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 피터슨의 묵상하는 목회자 유진 피터슨의 목회 멘토링 3
유진 피터슨 지음, 차성구 옮김 / 좋은씨앗 / 2008년 8월
구판절판


묵상하는 목회자

초판이 2002년도에 출판되었다. 2009년도에 개정판 2쇄를 구입했으니 참 오랫 역사?를 지닌 책이다.
그동안 유진 피터슨의 다른 책을 열심히 읽는 동안 이 책의 존재 여부도 알지 못했다. 유진피터슨를 집중적으로 읽기 위해 검색을 통해 얻은 책이기 때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이 책을 알게 된 것도 하나님의 섭리일까? 정말 적절한 시기에 접하게 되었다. 이제 '묵상'과 '목회자'라는 두 주제로 이 책을 전개해 나간다.

겉표지

목회자란 누구인가?
먼저 그는 분주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리고 파괴적인 도구이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종말론적인 존재이어야 한다.

목회자에 대한 재정의가 필요하다.
목회자란 누군인가? 세가지 형용사를 가진다. 분주하지 않고, 파괴적이고, 종말론적인 목회자가 바로 그 것이다.

분주함이라 게으름이며, 반역이다. 유진피터슨은 목사는 게으름을 배워야 한다고 말한다. 그 게으름은 세상에 대한, 본질적이지 못한 것에 대한 게으름이다. 그럼 무엇을 위한 게으름인가? 본질에 집중하기 위한 게으름이다. 그렇기 때문에 헛됨에 분주함은 곧 게으름이 된다.
파괴적이라함은 타락한 아담의 후손들이 건설한 죄의 왕국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왔으며, 새롭게 건설되고 있다. 목회자는 세상에 파괴를 선언하며 싸워야 한다.
종말론적 목회자는 어떤 사람인가?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다. 우리 가운데 도래했다. 목회자는 그것을 보여주어야 한다. 관계적 언어를 통해서......

언어1. 친밀함과 관계의 언어
언어2. 정보의 언어
언어3. 자극의 언어
세가지의 언어에 목회자는 정통해야 하지만 가장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1번이다. 그것은 관계의 언어이며, 기도의 언어이다. 우리는 그 언어를 통해 우리는 사랑과 반응과 친밀함의 표현들을 가능한 한 많이 확보할 수 있다. 아바! 아버지!(143쪽)

주일과 주일 사이는 분명 일상의 언어 시간이요, 변화와 자극의 언어가 필요한 시간이다. 그러나 친밀함의 언어가 없다면 나머지는 아무것도 아니다.

목회자는 언어의 사람이다.
아첨하거나 그럴듯한 말을 하여 다른 사람들을 좌우하는 권력을 차지하기란 쉽다.(228쪽)

목회자들은 언어를 사용해 설교하고, 가르치고, 상담한다.
언어는 하나님의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목회자를 통해 말씀하신다.


묵상은 결국 하나님의 언어를 듣는 시간이며,
나를 하나님께 조율하는 시간이다.
기록된 텍스트에 집중하라.
그리고 침잠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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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류호준 지음 / 이레서원 / 200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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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죄에 고뇌하시는 하나님

아파하시는 하나님, 인간의 죄로 인해 상처 입은 건 사람이 아니다. 하나님이다.

죽어있는 산문을 넘고 싶었다. 그는 시인이었다.
절대자의 권능 앞에서 발견되는 초라한 인간이었지만, 그것도 모르는 체 까불대는 인간은 되고 싶지 않았던 탓이다. 학자이면서 동시에 목사인 그는 하나님 앞에 진실된 성도이고 싶어한다. 월터 부르지만의 영향을 크게 받은 류호준 목사님은 목사로서의 가장 이상적인 설교를 문학적 그릇에 담았다. 소리의 울림을 넘어 영혼의 울림으로, 해석을 넘어 변화를 꿈꾸는 분이다.

예레미야 묵상집은 거짓과 어두움의 땅에서 외롭게 빛을 전하는 고록한 예레미야 선지아자의 마음을 담았다. 플라톤의 동굴 우상의 일면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킨다.

예수님은 고독한 자였다. 홀로 설 수 밖에 없었다.
시인은 외로워야 한다.
바닥이 따스한 아파트에서는 영감을 얻지 못한다.
시인은 죽음 앞에서 절대고독자로 살아야 하는 것이다.

선지자란 누구인가?

남들이 소유하지 못한 것을 소유한 자이다.
남들이 듣지 못하는 귀,
깨닫지 못하는 이해력,
미래는 보는 예지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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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의 철학 - 오스왈드 챔버스의 오스왈드 챔버스 시리즈 14
오스왈드 챔버스 지음, 황 스데반 옮김 / 토기장이(토기장이주니어) / 2010년 7월
구판절판


죄의 철학
오스왈드 챔버스는 이 책을 통해서 죄에 대한 놀라운 통찰들을 보여준다. 죄의 철학이라는 말은 어떤 의미에서 모순이지만, 죄의 숨겨진 의도를 보여주는 측면에서 맞는 말이다.

