컴퓨터 커넥션 미래의 문학 4
앨프리드 베스터 지음, 조호근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3년 5월
평점 :
절판


 출판사 폴라북스의 "미래의 문학" 시리즈로 앨프리드 베스터의 작품이 출간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반가움보다도 걱정이 앞섰다. 베스터의 휘황찬란한 영광은 첫 두 장편 소설 이후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는 것이 그간의 통설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어떤 작가의 최고작만을 골라 읽으며 눈먼 숭배를 바치고 신성을 부여해대는 건 꼴불견이긴 하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지난 10여년 동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두 작품을 남긴 독보적인 SF 작가'로 떠받들어 왔던 사람이, 뒤늦게 소개되는 힘 빠진 후기작 한 권 때문에 '각종 부침이 있었고 후기로 갈수록 기력이 쇠하기는 했지만 전성기에는 빼어난 작품을 내기도 했던 훌륭한 작가' 정도로 격하되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분명 있었다. 작품이 별로 안 좋다면 내지 말 것이지, 그걸 굳이 작가 이름 내세워서 팔고 싶을까, 하는 마음에 출판사 폴라북스를 살짝 원망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막상 컴퓨터 커넥션을 펴든 다음, 나는 첫 두 문장을 읽고 파안대소했고, 첫 두 장을 읽은 다음에는 완전히 사랑에 빠졌다. 정말이지 말 그대로 입에 걸린 웃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리고 쉰 쪽을 읽은 다음에는 이것은 약을 먹고 쓴 책임이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약을 먹었다느니 약을 빨았다느니 하는 수사를 마구잡이로 사용하긴 하지만, 나는 정말로 작가가 약을 먹고 쓴 것 같은 책은 본 적이 없다. 작가 자신이 약 먹고 쓴 책이라고 공공연히 밝힌 네이키드 런치는 진입 자체가 불가능해서 약 기운을 느낄 여지가 없었다. 필립 K. 딕의 장편은 약을 먹고 썼다기보다는 그냥 침착하게 돌아버린 작가가 쓴 글이었다. 그밖에 약 먹고 쓴 것 같다는 평을 듣는 책들은 모두 과격함을 정교하게 계산한 '예술품'이거나 위악을 떠는 작품에 가까웠다. 그러나 컴퓨터 커넥션을 약을 먹고 쓴 게 아니라면, 베스터가 어떤 사람이었을지는 상상이 안 된다. 평생을 폭죽과 풍선과 꽃다발과 흰 면장갑과 광대 가면과 훈제 청어와 날파리와 이구아나와 피라냐와 아세톤과 구정물이 가득 들어찬 머리통을 이고 살아가야 했던 어릿광대?

 

 보통 과격하게 돌아버린 책이란 작가가 주변의 말은 귀담아듣지 않은 채 한우물만 파다가 정신이 나가서 안드로메다로 가거나, 그게 아니더라도 '내가 평소에는 여기까지만 하고 그만뒀지만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자' 하는 정신으로 실험을 해대는 책이기 마련이다. 어느 쪽이든 그 집요한 일관성과 응집력이 독자를 기진맥진하게 하거나 어처구니없게 한다. 그러나 컴퓨터 커넥션은 일관성을 철저히 거부하는 방식으로 돌아버린 보기 드문 책이다. 물론 형식상의 줄거리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직접 이 책의 줄거리를 요약하려고 해보면 확인할 수 있겠지만, 컴퓨터 커넥션에 묘사된 사건의 경중을 가리기란 대단히 어려운 일이다. 이야기의 흐름을 요악하고 압축하려면 핵심 사건을 추려내고 잔가지를 쳐야 할 텐데, 베스터는 시종일관 잔가지가 더 중요한 듯 굴고 있다. 아니, 차라리 잔가지만으로 이야기를 진행하고 있다고 말하련다.

 

 이런 책이라면 명확한 지향점이 없고 횡설수설로만 가득 차서 산만하기만 하다는 평이 쏟아지는 가운데 실패작이라는 멍에를 쓰고 쓸쓸히 퇴장함이 마땅하리라. 그런데 베스터는 그걸 끊임없이 눈을 붙드는 신기한 등장인물과 사건과 설정의 폭격과 광포한 속도로 덮어버린다. 역자 해설에서도 작가 자신의 발언을 인용하며 언급하지만, 정말이지 이 사람은 근사한 아이디어를 뽑아내는 데에는 아무런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던 모양이다. 눈길을 사로잡는 이색적인 아이디어가 끝도 없이 쏟아진다. (어떤 아이디어인지 일일이 나열하는 것은 불가능할뿐더러 그 자체로 강력한 스포일러가 되지 않을까 싶다. 이 글에서는 오직 작가의 태도에 관해 언급하는 정도로만 만족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자기 아이디어에 심취해 자기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에 파묻힌 채 독자에게 등을 돌리지는 않는다. 또 자기 아이디어에 심취해서 한 아이템을 만들어 놓고 거기에 집착하여 글의 흐름을 망가뜨리지도 않는다. 카드 한 장을 꺼내 독자를 얼얼하게 한 다음 아무렇지도 않게 내다 버리고 다음 카드를 꺼내는 모습이 흡사 환절기 알레르기성 비염 환자가 크리넥스 뽑아 쓰는 꼴을 보는 듯하다. 게다가 애초에 무언가를 지향했는데 산만해서 못한 게 아니라 아무런 지향점도 없이 아이디어 쏟아내기에 탐닉하고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명확하기 때문에, 컴퓨터 커넥션의 방향성 부재는 단점으로 느껴지지도 않는다! (언젠가 쿠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말했듯, "푸른 영화를 만들었는데 붉지 않다고 말하는 것은 곤란"한 것이다.) 정말이지 이 정도로 근사하게 돌아버린 소설은 유일무이하지 않을까. 내겐 늘 로저 젤라즈니의 모험 SF/팬터지가 "어릿광대/트릭스터" 이야기의 모범으로 남아 있었는데, 컴퓨터 커넥션의 베스터에 비하면 젤라즈니는 얌전한 모범생에 불과하다. (젤라즈니의 가장 과격한 소설 별을 쫓는 자까지 포함해서 말이다.)

