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슴도치의 우아함
뮈리엘 바르베리 지음, 김관오 옮김 / 아르테 / 2007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쉰 네살의 르네는 부자들이 모여사는 그르넬가 7번지 아파트의 수위 아줌마이다. 키가 작고 못생긴 르네였지만 소박하고 진솔한 성품의 뤼시앵은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했고 둘은 짧지만 행복한 결혼생활을 하기도 했었다. 하지만 뤼시앵이 암으로 죽은 후 그녀는 수위실에서 톨스토이의 이름을 딴 고양이 레옹을 키우며 고상한 문화생활을 남몰래 즐기며 살아가고 있다. 그녀가 가장 근심하는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문화적 수준을 눈치채는 것이다. 그녀는 보통의 사람들이 갖고 있는 '수위 이미지'에 걸맞게 자신을 꾸미는데 골몰한다.

한편 같은 아파트에 사는 열 두살의 팔로마는 또래보다 별나게 똑똑한 아이로 언젠가 자신의 집에 불을 지르고 자살하기로 결심하고 있다. 팔로마는 그르넬가에 사는 어른들의 위선을 못 견뎌하고 삶의 부조리를 깨달아버린 이상 더 이상 사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 수 없다고 느낀다.

어느날 그르넬가에 일본인 오즈 가쿠로씨가 이사온다. 그는 다른 주민들과는 달리 수위인 르네에게도 선입견을 갖지 않고 대하고, 그 이유로 르네가 숨기고자 하는 면을 간파한다. 또한 팔로마와도 친해져 셋은 대화를 나누기도 한다. 어느날 르네를 가쿠로씨가 집으로 초대하고, 그들은 공통의 관심사로 친숙함을 느끼고 결국 가쿠로씨는 르네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하지만 르네에게는 가슴 아픈 과거가 있어 세상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움츠리며 살아왔다. 그녀의 언니는 뛰어난 미모를 지니고 있었지만 가난했기 때문에 농락당한 후 죽었고, 뛰어난 지성을 갖춘 르네는 자신의 사회적 계급을 벗어나려 했다가는 언니와 똑같은 죽음을 맞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톨스토이를 읽고 모자르트를 들으면서도 그런 사실들을 다른 사람이 눈치 챌 수 없도록 해온 것이다. 이런 사정을 들은 팔로마는 가쿠로에게 르네의 이야기를 하고 르네는 '당신은 당신의 언니가 아니다'라는 말로 사랑을 고백한다.

르네는 자신이 세상 속으로 나아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는 기대로 행복을 맛본다. 하지만 부랑자 제젠이 어느날 술에 취해 도로로 뛰어들자 그를 구하려다가 차에 치어 죽고 만다. 팔로마는 가쿠로, 르네와 함께 했던 순간들이 '다시는' 오지 못할 것임을 깨닫고, 그러한 '다시는' 못 올 행복한 기억 속의 '언제나'를 생각하며 불을 지르고 자살하려 했던 결심을 포기한다.

 

책의 프롤로그는 <마르크스>라는 제목을 달고 있다. 팔리에르 씨네 막내가 "마르크스가 내 세계관을 완전히 바꾸고 있어요."라고 말하는 것으로 소설은 시작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르네는 <독일 이데올로기>를 읽어보라고 권하고 포이어바흐 제11테제를 생각한다.

제11테제가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단지 세계를 다양하게 해석해 왔을 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세계를 변혁하는 데 있다" 이지만, 이 소설은 세계를 해석하지도, 변혁하지도 않는다. 마르크스는 단지 르네의 지적 수준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소설 속에서 계급이라는 단어가 몇 차례 나오지만 마르크스의 계급은 아니다. 단지 부자는 높은 계급, 가난한 자는 낮은 계급이라는 조잡한 구분법을 사용할 뿐이다. 따라서 마르크스를 인용하면서도 르네가 하는 '노동'이 신성한 것으로 그려지지는 않으며 그저 천한 일로 그려진다. 

작가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은 곧 고급 문화라는 이상한 도식을 소설 전반에 깔아놓고 있다. 그런 이유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이 톨스토이를 읽고 모자르트를 듣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한편 일본문화에 대한 작가의 편애를 유감없이 드러내는데 오즈 야스지로의 영화와 다니구치 지로의 만화, 호타 유미의 <히카루의 바둑>등을 등장시킨다. 작가가 이들에 열광하고 있는 것을 꼭 말하고 싶었다는 느낌이 든다. 르네와 팔로마의 기호, 생각들이 작가의 생각임을 단숨에 짐작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은 소설적 형상화의 실패이다. 특히나 후설에 대한 장황한 비판이 그렇다. 

팔로마가 천재로 나오는데 어떤 점이 천재인지 역시 모호하다. 팔로마는 작중에서 '조로(早老)'의 느낌을 준다.

 

결국 기껏 프롤로그에서 마르크스를 인용해 놓고도 '돈이 많더라도 예술과 철학을 알지 못하고 이해할 의지가 없다면 그건 제대로 된 삶이 아니고, 가난하더라도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과 지성을 갖추면 훌륭한 삶'이라는 '가진 자의 논리'로 회귀하는 것은 역설적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359747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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