radicalist feminism; (3세대) 급진(민주)주의 feminnism)]를 주축으로한 주류 2세대 feminism과 좌파 feminism 2세대로서의 사회주의 feminism(내 온건우파)의 혼합을, 3막으로 3세대 (좌파) feminism을 의미(하고자 시도)하고 있는데 이는 좌/우파의 정치적 분류축(과의 교차)을 사상하고 시간축 하나로만 모든 feminism들을 분류하려는 오류로 복합/통합주의자로서의 자기위반일 뿐이며, 이러한 2세대 feminism에 대한 과도한 집착과 과장은 그의 출발점=출신지=고향과 혼동된 좌파 지향성의 표식/흔적이고, 진정한 2세대의 부정성에 대한 비판과 탈주를 가능하게 할 상대화를 가로막는 감옥으로서의 (분류) 도식일 뿐으로 사료됩니다.


다만, 이러한 착상의 그나마 긍정적 측면을 최대화한 재활용해 세분화라는 구도로 정당화하면 2.1세대는 그래도 계급 감각을 유지하고 있는 사회주의 feminism으로, 2.2세대는 이것을 완전히 망실해버린 채 극단적 2분법의 정체성 정치로 빠져버리게 된 RF로, 2.3세대는 이들의 해악에 대한 반성과 비판을 본질로 표방하며 등장한 3세대의 좌파, 즉 (postmodern 및) poststructuralist 급진(민주)주의 feminism으로 합리화해 볼 수 있겠으나, 밝힌 바와 같이 2.3세대는 2.2세대에 대한 반성과 비판이 그 과업이자 본질이고 무엇보다 기반하고 있는 근본적 paradigm이 매우 상이하기 때문에 양자는 같은 세대로 묶이기 어려워 보입니다. 아무리 적극적으로 긍정화해도 2.3세대로 정위 시도해 볼 수 있는 2세대 말 3세대 초(기) feminism은 사실은 2세대 feminism 전체에 대한 비판에 더 주력하는 2세대 post-feminism이었고 이러한 반립을 통해 이후 미세한 차이를 보이며 3세대 feminism으로 계승, 정립되어 나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아울러 본고에서 제시되었던 분석/분류 model에서의 LF[ =Liberal feminism]에 대한 결과적/표현적 과소평가가 반성될 수는 있는데, 이는 한국을 포함하는 많은 나라들에서 LF가 본격적 (대중)운동으로 출현하지 못하고 누락, 미발현, 압축-이월/월경하거나 좌파 1세대 대중 feminnism운동의 영향과 연동/혼합되어 출현했었기 때문에 먼저 (자가) 시도된 바대로 0세대 feminism으로 분류하거나 아니면 1세대 우파/중도 feminism 등으로 분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공히 모든 1세대 feminism( 분파들)의 근본 동력과 기반은 누가 뭐래도 어쨌든 전고에서 밝힌 바와 같이 경공업 중심의 근대 산업자본주의 초기 값싸고 복종적인 여성 노동력의 대규모 동원과 이를 위한 여성 (대상) 대중교육 도입이며 LF는 그 대중 기반 동력의 특수한 일파적 반영이었을 뿐이고 이 계급 분파들의 LF는 이를 (분)기점으로 같은 LF계보라도 그 내부에서 이전의 극히 제한되고 수동적인 소수 elite 여성들의 선각자적 0세대 LF(/)운동과 이후 시대 분위기에 편승해 본격 대중운동으로 발화한 1세대 우파/중도 LF로 양분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당시의 시대 분위기(, 특히 1세대 안에서의 좌/우파 관계, 작성자의 model에 기반하여 좀 더 정밀히 표현하면 1세대 좌파 feminism과 1세대 우파 feminism 간 관계)에 대한 비교적 상세한 서술은 다음의 자료를 참고할 수 있음.

¶ ☞ Orr, Judith (2015). Marxism and women’s liberation. Bookmarks Publications.

국역본: 『마르크스주의와 여성해방』 역: 이장원. 간: 책갈피.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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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 자본이다 - 생명자본주의 그 생각의 시작
이어령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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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izek도 빈번히 인용하고 있을 정도로 이미 세계적으로 유명한 (Italian) 자율주의자들의, 뿌리 깊은 미셸 푸코 `생명(관리)정치`론에 대한 심오한 확대계승인 생명자본-인지자본주의론에서 중요한 문제의식들을 모두 제거해 버린 때늦은 도용이자 피상적 왜곡!!! 아직도 구시대 한국의 번안가요 같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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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지자본주의 - 현대 세계의 거대한 전환과 사회적 삶의 재구성 아우또노미아총서 27
조정환 지음 / 갈무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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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서에 대한 총괄적 이론 검토는 다른 자리에서 본격적으로 다루기로 하고, 여기서는 다만 그간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비판의 대명사가 되어버린 '노동가치론' 논쟁과 관련하여 일단 시급하다 생각되는 짤막한 언급만을 메모형식으로 게재하기로 한다.