죄의 기원에 대하여 제시하는 것은 성경밖에 없다. 죄는 오직 하나님께 반역하는 가장 무서운 성향이자 실체이다.

하나님은 언제 나타나시는가. 챔버스목사님은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은 인간이 스스로 해볼 것을 다해본 후에 포기하는 지점인 마지막 순간에 나타나신다. 인간적인 한계를 느낄 때 하나님을 만나기 쉽다'

사람은 삶에 문제가 일어나지 않을 때 하나님을 찾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잘못된 길을 갈 수 밖에 없으며, 결국 택자들이라면 하나님의 개입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다.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한계이다.

죄가 어리석다는 것은 하나님을 반역한다는 것이며, 하나님을 대신하려는 것 때문이다. 오스왈드 챔버스 목사님은 이 부분을 이렇게 말한다.

"죄는 인간의 속성 안에 있는 요소로서, 그 기원은 하나님 다음가는 능력을 지닌 초자연적인 존재에게 있다. 사탄의 죄는 오직 희미하게 계시되어 있는데, 그 계시는 사탄의 죄가 모든 최정상이요, 완전하고 자발적이며 의시적인 영적인 죄임을 보여준다"

사람은 언제 무너지는가?
"사람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곳은 깊은 내면이다. 행동으로 나타나는 것은 마지막이다" 그렇다 사탄은 보이지 않는 마음을 먼저 공격한다. 마음의 죄소를 점령하면 그 다음은 아주 쉬워진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스스로 어쩔 수 없는 한계를 체험하여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상황이 되었을 때, 비로소 우리는 성경을 제외하면 아무도 자신의 상황을 충분히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한다" 죄란 병은 '속죄'없이는 치유가 불가능하며 보완이나 수정이 되지 않고 오직 새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의 능력에 의하여 당신의 유전형질을 바꾸실 수 있다"는 것은 참소망의 소식이다.

그리스도의 피가 무엇을 상징하는가?
인간이 되신 하나님의 고통이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의 속성이 저지를 수 있는 가장 깊은 죄의 자리까지 닿아있다" 그리스도의 피는 육에 있는 우리는 죽이고 타인을 섬기도록 부르는 소명이다.

세상에서 가장 어리석은 생각은 죄가 교정이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조금만 수정하며 되고, 교육으로 충분히 회복될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그러나 죄는 죽이는 것이지, 교정하는 것이 아니다.

"당신은 하나님의 칼을 피하겠는가, 아니면 그 칼이 찌르려는 것들과 함께 멸망하겠는가?"

성도는 애굽에서 적당히 섞여 살 수 없는 존재이다. 그 곳에서 나와야 한다. 마찬가지로 죄와 성도는 적당히 섞여 살 수 없다. 반드시 그곳에서 나와야 한다.

고후 6:15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어찌 조화하며...

"매일 죄를 점점 덜 지을 것이라는 사상에 빠진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 우리에게 결코 임하지 않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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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인생 2010-12-16 15: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교정이 아니라 완전한 새로움으로 시작해야 한다.
 
정의란 무엇인가
마이클 샌델 지음, 이창신 옮김 / 김영사 / 2010년 5월
구판절판



정의란 무엇인가?
이 오래된 질문은 아직까지 정치와 철학자들에게 답을 요구하고 있다. 마이클 샌델은 지금까지의 정치와 철학을 통해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을 제시해 주고있다. 강의형식을 따라 가기 때문에 읽는 데는 별다른 문제는 없다. 그러나 전체적인 내용을 살펴 보는 데에는 중요한 이슈들과 철학들을 다루기 때문에 충분하다.

마이클 샌델은 존 롤스의 뒤를 잇는다는 측면에서 그의 색이 자유적인 색을 가지고 있지만, 그러나 29세의 논문에 존 롤수의 정의론을 비판하는 논문인 <자유주의와 정의의 한계>을 통해 공동체적 정의론을 제기한다.


이 책의 가장 중요한 이론적 기반은 9장에서 제시한다. 서사적 존재로서의 인간론을 펼치면서 궁극적으로 사람들은 나 혼자만의 자유를 추종하는 존재가아니라 '우리'와 '함께'라는 의미 속에서 찾아야 한다.

9강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어떤 의무를 지는가?를 질문하며, 조상들의 죄를 후손들이 사죄할 필요가 있는가를 점검한다. 독일과 일본을 예로 들면서 후손들이 조상들의 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았지만 사죄하는 것이 옳다고 말한다. 무엇 때문일까? 연대성 때문이다.
샌델은 공동선이 정당하다는 것을 알래스데어 매킨타이어에게서 찾는다. 매킨타이어는 인간을 서사적 존재로 보았으며, 공동체로 보았다.