 

 그럼에도 최종적인 인상을 정리하자면, 책을 읽는 내내 머릿속에 가장 자주 떠올랐던 이미지는조야하지만 눈길을 뗄 수 없는 원색으로 가득한, 그 그림체나 색채 때문에 어딘가 순박하다는 인상을 주기는 하지만 막상 디테일은 언제든 미쳐 돌아갈 준비도 돼 있는, 그러면서 매 화를 계속해서 클리프 행어로 끊는 바람에 독자들이 손톱을 질겅질걸 물어뜯어 가며 다음 호를 기다리도록 하는, 그리고 설령 한 사건이 일단락되더라도 계속해서 다음 사건의 전조가 이어지며 이 이야기가 영원히 계속될 것 같다는 행복감을 전해주는 (그렇기에 다른 한편으로는 어디서 끊어 읽어도 마찬가지인), 최종적으로 그 난장판 속에서 남는 것은 결국 화려하고 다채로운 캐릭터들의 유대관계인, 옛적 엑스맨연재만화의 모습이었다. (굳이 구체적으로 지목하자면 엑스맨: 다크 피닉스 사가같은 거.) 이러한 인상은 실제로 만화계나 라디오 드라마계에서 활동했다는 베스터의 이력에서 어느 정도 기인했겠지만, 그런 점을 논외로 하더라도 꽤 정확한 이미지라고 생각한다. 명확한 목표를 두고 내달리며 자신만의 닫힌 세계를 만드는 한 편의 작품이 되기를 거부한 채, 대신 우리 문화의 한 귀퉁이에서 늘 함께하면서 제멋대로 자생한 모습으로만 남아있기를 자청한 듯한 위대한 잡동사니. 이것은 진정 좋은 의미에서 만화적인 소설이다나는 이제 베스터를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빼어난 세 작품을 남긴 독보적인 SF 작가'로 떠받들련다. 고마워요, 폴라북스.

 

 사족을 더하자면, 이 책 뒤에는 SF계 최고의 독설가로 이름난 할란 엘리슨의 추천사가 붙어 있다. 이 글 또한 본편 못지않게 즐거우며, 내 감상문 따위는 신생아의 옹알이로 느껴지게 할 정도로 호화롭고 눈부시다. 어쩌면 이 책 덕분에 엘리슨의 팬이 늘지도 모르겠다. 제발 엘리슨의 책도 출간되기를. 반면 역자 조호근의 해설은 차분하고 명확하기는 하지만 너무 변명조가 아닌가 싶다. 글쎄, 엘리슨이 컴퓨터 커넥션자체를 찬양하기 어려운 까닭에 베스터라는 작가의 거대함을 에둘러 찬양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데 말이다. (애초에 그렇게 성격 좋은 인간이 아닐 텐데?)

 

 한편, 지금까지 나온 "미래의 문학" 출간작을 돌아보니 하나같이 자기만의 방식으로 안드로메다까지 가서 폭발하는(혹은 일단 안드로메다로 가기는 하는데 거기서 피시식 꺼지는) 작품들뿐이다. 독자로서 무척 반갑기는 하다. 그러나 출판사의 판매 부수는 무척 걱정스럽다. SF 소설 선물하기를 즐기는 나만 하더라도 한때 종교학과에 몸담았던 지인에게 정신기생체를 한 권 선물한 적이 있을뿐이니. 다른 책들은 차마 다른 사람과 공유할 엄두를 못 내겠다. (한때 언어학과에 몸담았던 지인에게 바벨-17을 선물하는 것도 고려해 볼 만하겠으나, 이미 테드 창을 소개한 다음인지라 아무래도 망설여진다.) 너무 짧고 굵게 타오르려고만 하지 마시고 적당히 팔릴 만한 책으로 보신도 하시면서 오래 버텨주시길 바란다.

 


댓글(1)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해줘 2013-07-18 0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알라딘 서핑 중 간만에 폭풍처럼 호객 에너지를 발산하는 서평을 읽게 되는군요. 베스터의 후기작들은 워낙 평이 안좋아서 전혀 구매 의지가 없었는데 장바구니에 책을 아니 담을 수 없게 만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