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도날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4
서머싯 몸 지음, 안진환 옮김 / 민음사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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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날』 서머싯 몸 / 민음사

나름의 삶을 풍요롭게 살아간다는 것

 

 

 

 

 맨 앞장에 힌트를 주고 시작한다. '면도날'이라는 비유적인 제목의 유래를 유추하고 소설의 모든 이야기를 함축하는 구절이다.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서기는 어렵나니. 그러므로 현자가 이르노니, 구원으로 가는 길 역시 어려우리라. (카타 우파니샤드)"라는 명언. 소설에 등장하는 일상적인 이야기들에 비해 그 뜻은 무거워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겉돌고 있었다. 삶과 인간에 관한 이야기일까. '면도날'의 의미란 무엇일까.


  소설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등장한다. 사교계를 누비는 속물적인 인물도, 다분히 계산적이고 의식적으로 삶을 사는 상류층 인물도, 불운한 운명인지 하루아침에 뒤바뀐 삶을 살게 된 인물도, 마땅히 관습을 따라 살아가야 한다는 소신을 가진 인물도, 정말로 자유롭게 아무것도 하지 않으며 - 그 의미는 다르지만 - 살아가는 인물도 있다. 화자인 '몸' - 단순히 관찰자라고 하기엔 큰 역할을 하는 -이 그들과 교류하면서 그들의 이야기를 듣고 의논을 하고 조언을 한다. 작가는 그 중, 앞에서 언급한 힌트와 관련된 인물을 역시 중점으로 다루는데, 아무것도 하지 않지만 사실은 치열한 그만의 공부를 하면서 살아가는 '래리'라는 인물이다. 그는 소설 속 등장인물들 사이에서도 중심을 이루고 있으며 남다른 성향을 자랑한다. 전쟁이라는 삶의 전환점이 있었고 신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남다른 철학을 얻고 온 그와 작가 '몸'이 대화하는 마지막 장면은 이 책의 주축이자 가장 무게를 잡고 있는 부분이다.

 

 신이 어느 곳에 있는지, 어떻게 찾아야 하는지, 살아가는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넘어 실재에 대하여 고민했던 '래리'의 여정과, 그로 인해 쌓인 확고한 그의 인식은 존경스러울 정도로 가치 있어 보인다. 하지만 『면도날』이 특별한 것은, 그런 '래리'의 삶을 우선적으로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소설의 힌트에 의하면, 스스로의 삶에서 질문을 끝없이 구하고 그 고행으로 답을 얻은 '래리'는 '면도날의 날카로운 칼날을 넘어선' 것이다. 하지만 그 동경스러운 삶이 절대적으로 우위에 있는 것만은 아닌 것. 작가는 비난하지 않고 특정한 삶을 유일한 것이라고 칭하지도 않는다. 의식적으로 물질을 추구했던 어떤 누군가의 삶도, 사람들과 어울림을 우선으로 삼았던 어떤 누군가의 삶도, 그들 자신에게는 최선이었고 어떤 이유로든 비난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떤 인생도 추켜세우지는 않았지만, 가장 힘 있고도 반복해서 말하는 중요한 것은 있다. 바로 '자기 확신'과 '열정'이다. 사람들 누구나 다 각각의 방향이 있고 관점이 있지만, 그 나름의 삶을 멋지게 살아가는 방법은 역시나 이 두 가지와 관련이 있다. 내가 어떤 방향을 택하고, 어떤 것을 선택했든 다른 사람의 시선에 휩쓸리지 않고 뚜렷한 주관대로 살아간다면. 어떤 인생이라도 자기만의 확신이 있다면 그 자신에게는 풍요로운 인생이 아닐까. 어차피 끊임없이 변화하는 삶의 비행 속에서 영원하고 절대적인 행복이란 없으니까 말이다. 인생이란 어떻게 살아가야 되냐는 질문에 서머싯 몸은 이렇듯 담백하고 멋진 여정으로 답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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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벽난로 선반 가장자리에 성냥을 그어 파이프에 불을 붙였다. 냄새가 고약한 구식 프랑스 유황성냥이었다. 그리고 이사벨 옆을 지나 창가로 걸어가 섰다. 그는 창밖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잠시 흐르는 침묵이 마치 영겁처럼 느껴졌다. 이사벨은 래리와 마주보고 서 있던 자리에 꼼짝 않고 서서, 벽난로 위에 걸려 있는 거울로 시선을 던졌다. 하지만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가슴이 미친듯이 뛰었고 불안함이 엄습해 왔다. 마침내 래리가 뒤로 돌아섰다."내가 제안하는 삶이 당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얼마나 더 풍성한지 설명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정신적 세계를 추구하는 삶이 얼마나 즐겁고, 얼마나 많은 것을 경험할 수 있는지 당신에게 알려 줄 수만 있다면.......

