풋사랑
김영현 / 실천문학사 / 1993년 9월
평점 :
절판


북쪽에서 기독교를 믿는 지주 집안에서 나고 자란 최덕근은 젊었을 적 남하하여 서북청년단에 들어갔다. 지리산은 물론이고 제주도까지 '빨갱이를 때려 잡기' 위해 뛰어다니며 총질을 해댔다. 포목점을 벌여 한때는 제법 돈을 손에 쥐기도 했고, 재혼을 하여 가정도 새로 이루었다. 아내도 재취자리였는데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영훈을 데리고 온다. 얼마 후 영민이 태어났고 네 식구는 그런대로 무던하게 지냈다. 이제 육십줄에 접어든 최덕근은 '주님 섬기기'를 게을리 하지 않으며 막내 영민이 출세하기를 바라며 살았다.

그러던 어느 날 처남 문상사가 덕근의 집을 찾는다. 문상사는 월남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긴 후 세상에는 절대적인 진리나 가치는 없으며 결과만이 중요하다고 믿게 된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아들 경식이 대입에서 미끄러지자 서울의 매형 집에서 재수를 시키면 돈도 아끼고 결과도 좀 더 좋지 않겠는가 하는 맘에 부탁을 하러 온 것이다. 최덕근은 내심 거절하고 싶었지만 체면상 거절하지 못한다.

 

시절은 5공화국 말기였고 영민은 소위 운동권 대학생이었다. 방에는 레닌과 전봉준의 초상화가 걸려 있었고 써클활동을 하며 사회과학책을 학습했으며 데모에 참가하고 있었다. 반면 서른 중반의 영훈은 한때 러시아 시인 예세닌을 암송하며 삶을 예찬했으나 이제는 니체에 빠져 얼핏 보면 께느른한 삶을 살고 있었다. 경식은 입시 학원에서 고향 친구 태수를 만나고 서울 생활에 점차 적응하게 된다.

 

영민은 현장으로 들어간 재희를 향한 애틋한 마음 때문에 자신이 나약한 감상주의자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을 다잡지 못하다가 시위의 지도부 역할을 맡게 된다. 영민은 시위 도중 끌려가 구속되지만 6.29 이후 유화 조치 덕에 풀려난다. 영민은 울산으로 내려가 단체일을 하고 있는 재희에게 애틋한 마음을 털어 놓고 재희 역시 영민을 향한 그리움을 인정하며 둘은 하룻밤을 함께 보낸다.

한편 경식은 재수학원 근처에서 은숙을 만난다. 은숙은 강원도 간성에서 함께 초등학교를 다녔던 동창으로 대대장의 딸이었다. 은숙이 대학생인것 같아 보여 경식은 자기도 모르게 국립대생이라고 거짓말을 하게 되고 그 후로 은숙에 대한 짝사랑을 키워간다.

 

6.29로 직선제는 쟁취했지만 부패한 정권이 언론과 군대, 경찰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잠시 유화조치를 통해 국민의 마음을 진정시킨 정권은 곧 폭압적인 본성을 드러내 노동조합 파괴에 나선다. 노조파괴꾼 제임스 박이 이끄는 일단의 무리들이 재희가 일하는 단체를 한밤중에 급습하고, 재희가 그들에게 윤간을 당한다. 재희는 정신병원에 입원해 가까운 사람도 알아보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고, 이를 본 영민이 복수를 맹세한다.

영훈은 동생이 복수에 성공하지 못할 것이고, 성공하더라도 그에 대한 댓가가 너무 크기 때문에 허무주의자인 자신이 대신 복수해야 하리라 생각한다. 호텔을 나서던 제임스 박을 살해한 영훈은 현행범으로 체포된다. 영훈은 진정한 사랑이란 악령처럼 이 땅 위를 거니는 모든 죄악들과 싸우는 일이며, 그러나 이 모든 일들도 지나가는 시간 속에서 그저 그림자가 스쳐가듯이 무의미할 뿐이라는 의견을 피력한다. 경찰은 그의 죄의식 없음과 허무주의적인 견해 때문에 정신병 감정을 의뢰한다.

은숙은 경식에게 자신이 쓰던 손 때 묻은 영어사전을 선물로 주며 미국으로 떠난다. 영어 사전 속에는 은행잎 하나가 곱게 말려져 있었는데 거기 쓰여 있는 날짜는 그 언젠가 경식이 국민학생일 때 은숙에게 은행잎을 주워준 날짜였다.

영민이 구속될 때 쓰러졌던 덕근은 몸이 회복되자 아들 영민의 방에서 북한과 관련된 책들을 읽기 지작한다. 그리고 황해도 남천, 자기 고향으로 갈 수 있는 방법이 없는지 알아보기 시작한다.

 

퇴근 후 운전을 하다가 문득 대학 입학 시절이 떠올랐다. 가슴 두근 거리던 그때가 벌써 20년 전이라는 사실이 무척 낯설게 느껴졌다. 그리고 <풋사랑>의 이야기들이 매우 먼 옛날 일처럼 치부되고, 역사의 진보는 우연의 산물인 것처럼 여겨지고, 진실과 정의를 왜곡하는 일이 마치 다양성을 인정하는 것처럼 눙쳐지는 작금의 현실에 묵지근한 분노가 느껴졌다.

 

도대체 어떤 일들이 일어났던가. 우리를 그토록 분노와 슬픔과 열정에 떨게 했던 그 시대의 정체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렇게 많은 젊음들이 불꽃처럼 사라지고 난 뒤에, 그 대신에, 우리들 속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인가. 아무런 추억도, 그리움도 없이, 마치 버스를 갈아타기라도 하는 것처럼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러 나서는 것은 과연 옳은 일인가.

 

작가는 책머리에서 회고담류 소설을 쓸 수밖에 없는 자신의 욕망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욕망은 어쩌면 억울함인지도 모른다. 한 시대의 불의를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젊음을 송두리채 바쳤던 사람들, 하다 못해 그런 사람을 아는 사람들은 '버스를 갈아 타듯' 새로운 시대를 맞이하러 갈 수는 없는 법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6368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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