 

 
 

 

첫째, 인지자본주의론의 핵심 messege는, 플랫폼만 제공하면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꿀벌처럼 꿀을 모아오고, 스스로 집을 짓고, 엄청난 활동의 결과물을 스스로 축적해 주는 각종 소셜 네트워크 같은 Platform 자본주의 등 모든 새로운 착취와 전유 방식들의 등장과 변화를 통해 후기자본주의가 탈산업화를 거치면서 이제 공장내 육체노동만 착취하는 것이 아니라 공장 밖으로 전면적으로 확대되어 사회공장, (거대)도시공장화하면서 공장 내외의 모든 다양한 (가치(/)생산)요소들; 감정-정서, 언어, 인지, 인간관계=인맥(활동) 등등 생명과 생활의 모든 요소들에 노동을 시키며 영혼까지 착취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인지자본주의론은 노동과 착취개념이 모든 생명활동으로 전면화 되는 현상에 대한 포착과 이론화일 뿐이며, 자본주의의 착취 기반이 과거의 영혼없는 노동에서 이제 노동하는 영혼으로 확장되었다는 것이 그 핵심의 가장 형상적인 요약이다.

 

따라서 흔히 오해하는 바처럼 얄팍하게 지식인(계층)을 지식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려는 중간계급 ideology도 아니고, 이 과정에서 여전히 노동의 위계화와 계급 차별, 계급 서열화는 엄밀히 유지-관철될 뿐 아니라  (노동과 관계의) 식민화, 외주화를 통해 완전부불/무급노동화, 비고용노동화까지 격화됨으로써 이에 의한 노동과 계급 간 차별과 위계-서열화, 계급 적대는 더욱 심화된다. 이 새롭게 서열화된 노동들의 위계에서 절대 다수를 이루는 주류 인지노동은 고급지식노동이 아니라 신자유주의적 시장근본주의에서 악의적으로 차별 받고 있는 새로운 부불노동, 여성노동의 형태들인 하층의 각종 Service노동들, 특히 전화상담, 고객상담 등 감정노동들과 보육, 간병, 가사 등 돌봄노동들, 비정규직, 청년실업, 실버노동, Prosumer노동, Cyber노동, Crowd sourcing 등등 각종 그림자 노동들, 그리고 여기에 덧붙여 구조적으로 배제-도태된 가난한 예술노동 등의 모든 비시장주의적 노동들이다.

또한 가치생산에서의 노동(계급)의 독점적 절대적 기여(도)를 위협하거나 전통적인 노동(들)의 가치를 폄훼하려는 어떠한 시도와도 관련이 없으며, 오히려 전통적인 (그러나 이제는 체계/체제의 수혜자로 변질되어 가고 있는) 대기업/대공장 조직 산업노동자 뿐 아니라 비정규직과 부불노동, 여성노동 등 부당하게 착취당하는 모든 노동계급 구성원들을 가장 폭넓게 가장 전투적으로 옹호하는 새 시대의 강력한 이론틀이다.
그러므로 일반적으로 알려진 바와는 완전히 다르게 인지자본주의론을 노동가치론 논쟁으로 몰아가는 것은 문제의 핵심이 전혀 아니고 오히려 핵심에의 집중을 심각하게 왜곡/방해하는 MacGuffin에 불과하다[각주].

 

 

 

 

둘째, 인지자본주의론은 이러한 노동과 착취의 전면확장과 다양화 과정에서 그 일부의 현상으로 전통적 산업자본주의의 기반이었던 Fordism 체계 상의 표준화된 단순노동을 중심 대상으로 개발된 가치측정 방법론(/)모형이 다소의 난점을 겪(으면서 일반적 설득력이 약화되)는 경향이 있다는 현실을 부인하지 않고 수용하여 적극적 해결을 모색하려 시도하고 있을 뿐, 단순히 모든 인지자본주의론자가 가치측정 가능성 자체나 가치법칙을 전면 폐기하고 있는 것도 아니고, 더구나 노동가치론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따라서 '노동가치론 논쟁'이라기 보다 '가치측정( 방법)론 논쟁'( 또는 정말 아무리 양보해도 '가치"법칙" 논쟁')으로 호명하는 것이 훨씬 합리적이고 왜곡성이 적다고 할 수 있다.