그건 정말 끝없는 즐거움이고, 말로 형언하기 힘든 행복이야. 그것에 비유할 수 있는 것이 하나 있어. 바로 홀로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 때의 기분이지. 높디높은 저 위에서, 사방이 온통 무한한 공간뿐인 곳에서 날고 있을 때 말이야. 그럼 끝없는 공간에 취하게 돼. 그때 느끼는 흥분이란, 세상 그 어떤 권력과 영예를 준다 해도 바꾸고 싶지 않지. 얼마 전에 데카르트를 읽었어. 그 평온함, 품격, 명석함이란!"

그때 이사벨이 한사코 말해야겠다는 투로 끼어들었다. "하지만 래리, 그거 알아? 당신은 나한테 맞지도 않는 삶을 요구하고 있어. 내가 관심도 없고, 또 관심을 갖고 싶지도 않은 삶 말이야. 난 그저 평범한 여자일 뿐이라구.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난 이제 겨우 스무 살이야. 10년 후면 늙어버릴 거고. 지금 시간이 있을 때 삶을 즐기고 싶어. 아, 래리, 난 당신을 너무나 사랑해. 하지만 당신이 말하는 삶은 시시해. 결국 아무것도 남지 않을거야.(...)" (125p) ​

"래리가 은행 털 계획을 짜기 위해서 그리스어를 공부한다는 말씀은 아니겠죠?" 나도 역시 웃었다.

"물론 아니지. 내가 하고 싶은 말은,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 열망에 너무 강하게 사로잡혀서 자기 자신도 스스로를 어쩌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거야.

그들은 어떻게든 그 일을 하지 않을 수가 없지. 그 열망을 충족시키려면 다른 모든 걸 희생할 각오가 되어 있는 거고."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까지도 말이에요?" "물론이지."

"그렇다면 단순한 이기주의에 불과한 것 아닐까요?" "글쎄, 나도 잘 모르겠군."

"래리가 죽은 옛날 언어들을 배워서 뭐하려고 그럴까요?"

"어떤 사람들은 다른 이해관계를 따지지 않고 지식 그 자체를 갈망하기도 해. 그건 멸시당해야 하는 욕망은 아니야."

"하지만 아무 데도 쓸 곳이 없는 지식을 얻어서 뭐해요?"

"꼭 그런 건 아니야. 안다는 것 자체에서 만족을 느끼기도 하니까. 화가가 그림을 그리는 일 자체에서 만족을 느끼는 것처럼.

그리고 그건 뭔가 더 심오한 것으로 나아가기 위한 하나의 단계일 수도 있고." (148p)

"난 단지 자기 확신이 얼마나 강력한 열정이 될 수 있는지 알려 주고 싶었을 뿐이야. 정욕도, 굶주림도 그 옆에서는 아주 하찮은 것이 되어 버리지. 자기 확신에 사로잡히면 그것으로 자신의 성격을 완전히 단정 짓게 되고, 그로 인해 스스로를 파멸로 몰고 갈 수도 있어. 그 확신의 대상은 중요하지 않아.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지. 어쨌든 그것은 그 어떤 술보다도 중독성이 강하고, 그 어떤 사랑보다도 사람을 지치게 만들고, 또 그 어떤 악덕보다도 강력하고 매혹적이야. 사람은 자신을 희생시키는 순간 하나님보다 훨씬 더 위대한 존재가 되지. 왜냐면 전지전능한 하나님도 자신을 희생시키진 못했으니까." (348p)

"저는 이 세상이 완전한 존재의 본질이 현시된 것이라면 어째서 그토록 혐오스러울 수 있느냐고 물었어요. 얼마나 혐오스러우면 인간이 신 앞에서 세울 수 있는 정당한 목적이 오로지 그 삶의 속박에서 벗어나는 것이 될 수 있느냐고 말이죠. 가네샤 씨는 이 세상에서 느끼는 만족은 덧없는 것이며, 오직 무한한 존재만이 지속적인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대답하더군요. 하지만 끝없이 존속한다고 해서 좋은 것이 더 좋아지지는 않으며 하얀 것이 더 하얘지지는 않죠. 새벽에 아름다웠던 장미가 정오에 그 아름다움을 잃는다고 해도 그것이 새벽에 가졌던 아름다움은 실제로 존재했던 거잖아요. 이 세상에서 영원한 것은 없어요. 그러니 무언가에게 영원한 존속을 요구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겠죠. 하지만 그것이 존재할 때 그 안에서 기쁨을 취하지 않는 것은 훨씬 더 어리석은 거예요. 변화가 존재의 본질이라면 그것을 우리 철학의 전제로 삼는 것이 현명하죠. 똑같은 강물에 두 번 들어갈 순 없어요. 강물은 끊임없이 흐르니까. 하지만 다른 강물에 들어가도 그것 역시 시원하고 상쾌한 건 틀림없어요." (459p)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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