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이마무라 나쓰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우리 동네에 '보라색 치마'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보라색 치마를 입고 다녀서 그렇게 불린다. 

처음에는 보라색 치마가 청소년인 줄 알았다. 아담한 체형과 어깨까지 내려온 검은 머리 때문인지도 모른다. 멀리서는 중학생 정도로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가까이서 잘 보면 결코 어린 나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보라색 치마는 대개 일주일에 한 번꼴로 상점가 빵집에 크림빵을 사러 간다. 나는 늘 빵을 고르는 척하면서 보라색 치마를 관찰한다......


'나'는 우리 동네 '보라색 치마'에게 관심이 있다. 그녀를 보면서 누굴 닮았을까 하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다 어쩌면 '내 언니'를 닮은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본다. 언니는 순한 성격이었지만 먹을 것에 대한 집착이 있었다. 그래서 '나'와 심하게 다툰 적도 있다. 부모가 이혼하고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언니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고 보면 '보라색 치마'는 언니랑 닮지 않은 것도 같다.

어쨌든 '보라색 치마'는 미스터리한 인물이고, 마을 사람들은 그녀에 대해서 다들 궁금해 한다. 반면 '노란색 카디건'인 '나'는 무색무취한 존재로서, 마을 사람 누구도 '나'에 대해 신경 쓰지 않는다. 한번은 '보라색 치마'와 부딪혀 보려고 한 적이 있다. 그걸 계기로 말이라도 걸어볼 심산이었을까? 하지만 '보라색 치마'가 너무나 능숙하게 피하는 바람에 '나'는 정육점 진열창을 박살내고 말았다. 그걸 물어주느라 '나'는 지금 파산 상태다.


어쨌든 '나'는 '보라색 치마'와 친해지고 싶었기에 그녀를 미행하기 시작한다. 그러다 알아낸 것이 그녀가 이제 슬슬 일을 시작해야 하는 처지라는 것. '나'는 구인정보지에 '내'가 다니는 호텔에 형광펜을 칠해 그녀가 읽도록 여러 번 시도한다. 마침내 '보라색 치마'는 '내'가 다니는 호텔에 입사하게 된다. 그녀는 그럭저럭 잘 적응했고, 소장과 치프 모두 그녀를 칭찬했다. 

하지만 그녀가 너무 잘 적응한 것이 문제였을까? 머리를 샴푸로 감고, 유니폼을 입고 나자 '보라색 치마'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다. 매력이 배가되었다고 할까? 하여간 그녀는 소장과 불륜관계가 된다. 그 뒤로는 내리막. 치프와 동료들이 뒤에서 쑤군댔다. 그러거나 말거나 '보라색 치마'는 떳떳하게 행동했다.

그러다 호텔 비품이 초등학교 바자회에서 팔린다는 첩보가 입수되자 모두들 '보라색 치마'를 의심한다. 담이 작은 소장은 자신의 불륜과 연계되어 함께 잘릴까봐 '보라색 치마'를 찾아가 모든 걸 실토하고 용서를 빌라고 한다. 하지만 사실 범인은 '나'였다. '보라색 치마'가 거절하자 소장이 다소 거칠게 나왔고, 옥신각신하던 끝에 별 소리가 다 들려온다. 서로 비난하던 끝에 소장이 호텔에서 묵어간 유명 연예인의 속옷을 훔쳤다는 얘기도 나왔다. 그러다 난간이 부러지면서 소장이 2층에서 추락한다.

이를 지켜보던 '나'는 즉시 뛰어가 뒷처리를 해준다. 소장이 죽었으니 즉시 도망가라고 '보라색 치마'에게 지하철 라커룸 키-사실은 언젠가 '내'가 도망갈 때 사용하려고 물품을 넣어둔-를 던져주고 어디어디에 가서 기다리라고 지시한다. 

다음 날, 라커룸에 가보니 '보라색 치마'는 가져가라고 한 물건 뿐만 아니라 다른 물건까지 모두 가지고 사라졌다. 착각이었겠지 하고 기다리라고 지정해 준 호텔에 가보니 그런 사람은 묵은 적이 없다고 한다.


소장은 다행이 목숨을 건졌고 '나'와 치프들은 소장 면회를 간다. 치프들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나'는 소장에게 시급을 올려달라고, 아니면 가불 좀 해달라고 애걸복걸한다. 소장이 안된다고 매정하게 거절하자 속옷 훔친 건 절대 비밀로 하겠다는 협박도 곁들인다. 소장은 생각해 보겠다고 어쩔 수 없이 중얼거리고, 나는 살았다고 생각한다.


이후 마을에 '보라색 치마'는 없어졌지만 '노란색 카디건'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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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마무라 나쓰코는 1980년 생으로 히로시마 출생, 오사카 대학을 졸업했다. 29세에 직장에서 잘린 뒤 소설을 쓰기로 결심, 가네하라 히토미의 <뱀에게 피어싱>에서 감흥을 받아 <여기는 아미코>를 썼는데 2010년 다자이 오사무 상과 미시마 유키오 상을 수상했다고 한다. (가네하라 히토미라면 내가 읽은 소설 중 가장 역겨운 편에 속하는 <애시 베이비>의 작가가 아닌가!)

2016년에 <오리>로 가와이 하야오 이야기상을, 2017년에 <별의 아이>로 노마문예신인상을, 그리고 2019년에 마침내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로 161회 아쿠타가와 상을 수상했다. 


불우한 어린 시절과 언니에 대한 그리움이 '보라색 치마'에게 투영되어 이런저런 공상을 하고, 급기야 스토킹까지 하는 '나'. 그러나 '보라색 치마' 역시 '환상의 여인'이 아닌 '생활인'이었음이 밝혀지자 급격히 태도를 선회하여 소장을 협박, 돈을 우려내는 '나'. 우리는 누구나 '환상'과 '실제'의 간극 속에서 유쾌함을 발견한다.


김현철의 노래 <까만색 치마를 입고>가 생각나서 고른 책이다. 까만색 치마를 입고 학교 앞을 지나가는 여성에 대해 이런 저런 상상을 하는 내용의 가사와 딱 맞아 떨어진다.


토요일 저녁일까

내가 그녀를 처음 봤던 그 순간에도

까만 치마를 입고


그녀는 말이 없지

항상 내 앞을 그냥 스쳐지나갈 뿐인걸

까만색 치마를 입고


난 바보같이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걸 바라만 봐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아


그녀는 혼자일까

아니 그녀는 멋진 남자 알지도 몰라

까만 치마을 입고


그녀는 언제부터

항상 이 거릴 혼자 스쳐지나간 것일까

까만색 치마를 입고


난 바보같이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걸 바라만 봐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아


하지만 난 바보같이 우두커니 서서

지나가는 걸 바라만 봐도 숨이 막힐 것만 같아


https://blog.naver.com/rainsky94/222157518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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