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들러 리스트 - 상
토마스 케닐리 / 오월 / 1994년 3월
평점 :
절판


1939년 9월 6일, 지그문트 리스트 장군의 기갑 사단이 주데텐란트에서 북쪽으로 진격하여 폴란드 남쪽의 그라쿠프를 점령한다. 모든 유태인에게 강제적인 호적 및 주거 등록, 이주가 명령된다.

오스카 쉰들러는 1908년 오스트리아의 모라비아 산악 지역에서 태어났다. 그의 고향은 즈비타우라는 산업 도시였고 아버지 한스 쉰들러는 50여명의 직공을 거느린 사업가였으며 종교는 가톨릭이었다. 에밀리라는 품격 있는 여성과 결혼 했는데, 사이는 데면데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쉰들러는 다른 여자들과의 관계를 굳이 에밀리에게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화려한 옷차림과 좋은 술을 사랑했고, 천성적으로 주목 받는 것을 좋아했다. 초기에는 국가사회주의에 찬성했던 것으로 보이고 나치 당원이었다.

그런 오스카 쉰들러가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크라쿠프로 가서 이츠학 슈테른을 만난다. 그는 유태인 회계사였다. 그들이 처음 만날 때 슈테른은 법에 의해 자신이 유태인이라는 것을 쉰들러에게 밝힌다. 쉰들러는 대수롭지 않게 자신은 독일인이라고 소개했을 뿐이다.

쉰들러는 레코드라는 이름의 파산한 회사를 슈테른을 통해 인수한 후 유태인 자산가들에게 지분을 나누어 주겠따며 투자를 권한다. 어짜피 모든 재산을 빼앗길 것이 자명한 이치였으므로 유태인들은 쉰들러의 '말'이 지켜지길 기대하며 그에게 돈을 건낸다. 

회사를 인수한 쉰들러는 좋은 술과 담배, 소시지, 갖가지 과일과 통조림 등 블랙 마켓에서 사들인 물건으로 두루 환심을 사고 회사를 법랑 공장으로 변모시킨다. 군부에 줄이 있었고, 특히 군부에 같은 성을 쓰는 장군이 있었기 때문에 종종 쉰들러가 장군의 인척이라는 고마운 착각의 혜택도 누린 덕에 쉰들러는 군부에 식기를 독점 공급하는 계약을 따낸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유태인에 대한 처우가 점점 나빠지더니 공공연한 학살이 자행되기 시작한다. 쉰들러 공장에 출근하는 노동자들은 유태인 지구라는 한정된 공간에 살도록 강제되었는데, 나치 친위대들은 수시로 유태인 지구에 들어가 병든 노인과 어린아이를 사살했다. 그들이 노동력을 제공하지 못한다는 이유였다. 쉰들러는 그들이 살해당하지 않기 위해서는 숙련노동자이며 직업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방법 뿐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아무런 기술이 없는 자들에게도 카드를 발급해 주었다. 쉰들러의 법랑 공장에 일하러 오는 유태인들은 공장에 와서야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수용소장으로 아몬 괴트가 임명된다. 그는 국가사회주의를 맹신했고, 유태인은 지구상에서 멸종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는 자였다. 그는 수용소 내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서 저격 총으로 마음 내키는 대로 유태인을 쏴 죽였다. 쉰들러는 그의 광기를 조절하기 위해 한편으로는 뇌물을 쓰고 다른 한편으로는 권력의 진정한 사용이 어떠해야 하는지 대해 반복적 주입을 시도한다. 하지만 그런 노력은 일시적인 효과만 발휘했을 뿐이다.

쉰들러는 유태인들을 근본적으로 보호할 수 있는 조치를 강구한다. 바로 공장 내에 자신만의 수용소를 짓는 일이었다. 아몬 괴트에게 오랫동안 공을 들인 끝에 쉰들러는 자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어 낸다. 쉰들러 공장의 유태인들은 2천 칼로리 이상의 식사를 했고 담배를 피웠다. 친위대원들은 쉰들러의 허가 없이 공장에 들어올 수 없었다. 유태인들은 쉰들러의 공장으로 가는 것이 곧 살아남는 길이라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전쟁이 막바지에 접어 들자 유태인들을 대량으로 아우슈비츠에 이송시켜 독가스로 살해하는 일이 빈번해졌고, 법랑 공장을 계속 유지하는 것도 어려워진다.

