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지음, 고재운 옮김 / 황금가지 / 2013년 12월
평점 :
절판


<무명인> 쓰카사키 시로 / 황금가지 

갑자기 어긋나버린 기억, '나'의 정체를 의심하기 시작하다

 

 

 

​  우리는 현재를 살면서도 과거와 미래를 벗어나지 못한다. '기억'때문이다. 기억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두를 지배하고, 우리 삶의 결정에 관여하곤 한다. 그렇기에 우리 삶에서 그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기억을 잃어버린다는 것은 내가 살아온, 보내온 삶을 잊어버리는 것이기에 우리는 항상 두려워하며 끊임없이 대비하려 한다. '기억상실', 만약 내 기억이 갑자기 없어지고 내가 알던 모든 기억이 바뀐다면 어떻게 될까. 이 책은 그런 상상에서 비롯된 이야기다. 내가 알고 있던 삶이 진짜 내 삶이 아니라면,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까.

​  일러스트레이터인 '도리야마'는 결혼 후 처음 맞게 된 생일날 집으로 들어와 아내 미유키의 죽은 모습을 발견한다. 갑자기 일어난 상황에 마음을 다잡을 시간도 없이 걸려오는 전화, 아내의 목소리다. 아내는 자신 앞에 죽어있는데, 전화 속의 아내는 태연하게 그에게 말을 걸고 있다. 그리고 갑자기 경찰이 다짜고짜 찾아와 집안으로 들어오는데, 순식간에 아내의 시체는 사라져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예상치 못한 상황들에 당황하던 그에게 다행히도 한줄기 빛처럼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이 전화를 걸어 도와주려한다. 그리고 추격을 피하다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도와주게 되는 '지아키'라는 여성의 등장. 그녀는 누구이고, 왜 자신은 이렇게 추격을 피해 도망을 다니고 있는 것일까?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에 대해 의심이 짙어지는 동시에, 도리야마는 자신의 정체 또한 흐릿해지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억은 점점 흐려지고, 분명히 알던 사람들의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다.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업을 갖고 있음에도 그림이 그려지지 않고, 갑자기 영어 원서가 술술 읽히고, 생전 알지 못하던 화학재료를 훔쳐서 도주에 이용하기도 한다. 나 자신이 '무명인'이 된 상황, 마치 영화 <트루먼쇼>를 생각하게 만드는 두려운 앞날, '도리야마'는 점점 드러나는 충격적인 사실에 놀라면서 자신의 삶의 기억조각을 맞춰가기 시작한다.


  원래 게놈 해저드 (Genome Hazard)라는 원제를 갖고 있는 이 책은 일반적인 장르소설의 스릴과 더불어, 과학적인 상식을 보탠 소설이다. 어떤 사람이 갑자기 '무명인'이 되버린다는 발상은 도플갱어, 쌍둥이, 기억상실증, 다중인격 같은 소재들을 상상하게 만드는데, 과연 정답은 무엇일까. 다소 판타지스러운 이야기 전개를 상상했었지만, 뇌과학적인 박식한 지식이 펼쳐지면서 이야기 구상에 대한 설득력을 높이고 있다. 뒷부분에 가서 조금 흐지부지해진 감이 있기는 하지만 가독성만큼은 참 좋은 소설이었다.

 

 

* 이 책은 한일 유명 배우 김효진과 니시지마 히데토시 주연으로 국내에 개봉되었습니다.

왠지 영화로 볼때 더 스릴있게 진행될 것 같기는 한데, 궁금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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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에서 지원받은 도서를 읽고 솔직하게 쓴 서평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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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어제까지 미유키와 내가 살고 있었다. 그런 집에 6개월이나 전부터 나카니시라는 부부가 살고 있다니. 누군가가 말했다. 제가 어떻게 알아요? 지금 말할 수 있는건 당신 머리가 어디 이상하지 않느냐 하는 정도죠. 누군가도 말했다. 내가 알 수 있는 건, 누군지 알 수 없는 그 여자가 한 말이 한 가지 적중하고 있다는 거라고. (111p)

"무슨 소리예요, 그건? 당신이 말한 건 전부 엉터리잖아요. 이게 거짓말쟁이가 아니고 뭐예요?"

"거짓말을 하고 싶었다면 더 근사하게 했을 겁니다."

"그래서요?"

"나는 사실을 말씀드리고 있습니다. 사실을, 내 스스로가 진짜라고 믿고 있는 걸 말씀드리고 있다고요. 그런데 그게 실제 사실과 다르다, 그런 이야기죠."

"그렇다면 둘 중 하나겠군요. 당신이 미쳤거나 이 세상이 미쳤거나. 그중 어느 쪽이에요?"

나는 오른손을 구부려 시계를 보았다. 벌써 몇 개월이 지난 듯한 기분이 들었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사건이 있은 지 아직 24시간도 지나지 않았다. 24시간도 지나지 않은 그 사이에 일어난 일이 조각조각 영상이 되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나에게 책임이 있다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나는 이미 미쳐 있고, 지리멸렬 상태에 빠졌다. 그렇게 생각하는 게 오히려 자연스러웠다. (120p)

나는 하나의 캔버스에 그려진 두 장의 그림이었다. 한 장의 그림 밑에 또 한 장의 다른 그림이 숨어 있었다. 위에 칠해진 물감이 조금씩 벗겨지고, 벗겨진 곳부터 아래에 칠해진 물감이 서서히 드러나 보였다. 바로 그런 느낌이었다. 그걸 보고 있으려니 질리지가 않았다.

그런데 언제부터일까? 나는 막연한 불안감에 휩싸이는 것을 느꼈다. 그것은 확실한 형체를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가슴 어딘가에 떨쳐 버리기 힘든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꿈쩍도 하지 않으려 했다.

위에 칠해진 그림물감은 요 이삼일 사이에 점점 벗겨져 떨어졌다. 1년 동안이나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왜 갑자기 벗겨지기 시작했을까? 직접적인 계기는 유코가 바닥에 늘어놓은 촛불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어떤 일에는 소인과 유인이 있다. 유인이 그렇다 치더라도, 소인은 따로 있는 게 아닌가? (292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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