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촌 공생원 마나님의 280일
김진규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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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촌 사는 공생원의 마나님이 어느날 임신을 하게 된다. 그런데 고민이 하나 있다. 의원이 말하길 본인에게 생산 능력이 결여되어 있다고 한 것이다. 의원 녀석은 한 때 명의로까지 소문이 날 정도로 그 능력을 인정받았었기에 그 말을 액면대로 받아들이면 마나님 뱃속의 아이는 자신의 아이가 아니다. 헌데 공교롭게도 이 의원놈이 이번엔 의료사고를 내고 줄행랑을 놓은 것이다. 그러니, 의원의 말을 믿을 수도, 그렇다고 돌파리로 치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공생원은 혹시라도 다른 놈의 씨앗일 경우, 그 임자가 누구일 것인가 용의선상에 올리면서 주변 인물들을 하나 하나 탐색해 나간다.

의심과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그가 큰아버지 집을 찾아가다가 도망친 의원을 만나고, 알고보니 그 의원이 어릴 적 동무였으며, 애가 들어서지 않아 마나님 탓을 하며 생을 허비할 공생원을 위해 의원 나름의 선의의 거짓말, 생산 능력이 없으니 마나님에게 잘하라, 라는 거짓말을 한 것임이 밝혀지면서 이야기는 끝이 난다.

 

바둑을 조금 둘 줄 아는 사람들은 조훈현과 이창호를 많이 비교하곤 한다. 성격에 따라, 날렵하고 기지가 번득이는 조훈현의 행마를 좋아하는 부류가 있고, 반면에 진중하면서도 탄탄한 이창호의 전개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 김진규의 소설을 굳이 어느 한편에 속하게 한다면 조훈현의 행마에 속할 것이다. 그런데 내내 소설을 읽으면서 편치 않은 감정을 느낀 건 왜일까. 두어가는 한 수 한 수는 날렵하고 기지가 번득이지만 집을 지어가지는 못하고 있다고 할까.

은희경의 <마이너리그>를 읽을 때 느꼇던 그 느낌이었다. 할 말도 많고 역량도 있으나 정제되지 않은 듯한 느낌. 치열함이랄까, 진중함이 빠져있는 느낌 말이다. 한편, 걸쭉하게 풀어내고는 있으나 이문구와 같은 무게가 느껴지지 않는다.

 

클리언스 브룩스와 로버트 펜 워렌이 쓴 <소설의 분석(The Scope of Fiction)>을 보면, 앰브로우즈 비어스의 <아울 샛강 철교에서 생긴 일 An Occurrence at Owl Creek Bridge>을 분석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 놀라운 변화로 끝부분을 장식하는 데 무리는 없는가? 그것은 작품의 본문과 연관지어 당위성을 갖는다고 인정할 수 있겠는가? 달리 말해서, 끝부분은 단지 하나의 트릭에 불과한 것인가? 아니면 설득력이 있고 나름대로 의의를 가질 수 있는 것인가?

 

서의가 어릴 적 동무인데도 전혀 알아 볼 수 없었다가, 나중에 고백을 통해 어릴적 동무였음을 인지하는 장면에서 차고 넘치는 얘기를 신명나게 풀어내다가 마무리를 못짓고 소설가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야 하는 강박에 시달린 작가를 보는 느낌이었다.

이야기꾼과 소설가는 다르다. 이야기꾼은 신명나게 썰을 풀면 그만이다. 주워들은 얘기, 제 안에서 차고 넘치는 얘기, 읽은 얘기, 본 얘기 그저 한데 뒤섞어 주절주절 풀어내면 이야기꾼으로 명성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소설가는 그래선 안된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1233870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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