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남들의 세계사 - 2014년 제47회 한국일보문학상 수상작 죄 3부작
이기호 지음 / 민음사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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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남들의 세계사』 이기호 / 민음사

 슬프지만 웃기고,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웃프다'라는 말, 어느샌가 생겨난 신조어이자 속어지만, 이 소설에 어울리는 말은 이것보다 더한 게 없을 듯하다. 어느 누가, 그 시대를, 웃기게 표현하는 것 자체가 가혹하고 엄숙함을 요하는 무서운 시대를, 이렇듯 유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저 웃기기만 한 게 아니라 그 속의 페이소스를 잔잔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작가는 남다른 유머감각을 타고 난 것 같다. 

 


 소설의 주인공, 나복만. 그는 80년대의 그 무서운 시대에서 살아남기엔 정말 불안한, 어떻게 보면 아주 멍청하고 빠릿빠릿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의 실수로 어떤 죄를 떠안게 되지만, 쉽사리 빠져나갈 재능도 없고, 그 운을 떨쳐내줄 행운과 권력의 끄나풀도 없었던 사나이였다. 사실상 그는 여자운에 있어서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좋은) 행운을 얻었지만, 그 외에는 말짱 꽝인 사나이였다. 하기야 그보다 더 날쌔게 자신의 기회를 낚아채는 사람들은 뭐 달랐을까. 그때는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것을 넘어서, 그 누군가의 업적을 위해 없는 죄를 술술 털어놓게 만드는 시대였으니, 주인공 나복만의 분신들은 생각보다 꽤 많았으리라.

 

  그렇다. 그때는 느와르 시대 - 작가가 칭하길, "수사와 체포로 한 나라를 통치하고, 형네 집의 안녕과 평안을 위해서라면 능히 하나님의 손목에도 수갑을 채울 수 있을 만큼 웅대한 담력을 지닌 수사관 대통령의 시대" -였던 것이었다. 나는 소설 속 느와르 장면들을 표현해내는 작가의 걸출한 입담에 빠져들어 흥미 있게 읽으면서도, 실제였을 법한 느와르 장면들을 상상해 눈살을 찌푸리고 연민과 고통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뒤에 나오는 작가의 말엔 실제 인물 김근태 님의 <남영동> 에세이를 참고했다고 나와있으니 그 연민과 슬픔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서 『차남들의 세계사』는 작가만의 걸출한 입담으로 슬프기만 한 차남들의 세계사를 정말로 그럴듯하게 재현해낸, 제대로 된 한국 소설이다. '차남'들, 그들은 자신보다 더 큰 권력의 힘을 빌려 점점 자신의 영혼을 잃어가면서까지 광기의 권력을 휘둘렀던 사람들이다. 사실은 그들도 '보통' 사람이었을 텐데, 무언가의 눈이 멀어 미친 듯이 칼을 휘두르는 그들의 모습은 슬펐고, 지금도 어디선가 있을 법한 생각에 더욱 슬퍼지는 것이다.

  그리고 책에 특별함을 더했던 것은 단락단락 이어지는 작가의 관여 - "자, 이제 양치질이나 한번 하고 와서 들어보아라"와 같은 - 와 그 서술이 마치 판소리를 듣는 듯, 운율감이 느껴지듯 능글맞고도 재미있게 이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다음에 올 이야기의 '아주 얕은 복선'을 주기도 하니, 가독성이나 흥미로운 이야기 전개는 말할 것도 없다. 자, 이제 슬프지만 웃기고, 웃기지만 웃을 수 없는 『차남들의 세계사』를, 지금도 활개치고 있을 그들의 세상에 대해 생각하며 읽어보아라 -

 

 

 

- 리뷰의 끝은, 작가님의 표현을 이용한거라는 거 아시죠? 오해하지 말라는 소심한 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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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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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고아라니까."

나복만은 아무 생각 없이 그렇게 말해 놓고 나서, 퍼뜩 일곱 살때 헤어졌던, 그때는 이미 얼굴조차 희미해져 버린 어머니를 떠올렸다. 더불어 자신이 태어나기 6개월 전 단신으로 월북을 해 버렸다는 아버지의 이야기까지.......

