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시네마 한국시나리오걸작선 84
유미리 지음, 우병길 각색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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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시네마>


모토미의 가족이 20년 만에 모였다. 영화 촬영 기자재가 집 안으로 들어왔고, 감독은 이런저런 주문을 해대며 지시를 내리기 바쁘다.

모토미의 여동생은 성인 비디오에 두 번 주연으로 출연했고, 이따금 CM에 엑스트라로 출연하는 별볼일 없는 배우다. 어느 날, 얼빠진 감독이 그녀에게 가족에 대한 "다큐멘터리도 아니고 픽션도 아닌" 영화를 찍고 싶다고 말하자 그녀는 어엿한 배우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하여  가족을 설득해 한 자리에 모았다. 그리고 지금 얼빠진 가족 영화를 찍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는 터무니 없는 가격의 선물을 선사하며 자기 돈 쓰기 바쁜 위인이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를 견디지 못하겠다며 처자식 있는 후지키와 관계를 갖기 시작했다. 남동생은 성인이 되지 못한 채 빌빌거렸다.

주인공 모토미는 가족과 떨어진 뒤 화훼업체에 취직해 나름의 커리어를 밟아왔다. 그래서 이제 독립된 혼자만의 생활에 만족해 하는 중인데, 이런 되지도 않는 가족 영화 촬영에 동원되자 황당한 심정이었다. 감독은 께느른한 태도로 영화를 촬영했고, 실제 필름이 돌아가고 있는지 의문일 정도로 엉망인 분위기로 진행되었다.

영화 촬영에 집중할 수 없던 모토미는 남자친구 이케와 헤어진 뒤 후카미 세이치라는 늙은 도예공을 찾아간다. 그는 페티시즘에 빠져 폴라로이드 카메라로 여성의 둔부를 찍어대는 엉뚱한 늙은이였다. 하지만 그 늙은이 마저 다른 여자를 집안에 끌어들인 것을 알게된 날, 모토미는 문득 어머니의 말을 떠올린다. "이걸로 너도 혼자가 된 거야, 집을 빠져 나온 거라구".

3월의 끝이었고, 모토미는 썰물같은 바람에 떠밀려 갈 것만 같아 바람과 타협하기 위해 몸을 흔들었다.


<한여름>


여자는 집에서 나온지 사흘째에 집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녀와 함께 사는 남자는 3년째 두 아들이 기다리는 교외의 집으로 돌아가는 생활을 반복하고 있다. 그는 이혼을 원하지 않는다.

여자는 문득 상념에 빠진다. 중2때가 생각난다. 그녀는 그 해 여름부터 툭하면 학교를 빠지고, 급기야 등교거부에 돌입했다. 엄마는 아버지의 바람기를 참지 못하고 집을 나갔다. 나가면서 그녀에게 같이갈래, 아니면 여기 있을래라고 물었다. 여자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집에 남게 되었다. 부모가 내 마음을 헤아리고 이해해 주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그때 버린 것 같다.

아버지의 정부가 그녀에게 브래지어와 옷을 사주었던 기억이 난다. 어느 날인가 정부가 사라졌고, 그 뒤로 몇명의 여자가 집을 거쳐갔다.

현실로 돌아온 그녀가 스토커 생각을 한다. 사흘 전 스토커를 따라 그의 집에 갔다. 스토커는 그녀의 존재를 견디지 못했다. "미안하지만, 돌아가 주렵니까? 역시 나는 여자랑 같이 살 팔자가 아닌 모양입니다. 게다가, 당신이니까 하는 말인데, 여자 뒤를 밟고 싶고, 뒤를 밟고 있는 편이, 그러니까 음, 발기합니다" 라는 어처구니 없는 변명을 중얼거렸다. 

집에 다 온 여자는 문을 열고 잠시 불길한 예감에 사로잡힌다. 남자는 여자와 헤어지면 죽겠다고 했었다. 하지만 곧 여자는 웃는다. 그가 죽었을리가 없다. 웃음은 여자를 옴싹달싹 못하게 하려 한다. 웃음이 여자를 완전히 덮쳐 버리고, 내려 쪼이는 한낮의 햇살 아래로 삼거리가 여자 앞에 한없이 뻗어 있다.


<그림자 없는 풍경>


전학생 야스다 리나에게 마유미가 말을 건다. 마유미는 '가능하면 그녀가 자기한테만은 마음을 열어주면 좋을텐데'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리나는 이렇다할 대꾸를 하지 않는다. 마유미를 꺼려하는 태도는 아니었지만 굼뜨다는 느낌이다. 마유미는 이상하게 가학적인 심정이 되어 리나를 괴롭히기 시작한다. 친구들과 함께 리나의 팬티를 벗기려 했고, 수영장에 빠뜨려 흠뻑 젖게 만들었다.

담임 다나카는 리나의 모습을 보고 잠시 놀라는 듯 했지만, 실수로 빠졌다는 아이들의 말을 순순히 받아들인다.

방과 후 마유미는 다시 리나에게 치근덕 댄다. 벽쪽으로 몰아부치는 과정에서 리나의 머리에 큰 상처가 생긴다. 피가 흘러 겨드랑이로 흘러 내리자 깜짝 놀란 아이들은 리나를 양호실로 데려간다.

교장은 암묵적으로 폭력사건이 없도록 처리하라고 지시하고, 담임은 아이들에게 폭력이 없었다고 주지시킨다.

양호실에서 깨어난 리나는 센다이 역에서 엄마가 '여기서 꼼짝하지 말고 기다리고 있어' 라고 신신당부한 뒤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도서실 창문으로 보이는 운동장에는 아무도 없었다. 능목, 그네, 정글짐이 긴 그림자를 한없이 늘어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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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은 일그러진 가족, 기형적인 남녀관계, 부모로부터 버림받은 심정, 차별과 왕따 등을 소재로 다루고 있다. 다분히 그녀의 체험을 기반으로 쓰여진 것 같다. 

작가는 부모의 별거로 어린 시절 상처 입었고, 재일교포 2세로 일상적인 차별을 겪었다. 그 결과 잦은 자살미수로 여러 차례 정학 처분을 받다 고교에서 퇴학 당한다. 

잠시 연극 활동도 했으나 실어증을 앓는 통에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그녀가 찾은 돌파구가 문학이었다. 17세부터 희곡을 쓰기 시작하여 1993년 <물고기의 축제>로 일본 최연소 기시다 구니오 희곡상 수상했다. <풀하우스>와 <콩나물>로 113회, 114회 아쿠타가와 상 후보에 오른 뒤, 소설집 <풀하우스>로 제24회 이즈미 교카 상과 노마 문예 신인상을 수상했으며, 중편 3편이 실린 본 작품으로 97년 일본최고 권위의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한다. 

재기발랄한 문체와 내면 풍경을 그려내는 솜씨는 뛰어나지만, 의식의 흐름에 자주 의존하다 보니 구성과 줄거리가 주는 안정감은 다소 부족한 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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