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의 시간 오늘의 젊은 작가 5
박솔뫼 지음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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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의 시간』 박솔뫼 / 민음사

시곗바늘처럼 고요하게 도는 청춘의 시간

 

 

 청춘의 시작, 그 시기를 정확히 언급할 수는 없지만, 어렴풋이 짐작한 나의 그때는 아프지도, 파란만장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언제 이 시간을 다 보내고 어른이 되어서 재밌는 삶을 살까 하는 생각을 하며 울상을 짓기는 했다. 표로 짜인 시간, 입이 닳도록 외우고 다녔던 시간의 목록들, 수능을 앞둔 1,2년 사이에 자유롭게 주어진 시간을 또 시간과 분 단위로 조각내어 종이에 적어 붙여놓곤 했던 책상 위. 그때 그 시간은 정말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는데, 구르는 수레바퀴에 깔려 그저 멈춰있을 것만 같았는데, 이렇게 또 지나왔다.

  무기력하게 보냈던 지난날들 틈에서 소리 죽이며 환호했던 건 뭐가 있었을까. 지금은 고물이 돼버려 제값 주고 팔지도 못할 mp3 속의 음악이었다. 무언가에 크게 열광해본 기억이 흐릿하고, 좋아하는 건 있었지만 미쳐있는 것도 없었던 내게 음악도 최고랄 것은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정말 지루했던 수험생의 나날 속에서 나는 좋아하는 가수 세명을 추렸다. 그리고 매일 가던 집 앞의 독서실 책상에 포스트잇을 붙였다. "콘서트 꼭 가자."라고. 무언의 다짐이었다. 하지만 그 확고했던 다짐은 점차 흐려졌고, 그 열망은 어느새 흘러가는 시간 속에 없어져 버렸다.

 

 네 주인공 '우나'와 '우미', '배정' 그리고 '나'는 그저 별다를 것 없는 청춘을 보낸다. 학교를 그만두거나, 비자가 없어서 아직 한국인이 아니거나, 재수에 삼수를 거치고 있는 시간을 보내는 그들. 특별한 케이스라고 여겨지지만, 무의미하고 공허한 '도시의 시간'을 걸어간다. 우나가 유일하게 미쳐있던, 아빠가 좋아하던 기억의 '제니 준 스미스',1954년 태어나 '돌핀'이라는 앨범을 발표했던 가수는 『도시의 시간』 속에서 오직 흐르고 있고 위로가 되는 시간 같기도 하지만, 종적을 감춘 그 가수의 기록을 찾아가는 우나의 삶 또한 무의미하다. 시간은 돌고 돌고, 그들이 사는 '도시의 시간'은 유독 더 느리게 돈다.

 

 "나는 아이러니가 싫어. 그러니까 나는 아이러니라고 하는 것이 싫다." (28p)

  '우나'는 왜 그토록 '아이러니'가 싫다고 말했을까. 흔적이 없는 것을 억지로 찾아내야 했던 아이러니, 시간은 흘러가지만 크게 변화하는 것이 없는 아이러니, 점으로 연결되었던 '나'와 '배정' 그리고 '우나'와 '우미'의 언젠가는 떨어질 수밖에 없는 간격의 아이러니일까. 『도시의 시간』은 참 아이러니한 소설이다. 소설 속 그들은 재수 학원을 가고, 침대에 누워 진심 어린 대화를 하기도 하고, 좋아하는 것을 설렘과 함께 읊고 있지만, 불안함과 모호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파릇파릇하고 생기 넘치는 청춘들은 여기 없다. 소설 속 주인공, 특별함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항상 그랬던 대로 단조롭게 살아가겠다는 것이 아이러니, 그리고 청춘인 우리도 별반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을 거라는 아이러니다.

 

 박솔뫼 작가의 글은 아무도 없는 방의 시곗바늘처럼 고요하게 울린다. 어느새 한 바퀴를 지나가 있는 분침과 초침처럼, 『도시의 시간』도 참 조용히 흘러간다. "익숙하지 않다"는 느낌이 처음이었고, 강하게 들었다. 하지만 자꾸만 되돌려 읽게 되는 게 어쩔 수 없다. 이야기에 집중하지 않고, 그들의 대화와 감정을 깊게 음미하며 읽는다. 낯설지만, 왠지 모르게 나쁘지 않은 기분으로 책을 덮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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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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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대에 등을 기대고 준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 가끔 준이 아주 가깝게 느껴지기도 했다. 우리는 바람이 뭔지 알았고 비도 알았으니까. 마음도 알고 있다. 슬픔과 우울도 알고 있다. 그건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히 앉아 있으면 많은 마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는 많은 것을 알았다. 우리는 슬프지 않아도 슬픔을 알고 있다. 기쁠 때에도 우울을 볼 수 있다. 우리가 가만히 앉아 있을 때면 우리 앞으로 많은 소리들이 찾아왔다. 우리는 많은 것을 보게 되었고 그래서 우리는 준이 불렀던 것이 어떤 것인지 잘 아는 기분이 되었다. 동시에 우리는 아득함도 알았고 먼 곳도 알았다. (22p)

