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본 백석 시집
백석 지음, 고형진 엮음 / 문학동네 / 2007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팔 원 ( 八 院 ) 
서행시초(西行詩抄) 3

 

차디찬 아침인데

 

묘향산행(妙香山行) 승합자동차(乘合自動車)는 텅하니 비어서

 

나이 어린 계집아이 하나가 오른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를 입고
 
손잔등이 밭고랑처럼 몹시도 터졌다

계집아이는 자성(慈城)으로 간다고 하는데

자성(慈城)은 예서 삼백오십리(三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백오십리(百五十里)

묘향산(妙香山 어디메서 삼춘이 산다고 한다

쌔하얗게 얼은 자동차(自動車) 유리창밖에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같은 어른과 어린아이 둘이 내임을 낸다

계집아이는 운다 느끼며 운다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계집아이는 몇 해고 내지인(內地人) 주재소장(駐在所長) 집에서

밥을 짓고 걸레를 치고 아이보개를 하면서

이렇게 추운 아침에도 손이 꽁꽁 얼어서

찬물에 걸레를 쳤을 것이다
 

 

 

대학에 다닐때에, 시를 읽고 눈물을 흘릴 수 있다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산문, 그 중에서도 사실주의에 경도되었던 이유도 있고, 브레히트나 박노해와 같이 알기 쉬운 시 이외에는 잘 이해를 하지 못한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교양수업시간에 제일 뒤에 앉아, 우연히 백석의 시 八院을 읽고 눈물을 흘렸었다. 나도 모르게 흘린 눈물이라 허둥지둥 당황하며 자는 척 책속에 머리를 묻었던 기억이 난다.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어느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라는 구절을 수업시간이 끝나도록 속으로 되뇌어 보았다. 문학이란 무엇일까를 다시금 생각하게 만들었고, 특히나 시에 대한 내 생각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었다.

八院의 소재가 만일 시가 아닌 소설로 표현되었더라면 공분을 일으키거나 비감에 젖게 만들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날의 나처럼 울게 만들 수 있었을까...

 

관서지방을 지나던 작가는 우연히 손발이 차가운 물에 붇고 갈라진 계집아이 하나가 차에 타는 것을 보게 된다. '자성'에 있다는 삼촌을 찾아간다고 한다. '옛말속같이 진진초록 새 저고리'인 것은 계집아이가 난생 처음 얻어입는 옷이었기 때문에 생뚱맞게 보이는 것이다. 새로 찾아가는 곳이 집이 아닌 삼촌이라는 건 계집아이에게 부모가 없다는 것이고, 거기에서 어떤 생활이 기다리고 있는지도 알 수가 없다. 계집아이는 운다. 흐느끼며 운다. 지금까지의 생활이 서럽고, 의지가지할 데 없는 자신의 처지가 서럽고, 어려서 무섭고, 새로운 곳을 가는 것이 두렵고, 그래서 운다. 그 우는 것을 보고 백석도 운다. 그러나 더불어 우는 것을 백석은 '텅 비인 차(車) 안 한구석에서 다른 한 사람도 눈을 씻는다' 라고 쓴 것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의 그 어떤 시보다도 이 시가 혁명적이라고 느꼈다. 문학이란 바로 이것이 아닐까 싶은 아련한 느낌. 그 후 기형도의 시에서 또다시 그 느낌을 느꼈었던 것 같다.

 

여전히 나는 시는 잘 모른다. 내가 아둔하여 모르는 것인지, 시가 원래부터 어렵고 난해한 것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잘 모른다. 하지만 백석의 시만은 내가 진정 가슴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다.

감정을 직접적으로 표현하지 않으면서도 마음 깊숙한 곳의 정수를 고스란히 전달하는 시인 백석을 떠올리며, 근자의 내 어리석음을 반추해본다. 

 

http://blog.naver.com/rainsky94/80055623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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