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에
김형경 지음 / 푸른숲 / 2004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소설은 애인과 약혼자가 있는 연희와 세중이 한 눈에 서로를 '알아' 본 뒤 크리스마스 이브 날 차를 타고 강원도로 가면서 시작된다. 돌아오는 길에 폭설이 쏟아지자 이들은 휴게실에 차를 세우고 산책을 나섰다가 외따로 떨어진 농가에 들어서게 된다. 잠시 다리쉼을 하고 허기도 달랜 이들이 주위를 둘러볼 여유가 생겼을 때, 시체를 한 구 발견한다. 시체는 그 뒤로도 두 구가 더 발견 된다. 남자 둘과 여자 하나 모두 상처를 입고 사망해 있었다.

연희와 세중은 그곳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폭설 때문에 길이 막혀 어쩔 수 없이 일주일을 그곳에서 머물게 된다. 연희와 세중은 고립과 죽음이 주는 공포에 서로에 대한 성적 집착으로 대항하며 왜 세 사람이 죽어야 했는가를 파헤친다.


죽은 남자가 남겨 놓은 일기에 따르면, 그는 탈북자였다. 남한에서 정부의 지원을 받아 '먹고 사는' 문제는 해결 되지만, 남자는 도시에서 경쟁하며 사는 삶에 적응하지 못한다. 그래서 강원도 산골로 숨어들어 은둔자적 삶을 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소망은 '세계여행' 이었다.

얼마 뒤 한 사내가 남자의 옆집에 둥지를 튼다. 그는 보물지도가 있었다. 일확천금과 '스위트홈'을 꿈꾸는 그는 산에서 살려고 온 것이 아니었다. 그의 시선은 도시를 향하고 있었다.

어느 날, 여자가 산으로 온다. 그 여자는 남자가 사는 집에 예전에 살았는데, 도시로 나가서 결혼을 했었다. 하지만 남편은 정식 아내가 있었고, 태어난 아이는 빼앗긴다. 여자는 '살기 위해' 옛집으로 돌아온다.

그때부터 남자, 사내, 여자의 공동생활이 시작된다. 여자는 둘 모두 넉넉하게 품어준다. 완벽하진 못해도 균형을 유지하던 이들의 삶은, 여자가 임신하면서 깨지고 만다. 사내는 아이가 '누구의 아이'인지 중요했다. '스위트홈'을 위해서는 핏줄로 연결되고 상속이 명확한 가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다툼이 일어나 서로를 해하게 된다.


세 구의 시체를 묻어준 뒤 연희와 세중은 일상으로 돌아간다. 세중이 연락을 끊고 훌쩍 떠난 뒤, 연희의 회사 동료가 세중이 자신에게 집적거렸던 이야기를 해준다. 12년만에 세중과 다시 만났을 때, 연희는 한때나마 자신이 세중과 탐닉했던 성적인 관계 역시 환상에 불과했음을 깨닫는다.

  

대학교 때부터 매년 꼬박꼬박 사는 책이 <이상문학상 수상 작품집>인데 1996년도 수상 작품집에서 김형경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담배 피우는 여자>였는데, 생활도서관 친구와 한참 동안 그 소설에 대해서 이야기한 기억이 난다. 지금은 그 친구의 이름도,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다가 다시 읽은 게 <외출> 이었고, 이 작가는 스토리 텔링에 굉장히 능한 작가구나 생각했다.

한동안 잊고 지내다가 다시 읽은 게 <좋은 이별> 이었다. 힘든 일은 당한 선배가 <천개의 공감>을 읽고 힘이 되었다길래, 같은 작가의 다른 책을 읽은 것인데 사실 그다지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다. 아픔을 분석할 수 있을 때에는 이미 그 분석이 필요 없는 상황이기가 쉽고, 한참 아파할 때에는 그 어떤 분석도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최근에는 2014년 즈음 라디오 프로그램 인문학 산책에서 청소년 문제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을 들었는데 '정신분석' 이라는 틀에 빠져 다소 순진한 분석을 하는 것을 들었다.

김형경에 대해 꾸준히 읽어 왔던 것은 아니었지만 <성에>를 읽고 보니 작가가 심각한 성적 폭력, 또는 배신에 대한 트라우마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사실 나는 '치유적 글쓰기'에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은 아픔에 대해 회피하도록 설계되어 있고, 충분한 회피 기간이 지난 뒤에야 의식의 영역에서 이를 처리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고 믿는다. 글쓰기를 통한 '자기로의 침잠'이 무의식의 영역에서 치료되고 있는 환부를 강제로 드러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치료과정에 반드시 의식적인 자아가 개입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강박의 일종은 아닐런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