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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트리히 슈바니츠 지음, 조경식 옮김 / 민음사 / 200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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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함부르크 대학의 저명한 사회학과 교수 H.하크만은 최근 골머리를 썩이는 문제가 하나 있다. 그것은 밥시라는 이름의 제자와 뒤탈없이 헤어지는 것이었는데, 마누라 가브리엘이 슬슬 관계를 눈치 채려는 시점이었기에 시급을 요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격정에 휩싸여 교수실에서 관계를 한 뒤 줄곧 주도권을 밥시에게 빼앗겨온 터라 깨끗하게 관계를 정리할 수 있을지 어떨지 자신이 없었다. 

그러다 하크만에게 묘안이 하나 떠오른다. 밥시는 졸업논문에 페미니즘과 관련된 내용을 담으려 했는데, 이 주제에 대한 집착이 강했기 때문에 만약 하크만이 논문 지도 과정에서 그 내용을 다루지 못하게 하면 관계를 정리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하크만은 밥시와 관계를 정리하는데 성공한다. 격정에 휩싸여 다시 한번 관계를 가졌다는 점과, 그 모든 광경을 창밖에서 작업하던 공사장 인부 네 명이 목격했다는 점만 빼면 말이다.(그들은 하크만에게 엄지 손가락을 치켜 올려 보여주었다)


얼마 뒤, 밥시는 하크만의 사회학과를 떠나 연극에 출연하게 된다. 그런데 연극의 소재가 하필이면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 강간을 당하는 내용이었고, 밥시는 연극이 끝난 뒤 발작적으로 '자신은 이와 똑같은 일을 당한 경험이 있다'고 소리친다. 밥시 스스로도 자신이 왜 그런 말을 지껄였는지 몰랐다. 하크만이 자신을 차버린 것 같다는 쓰라린 상처 때문인지, 아니면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이므로 배역을 계속 맡겨줄 것이라는 기대 때문인지는 확실치 않았지만 어쨌든 이 소동은 소문이 되어 대학의 여러 구성원 귀에 들어가게 된다.


그때부터 복마전이 시작된다. 먼저 여성담당관 바그너는 이 사건을 크게 문제 삼아 자신이 학내 여성인권을 옹호하는 수호자가 되겠다고 결심하고, 총장은 여성담당관 지지를 등에 업고 재선을 손에 쥐기 위해 사건을 이슈화한다. 베르니는 총장 눈에 들어 부총장 자리를 따내기 위해 징계위원회를 진실과 무관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외국인을 위한 독일어> 학과의 얼치기 교수는 여성과 외국인의 이해가 때로 일치한다는 점에 착안해 강간범 처단에 앞장선다. 그리고 이 모든 일을 부채질하는 것은 언론인데, 대학 졸업에 실패한 좀머라는 사이비 기자가 사건을 강간사건으로 규정하고 사실과 추측을 대충 뒤섞어 기사화한다.


사건이 점차 심각하게 흘러가자 밥시는 자신이 '강간당했다'고 말한 것은 단지 배역을 따내기 위해서였을 뿐이고, '실제로는 그런 일이 없었다' 고 고백하지만 각자 바라는 바가 있었던 대학 구성원들은 전혀 밥시의 말에 귀기울이지 않는다. 게다가 베르니가 공사장 인부들에게 위증을 사주하기까지 하자 꼼짝없이 하크만은 강간범이 되고 만다.


추저분한 강간범이 되기 직전, 베르니는 딸인 사라를 생각하며 용기를 내어 '자신과 밥시가 내연관계였음'을 양심고백하고 대학을 떠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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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디트리히 슈바니츠는 1940년생으로 1997년까지 20여년간 함부르크 대학에서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였고, 퇴직한 뒤부터는 작품활동에 전념하여 <교양>, <남자>, <영국문화사>, <샤일록 신드롬>, <서클> 등을 발표하였다. 작품의 무대가 함부르크 대학이기 때문에 작품이 발표된 뒤 언론과 독자들은 작품 속 인물들을 실제 인물들과 결부시켜 추리하는 일에 한동안 골몰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독일 사회학자 니클라스 루만(Niklas Luhmann)이 창안한 <체계 이론>의 문예학적 수용에 앞장섰는데, 역자인 조경식에 의하면 이 작품에서 나타나는 현실의 구성, 주변 세계에서 일어난 일회적 사건의 의미적인 재생산, 다시각주의와 상대주의, 코드 등의 개념이 <체계 이론>의 핵심적인 개념이라고 한다.


다양한 층위의 욕망과 모순들이 진실을 호도해가는 과정을 블랙코미디 형식으로 풀어가는 이 작품에서 인물들은 자신의 욕망에만 집중하고, 환경과 타자를 자신의 욕망에 유리하도록 바꾸는데만 골몰한다. 그나마 작품에서 가장 균형잡힌 인물은 치트카우라는 언론인이다. 그는 나치에 저항했기에, 좌파에 대해 쓴소리를 해댄다. 치트카우는 좌파 운동으로 인해 모든 사회적 영역이 도덕화하는 경향을 띠게 되었고, 그 결과 도덕이 인플레 상태가 되어 평가절하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맞았다고 주장한다.

치트카우는 나치에 저항했다. 그는 자신의 신념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인물이다. 그가 좌파적 견해에 반대하는 논지는 당당하다. 그 논지에 동의하는지, 동의하지 않는지는 또 다른 문제다. 치트카우와 같은 사람들이 진정한 보수다.

반면, 일제강점기를 지나고 한반도가 분단되면서 남한 사회에는 보수를 자처하는 사이비들이 들끓을 뿐, 진정한 보수를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일제에 부역했거나, 부역한 자의 자손이거나, 부역한 자의 자손에 기생하여 친일을 찬양하는 자들이다. 그들이 하는 일이란 건국절을 만들어 친일행위를 세탁하려 하거나, 천황폐하께 충성을 맹세하는 혈서를 써서 바친 자를 신격화하는 일 따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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