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시간 책세상문고 세계문학 32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 지음, 박채연 옮김 / 책세상 / 2005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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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인공 페드로는 암의 원인이 유전적 요인 때문인지, 아니면 환경적 요인 때문인지를 밝히기 위해 미국 일리노이주에서 쥐를 수입해다가 연구하고 있다. 하지만 왠일인지 쥐들이 연구실에서는 번식을 잘 하지 못해 매번 죽어나갔으므로 골머리를 썩였다.

조수 아마도르가 페드로에게 무에카스라는 사람이 연구실의 쥐를 훔쳐다가 번식시켰다는 말을 전하자 페드로는 곧 무에카스의 집을 방문해 쥐를 얻고자 한다.

무에카스의 집은 빈민굴에 있었는데 두 딸과 아내, 그리고 갖가지 동물들이 쓰레기장을 방불케하는 방 안에서 함께 살고 있었다. 무에카스는 쥐들을 번식시키기 위해서는 열을 가해주어야 하기 때문에 쥐들을 딸들의 목에 메달아 발정기를 유도한다고 했다. 두 딸은 매우 예뻤는데 큰 딸은 쥐에게 가슴 윗부분을 물리기까지 했건만 개의치 않는 듯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페드로에게 무에카스가 찾아와 자신의 딸이 엄청난 양의 피를 흘리고 있으니 구해달라고 말한다. 페드로가 무에카스의 집을 가보니 큰 딸이 임신한 상태에서 무언가 잘 못 되었는지 피를 쏟으며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녀는 주술사의 수상쩍은 처방으로 어떻게 해볼 수도 없는 상태였다. 페드로는 자신이 의사가 아님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소파 수술을 시도한다. 하지만 큰 딸은 페드로가 손을 쓰기 시작한 그 순간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페드로는 자신이 큰 딸을 죽인건지도 모른다는 혼란에 빠져 친구 마티아스와 함께 창녀굴에 몸을 의탁했다가 경찰에 잡혀간다.

페드로가 경찰에 잡혀가자 마티아스는 집안 연줄을 이용해 페드로를 도우려 하고 페드로가 하숙집 모녀의 간계로 손을 댄 도리타는 매일같이 페드로를 면회하러 간다. 하지만 경찰은 교묘한 유도심문을 통해 페드로를 범인으로 확정지으려 한다.

이 때 무에카스의 아내 리카르다가 딸이 페드로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는 진술을 하고 덕분에 페드로는 무사히 풀려난다. 하지만 페드로가 사랑하게 된 하숙집 딸 도리타가 질투심에 눈이 먼 사내에 의해 살해당하고 - 그는 페드로가 무에카스의 딸을 죽였다고 오인한다 - 페드로는 연구실의 품위를 손상시켰다는 이유로 해고되고 시골 의사가 되기 위해 떠난다.


1924년에 스페인의 보호령 모로코에서 태어난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1946년에 살라망카 의대를 최우등으로 졸업, 박사 과정 수료 후에는 정신과 의사로 근무하다가 1951년 산세바스티안 정신병원의 원장을 지낸다. 남부러울 것이 없는 경력을 쌓은 그였지만 스페인 독재 체제에 저항하는 사회노동당 활동을 한 이유로 세 차례 투옥된다.


<침묵의 시간>은 1986년에 비센떼 아란다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는데 국내에서는 개봉도 되지 않았고 찾아 보기도 힘들다. 종종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즈>에 견주어 평가 받기도 하는 이 소설은 줄거리의 흐름에 익숙한 독자들에게는 상당히 난해한 편이다. 의식의 흐름에 맞추어 줄거리가 무시되기도 하고 대화가 엇나가는 느낌이 들어 다시 읽어보면 상대편의 대화는 생략되고 한 사람의 대화만 적혀 있는 경우도 있다. 여러사람의 의식이 순서대로 적혀 있어 끝까지 읽고 나서 누구의 생각인지 간추려봐야 하는 경우도 있다. 이러한 난해함 때문에 매일 밤 조금씩 읽다가 눈을 감고 내용을 곱씹어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잠드는 경우가 많았다.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1964년 1월 24일 젊은 나이에 불의의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에 그가 남긴 작품이 많지 않다. <침묵의 시간>, 속편 격인 미완의 유작 <파괴의 시간>, 단편 모음과 정신분석 이론서, 처녀시 모음집 각 한 권씩이 전부이다.

소설 속에서 '사회를 분석하기만 할 뿐 변혁하는데는 무능력한' 철학자로 등장하는,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의 스승이며 철학자이자 미학자인 오르테가 이 가세트는 '독자들의 실제 삶이 소설보다 더 놀랍고 충격적이며 더 빠르게 변하고 있어 언어를 매개로 현실을 재현하고 상상하는 작가의 위상이 흔들리게 되었고 이것이 곧 소설의 죽음 이라는 위기 의식을 가져왔다'고 말하는데, 루이스 마르틴 산토스는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의 한계를 극복하고 '기술(description)'이 '줄거리'를 극복하는 새로운 소설 형식의 실험에 있어 대단히 큰 업적을 남긴 작가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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