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토끼 차상문 - 한 토끼 영장류의 기묘한 이야기
김남일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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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집도 안 간 여선생, 심지어 아이들이 화장실도 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던 바로 그 여선생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토끼라는 풍문이 돌았다. 그녀의 이름은 유진숙이었다. 유진숙이 양잿물을 퍼마시고 자살을 기도할 그 즈음에 그녀의 오빠 유진명은 똥물을 두어 양동이나 받아 마셔야 했다.

사정은 이렇다. 유진명은 반정부 인사로 분류되어 '업계에서 기술이 좋기로 소문난' 차씨 성 가진 자에게 지독한 고문을 당하였고, 매를 맞아 죽게 생겼기에 어혈을 풀기 위하여 똥물을 받아 먹은 것이다. 한편, 차씨 성 가진 자는 유진명의 동생 유진숙을 겁간하여 임신시켰는데, 유진숙은 이것이 치욕스러워 죽으려고 양잿물을 마셨던 것이다. 하지만 어찌된 일인지 유진숙은 살아 남았고 열 달 뒤에 아이를 낳았는데, 낳고 보니 토끼였다. 유진숙은 침묵으로 차씨 성 가진 자에게 반항하다 정신에 문제가 생겨 오락가락하는 사람이 되었지만 토끼는 차상문이라는 이름을 얻어 착실히 삶을 살아가게 된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토끼가 또래 아이들보다 영특하였고, 미국에서 저개발 국가의 인재들을 모아 미국에서 교육을 시키는 B.P.라는 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아 유학을 떠나게 된다. 

미국은 한창 베트남전에 발을 잘 못 들여놔 반전 열풍이 불 때였다. 학생들이 반전 구호를 외치고, LSD에 취한 히피들이 짐 모리슨을 들었으며, 프리 섹스 유행이 살풋 불어닥치던 시기였다. 차상문은 본디 여성 알레르기가 있어서 이성에 대한 관심이 별로 없었으나 룸메이트 밥의 소개로 신씨 성의 동종 토끼를 만나 첫사랑에 설레게 되고, 자위의 몽롱한 맛도 알게 된다. 하지만 이성 토끼가 하필이면 재수 없게 북조선 토끼라는 사실 때문에 첫사랑은 열매를 맺지 못하고 그저 수학 공부를 열심히 하다가 덜컥 교수까지 되고 만다.

한국으로 돌아와 서울대 교수 자리를 꿰어 찬 차상문은 80년대 한국의 민주화 열풍 한 가운데 서게 된다. 나름의 신념으로 시국을 돌파해 보려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시대의 분위기에 떠밀려 강단을 떠나게 된다.

강단을 떠난 차상문에게 충격이 된 말이 있었으니 '쿵쿵거리지 마라, 땅이 놀란다' 였다. 차상문은 이 말에 감명 받아 인간 위주로 사고하며 만유를 파괴하는 인본주의를 거부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 저기 출몰하며 가장 효과적이라 생각되는 선전 선동을 벌이는 차상문의 행동은 별다른 반향을 얻지 못하고 끝내 테러리즘 흉내를 끝으로 스스로 벽 속에 갇히고 만다.


<천재토끼 차상문>은 패배주의자의 씁쓸한 중언부언에 불과한 소설이다. 소설은 <청년을 위한 한국현대사>와 같은 진보적 현대사 책에서 중요하게 다루어질 법한 사건들 전반을 걸터듬는데, 인간과는 다른 '토끼' 라는 종을 탄생시켜 새로운 시각을 도모하나 사실 새로운 시각이란 거의 없다. 토끼의 시각과 견해는 오히려 '맛이 가기 시작하던 시기'의 김지하가 '밥' 타령을 하던 모습, 감옥에 갔다온 박노해가 '사람만이 희망' 이라며 두루뭉술 해지던 시기를 떠올리게 한다.

작가 김남일은 현대사의 질곡과 모순에 눈 돌리지 않으려는 근성을 보여주지만, 그 질곡을 헤쳐나가려던 수많은 패배자들에 대한 조롱기 섞인 희화화에도 별다른 주저함이 없다. 하지만 정작 그 자신도 대안이 없기는 마찬가지어서, 소설은 후반부로 갈수록 토끼가 도대체 뭘 주장 하고자 하는지 알 수가 없고 비맞은 중이 중얼거리듯 어수선하다.


지금도 인도에서는 180만여 명의 신도를 지닌 자이나교가 가장 아름다운 대안일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들은 철저한 불살생과 무소유, 그리고 엄격한 고행을 추구한다... 아 얼마나 아름다운 존재들인가!


이 대목에서 분명 김남일은 기존의 변혁 운동과 저항에 대한 반성과 대안으로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극단적 근본주의' 에 잠시 현혹되는 듯 하다. 하지만 바로 다음 문장을 보자.


하지만 바로 그다음 순간, 차상문은 그들의 시간이 제 어머니의 그것처럼 움직이지 않거나 혹은 영원 속에 갇혀 있다는 사실 또한 깨달았다. 아무리 좋은 사상이라도 중력이나 자기장을 견디지 못 한다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쨌든 인간만을 중심에 놓는 오만한 인도주의에 대한 경종을 울릴 필요는 있었다.


근본주의는 아닌 것 같고, 토끼를 내세웠으니 인도주의는 거부해야 할 것 같고, 그렇다고 거부 이후의 그림을 그릴 수도 없으니 얼결에 '어쨌든' 으로 얼버무리고 마는 것인가.


소설이 매우 진보적인 듯 하면서도 패배주의자의 중언부언으로 읽힐 소지가 바로 여기 있다고 생각한다. 진지한 성찰과 반성을 통한 교훈 없이 '해봤지만 안되었으니 일단 틀린 거였다' 식으로 대충 덮어버리는 태도는 위험하다. 긍지 높았던 패배자들이 조롱받고 희화화 될 때, 그들이 저항한 질곡과 억압의 역사 역시 '견딜만 했던, 나름대로 유머가 있던 시대'가 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소설의 맥을 끊는 만연체와, 그 만연체 곳곳에서 나타나는 비문이 거슬리는 대목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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