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예 - 오상원 중단편선 문학과지성사 한국문학전집 37
오상원 지음, 한수영 엮음 / 문학과지성사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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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 평안북도 신천에서 태어난 오상원은 전쟁이 발발하자 남하하였고, 서울 용산고등학교와 서울대 불문학과를 졸업하였다. 1953년 희곡 <녹스는 파편>으로 문단에 데뷔하였고, 1955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유예>가 당선되어 정식 등단하였다. 1958년 <모반>으로 제3회 동인문학상을 수상하였고, 조선일보와 동아일보 기자로 재직하기도 한다. 1970년대에는 동아일보 논설위원을 맡아 언론계 활동에 종사하다 1985년 사망하였다.


소설집에 수록된 작품은 중편 <황선지대>와 단편 <유예>, <균열>, <죽어살이>, <모반>, <부동기>, <보수>, <현실>, <훈장>, <실기> 등 총 10편이다.


<황선지대>에서는 노란선을 중심으로 두 개의 삶이 대비된다. 노란선 너머는 미군이 지배하는 곳인데 풍요로운 삶이 펼쳐진다. 반면 노란선 바깥의 삶은 처참하고 황폐하다. 노란선 바깥에 존재하는 정윤과 영미는 전쟁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고 나라의 미래를 걱정하며 정치 활동에 참여하는 등 꿈이 있었지만, 전쟁을 겪으면서 날개가 꺾여버리고 말았다. 영미는 군인들에게 강간당한 뒤 몸을 팔아 생계를 이어가고 있고 정윤은 그런 영미와 떠나고 싶지만 현재로서는 도리가 없다. 설혹 미군 부대를 터는데 성공하더라도 그녀가 따라나설지 의문이다. 너무나 망가져버린 각자의 모습이 둘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유예>는 적군의 포로가 된 후 사살당하기 직전까지의 짧은 기록이다. 사살 당하기 직전 소회를 묻는 인민군에게 국군 포로가 말한다. "생명체와 도구와는 다른 것이오. 내 이상 더 무엇을 말하고 싶겠소? 나는 포로가 되었을 때 비로소 내가 확실히 호흡하고 있는 인간이라는 것을 알았을 뿐이오. 나는 기쁘오. 내가 한 개 기계나, 도구가 아니었다는 것, 하나의 생명체인 인간으로서 살아 있었다는 것, 그리고 인간으로서 죽어간다는 것, 이것이 한 없이 기쁠 뿐입니다."


<균열>은 정치적 혼란기에 정적을 암살하는 내용이다. 어쩔 수 없이 총을 들면서도 끝내 인간의 목숨을 앗아가는 것에 정당성을 부여하지 못하고 갈등하는 암살자의 모습을 통해 인간이 도구적 존재로 기능하는 상황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암살당하고 마는 젊은이의 이야기를 다룬 <죽어살이>, 암살 직후 그 길을 지나갔다는 이유만으로 살인자가 되고 마는 불쌍한 사내의 이야기인 <균열>에도 나타난다.


<부동기>는 전후 가족의 해체와 비참함을 자연주의적 수법으로 그린 소설이다. 과거 직원이 꾸려가는 술집을 기웃거리며 잔술 얻어먹는 데 골몰하는 아버지, 몸을 파는 딸,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불만을 품고 정치적으로 과격해져가는 큰 아들과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는 막내의 이야기이다.


<보수> 미군 부대를 털다 걸리면 동료를 도망치게 하여 미끼로 삼고 자신은 살아남았던 얌생이꾼이 '자기 사는 궁리' 만은 하는 사내와 일을 도모하다 목숨을 잃는 내용이다. <현실>은 전쟁이 얼마나 비정할 수밖에 없는지, 전쟁에 처한 인간은 얼마나 잔인해질 수 있는지를 그리고 있다. 하사는 마을 주민에게 길을 묻고나면 어김없이 쏘아 죽인다. 그가 돌아가 입을 열면 내 목숨이 위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 <훈장>은 그러한 잔인함과 비정함을 거친 인간이 받은 훈장이 전후에는 쓰레기나 매한가지인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실기>는 어린아이들의 눈으로 전후를 보여주는데 아이들은 어른들의 질문에 번번이 '길을 잃었다'고 대답한다. 아이들은 '어른이 길을 잃으면 찾을 수가 없다' 고 말하는 사내를 만난 뒤다. 이 아이들에게 길을 가르쳐 줄 어른은 누구인가?


전쟁에 나서는 군인은 '자신이 왜 전쟁에 나서야하는지', '이 전쟁의 도덕적 명분은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자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외부의 의지에 의해 편이 갈려 서로에게 총질을 하게 되어 있다. 남쪽에 있었기 때문에 북쪽 군인을 죽여야 한다든가, 내 나라가 어디이기 때문에 타국 사람의 피를 봐야 한다든가 하는 이유는 사실 개인의 의지와는 전혀 무관하지 않은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쟁에 끌려가 어딘가에 배속되고, 일단 배속된 뒤엔 '주체적인 판단'을 할 수 없다. '주체적인 판단'은 곧 항명이고, 항명은 즉결 사살이다. '인간은 어떠한 경우에도 타인의 목숨을 빼앗아서는 안된다'는 윤리도 곧장 폐기된다. 많이 죽일수록 영웅이되고, 훈장을 받고, 애국자가 된다. 거대한 부조리를 겪은 인간은 어떤 형태로든 결핍을 갖게 되고, 망가지게 된다. 오상원의 소설을 읽고 나면 하나의 이미지가 남는다. 비가 내리는 어두컴컴한 거리의 이미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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