 

이 논쟁에서 인지자본주의론 진영 내에 '가치실체론'보다 '가치형태론'을 선호하는 경향이 좀 더 다수인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흔히 오해하듯이 가치수량화는 가치실체론의 전제 하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니라 가치형태론에서도 얼마든지 가능하며, 따라서 인지자본주의론 진영도 제기된 가치측정 상의 난점 문제와 관련하여 가치측정 가능성을 유지 또는 유보하는 그룹과 폐기로까지 나아가는 정치적 독해론 그룹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

 

 

 

 

셋째, 그런데 여기서 지적되어야 할 점은 이 논쟁이 언제까지든 측정 가능성 자체를 두고 왈가왈부, 갑론을박 해봐야 결코 해결이 나지 않는 문제 구조로서, 제기된 난점들을 극복하고 새로운 가치 (생산) 및 노동, 착취 유형들에서도 엄밀히 관철, 작동되는 새로운 가치측정 방법론(/)모형을 개발해 낼 때에만 건설적으로 해소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국내 가치론 연구의 대가이신 이채언 선생님께서 최근 Communnale에서 발표하신 "Marx 가치이론에 있어서 닫힌 가치체계와 열린 가치체계" 같은 시도는 이런 문제 구조를 정확히 관통하는 매우 생산적의 논의 전개로서 모든 (폐기) 반대론자들에게 (방향과) 시사점을 제시해 줄 매우 의미있는 작업으로 보인다.

 

 

 

 

넷째, '엄밀하게 관철되는 가치법칙'의 자본주의적 역-이용(/)효과 문제.

엄밀한 가치법칙과 가치측정(모형)은 사실 잔인한 '무노동 무임금' 철칙과 함께 엄격한 성과급제의 구현을 위해 필요했던 산업자본주의의 ideology( 요소)이며 Ford주의 생산방식 하 분배체계의 근간이자 그 소산으로서 아무런 반성적, 철학적 성찰없이 교조적 관성에 의해 맹목적으로 추종, 옹호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에 대해 현철한 선결적 사유를 시도해 보아야 한다.

이는 궁극적으로 생산과 노동 능력이 없는 장애인 계층 등 모든 존재자를 고려하여 "능력에 따라 일하고 필요에 따라 사용한다"는 따뜻한 communism의 이상에도 위배될 뿐만 아니라, 이미 post-Fordism 하의 사회공장, 거대도시공장화된 항상적 복합 network 작업 방식에서도 다시 개인 노동 단위로 "엄밀히" 가치 (생산) 기여도를 환원적으로 복고 계산해 내는 것은 각고의 노력을 통해 설령 성공한다 하더라도 결국 2중 효과를 발생시키(지 않을 수 없)게 되며 오히려 정보재등 지적 재산과 그외 모든 새로운 식민화 및 상품화와 사적 소유권 주장을 위한 굳건한 토대 개발로서 가치 평가와 가격 계산 등 지금 자본가들이 가장 절실히 원하고 있는 생존도구이자, communism의 도래, 이행을 지연, 방해하고 그 징검다리로서 새로운 시대의 분배체계이자 이념인 기본소득(론)등에 대한 가장 강력한 이론적 근거 중 하나를 아래에서부터 허물어 자본주의를 구원, 연명시키는 결정적 수단으로 전유당할 수 있음을 먼저 유의, 각성할 필요가 있다.

 

 

 

 

소결1. 인지자본주의론의 의미에 대한 확장적 재평가의 필요성.

  인지자본주의론은 기본관점과 인지태도에서 끊임없이 조절-변화-적응하는 자본주의에 대하여 수구적인 구좌파가 보여주는 방어기제로서의 현실 부정과 억압/망각, (자기)합리화 같은 도피형이나 기만형 패턴, 또는 반대로 조절이론류의 패배주의적 체념과 수용 패턴 양자를 모두 극복하고 현실의 변화를 면밀히 적극적으로 연구하면서도 급진적 관점과 대안 전망을 결코 잃지 않는 (Gramsci적) 투혼을 훌륭히 보여주고 있을 뿐 아니라 전통적인 착취모델 이외에도, 유기적 구성의 고도화로 이윤율이 저하된 자본주의 중심부/선진국들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내부식민지에 대한 전면확장의 일과정으로서의 시원축적=비자본주의/탈산업자본주의적 환원의 주요 메커니즘으로 등장한  (노동과 관계의) (재)식민화, 여성(노동)화=무급부불노동화, 금융화를 고찰하는 과정에서, 매우 오래된 전통적 무급부불노동인 여성노동에 대하여도 막강한 (친)여성주의 경제학 이론틀을 제공하게 될 것이며 새로운 부불노동, 여성노동의 형태들인 비정규직, 청년실업, 실버노동, 감정노동, Prosumer노동, Cyber노동, Crowd sourcing 등등 그 모든 (신(신))식민주의적 외주노동들과 비고용=미상품(화) 노동들에 강력한 통찰과 영감을 주는 이론적 투쟁 수단이 될 것이다.

