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하시 토마리항에서 페리를 타고 도카시키섬으로 떠났다. 도카시키섬에 살았던 분들을 떠올리며, 그곳에 있는 특별한 위령비를 찾아가보기 위해서였다.
1943년, 29살의 배봉기는 "과일이 지천이어서 나무 밑에 누워 입을 벌리면 절로 바나나가 떨어지는 곳"에서 먹고 살 수 있다는 말에, '돈 많이 벌면 뭐할거냐'는 말에 괜히 설레어하며 모집인을 따라나섰다. 그가 도착한 곳은 도카시키섬.
선착장에서 천천히 걸어도 3~4분이면 도착하는 빨간 기와집. 그곳에서 그녀보다 어린 다섯 명의 한국인 여성들과 일본군 '위안부'의 삶을 강요당했다.
도카시키섬 관광 안내도에는 물론 이 집의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다. 우연히 본 한겨레 기사를 근거로 구글지도를 클릭해가며 대략의 위치를 찾아갔다. <빨간기와집(가와다 후미코, 꿈교출판사)>을 보면, 미군 공습 때 원래 집은 파괴되었고 전쟁 후 콘크리트로 튼튼하게 다시 집을 지었다고 한다. 혹시라도 그곳에 사는 분께 폐가 될까봐 조심스럽게 다가갔다. '과거' 때문인지 한때는 누군가에게 임대해줬었다는 집이 잡초만 무성한채 지금은 아무도 살지 않는다는 것을 말해줬다.
한국어로 된 관광안내도에는 표시되어 있지 않은 위령비를 찾아 걷기 시작했다.
처음 여기를 가려고 하자, 내 일본인 동료는 더운 날씨에 걸어가기엔 너무 오르막이라며 걱정했다. 그곳으로 가는 버스가 없기 때문이다. 도카시키섬의 버스는 선착장과 아하렌비치 사이를 운행하는데 이마저도 배 운행시각에 맞춰서 타야 한다.
도카시키섬에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은 딱 두 가지였다. 빨간 기와집과 아리랑 위령비. 그리고 시간은 넉넉했다.
아하렌비치로 가는 차도 왼편으로 구불구불한 도로가 펼쳐진다. 아무도 없는 조용한 길 위에는 내 거친 숨소리와 까마귀 소리만 들렸다. 맞은편에서 누군가가 나타났다면 오히려 무서웠을 것이다. 관광포인트와 멀어서인지 차량도 거의 다니지 않는 도로 위를 30분 넘게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걷고 또 걸었다. 조금만 더 힘내서 가자고 생각했을 때, 오른 편에 나타난 아리랑 위령비.
위령비에 도착하자마자 갑자기 후두둑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아리랑 위령비는 1997년 마을 주민들의 성금으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꽃다운 나이에 끌려온 한국인 위안부들을 추모하는 뜻에서였다고. 안타깝게도 돌보는 이가 없는 탓인지 잡초가 무성하고 비문은 군데군데 읽을 수 없을 만큼 훼손되어 있다. 비도 오고 바람이 불고 마음은 쓸쓸하고 울컥 눈물이 쏟아졌다.
이 위령비가 만들어질 때 도카시키섬 어린이들도 직접 그림을 그려 동참했었다고 한다. 그때의 마음과 뜻이 계속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했다.
금방 내려가버리면 할머니들이 서운해하실까봐 가만히 앉아서 한참을 책을 읽다 내려왔다.
배봉기 할머니는 최초로 일본군 '위안부'였음을 밝힌 분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할머니가 위안부였음을 스스로 밝힐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추방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1972년 오끼나와가 일본정부에 반환될 때, 할머니의 체류자격이 문제가 되었고, 할머니는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정체를 밝혀야 했다.
아리랑 위령비에서 내려오다 전망대에 올랐다. 선착장과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 마을 한복판에 빨간기와집이 있었다. 가난하고 힘없는 식민지 조선의 여인들이 이 먼 외딴 섬까지 끌려와 일본군의 성노예로 살았다. 세월이 아무리 흐른대도 그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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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0명 정도 밖에 살지 않는 도카시키섬에 1000명의 일본군이 들어왔을 때, 마을 주민들은 감격했다고 한다. "우리 같은 작은 섬 사람들을 지켜주기 위해 군대를 보내줬다"고. 물론 이런 감격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초등학생 아이들까지 강제노역에 동원당하고 식량을 빼앗기고 마지막 순간에는 '옥쇄'를 위해 자결할 것을 명령받는다. 도카시키섬 주민 가운데 300명 이상이 일본군의 집단자결 명령/강요로 사망했다고 한다.
오끼나와 사람들은 지금도 오끼나와 전투때 일본군이 주민의 집단 자결을 강제했다는 내용을 교과서에 기술하라고 일본정부에 요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