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초, 격월간지 <오늘의 교육>에서 청탁받아 썼던 글이 

그간의 다른 특집글들과 함께 책으로 묶여 나왔습니다.

글이 쓰여졌던 그때를 생각하면 갑갑하기만 한데,

이상하게도, 다시 볼 기회가 자꾸만 생기네요.

 

함께 실린 다른 글들의 면면을 보니, 이 시대 교육현장이 생생히 보일듯 합니다.

책 정보와 목차를 아래에 옮겨놓으니 참고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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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불가능의 시대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회 (엮은이) | 교육공동체벗 | 2011-10-10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을 말하다. 오늘날 지옥으로 변해 가는 교육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1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교육에 미친 영향과 교육 주체들의 내면의 변화를 추적한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는 경쟁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난다.

2부에서는 주류 경쟁 속에서 소외되고 추방당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학교는 경쟁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밖으로 쫓아내면서 체제를 유지해 왔을 따름이다. 학교가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3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인 대학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시장의 논리가 학교를 지배하면서 대학은 더 이상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대기 위해 알바를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를 하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이 부지기수다. 치열한 생존경쟁은 학생들을 원자화하여 연대할 수 없게 한다. 대학 문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처방 없이는 교육개혁의 방향을 잡기도 어렵고, 대안적 삶과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할 때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목차>


책을 펴내며

1부 신자유주의는 우리 내면을 어떻게 바꾸어 놓았나
014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 | 이계삼
031 달리는 신자유주의 열차에 ‘우리’라는 좌석은 없다 | 정용주
050 ‘매니저 엄마’의 탄생과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 | 박소진
062 신빈곤, 혹은 외환 위기의 아이들 - 비유예, 비훈윤적 문화 | 민가영

2부 모두를 위한 학교는 없다
076 학교가 버린 아이들, 학교를 버린 아이들 | 채효정
095 문제아 홀로코스트 - 남양주 K고 무더기 퇴학 사태 |혜원
111 “선생님, 우리 반에서 공부하고 싶어요”  - 장애 학생들이 학교에서 경험하는 배제와 차별 | 류경원
122 학교에 학습 부진 학생은 없다! - 학교 부진아 정책 실태 보고서 | 정용주
141 아이들은 실패할 권리가 있다 - 흔들리는 아이들, 하지만 꽃보다 아름다운 아이들 | 이미연
160 될성부른 떡잎들만을 위한 세상  - 명품교육도시 K군에서 보낸 비교육적 나날들| 최은정

3부 대학의 교육 불가능
174 학문하지 않는 대학 | 문수현
184 대학, 악마와 거래하다 - 두산그룹의 중앙대 인수 그 이후 | 노영수
199 ‘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이 보낸 ‘475시간’에 대한 기록| 오혜진
208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서유정
224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 어느 운 좋은 예비 졸업생의 취업 성공기 | 최은정
236 카이스트의 유령들 - ‘동시대인’의 죽음, 동시대인의 ‘죽음’ | 엄기호

에필로그 : 교육 불가능의 시대, 가르친다는 것은
260 이계삼 선생님께 | 안준철
273 안준철 선생님께 | 이계삼
284 ‘교육 불가능’과 《녹색평론》적 사유에 대한 소고小考 | 윤지형

 
<책 내용 소개>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을 말하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경쟁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는 교육 주체들,
살벌한 경쟁에서 낙오하고 학교에서 배제되고 추방당하는 학생들,
더 이상 학문은 하지 않고 취업 학원으로 변한 대학….
오늘날 한국 교육은 사실상 교육 불가능한 현실에 처해 있다.
하지만 교육 불가능을 넘어 희망의 페다고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바로 이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을 말하다