 

 

 

 

 

소결2. 보편성? 또는 추상에서 구체로의 상승

;  역사적 자본주의와 현실 자본주의

a. 자본주의의 역사적 변화 문제

b. 순수이념형 자본주의 vs 현실 자본주의로서의 macro사회구성체 문제.


잉여가치추출의 다양한 복합 경로들과 그 원천으로서의 부불(분) 노동.

상품(경제)회로를 통한 일부불 고용노동의 소위 "착취" model은 그 일 경로/형태에 불과할 뿐.

오히려 후기 자본주의는 유일한 활로로서 (직접)고용의 최소화 때문에 상품회로의 외연(/)주변부에 지배-관리-통제권 하에 있으면서도 (전혀) 지불되지 않는(,) 노동들에 대한 "수탈"과 액체화되고 추상/일반화된 현대(판) 토지로서의 금융-자산에 의한 임대-지대 "수탈" 기반 내부식민지 model들로의 환원과 다양한 (재)확대가 일어나고 있다.


따라서, 후기자본주의에서 자본(경제)의 정치-명령-폭력화는 자본주의의 국가화에 의한 국가(독점)자본주의화에 정확히 조응하는 일반 현상으로(서), 이 모든 기저에는 (공황, 과소소비, 이윤율저하 등등) 순수자본주의의 (각종) 위기와 그에 따라 (재)식민화(에 의한 폭력적 원시축적 model)로의 (탈산업적) 환원과 확산이라는 부정할 수 없는 근원이 존재한다.

 

 

 

 

 

소결3. 자기붕괴에 대한 구좌파의 불안-공포증에 대하여

; 소극/방어/수구적 협의의 Marxism과 확산/진취/혁신적 광의의 Marxism.

 

 

 

 

 

소결4. 인지자본주의론은 Foucault 정치경제학의 혁명적 발전으로서의 생명경제, 생명자본주의론의 다른 이름이자 그 일부.

  이상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인지자본주의론은 국내에선 극히 최근에야 출간된 Foucault의 선구적 신자유주의론( 비판)을 담고 있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과, (그 주제에 너무 몰입하는 바람에 본격 시도도 제대로 못하고 못내 아쉬워하며 끝나버린) 그 책의 원래 궁극적 목표였던 "삶/생(명)(관리)-정치론"의 합리적 핵심을 더욱 발전시켜 경제적, (총)체제적 차원까지 끌고 나가는 생명-경제, 생명-자본주의(bio-capitalism)론의 다른 얼굴이고 층위인 것이며, bio-capitalism 시대 금융자본주의 분석의 핵심적 혁신 중 하나랄 수 있는 Lazzarato의 부채(인간)론 같은 통찰들이 계속 잉태되고 터져 나오는 혁명 정신의 토양이다.

 

그런데 그간의 (한국 사회에서) 인지자본주의론의 수용과 논쟁 과정을 돌이켜 보건데 그 최대 장점으로서의 혁명적 잠재력과 설명력에도 불구하고 반대 흐름은 오히려 좌파 내부 그것도 급진 좌파의 한 축을 형성하고 있는 구좌파적 전통으로부터 제기되어 왔다는 사실은 irony를 넘어 비극이라 해야 할 것이다. 이것은 여러 구시대적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지만 그 하나로 계속 확인되는, 예상 외로 낮고 불철저한 구좌파의 인지자본주의론에 대한 이해도와 그에 의해 거대증폭된 '인지자본주의'라는 '이름'이 초래한 오해와 선입관념-태도들을 거론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이름'이 아무 (실질적) 연관도 없이, 위에서도 지적했듯 꽤 오랜 역사가 있는 '얄팍하게 지식인(계층)을 지식노동자라는 이름으로 포장하여 옹호하려는 (중간계급) ideology'에 대한 구좌파의 거부감과 저항을 불필요하게 소환해 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도 인지자본주의론은 물론 Foucault, Agamben등등으로 이어져 온 '생명(관리)정치'론/개념의 본질과 핵심 messege들도 더욱 잘 표현하고 있는 '생명자본주의'론이라는 호명이 여러가지로 더욱 적절해 보인다. 

 

 

 

 

 

 

 

 

[각주]――――――――――――――――――――――――――――――――

 

MacGuffin, McGuffin (맥거핀)

 : 소설이나 영화에서, (주로 결말부에서의 (예상치 못한) 극적 대반전을 위해) 어떤 사실이나 사건이 매우 중요한 것처럼 꾸며 독자나 관객의 주의를 전혀 엉뚱한 곳으로 돌리게 하는 속임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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