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중에 인수가 태어난 것이다. 인수의 고추를 보고 남편은 당신 참 큰 기적을 이룩했군 했다. 나는 당신도 좀 기적을 이룩해보라고 뻐겼다. 나는 좀 뻐기느라고 한 소리인데 그는 정말 기적을 이룩하기 시작했다. 월급 외의 돈을 마련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렇다고 공무원이 국록 외에 팁을 받을 수 있게 된 게 아니고 옛 은사의 연줄로 번역 같은 걸 맡아 하게 되고 그런 연줄을 찾으러 – 물론 떳떳이 역자의 서열에도 못 오르는 번역이지만 – 부지런히 싸다니기도 하고 제법 친구 교제가 넓어지더니 아쉬울 때 돈을 돌려오는 재주까지 피우게 되었다. 아내가 아들을 낳고, 남편이 돈을 버는 지극히 당연한 일이 못난 우리에겐 크나큰 기적이었다. 그러나 더 큰 기적은 운명이 베풀어주었다. 땅값이 오른 것이다. 마구 올랐다. 조그만 채마밭을 파랗게 덮은 상추는 이미 상추가 아니라 백원권이었다. 한 평에 몇백원씩 하던 땅이 그렇게 꼭 백원권으로 한 평을 덮을 만큼 그렇게 올랐다. 이미 전기 수도가 들어오고 번지르르 기름진 아스팔트까지 깔리자 채마밭의 백원권은 다시 오백원권으로 둔갑했다.-16-17쪽
그리고 그 돈! 밤에 남편과 돈을 세는 재미라니. 부피 많은 돈을 세는 재미에 비할 인생의 열락이 다시 있을까. 맹자님이 지금 세상에 살아 계시다면 별수 없이 돈 세는 재미를 인생 삼락 중 으뜸가는 열락으로 꼽으셨으리라. 가게를 닫고 금고를 들여다가 남편은 마구 섞인 돈을 백원권과 오백원권으로 분리만 해놓고 나는 적당한 부피를 집어다가 척척 넘겨간다. 간혹 백원권 중에 오백원권이라도 섞여 있으면 혀를 끌끌 차고 쏙 뽑아내어 무릎 밑에 넣는 맛이라니 어찌 숲속에서 알밤을 줍는 재미 따위에 비하랴. 아무리 적어도 삼만원, 대개는 그 이상 – 아무리 부피가 많은 돈을 셀지라도 나는 절대로 물을 쓰지 않고, 가끔 아랫입술을 아래로 훌렁 뒤집고, 엄지손가락 끝에 침을 듬뿍 묻혀가며 센다. 지폐가 새로 탄생했을 때의 그 생경한 체질에서 차차 세파를 겪으면서 우아하고 원만하게 늙어갈 때의 체취는, 어떤 동식물의 체취하고도 안 닮은 착잡한, 그러나 비할 데 없이 구수한 것이다.-18쪽
돈을 걷는데 섣불리 선물 꾸러미를 들고 가 그 돈 걷는 축에서 빠지기도 싫고 돈도 내고 선물도 드리고 둘 다 해서 – 실상 둘 다 못 할 것도 없지만 – 딴 자모한테 눈총을 받기도 싫었다. 그렇게 생각하자 틀림없이 돈을 걷고 있을 것 같고 나도 돈 내는 축에 꼭 끼어들고 싶었다. 수첩을 슬쩍 넘겨다보며 제일 많이 낸 액수만큼 척척 세어주고는 "호호호 이름은 강인수, 네, 네, 강인수 엄마예요. 사업이 좀 바빠서 고만 그 동안 학교에 등한했었나 봐요. 앞으론 적극 협조하겠어요. 호호호…… 별말씀을…… 다 제 자식 위한 노릇인데. 호호호 수고하세요." 이럴 수 있는 것이다. -21-22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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