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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란 무엇인가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1년 4월
평점 :
구판절판
책은 쉽게 읽혔는데, 서평은 쉽게 쓰지 못하겠다. 마찬가지로, 책은 빨리 읽혔지만, 뿌듯함은 없다. 국가란 무엇인가, 이런 책을 써야 했던 저자의 고민만큼 읽는 이의 번민 또한 크다. 서평을 쓰자니 정치평론을 해야 하겠고, 그걸 피해서야 좋은 서평은 아닐진대, 차마 감당할 역량과 의욕이 없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저자 유시민에 대해서만 쓴다고 해도, 그게 정치인 유시민과 무관하다고 곧이 읽을 이도 없을 것이다. 독자들의 그런 공통감각이야말로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자체보다도 유시민이 더욱 심각하게 의식했을 문제였을 테고 말이다.
‘국가주의적 국가관’, ‘자유주의적 국가관’, ‘계급주의적 국가관’을 각각 설명한 제1장부터 3장, 그리고 고전 철학자들의 ‘통치자론’의 내용을 개괄적으로 설명한 4장까지는 고등학교 때 배운 정치·사회 교과서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술 방식도 대학 교양입문서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다. 다만, ‘애국심’, ‘혁명과 개량’의 내용을 다룬 5, 6장의 내용은 그 자체는 새롭지 않더라도 앞서 등장한 정치 입문서의 내용과 함께 나오는 법은 드물기에 흥미롭게 읽히는 부분이다. 1-4장까지의 객관적 지식을, 5, 6장에서 제기한 애국심에 대한 사유, 혁명과 개량의 논리적 구도에 적용 ·서술하는 부분에서 저자의 문제의식을 드러내고자 시도한 대목을 발견할 수 있다.
그는 여기서 대한민국의 보편적인 애국심의 개념은 피히테가 주장한 ‘배타적 사랑의 감정’이며, 또한 이 단어는 국가주의자들이 독점했다고 적확하게 지적한다. 그리하여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들이 ‘애국심’을 표 나게 내세우지 않는 것은 이해 못할 바 아니지만, 그가 보기에 그것은 현명한 커뮤니케이션 전략은 아니다. 이러한 전제 하에 그가 선택한 애국심의 정의는 르낭의 개념에 바탕을 둔 것으로, “국가라는 하나의 공동체에 함께 귀속되어 훌륭한 삶을 영위하고 공동의 선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137)이다. 물론 유시민이 택한 ‘애국심’과, ‘사회변혁’, ‘진보’에 대한 정의는 단지 그가 그것을 선택했다고 해서 정치인으로서의 그의 이상과 성격을 담보해주는 것은 아니다. 이는 모든 저자의 경우에 다 해당되지만, 특히 정치인 유시민은 바로 그런 의심과의 정면대결을 피할 수 없고, 피해서도 안 될 것이다.
다만, 그의 책 전반에 걸쳐 이러한 서술방식이 매우 정치적으로 활용되고 있음은 지적해두어야 하겠다. 그러니까 애국심을 ‘배타적 사랑’으로 개념화하여 전체주의적 국가관으로 나아가는 것이 정향되어 있었던 피히테의 주장, 애국심을 사악하고 위험한 감정으로 간주하여 홀로 성자처럼 살아간 톨스토이, 그리고 애국심을 주민들 자신의 의지에 의해 발생하는, 함께 귀속되어 살면서 실현하고자 하는 가치 또는 목적에 대한 사랑과 충성심이라고 주장하는 르낭으로 세 가지 선택지를 제시하고, 저자 그 자신의 견해를 그중 가장 온건하면서도 적극적인, 그러니까 이론과 현실 두 측면 모두에서 가장 변증법적으로 고양된 위치에 자리매김하는 이런 서술 방식 말이다. 이런 방식으로 합리성과 진정성을 보장받는 것은 가장 손쉽게 정치적 서사를 구성하는 전략이기에 예민하게 의식되어야 한다.
7, 8, 9장은 ‘진보’와 ‘국가의 도덕’을 의제로 설정하여, 정치인 유시민 자신이 표방하는 ‘진보자유주의’의 논리적 근거를 설명하기 위해 마련된 장이다. 그는 라인홀트 니버를 논리적 스승으로 삼아 이렇게 주장한다. “나는 자유를 원하는 것과 똑같이 간절하게 정의를 소망한다. 그래서 자유주의 국가론이라는 땅을 딛고 정의를 실현하는 국가를 바라보며 나아간다. 이것이 내가 스스로를 진보자유주의자라고 말하는 의미이다. (...) 진보자유주의자는 민주주의를 통한 사회개량의 길을 선호한다.”(242-243) 그리고 이러한 철학을 실현한 현실모델로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소환된다. 저자가 베른슈타인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한 수사는 “졌지만 이긴 정치인”이다. 그 이름, 어딘지 익숙하다. 기시감을 탓할까.
9장에서 저자는 베버의 책임윤리를 제시하며, 그것을 의식한 현실적 최선으로서 ‘연합정치’를 주장한다. 과연, 연합정치는 그의 ‘철학’의 산물(?)이었음을 새삼 확인하게 하는 대목이다. 그가 1987년부터 2007년까지 실시된 진보진영과 자유진영의 연합 사례와 그에 따른 승패 및 표차를 계산하며 주장하는 것은 일명 ‘섞임’의 정치다. “이념과 정치문화의 ‘섞임’을 통해 진보의 힘을 키우는 것이 연합정치이다. (...) 자유주의자와 진보주의자가 대중의 존경과 믿음을 받는 길이 바로 연합정치에 있다. 연합정치를 통하지 않고서는 훌륭한 국가를 만들 수 없다.”(282-283) “책을 쓰면서 정치인의 시각을 유지하려고 노력”(286)했다는 유시민의 책은 이같은 문장으로 끝난다.
그는 책을 쓰면서 두 가지 소망을 가졌다고 한다. 서로 다른 국가관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을 이해하는 것과, 정치인의 글쓰기가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것. 어떤가. 전자는 유시민의 책이 한 것이 아니라, 정치철학 입문서의 양식 자체가 한 것이다. 그렇다면, 후자는? ‘정치인의 글쓰기’의 이상은 무엇인가에 대한 고민이 먼저 필요하겠다.
아쉬움 아닌 아쉬움을 짚자. 유시민은 대한민국에서 정치인을 해야 되는 존재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국가란 무엇인가’라는 문제를 던지면서, 정작 ‘국가 밖’에 대한 삶에 대해서는 아예 사유의 가능성을 차단해버렸다. 현실정치를 수행하는 정치인과, ‘탈국민, 탈국가’의 상상은 결코 만날 수 없고, 만날 필요도 없는 것일까. 국가의 독점적·배타적 폭력을 승인하는 것을 좁은 의미의 국가주의자 혹은 마키아벨리스트라고 할 수 있다면, 국가를 상대화하지 않는 것 역시 그러한 호명과 아주 잘 어울린다. 그런 의미에서 “휼륭한 국가 없이는 시민들의 훌륭한 삶도 있을 수 없다.”(7)라는 문장을 인용하는 사람은 언제나 ‘국가주의자’의 혐의에 노출되어 있다. 이제 참다가, 참다가 묻는다. 그렇다면 저자는 ‘국민’을 도대체 뭐라고 생각하는가. “국민이란 무엇인가” 말이다. 국민은 왜 국가 없이 못 살면서도, 국가에게 버려지는가. 한 인간이 시민이 되고, 국민이 되는 것은 어떤 문제인가. 저자 유시민이 답해도 되고, 정치인 유시민이 답해도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