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 전2권 세트
로렌 와이스버거 지음, 서남희 옮김 / 문학동네 / 2006년 10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인공 앤드리아는 코네티컷 주 에이본에서 자랐는데, 이는 고등학교 때 온갖 운동을 하고, 끼리끼리 모여 놀며, 부모님이 안 계실 때면 '술 파티'를 즐겼다는 의미이다. 학교 갈 때는 스웨트 팬츠를 입었고, 토요일 밤에는 청바지를, 댄스파티에서는 드레스라 칭할 만한 것을 입었다. 앤드리아는 이후 브라운 대학-온갖 유형의 예술가와 사회부적응자, 그리고 컴퓨터 괴짜들이 모여드는-에서 영문학을 공부한 뒤 여행을 다녀왔다. 인도 여행에서 아메바성 이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긴 앤드리아는 자신이 진정 원하는 일은 <뉴요커>지에 기사를 쓰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커리어를 위해 온갖 잡지사에 편집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싶다는 이력서를 집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후 '엘리아스 클라크'에서 앤드리아에게 면접 기회를 주었고, 면접 과정이 신통치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앤드리아는 <런웨이>의 편집장 미란다 프리스틀리를 위해 어시스턴트로 일할 기회를 잡게 된다.


인사과 직원의 말에 따른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패션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여성이자, 전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에디터 중 한 사람인데, 그녀가 날마다 헤내는 모든 업적을 옆에서 돕는 일은 '백만 명쯤 되는 여자들이 너무도 하고 싶어하는 일' 이라고 했다. 계약기간은 1년이었고, 그 1년을 잘 마친 선임 어시스턴트들은 에디터로 승진하는 등 고속 승진 가도를 달렸다. 


막상 일을 시작하고 보니 앤드리아가 수행해야 할 과제는 수행 비서나 할 법한 일들이었다. 앤드리아의 아침 식사를 대령하고, 스타벅스에서 커피를 사 오고, 옷들을 세탁소에 맡기고, 일정표를 업데이트 하는 따위였다. 

앤드리아는 정확하게 지시하는 법이 없었다. 이를 테면 최근 자신이 신문에서 본 퓨전 레스토랑에 관한 기사를 스크랩해서 책상에 올려놓으라는 식이었다. 언제, 어떤 신문에서, 어떤 종류의 식당을 봤는지 묻는 것은 금기였다. 그리고 종종 지시는 엉뚱하게 이뤄지기도 했다. 맨해튼에서 무언가를 찾아오라고 해서 온 신경을 거기에 쏟고 있는 앤드리아에게 '워싱턴에서 그 가게를 찾는 게 그렇게도 힘든 일이냐'고 소리지르는 식이었다.

또한 그녀의 업무 범위는 직장에서의 일에 한정되지 않았다. 그녀의 쌍둥이 딸들을 위해 해리포터 신간이 서점에 깔리기도 전에 구해와야 했고, 그 집 강아지를 동물병원에서 찾아와야 했으며, 시동생을 위한 파티도 지원해야 했다. 이 모든 것은 그녀가 정한 불가능에 가까운 시간 내에 처리되어야 했다. 할 수 없는 이유를 대는 것은 해고를 종용하는 행위로 간주되었다. 

미란다 프리스틀리는 심지어 앤드리아와, 그녀의 동료 에밀리를 같은 이름으로 부르기도 했다. 그녀에게 있어 에밀리든, 앤드리아든, 자신이 원하는 사항을 충족시켜주기만 하면 되었고, 그것을 해내지 못한다면 교체하면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앤드리아는 매일 매일 미란다의 폭압에 시들어갔다. 정해진 식사 시간도, 정해진 퇴근 시간도 없었다. 그러나 좋은 점도, 굳이 찾자면 얼마쯤 있었다. 그것은 앤드리아가 타운카를 자신의 전용 차처럼 타고 다닐 수 있다는 점과 패션에 관한한 무엇이든 제공받을 수 있다는 점, 그리고 경비 처리를 유연하게 할 수 있다는 점이었다. 

