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
무라카미 류 지음, 한성례 옮김 / 동방미디어 / 2004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1976년, 내가 태어나던 해에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시대를 따로 떼어놓고 내용만 본다면 이 책은 일정한 줄거리가 없고 섹스, 혼음, 마약, 폭력으로 뒤죽박죽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작품이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할 수 있었는가?

 

책 말미에 쓴 무라카미 류의 한국어판 서문(말미에 실어놓고 서문이라 이름 붙여놨다)의 일부를 그대로 인용해본다.

 

...1970년대 중반이란 어떤 시대였을까? 닉슨의 워터게이트 사건과 제1차 석유 파동을 잘 뛰어넘어 일본은 고도의 경제성장을 일단 이뤄 내고, 막 사회의 성숙기가 시작되는 시기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일본은 '근대화'를 마무리하고 있었다. 근대화 과정에 있는 나라에는 그 나라만의 독자적인 문학이 있다. 그 나라가 가졌던 문화와 근대라고 하는 소위 글로벌리즘과의 충돌을 표현하게 되는데, 그 내부에 살아가는 인간의 갈등과 대립을 나타내는 것이 근대문학이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당시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극단적인 스캔들에 시달렸다. 마약이라든가 혼음섹스 묘사가 화제가 되었고 이런 것은 문학이 될 수가 없다는 목소리도 높았다. 인간의 내면을 그리지 않았다는 비판도 있었고, 고뇌도 회한도 비애도 없는 작품이라는 비평도 많았다. 나는 현대인의 불안감 따위를 그리지 않았고, 국가와 개인의 불화라든가 가족간의 뗄 수 없는 굴레는 물론, 젊은이들의 보편적인 청춘 같은 것도 쓰지 않았다. 25년 전 내가 아무런 자각을 포함시키지 않고 표현하고자 했던 것은 '상실감'이다. 1970년대 중반 일본은 근대화를 성공적으로 이뤄 내고 그 대신에 무엇인가를 잃었다...

 

전공투 운동이 연합적군의 동료 처형사건을 끝으로 사그러 들고, 일본인들은 상실감에 시달려야 했던 것 같다. 전통적인 가치, 살아있는 신이었던 천황이 미국에 항복을 해 전국민이 충격에 빠져버리자 일본은 극우와 극좌가 모두 설득력을 갖는 시기를 한동안 보냈던 것 같다. 미시마 유키오와 전공투(아니 보다 정확하게는 적군파)로 대변되는 양자 모두가 대안이 아니었음에도 일본인들은 그 어느 한쪽에 지지를 보냄으로서 존재이유를 확인해야 했을 것이다. 70년대 초중반은 바로 이러한 극단의 선택마저 불가능한 사상의 공백, 상실의 시기였던 것 같다. 이러한 시기에 쓰여진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래서 불쾌하기 보다는 공명을 불러일으킨다. 성묘사와 마약은 에로틱하게 느껴지지 않고 폭력을 휘두르는 대상이 나에게로인지 타인에게로인지 구분이 잘 가지 않는다. 마치 꼬뮌전사들의 패배에 절망하여 파리 한 구석으로 도망친 보들레르에 대해 김남주가 말했던 시 <예술지상주의>를 떠오르게 한다.

 

무라카미 류의 <한없이 투명에 가까운 블루>는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 보자면 퇴폐적인 책은 맞다. 대안을 말하지도 않고(아니, 대안은 커녕 주인공들의 감정 조차 잘 드러나지 않는다) 그저 한없이 절망하고 좌절하면서 도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아무런 생각도 못하는 인물들만 등장한다. 무라카미 류의 절망이 느껴지지 않았다면 그저 3류 쓰레기 소설이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최근에 읽은 가네하라 히토미의 <애시베이비>가 떠올랐다. 같은 퇴폐라도 절망 속에서 나온 퇴폐는 어느정도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반면, 형식만을 차용한 퇴폐는 쓰레기이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31185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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