오늘날 학교는 사실상 ‘교육 불가능’의 공간이 되었다. 아이들은 수업을 외면하고, 교사에게 대들고, 잠을 잔다. 아이들끼리의 먹이사슬은 더욱 공고해지고, 폭력과 일탈은 더욱 광범위하게 확산되어 간다. 우등생은 학원에서 공부하고 열등생은 친구들 만나는 재미 하나로 학교에 간다. 한 해에 7만 명이 학교에서 밀려나는데, 이렇게 밀려난 아이들의 상당수는 정당한 대우를 받지 못하는 알바를 하며 연명하거나 성性산업에 편입된다. 학교는 좌절의 공간이고, 세상은 혼자 힘으로 헤쳐 나가야 할 정글이다.
교사들도 학생들만큼 무기력하다. 교사 집단을 관통하는 안락의 정서는 더욱 짙어지고 있다. 교사는 신자유주의적 교육개혁을 통해 ‘자기 혁신’이라는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포섭되고, 강화되는 평가 시스템 속에서 지식인으로서 정체성도 교육자로서 책무감도 내버린다. 일제고사로 대표되는 학교 간 경쟁이 강화되면서 교사들은 오로지 학생들의 성적으로 평가를 받게 되고, 결국 거대한 경쟁 시스템의 부속품이 된다. 전인교육은 고사하고 입시 교육에서도 주도권을 학원에 빼앗긴 교사들은 그저 학생들 스펙이나 정리해 주는 관리자로 전락했다.
그러므로 학부모는 학교와 교사가 방기한 몫을 떠맡아야 한다. 학부모는 아이가 일탈하지 않도록 감시하는 야경夜警이자, 학교 안과 밖의 모든 자원을 총동원하여 스펙 쌓기에 전념할 수 있게 스케줄을 관리해 주는 매니저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해서 아이를 명문대에 보내 놓지만 정작 아이들은 스스로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어른이 된다.

아프지만 솔직한 교육 현장의 목소리들

이 책은 오늘날 지옥으로 변해 가는 교육 현실을 정직하게 드러낸다. 1부에서는 신자유주의가 우리 교육에 미친 영향과 교육 주체들의 내면의 변화를 추적한다. 신자유주의 광풍 속에서 교사와 학생, 그리고 학부모는 경쟁과 자기 계발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며 신자유주의적 주체로 거듭난다. 2부에서는 주류 경쟁 속에서 소외되고 추방당했던 학생들의 이야기를 담았다. 학교는 경쟁을 따라오지 못하거나 저항하는 이들을 밖으로 쫓아내면서 체제를 유지해 왔을 따름이다. 학교가 표면적으로라도 모든 아이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은 명백한 거짓말이다. 3부에서는 신자유주의적 모순이 가장 첨예하게 드러나는 공간인 대학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이야기를 담았다. 시장의 논리가 학교를 지배하면서 대학은 더 이상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 아니게 되었다. 천문학적인 등록금을 대기 위해 알바를 하느라 정작 해야 할 공부를 하지 못하는 가난한 학생이 부지기수다. 치열한 생존경쟁은 학생들을 원자화하여 연대할 수 없게 한다. 대학 문제에 대한 바른 진단과 처방 없이는 교육개혁의 방향을 잡기도 어렵고, 대안적 삶과 사회에 대한 그림을 그릴 수도 없다. ‘교육 불가능’을 이야기할 때 대학 교육에 대한 비판을 늦출 수 없는 이유다.

교육 불가능을 넘어 희망의 페다고지로

이 책은 ‘교육 희망’이 아니라 ‘교육 불가능’이라는 언어를 사용한다. 하지만 이것은 좌절의 언어가 아니라 ‘래디컬한 희망’의 언어다. 희망은 현실을 정직하게 보는 데서, 현실의 교육 불가능성을 고통스럽지만 인정하는 데서, 그리고 새로운 철학과 방법을 치열하게 모색하는 데서 나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학교가 교육 불가능의 공간이 되어 가는 상황은 이런 현실이라도 유지되어야 할 이유가 있는 이들이나 학교를 통해 무언가 물질적 이득을 챙기려는 이들에게는 확실히 재앙일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진정한 교육의 의미와 한국 교육의 현실 사이의 괴리로 괴로웠던 이들에게는 새로운 지평이 열리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교육 불가능을 넘어 희망의 페다고지를 만들기 위한 노력은 바로 이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


<글쓴이>

혜원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 soul1905@hanmail.net
청소년인권행동 아수나로에서 활동하며 십대의 끝자락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권을 만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지금 이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하게 반짝이는 사람입니다.

최은정 교육공동체 벗, 오늘의 교육 기자 eunja17@naver.com
30분에 한 번 있는 버스를 놓치면 읍내까지 40분을 걸어가야 하는 시골에서 19년을 살고 서울에 왔습니다. 대학 4년 동안 친구들과 교육 잡지 같지 않은 교육 잡지를 만든 게 대학에 와서 연애 다음으로 잘한 일 같습니다. 재밌는 교육 잡지를 만들고 싶다던 꿈의 첫걸음을 <교육공동체 벗>에서 이제 막 시작했습니다.