쉰들러는 자신이 벌어들인 돈의 대부분을 들여 고향에 포탄 공장을 짓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숙련 노동자들의 충원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공장에 데려갈 유태인 명단을 만들기 시작한다. 그것이 바로 '쉰들러 리스트' 이다. 리스트의 작성 과정에서 끊임 없이 수정과 변경이 이루어진다. 이송 중 착오로 여자들이 아우슈비츠행 기차를 타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쉰들러의 노력으로 유태인 1천명 이상이 포탄 공장에 안착하게 된다. 하지만 그들이 만들어 낸 포탄과 탄피들은 모조리 검사에서 불합격 된다. 쉰들러는 그런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포탄들이 합격한다는 것은 곧 살상 무기로 사용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6개월 이상을 쉰들러 공장은 쓸모 있는 아무것도 생산해내지 못했다. 검사에 계속 탈락할 경우 가해질 조치들에 대비해 다른 공장에서 반제품을 사다가 검사를 맡는다.

처칠의 음성으로 전쟁이 종료되었음이 라디오를 통해 선포되자 쉰들러는 공장 노동자와 친위대원들을 모아 놓고 긴 연설을 마친 후 도피길에 오른다. 떠나기 전 유태인 노동자들 중 한명이 자신의 금이빨을 뽑아 녹여 만든 반지를 선물한다. 그 반지에는 히브리어로 '한 사람을 구함은 세계를 구함이로다'라는 탈무드 경구가 세겨져 있었다. 그리고, 쉰들러가 잡혀 전범 취급 당할 것을 우려하여 그를 두둔하는 편지를 쥐어준다.

 

작가가 1980년 캘리포니아 베벌리힐스의 한 가방 가게에서 우연히 '쉰들러 생존자'인 레오폴트 페페르베르크를 만나 오스카 쉰들러에 대해 듣고난 후 흥미를 느껴 각국에 흩어져 있는 50여명의 생존자들을 면담하고 쿠라쿠프 등을 답사한 후 르포르타쥬 형식으로 구성한 소설이다. 소설은 다양한 일화를 다양한 시각으로 담고 있다. 소설적 상상력은 개연성 있는 선에서 억제되고 있다.

쉰들러는 나치 당원이었으나 적극 동조한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그가 사회주의적인 사상이나 그 밖의 특정한 정치적 신념을 훈련받은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그는 성자의 이미지와는 거리가 멀었고 오히려 돈과 술, 그리고 여자를 좋아한 어찌 보면 속물적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유태인들의 생존을 위해 네 번의 체포를 감수했고 끝내 자신의 리스트에 오른 사람들을 구출한다.

쉰들러의 행동을 설명해 줄 수 있는 것은 그가 이츠학 슈테른을 만나 나눈 대화에 있을 지도 모른다. '법에 의해 제가 유태인임을 밝히고자 한다'는 슈테른의 말에 쉰들러는 심상히 '나는 독일인이니 유태인과 독일인이 이제 대화를 나누고 있군요' 라고 답한 대화 말이다. 그는 상대편이 유태인이든 자신이 독일인이든 그것은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중요한 것은 둘 다 인간이고 욕망하는 것은 누릴 권리가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쉰들러는 그 이외의 구분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동의하지 못했고 심상한 태도로 유태인들의 보호에 자신의 재산과 안위를 희생했다. 그는 유태인을 구조한 자신의 행위를 구태여 기록으로 남겨 과장한 적이 없다. 훈련된 정치적 신념이나 도덕적 당위에 메달린 행위가 아니었고 본능적인 행위였기 때문에 가능했으리라 생각한다.

 

쉰들러는 전 후 아르헨티나로 가서 10년간 들쥐를 키우고 농사를 짓는다. 사업들은 모두 실패한다. 아내 에밀리와 헤어진 후 다른 여인을 만나는데 경제적으로 풍요로웠던 적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쉰들러의 생존자들은 그를 위해 모금을 벌였고, 그가 독일 정부로부터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애 쓴다. 1974년 10월 프랑크푸르트 철도 역 근처 자신의 조그만 아파트에서 쉰들러는 숨을 거둔다. 예루살렘은 쉰들러를 '정의로운 사람' 으로 선포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203346939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