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
로맹 가리 지음, 이선희 옮김 / 마음산책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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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화자 '나'는 1936년에는 국가대표 럭비선수였고, 2차 세계대전 당시에는 드골과 함께 레지스탕스로도 활동했다. 전쟁이 끝난 뒤에는 출판사를 설립해 많은 이윤을 거두었지만, 최근에는 유가가 폭등하고 경기가 침체되는 바람에 회사 경영에 곤란을 겪는 중이다. 

게다가 59세의 나이로, 스무 살 이상 나이 차이가 나는 로라와의 관계를 계속하는 것이 어렵다는 것을 자각하는 중이다. 지금은 그럭저럭 로라와 관계 맺을 정도의 상태는 되지만, 성기능이 퇴화되고 있다는 것을 매순간 실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로라와 관계맺는 행위가 '자연스러운 잠자리'가 아니라 '자신의 상태를 확인하고 안도하는 행위'로 변질된지 오래이지만, 로라는 이러한 '나'의 불안함을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호텔에서 로라와 자던 '나'는 부스럭 거리는 소리에 잠이 깬다. 도둑이 들었던 것이다. 그는 나의 목덜미에 칼을 들이밀고 고가의 시계를 훔쳐가려 한다. 그때 나는 도둑의 야성적인 외모에 매료된다. 그리고 그에게 도망갈 길을 일러주는데, 그때 도둑이 무심결에 '시 세뇨르' 라고 답변한다. '나'는 어쩐지 그 도둑을 찾아내어 잘 길들이면 '나'의 젊음을 그가 대신해 줄 수 있을 것이라는 환상에 빠져든다. 하지만 그것은 실현되지 못할 환상이었다. 결국 '나'는 과거 레지스탕스 활동 중에 알게 된 포주 릴리 마들렌을 찾아가서 자신을 죽여달라는 부탁을 한다. 릴리 마들렌은 '나'를 죽이는 대신 로라에게 '나'의 성기능이 예전과 같지 않다는 사실을 담담하게 전한다.

'나'는 아들에게 남기는 노트를 금고에 넣고, 도둑을 운전기사 삼아 로라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한다. 그 여행이 무엇으로부터 떠나는 여행인지, 무엇을 발견하게 될 여행인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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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문학의 오랜 주제였다. 그런데 '죽음'보다 더 비극적인 것이 '늙음'이다. '늙음'은 '죽음'의 계속적인 경험이다. '늙음'을 최초로 경험하는 순간부터, 인간은 '죽음'을 의식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죽음에 대한 추체험이다. 

불가역적인 노화현상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 그것은 질병이 아니므로 치료될 수도 없다.노화를 다소 완화할 수 있는 기구와 처치들에 감사해 하고, 또 일부 영구적인 기능 상실은 받아들이는 수밖에 없다. 그러다 보면 자신의 시대가 저물었다는 것을 느낀다.   

 

"이 경계를 지나면 당신의 승차권은 유효하지 않다"는 프랑스 지하철역에 붙어 있는 경고 문구이다. 로맹 가리는 이 소설을 쓰기 직전에 에밀 아자르라는 필명으로 <그로칼랭>을 발표했고, 이 소설 발표 직후에 역시 에밀 아자르 이름으로 <자기 앞의 생>을 발표하여 콩쿠르상을 수상한다. 당시 평론가들은 로맹 가리를 박하게 평가했고, 심지어 그가 신예 소설가 에밀 아자르의 문체를 모방했다고까지 비난했다. 로맹 가리는 자신이 에밀 아자르라는 것을 밝히지 않았다.

진 세버그와의 관계가 파국으로 치닫고 결국 그녀가 79년에 자살하자 로맹 가리도 이듬해에 유서를 남기고 권총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

더 이상 유효하지 않은 승차권을 손에 쥐고 씁쓸해 하는 날이 우리 모두에게 올 것이다. 생은 한 번밖에 주어지지 않는다. 게다가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에서와 같이 우리가 선택한 삶은 사후적으로밖에 알 수 없다. 미네르바의 올빼미는 언제나 황혼녘에 날아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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