채효정 학벌없는사회 운영위원, 경희대 후마니타스칼리지 강사 measophia@naver.com
공부하는 사람, 실천하는 사람, 그리고 ‘엄마’입니다. 셋을 다 하려니 셋 다 늘 제대로 못하고 삽니다. 그래도 그 셋으로 살고자 합니다. 2000년부터 <학벌없는사회> 활동을 시작하여 10년째인 2010부터는 ‘학교 밖 청소년과 함께하는 인문학교실 - 삶은 달걀?’이란 프로그램을 통해 학교 밖 청소년들을 만나고 있습니다.

정용주 서울 백석초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edcom234@hanmail.net
어른이 되어 가면서 점점 세상에 대한 질문이 사라져 버리지만 그렇다고 습관처럼 살고 싶지는 않습니다. 완성된 무엇을 만들어 인정받기보다 시도하고 그러다가 깨지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미연 전 중등교사 oliveyeon@hanmail.net
21년 6개월을 끝으로 결국 학교를 자퇴하고 말았습니다. 퇴직을 결심하고 지낸 지난 몇 달 동안 이별할 것을 알고 사랑하는 일이 참으로 슬프다는 걸 알게 되었으며 학교를 떠나간 수많은 제자들의 심정이 비로소 날것으로 내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가지 말라는 아이들의 부름을 뒤로하고 ‘용기를 내어 그대가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결국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된다’(폴 발레리)는 말을 가슴에 새기며 이제 뚜벅뚜벅 새로운 길을 찾아 걸어가려고 합니다.

이계삼 경남 밀양 밀성고 교사,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ygs0720@hanmail.net
경남 밀양에 있는 밀성고등학교에서 국어 교사로 일하며,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입니다.
여러 매체에 교육과 사회에 관한 글을 쓰고 있으며, 이를 묶어서 몇 권의 책을 냈습니다.

윤지형 부산 내성고 교사 besanson@hanmail.net
‘진리를 등불 삼고 나를 등불 삼으라’는 붓다의 가르침을 생각하곤 하는 부산의 국어 교사입니다.

오혜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수료 ohae@hanmail.net
식민지 시대 문화론 같은 걸 공부하고는 있지만, 사실은 하루 종일 손바닥이 노래지도록 귤 까먹으며 드라마를 볼 수 있는 지상낙원을 꿈꿉니다. 등록금 투쟁을 하면서 착하고 똑똑해졌다는 이야기를 자주 듣고는 크게 고무됐습니다. 운동이 존재를 바꾼다는, 그 말을 믿습니다.

엄기호 연세대 문화학 박사과정 수료,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uhmkiho@empal.com
최근까지 신자유주의 세계화에 맞서는 세계 민중들의 싸움을 한국에 알리는 일을 주로 해 왔습니다. 여전히 저항과 교육을 연결시키며 아이들을 자율적인 주체로 키우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연세대학교 문화학과 박사과정에서 공부하며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강의하고 있습니다. 인권연구소 ‘창’과 우리신학연구소의 연구원으로 있으며 급진적인 인권 담론을 만드는 것에도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펴낸 책으로 《닥쳐라 세계화》, 《아무도 남을 돌보지 마라》, 《이것은 왜 청춘이 아니란 말인가》 등이 있습니다.

안준철 전남 순천 효산고 교사 jjbird7@hanmail.net
남녀공학인 전문계고에서 영어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정년이 5년도 채 남지 않은 늙다리 교사지만 정신연령은 그보다 한참 아래입니다. 저는 학생들 앞에서만 제 자신이 안심이 됩니다. 하여, 다시 태어나도 교사가 되고 싶습니다. 아이들을 사랑하는 한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은,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진 낭만파 교사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서유정 덕성여대 문화인류학과 예비 졸업생 chloecre@gmail.com
너무 용감하고 씩씩해서 무서워 보일 수도 있지만 알고 보면 소녀 감성. 가끔은 생각이 너무 많아서 사는 게 힘든 스물넷. 결국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지만 여전히 대학원을 꿈꾸며 고군분투.