아이러니는 옷을 잘 입은 사람이, 그러니까 남자가. 남자가 수트를 입었어. 잘 입은 남자가, 바지에 뭔가 묻은 거야. 바지에 크림 같은 게 묻어서 그걸 하루 종일 고민하는 거야. 검은 바지에 흰 크림이 묻으면 잘 지워도 자국이 남잖아. 멀리서 보면 보이지 않지만 책상에 앉아서 일을 하다가도 무릎을 내려다보면 흰 얼룩이 보이는 거야. 보통은 그렇다. 아닌가? 그렇지? 보통은 그렇다. 그런데 그 사람은 부족한 게 없다. 좋은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 얼룩을 하루 종일 고민하는 거야 옷을 잘 입은 채로. 멋있는 사람이다. 나무랄 데가 없다. 그런데 자꾸 고민을 해. (...) 그런 모습이 아이러니야. 나는 아이러니가 싫어. 정말 싫어. 옷 잘 입은 사람이 크림에 대해 고민하는 게 너무 싫어. 혐오하고 경멸하고 경원시하는 쪽이다. 가끔씩 그게 너무 역겹다고 생각해. 그럴 때면 그 사람을 큰 크림 통에 집어넣었다 빼는 생각을 해. 그럼 그게 아이러니가 아니고 뭐가 되지? 그건 잘 알지 못해. (28p)

시간은 흐르고 나는 지금처럼 살아갈 것이다. 지금 같은 대학생이 직장인이 될 것이다. 그마저도 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날 것이다. 그 이후는 알 수 없다. 되는 것 없이 변하는 것 없이 완성되는 것도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지는 것도 없고 깨닫고 나아가는 것도 없다. 그것만은 꼭 그렇게 될 것이다. 그걸 깨닫고 앞을 보아도 이것 봐. 대구타워에 올라서도 빛나는 불빛 사이 건물들 건물들 매연과 건물들이었지? 반짝이는 야경을 걷어 내면 똑같은 건물들 건물들일 거야. 도서관 휴게실에 나와도 그대로지. 내 마음을 지금의 풍경이 증명하고 있었다. 비둘기는 순간 참새 떼들처럼 동시에 날아올랐다. (46p)

"나는 커다란 들판, 벌판이 좋아. 구르고 굴러도 끝이 보이지 않는 들판. 구를 때는 풀 냄새가 나고 한참을 구르다 주저 앉으면 고요해 새소리도 들리지 않아. 그런데 기다리다 보면 바람 소리가 나는 커다란 먼 곳. 풀, 바다가 좋고 범고래가 좋아 돌고래가 좋아. 큰곰이 좋아. 알래스카 갈색곰 북극곰 코끼리 사자 호랑이. 물이 어는 것 녹는 것. 내가 모르는 커다란 것. 그런 걸 알고 있어. 들판, 벌판, 바람 소리, 바다와 고래, 비, 아주 오랫동안 온 시간동안 하나를 생각해. 달, 부들개지가 좋아. 산에 내리는 비, 바다에 내리는 비, 멀어진 사람을 생각하고, 멀리 뻗어 있는 길과 가로수, 거기에 해가 쨍쨍 내리는 것 비가 종일 내리는 것 다음 날 해가 다시 쨍쨍하고 밤이 되면 달이 내려오는 것, 아주 먼 곳에 있는 사람, 내 속에 들어와서 나와 같이 숨 쉬는 사람. 내가 절대로 모르는 시간. 그렇지만 이미 알고 있는 것이 좋아." (83p)

언젠가 나는 흰 벽이 푸르게 변하는 것을 보았다. 그것은 나에게 아무런 영향도 끼치지 못했다. 나는 더 나은 인간이 되지 못했고 더 나아가지도 못했다. 또한 더 나은 인간이 어떤 것인지 한 발짝 다음의 세계가 밝은지 어두운지 알지도 못한다. 알고 싶지도 않다. 나는 벽에 대고 우나 우나 하고 말해 보았다. 꼭 우는 사람 같다. 알고 있는 것은, 어떤 여름날 누군가는 자꾸만 허벅지에 감기는 원피스 자락을 떼어 내고 매번 헤매는 길을 다시 또 걷는다는 것이다. 아무도 길에 없을 때 내가 눈에 보이지 않을 때 누구도 누구를 찾지 않을 때 나는 문을 열었다. 그때 문을 열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매번 여름이고 매번 헤매며 길을 나선다. 그곳에서는, 그 길 위에서는 매번. 그렇게 그 사람은 계속 길을 걸으며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은 시간대로 스스로 자기 자신을 살고 있다. (17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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