미란다는 앤드리아가 자신의 일을 신속히 처리하길 원했고, 런웨이에서 자신을 위해 일하는 데 촌뜨기 처럼 입는 것은 못 견뎌 했으며, 경비 처리에 신경 쓰다가 자신의 요구사항이 그르치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미란다는 이런 이유로 갈 수록 하이패션으로 치장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절친 릴리, 그리고 남친 알렉스와 멀어지게 된다. 도저히 그들과의 친교를 다질 시간을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미란다 프리스틀리의 그림자가 앤드리아의 삶을 거의 잠식해 들어가 이제 일상 생활의 모든 영역이 그녀의 박자에 맞춰졌을 무렵, 앤드리아는 그녀와 함께 파리의 패션쇼에 가게 된다. 원래는 동료 에밀리가 함께 가기로 했었으나 단구증가증에 걸려 드러누웠기 때문이다. 

파리에서도 미란다의 무리한 요구는 계속 되었다. 그런데 그 때, 아주 약간의 변화가 감지된다. 미란다가 앤드리아에게 런웨이에서 일한 지 얼마나 되었는지, 그리고 장래 희망이 무엇인지 물었던 것이다. 그녀는 앤드리아의 삶에 아주 약간의 관심을 보였던 것 뿐이지만, 그녀가 암시하는 바는 매우 강력해 보였다. 그녀는 원한다면 <런웨이> 내에서 승진을 시켜줄 수도, <뉴요커>지의 유력한 사람에게 앤드리아를 소개시켜 줄 수도 있다고 암시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 때 또 다른 사건이 발생한다. 앤드리아의 오랜 친구 릴리가 음주운전으로 사고를 일으켜 코마 상태에 빠진 것이다. 앤드리아는 파리에서 며칠 더 머물며 장래를 보장 받을 지, 아니면 당장 자신의 가장 절친한 친구에게 달려갈지 결정해야 했다. 

다음 날, 앤드리아는 미란다에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가 코마 상태에 빠졌지만 남기로 결정했다'고 고백한다. 미란다는 매우 만족하며 앤드리아의 결정을 칭찬한다. 그리고 몇 시간 지나지 않아 앤드리아를 다시 하녀처럼 부리며 무리한 요구를 해 댄다. 바로 쌍둥이 딸의 여권이 만료되었으니 당장 갱신하라고 소리치며 발작을 시작한 것이다. 앤드리아는 불가능한 요구를 당연한 권리인 듯 요구하는 미란다에게 '엿 먹으라'고 말해준 뒤 미국으로 돌아온다.


릴리는 다행히 건강을 회복한다. 남친 알렉스와는 서먹해 진다. 미란다는 그 후로 앤드리아에게 복수를 하지는 않았다. 물론 11개월에 달하는 그녀의 봉사를 인정하여 업계에 영향을 행사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녀와의 관계가 아무런 도움이 안 된 것은 아니었다. 앤드리아가 쓴 짤막한 소설을 좋게 본 쎄븐틴의 편집자가 자신도 미란다의 어시스턴트 출신이라며 기뻐했던 것이다. 앤드리아의 새로운 커리어가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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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스트 셀러를 한 10년 쯤 뒤에 읽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일단 느긋하게 읽을 수 있고, 다른 사람과 의견을 교환하지 않아도 된다. 게다가 시간이라는 훌륭한 비평가의 도움을 받아 책의 가치를 좀 더 객관적으로 측정할 수가 있다.


뉴욕을 배경으로 패션계 이면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생동감 있게 포착해 냈다는 점이 상당히 매력적인 작품이다. 실제 작가는 <보그>지의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어시스턴트로 1년간 일한 경험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구성이나 주제의식은 다소 산만하다. 러브라인은 엉망이고, 미란다-엔드리아의 대립 구도 외에 공을 들인 관계도 거의 없다. 입체적인 인물과 사건이 전혀 없이 평면적으로 진행되는 점도 단점이다. 이는 작가의 심리묘사 기술이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은 것 때문으로 보인다. 그래서 엔드리아가 <런웨이>를 박차고 나오는 부분도 두 갈래 길 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으로 표현되는데, 독자는 '겨우 이런 식으로 나오려고 11개월을 고생했다고?' 하는 아쉬운 마음을 품게 된다.

<아메리칸 사이코>와 같이 일정한 지향점을 향해 이미지를 다양하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비싸고 예쁜 것', '일상에서 보기 힘든 것' 으로 한정하다 보니 울림이 작다. 소설 보다는 영화로 시각화 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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