박소진 연세대 강사 sojin618@gmail.com
일리노이대학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박사 학위를 받고, 그동안 연세대학교 등에서 문화인류학, 여성학, 질적연구방법 등을 강의해 왔습니다. 한국 어머니의 자녀 교육, 대학생의 해외 연수 등 자기계발 실천에 대해 신자유주의적 변환과 연결하여 연구를 해 왔고, 최근에는 중국인 유학생에 대한 연구를 진행 중입니다. 일상 속에서 사람들이 스스로 치유하면서 자기 삶을 변화해 나가는 여정에 대해 호기심이 많습니다.

민가영 한양대 비교역사문화연구소, HK연구교수 gendertrouble@hanmail.net
신자유주의 시대 언더클래스 10대들의 주체에 관한 연구를 했고 그 문제의식을 이어 받아서 인간들 간의 관계성을 끊어 버리고 개인화시키려는 새로운 권력의 작동 방식에 대한 대안을 ‘인간 존재에 관한 조건’에 대한 연구를 통해 구체화시키려고 하고 있습니다.

문수현 서울대 영문과 석사과정,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 anfuq@naver.com
2004년에 대학에 입학해 지금은 영문과 대학원생으로, 학교에 머문 지 7년째입니다. 학회와 동아리 활동에서 배운 것들이 수업에서 얻은 것들보다 유익했고, 논문을 쓸 때보다 학생자치언론 《교육저널》에 글을 쓸 때 더 많은 성장을 경험하기도 했습니다. 그래도 학문을 계속하고 있습니다. 대학에 대한 깊은 애증 속에서 더 올바른 배움을 향한 갈망을 길어 내길 희망하면서.

류경원 서울 영남초 특수학급 담당 교사 jayunari@hanmail.net
특별한 교육적 지원이 필요한 학생들에게 진정한 도움을 줄 수 있는 특수교사로 살려고 노력합니다. 아이들과 함께 성장 중입니다.

노영수 중앙대 독어독문학과 학생 dogmaspiel@hotmail.com
지난 2010년, 중앙대의 기업식 구조조정에 반대하는 시위를 벌이다 학교에서 쫓겨났습니다. 퇴학 무효 소송에서 승소했지만 바로 학교로 돌아가지 못한 채 다시 14개월의 정학 처분을 받았고 징계 기간이 모두 지난 2011년 2학기부터 다시 학교를 다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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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암살이라는 스캔들(나이토 치즈코,  고영란 역, 역사비평사)

  

 '암살' 사건을 다룬 일본 메이지시대 미디어 서사의 욕망을 다룬 책이다, 라고 간단히 정리할 수도 있겠지만, 식민지 시기를 공부하고 있는 내겐 여러 모로 꼼꼼히 읽어보고 싶은 책이다. 그 자체로 공부가 될 뿐 아니라, '담론 연구'라는 방법론 자체에 대한 성찰의 가능성도 동시에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단 일본 메이지 시대 신문기사를 읽는다는 건, 식민지 조선의 관제 매체와, 당국의 영향을 지배적으로 받았던 민간매체를 주된 사료를 삼았던 한국의 연구자들에게 확실히 '외부'를 제공한다. 제국의 신문지상에 등장한 명성황후와 김옥균, 안중근의 모습은 새롭게 보인다. 그들은  제국의 욕망 지형도 안에서 요청되는 배역을 부여받고 다시-새롭게 '해석의 대상'이 된다. 그런데 이 책의 의의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저자는 나아가 '식민지-여성'이라는 타자를 재생산하는  제국의 남성지배 미디어 공동체에 의해 주조된 '이야기' 그 자체를 문제 삼고 있다. "텍스트에 담긴 암묵적 전제와 결론들은 결코 독자=미디어 공동체의 은밀한 욕망을 거슬러서는 안 된다"는 것이야말로 미디어 내러티브의 가장 강력한 성립조건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끊잆없는 스테레오타입을 통해 이야기 주체의 욕망을 재생산하는 '제도로서의 이야기' 그 자체가 의심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암살 이야기' 뿐 아니라, '이야기를 암살'한다는 저자의 기획이 "암살이라는 스캔들"이란 제목에 담겨 있는 것이다.

