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리의 트렁크
백가흠 지음 / 창비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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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가흠 소설을 읽는 것은 매우 고통스럽다. 등장인물들은 정신이나 육체가 기형적이고, 일어나는 사건들은 엽기적이지만 우리 주변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사건들이다. 그래서 소설을 읽는 내내 불편함을 느끼게 된다. 

기형적이고 엽기적인 것들을 대할 때 보통 독자는 '관망자'의 입장으로 자신을 한정 짓는 태도를 취하게 마련이다. 나는 저렇게 기형적이지 않고, 저런 엽기적 사건의 중심에 있지 않다, 따라서 나는 정상적이고 안전하다. 라는 식의 태도 말이다. 그러나 백가흠은 독자를 끊임 없이 소설 속으로 끌어 당긴다.

먼저 육체적 '기형'을 가진 인물들을 보자. <루시의 연인>의 주인공은 군복무 중 태권도 입단 시험 합격률을 높이기 위해 고참들이 강제로 다리 찢기를 하는 과정에서 신경이 찢겨 장애를 갖게 된다. 대한민국 남자는 누구나 동일한 사건을 겪을 개연성이 있는 것이다. <사랑의 후방낙법>의 뚱뚱한 민숙과 날씬한 유진 사이에서 독자는 민숙에게 심정적 동질감을 갖게될 개연성이 크다.

정신적 '기형'의 측면에서도 크게 다르지 않다. 갓 스물에 네번째 아이를 임신한 철부지가 화장실에서 아이를 낳았는데 기형인 것이 확인되자 모텔에 버리고 가는가 하면(<웰컴, 베이비!>), 아이를 개와 방치하여 아사시키고도 죄의식을 느끼지 못하는 어린 엄마와 아이를 납치하도록 사주하여 아이 엄마를 죽이는 사건에 연루된 바람난 미씨를 묘하게 병치시킨다(<웰컴, 마미!>). 엽기적인 사건이긴 하지만 이 사건들이 금시초문이 아니라는 것에 독자는 매우 불편하다. 신문에서 이런 사건들을 보았다면 인상을 찌푸리며 천인공노할 것들이라고 욕한 후 잊어버리면 그만이지만, 소설을 통해 접한 이상 우리는 외면하고 싶은 그 엽기적 사건에 한동안 함께 해야 한다. 그것은 무척 불편하다.

<조대리의 트렁크> 역시 사정은 마찬가지다. 사업에 실패한 사내가 아내를 살해하고 어머니를 트렁크에 유기한다. 그 사내는 주인공인 조대리에게 자신이 동창이라고 말한다. 조대리 역시 그런가보다 했었지만 사실은 알지 못하는 사내였다. 백가흠은 왜 그 사내가 자신이 조대리의 동창이라는 거짓말을 하게 했을까? 그런 엽기적인 사건을 저지른 기형적 인물이 독자인 당신과 무관한 인물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집나온 아이들이 노숙자나 다름 없는 할아버지의 마지막 동전 한닢까지 흡혈귀처럼 빨아먹는 <매일 기다려>나, 몸을 주고 에어컨을 파는 도둑과 관음증적 환상에 세월을 보내는 <장밋빛 발톱>, 데이트 폭력의 극단을 보여주는 <굿바이 투 로맨스> 등 백가흠 소설은 어느 것 하나 쉽게 읽히는 소설이 없다. 그 소설들이 불편한 이유는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작가의 시선이 우리 사회의 외면하고 싶은 추악한 현실을 직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현실 속에 독자인 내가 '관망자'가 아닌 '참여자'로서 존재할 가능성이 상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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