그래서...... 나복만이 그 순간, 어쩌면 그 모든 일들은 이미 오래전부터, 자신이 태어나기 훨씬 전부터 쭉 이어져 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었다. 나복만은 아주 잠깐, 얼굴도 알지 못하는 자신의 아버지를 속으로 원망했고 (그는 속엣말로 짧게 욕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딱 한 번만이라도 어머니를 만나봤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스치듯 했을 뿐이었다. 그것이 전부였다. 그리움이나 애정 때문에 어머니를 만나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사는 모습을, 단칸방이지만 따뜻한 이불이 깔려 있는 거처와, 결혼한 여자도 있고, 번듯한 직장도 있는 자신의 현재를 보여주고 싶었을 뿐이었다. 보여 주고만 싶었을 뿐, 같이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딱, 거기까지만이었다....... 그만큼 그는 자신이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 모든 것에 만족하고 있었다. 때때로 그는 그 모든 것들이 다 기적처럼 여겨질 때가 많았으니까. (114p)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 시절은 예지력 넘치고 날카로운 분석력과 판단력을 지닌 각종 요원들과 형사들이 전국 각지에 넘쳐나던 시기이기도 한데 (바야흐로 형사들의 시대, 누아르의 시대가 만개한 것이었다.) 그들은 일단 자신들의 손에 넘어온 사람들이라면, 그 사람이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가정주부든 성직자든, 단 한 명도 빠뜨리지 않고 자신의 죄를 인정하게 만드는, 아니 그 이상의 죄를 자백하게 만드는, 능숙하고 능란한 취조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다. 그 취조의 힘은 대개 물과 전기와 그들의 성기와 주먹과 발끝에서 나왔는데, 어떤 사람에겐 그중 한두 가지만 쓰기도 했고, 또 어떤 사람에겐 그것들 모두를 한꺼번에, 여러 번에 걸쳐 사용하기도 했다. 그러니 그것들이야말로 우리의 누아르 주인공 시대를 가능케 했고, 또 번영케 했던 '5원소(물과 전기와 성기와 주먹과 발끝)'라고 해도 큰 무리는 없을 것이다. ('7원소'를 말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그들은 거기에 수건과 밧줄을 추가했다.) (140p)

때때로 평온하게만 보이던 우리의 일상이 부욱, 소리를 내며 찢어진 후, 그 틈에서 낯선 손 하나가 불쑥 튀어나올 때가 있다.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의식 중이든 무의식중이든 우리가 감추고자 애를 쓰던 유일한 진실이 눈앞에 나타나는, 아프지만 흔치 않은 기회이기도 한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외면하기에 급급해한다. 그만큼 우리의 진실이 더럽고, 하찮고, 추악하고, 섬뜩한 모습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그것을 외면하는 방식이다. 그 손이 마치 다른 사람의 것인 양, 자신의 손이 아닌 것처럼, 다시 틈 안으로 억지로 욱여넣고 겹겹이 시멘트를 발라 버린다. 그리고 시멘트를 바르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 안의 또 다른 괴물을 눈앞에 호명해 낸다. (사실, 그 낯선 손은 이 괴물의 손이기도 하다.) 그렇게 불러낸 괴물이 우리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날뛰고, 제멋대로 우리를 이끌어 가도, 우리는 스스로 괴물을 통제하고 있다고 착각한다. 어쨌든 괴물 덕분에 우리는 다시 진실을 외면할 수 있었으니까. 고마운 괴물이니까....... 그것이 우리가 우리를 잃어버리는 기본 공식이다. (233p)

정남운이 '3'번 방에서 한창 나복만에게 『데미안』을 읽어 주고 있을 무렵, 김순희는 원주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 쩡, 쩡, 쩡, 울리는 소리를 일주일 내내 철제 의자에 앉은 채, 졸다 깨고, 또 졸다 깨기를 반복하면서, 무방비 상태로 계속 듣고 있어야만 했다. 사실 그 소리는 원주경찰서 지하 조사실에서부터 4층 화장실까지 연결된 낡은 상수도 배관에서 나는, 수격 현상 (water hammering) 중 하나였다. 물의 압력이 일정하게 배관을 진동시키면서 내는 그 소리는, 그러나 김순희에겐 단순한 소음이 아닌, 소리 자체가 지시봉이 되고, 소리 자체가 주먹이 되고, 소리 자체가 머리채를 쥐고 흔드는 듯한 낯설고 섬뜩한 형상으로 다가왔다.

실제로 그녀는 쩡, 쩡, 쩡, 소리가 울릴 때마다 계속 맞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어 목을, 어꺠를, 허리를, 소리보다 반 박자 늦게 움츠리곤 했다. 그러면서 그녀는 생각했다. 무엇이,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잘못된 것일까? 그녀는 「마태복음」26장을 떠올리려 애써 노력했다. 「고린도전서」 13장 속사도 바울의 말 "내가 예언하는 능력이 있어 모든 비밀과 모든 지식을 알고 또 산을 옮길 만한 모든 믿음이 있을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를 무의식중에 웅얼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아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를 진정 괴롭혔던 것은, 그녀 스스로가, 누군가 묻지도 않았는데도, 이미 벌써 나복만을 부인하고 있다는 점, 바로 그것이었다. (269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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