 

2. 프레카리아트, 21세기 불안정한 청춘의 노동(아마미야 가린, 김미정 역, 미진북스) 

   

프레카리아트, 이 말은 예전에 읽은 아마미야 가린의 전작 <성난 서울>(꾸리에, 2009)에서 처음 알았다. 나는 그 책을 우익 록밴드 보컬로부터 좌익 문화운동가로 '전향'한 한 일본인 젊은 여성의 이념적 편력과 문화적 실천이 궁금해서 읽었었다. 사실 아직도 그녀가 누구인지는 잘 가늠되지 않는다. 다만 얻은 것은 있었다. 눈에 띠는 요란한 의상을 입은 채로, 닥치는대로 '현장'에 나타나고, 뭔가를 외치거나 쓰면서 끊임없이 사람들을 만나는 그녀가, 책상에 앉아 오직 '머리'로만 읽거나 상상하는 내게, '눈'과 '머리'의 한계로 보지 못한 뭔가를 알려줬다. 한국에 88만원 세대가 있는 것처럼, 일본에는 '로스트 제네레이션'이 있고, 이탈리아에는 '1000유로 세대', 그리스에는 '600유로 세대'가 있다는 것. 그러니까 이건 그야말로 '만국의 (청년)노동자'의 문제라는 것. 그리고 이러한 삶의 조건을 타개하기 위해, 그들은 끊임 없이 '글로벌적'으로 뭔가 일을 벌이고 있다는 것. '스쾃(squat)'같은 삶의 방식이 있다는 것도 그 책을 통해 처음 알았다. 프레카리아트, 프리터, 청년실업자, 88만원 세대, 잉여... 등등 비정규적인 삶의 '양식'을 가진 이들을 부르는 이 서로 겹치는 명칭들의 다양함은, 어쩌면 '실재'함에도 불구하고 '유령'처럼 존재하는 이들의 정체성을 반영하는 것 같다. 그러나 청년(비정규)노동자는 엄연히 전일적인 시장지배 체제가 낳은 구조적 실재다. 이들은 정말 어디서, 어떻게 살고 있고, 어떤 '기획'을 가지고 있나. 이 책은 그들의 목소리를 들어보기 위해 쓰였다.

 

3. 조선인극장 단성사 1907~1939(이순진, 한국영상자료원) 

 

 언젠가부터 식민지기 조선 영화를 찾아보는 것에 관심을 갖게 됐다. 식민지 조선에서 모던과 첨단의 상징으로 간주됐던 '영화'를, 21세기인 지금 본다는 것은 기묘한 체험이다. 과연 우리는 같은 텍스트를 보는 것일까. 식민지 조선의 영화를 본다는 것은, 영화의 내용, 영화에 나타난 당대의 풍속, 영화를 상영하는 극장의 모습 등을 상상하는 것 모두를 포함한다. 그들도 영화관을 나오면서 조금은 어색함을 느꼈을까? 그렇다면 그건 '영화'라는 미디어 자체의 낯섦 때문일까? 그들도 방금 본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을까? 이 모든 '상상'이 단지 '공상'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는 걸, '단성사'는 말한다. 그런 상상을 더 해보라고 자꾸만 부추긴다. 과연 단성사라는 '장소'는, 거기 있는 것 그 자체만으로 이미 '환상의 영사기'다. 식민지 조선에서 '극장'은 그 자체로 꿈의 장소이면서 동시에 치열한 문화정치의 현장이었다. 그곳은 제국과 자본의 굴레 속에서 힘겹게 구축된 '이등국민'의 '영화 산업'이 펼쳐진 '현장'이다. 거기에 활동사진과 무성영화 시절을 거쳐 자체적인 조선영화를 제작하게 되기까지의 지난했던 조선영화의 꿈이 모두 아로새겨져 있다. 저자가 '단성사'라는 "흘러간 이름"을 다시 소환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영화가 스크린 위에서만 펼쳐지는 빛의 작용이 아니라 그 뒤에서 벌어지는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현상이기도 하다"는 것. 온갖 부침을 겪으며 아직, 거기 있는 단성사를 읽자.  

 

4. 깔깔깔 희망의 버스 - 정리해고 비정규직 없는 세상을 위한(깔깔깔 기획단, 후마니타스) /  25일 - 현대자동차 비정규직 울산공장 점거투쟁 기록(박점규, 레디앙)

