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깊은 계단
강석경 지음 / 창비 / 199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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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주는 고고학 강의를 하며 고도(故都) 경주에서 발굴 작업을 하고 있다. 아버지는 치과 의사이고 어머니는 법학을 전공한 후 신문사 일까지 했던 엘리트이다. 작은아버지는 사업을 해서 큰 돈을 벌었는데 첩을 두었다. 첩은 강희와 소정을 낳는다. 강희는 강주의 사촌 형이고, 소정은 사촌 누이가 된다.

강희는 어머니가 첩이라는 사실을 안 후부터 독립적인 성격이 되어 자기 앞가림에 골몰한다. 독일로 유학을 가 10년이라는 세월을 연극 공부를 하고 한국에 돌아온 강희는 아라발의 <환도와 리스>를 무대에 올릴 예정이었다. 여배우들은 강희의 카리스마 넘치는 모습과 연극에 대한 열정에 이끌려 그를 거의 숭배하다시피 했다. 강희는 그런 여자들과 관계하면서도 결코 곁을 주지 않았다.

한편 소정은 강희가 독일에 가 있는 동안 어머니와 살았다. 큰아버지가 취직시켜준 은행에 잠시 다니기도 했지만 지금은 도서관 사서가 되어 있다. 수더분하다고 생각되던 남편과 결혼했지만 오산이었다. 남편은 끝내 어머니를 장모라 부르지 않았고 소정을 첩의 딸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다른 사랑에 상처받은 직후 소정과 결혼한 것이었다. 소정은 그 사실을 알았지만 개의치 않았다. 소정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강주의 약혼녀 이진에게 강희가 무대 음악을 맡아달라고 부탁한다. 이진은 바이올린을 전공하고 유학까지 다녀 왔지만 다른 동료들에 비해 자신의 감성이 부족하며 그것은 노력으로 극복될 성질이 아님을 잘 알았다. 아라발의 연극에 참여하는 동안 이진은 강희 때문에 불편한 자신을 깨닫는다. 강희가 선을 넘으려는 기색을 보이자 이진은 뿌리친다. 하지만 이진은 자신의 마음에 파문이 일었음을 잘 알고 있었다.

소정이 중국 여행을 떠난다. 강주가 꼭 가보고 싶다던 창사를 여행하면서 신라사를 공부하는 일본인 히로를 만난다. 소정은 히로에게서 따뜻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깨닫는다. 돌아온 소정은 남편과 이혼하고 호주로 유학을 간다.

강주는 강희가 가변차선을 잘못 들어선 탓에 교통사고를 당해 죽고, 이진은 자신의 뱃속에 강주의 아이가 자라고 있음을 깨닫는다. 강희는 이진에게 자신들은 운명이라며 청혼한다. 결혼한 후에도 강희는 자신의 헛헛함을 이기지 못해 끊임없이 여자를 찾아다니고, 이진은 끝내 강희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하지 않는다.

 

소설은 강주를 중심으로 네 명의 삶이 교차되며 여성성과 남성성, 정치권력과 폭력, 그리고 사랑에 대해 말한다. 또, 유물 발굴과 페르난도 아라발의 희곡 <환도와 리스>,  창사 여행이 각각 독립적인 하나의 이야기를 구성하기도 한다.

강주를 통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 무엇인지 궁금한다. 강주는 고고학을 전공하고 있고, 버스를 타고 이동하다가 극심한 공포를 느낀 후부터 버스는 물론이고 비행기도 타지 못한다. 자동차 역시 누군가 동승했을 때나 운전이 가능하다. 독재자 박정희가 고고학에 미친 긍정적인 영향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경주라는 고도(古都)에 살길 희망하던 강주는 결국 자동차 사고로 죽는다. 고고학, 이동수단과의 불화, 고도에 대한 집착, 개발에 대한 부정적 시각 등 강주는 변화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다. 그리고 유일하게 죽는 인물이다.

작가는 <환도와 리스>에서 리스에게 가해지는 폭력과 이를 수수방관하는 주변인들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작가의 의도인지는 모르나 강주야 말로 소설 속에서 가장 순진한 인물이다. 그는 강희와 이진 사이의 일을 모르고, 첩의 자식도 아니며, 고고학에 도움을 주었는지 아닌지에 따라 독재자를 판단하기까지 한다. 얼핏 강주가 주인공 같지만 강주를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가 작품의 주조를 이룬다. 강주는 그들 모두를 알고 있는 매개체일 뿐이다. 어쩌면 강주의 순진성이 그를 죽음에 이르게 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소설 속에서 또 알 수 없는 것은, 아니 이해가 잘 되지 않는 것은 여성의 첫경험과 관련된 것이다. 처녀성을 '바치는'는 상황이 곧 남성에게 예속되는 상황임을 모르지 않지만, 처녀성을 '버리는' 상황이 곧 이의 극복이 아닐진대 여성 작가들의 소설 속에서는 자주 자신의 처녀성을 아무 남자에게나 '버리는' 상황이 자주 등장한다. '바쳐야 할' 중요한 '무엇' 이 아니라고 해서 아무데나 '버려야 할' 당위가 취득되는 것이 아닐텐데, 이 부분은 여성이 아닌 나로서는 언제나 수수께끼다.

 

누구의 가슴 속에나 저만이 딛고 내려가는 깊은 계단이 있어. 인간은 다 고독해. 고독해서 불안정하고 격정에도 휩싸이는 거야. 부나비처럼.

 

<숲속의 방>에서 <내 안의 깊은 계단>을 응시하는 작가의 시선은 소설가 양귀자의 표현대로 격조 높고, 서늘하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936685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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