"우리는 누구나 특정한 사회적 정체성을 지닌 사람으로서 자신을 둘러싼 환경을 이해한다. 나는 누군가의 아들이거나, 누군가의 사촌이거나..... 이 나라에 속한다. 이처럼 나는 내 가족, 내 도시, 내 부족, 내 나라의 과거에서 다양한 빚, 유산, 적절한 기대와 의무를 물려 받는다. 이는 내 삶에서 기정사실이며, 도덕의 출발점이다."(311쪽 매킨타이어의 말을 인용함)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한번도 노예를 소유한 적이 없다 하더라고 사죄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일본이 우리나라에 사죄를 하는 것은 정당하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그들의 조상으로부터 받은 모든 유산을 버리고 새로 시작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나와 상관 없다고 하며 나의 선택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에게서'도덕적 천박함'을 보게 된다. 바로 이것이 자유주의 한계인 것이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은 인정하지만 자신의 약속(사회계약이든 가언합의이든)만 지키면 된다고 생각한다. 그 나머지는 어떻게 되든 나와는 상관 없는 것이다. 역사와 관계속에서 만들어진 서사적 존재로서 인간을 볼 때 다른 사람에 대한 의무를 다하게 된다. 의무를 단지 자신의 자유 선택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기적이다.

인간은 자유로운 존재이다. 또한 서로 합의에 의하여 서로에게 의무를 이행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진정한 정의란 공동체의 관점에서 이해 되어야 한다. 서로가 보이지 않는 의무에도 충실해야 하고, 또한 서로에게 요구하지 않는 보이지 않는 가치에도 충분히 존중해 주어야 하는 것이다.

마지막 장인 10강 정의와 공동선으로 넘어가 보자.

"여기까지 오는 동안 우리는 정의를 이해하는 세 가지 방식을 탐색했다. 어떤 이는 정의란 공리나 행복 극대화, 즉 최대다수의 최대행복을 추구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정의란 선택의 자유를 존중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선택은 실제로 행하는 선택일 수도 있고(자유지상주의의 견해), 원초적으로 평등한 위치에서 '행할 법한' 가언적 선택일 수도 있다.(자유주의적 평등주의의 견해) 마지막으로 어떤 이는 정의란 미덕을 키우고 공동선을 고민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불과 몇문장되지 않는 이 문장들은 이 책의 모든 주장과 논의의 요약이다. 그러니까 이 책은 정확하게 세가지의 주레를 다룬다. 첫번째는 최대다수의 최대행복, 두번째는 자유의 문제, 세번째는 공동체의 미덕, 즉 공동선이 그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첫번째와 세번째 주제는 많은 부분 닮아있다. 그러나 동일하지는 않다.


마지막 공동체적 정의를 다룬 마이클 샌델은 다음 책인 <왜 도덕인가?>에서 좀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이슈들을 언급한다. 동성애, 낙태, 자유주의 시장 경제 등의 다양한 이슈들을 언급하며 정의한다. 이 책은 장하준 교수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와 함께 보면 좋을 것이다. 그렇다면 장하준 교수의 장단점도 보게 될 것이며, 샌델의 정의론이 어떤 의미인지도 좀더 쉽게 분별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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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리 2012-11-20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이 책을 읽는데 다소 어려움이 있었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네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낭만인생 2012-11-21 18:08   좋아요 0 | URL
도움이 되었다니 저도 감사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비결
마틴 로이드 존스 지음, 김현준 옮김 / 꿈지기 / 2006년 12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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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이드존스의 몇권되지 않는 구약설교이다. 엄밀하게 말하면 히브리서 11장 설교입니다.  로이드존스는 히브리서 11장에 나오는 4명의 믿음을 고찰합니다. 5장인데 3-4장은 모두 아브라함에 관련된 설교입니다. 아무래도 비중있게 다루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게 한 것 같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의 배경은 유대 공동체에서 핍박받는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처음 예수님을 믿었을 때의 믿음이 흔들이고 유대교-종교로 다시 돌아가려는 유혹속에서 갈등하고 있었습니다. 이 때 히브리서 기자는 유대교를 돌아가는 것은 그림자(유대교)에서 본체(복음)으로 왔다고 다시 그림자로 돌아가는 믿음의 퇴행이요 역행임을 장조합니다. 그리고 초반부에 참된 복음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참된 성전에 대한 이야기 등을 다룹니다. 그런데 사실은 모두 예수님이 참 메시야임을 말하려는 것이죠. 그래서 율법보다 탁월하신 그리스도, 천사보다 탁월하신 그리스도, 모세보다 여호수아보다 탁월한 본이 지금 자신들이 믿고있는 예수라는 분임을 말합니다. 그리고 11장에서 드뎌 그럼 구약의 조상들은 누구를 믿었는가?를 짚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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