 추천페이퍼에 '이런 책'들을 소개하는 건, 반드시 어떤 '신념' 때문만은 아니다. 공부하기 위해서다. 한국 노동자의 삶과 노동계급의 역사에 대한 기록 및 이론들을 다룬 몇 가지의 책들을 알고 읽게 된 건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그건 좀 기이한 체험이었다. 나는 왜 이전에 이런 책들을 알지 못했을까. 생각해보니, 한국 노동계급의 투쟁사를 나는 한번도 '제대로' 배운 적이 없다. 초중고는 물론 대학교에서도, 그리고 미디어에서도 그런 책을 소개해 준 적이 거의 없었다. 지금까지 투쟁과 혁명을 '글로 배워야 했던' 나의 아비투스에 대해 약간의 난처함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니 실은 오히려 '글로도 배울래야 배울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어떤 책들은 미디어에 과잉 노출되는데, 어떤 책들은 있는지조차 모른다. 온갖 것들이 다 상식과 교양의 대상이 되는 이 시대에, 유독 노동자에 관한 '앎'만은 철저히 은폐된다. '김진숙'과의 연대는커녕, '김진숙'이라는 존재를 알고 이해하는 데에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린다. 결코 간과해서는 안되는 노동자의 삶이 있고, 그것이 나와 무관하지 않으며, 나도 할 수 있고 해야 되는 일이 있다는 걸, 항상 너무 늦게 안다. 한진중공업 사태를 보도하(지 않)는 한국 미디어들을 보라. 늘 그랬지만, 한국 지배동맹의 가장 강력한 전략은 노동자들의 삶을 결코 가시화하지 않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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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의딸 2011-08-09 09: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깔깔깔 희망버스>에 한표 던집니다. 85호 크레인은 김진숙 위원의 문제만도, 혹은 한진 노동자의 문제만도 아닌 우리 모두에 관한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윈터 2011-08-09 16:45   좋아요 0 | URL
비의딸님 반갑습니다. 그렇죠. 며칠 전에도 <창비주간논평>에 실린 난감한 글과, 그에 대한 프레시안에 실린 반론문을 봤는데.... 이렇게 팩트와 논점을 가지고 대립하는 일이 왜 벌어진 걸까 생각해보면, 아무도 한진사태를 들여다보려고 안 했기 때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언론에서 쓰면 쓰는 대로, 안 쓰면 안 쓰는 대로, (안) 읽고 넘기고 마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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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나는 가끔 속물일 때가 있다 - 두 남자의 고백>(악셀 하케 & 조반니 디 로렌초, 배명자 역, 푸른지식) 

 로쟈가 적확하게 지적한 대로, 이 책의 제목은 독자를 교란시킨다. "나는 가끔 성자일 때가 있다"가 더 겸손한 제목인데, 우리는 종종 그 반대로 착각한다. 그렇다고 할 때, 이 책이 강력하게 표방하는 '솔직담백한' 이야기를 이 두 아저씨의 대화로부터 기대하기란 힘든 일이 아닐까.(아저씨 두 분의 이야기를 참견 없이 장시간 듣는 건 원래 좀 험난한 일이지만...^^) 독일의 두 저명한 지식인 남성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자기 안의 모순, 지식과의 괴리 등에 대한 고백은 우리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 학생운동 이력에 대한 비판적 성찰, 사회적 책임, 정의와 같은 가치에 둔감해지며, 오직 쓰레기 분리수거를 통해서만 자기보존과 옹호의 길을 구하게 된 이들. 그런데 이들의 속물근성에 대한 고백이 오히려 여느 속물들에게 안정적인 자기위안의 내러티브를 마련해주는 것은 아닐지. 자폭할 줄 아는 속물이야말로 '고급속물'이기에. 자, 들어나 봅시다. 속물지배의 대한민국에서 '속물'에 대한 (자기)성찰은 일단 매우 드무니까.  

  

2. <자기만의 방 - 고시원으로 보는 청년 세대와 주거의 사회학>(정민우, 이매진)

 "석사 학위 논문이라는 종(種)의 지위에 관한 의문 또는 의구심"에 답하거나,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 쓰여진 책이란다. '고시원', 과연 석사학위논문다운 주제다 (양자는 고학력,고성취를 위해 마련된 시공간이면서 동시에 과도기, 결여 ... 등의 용어와 잘 어울린다는 점에서 공통적이다^^)  "자기만의 집"이 아니라는 것에 주의할 것. 이 책은 부제가 잘 말하고 있는 것처럼, '고시원'을 통해 본 청년 세대의 현재와 미래에 관한 책이다. 마침, 저작의도를 아주 잘 말해주는 구절이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지적 자유를 얻으려면 ‘자기만의 방’이 필요하다고 했다. 달리 말하면 독립의 조건이다. (...) 이 시대의 ‘자기만의 방’이라 할 만한 고시원은 독립의 조건을 준비하는 자리인 동시에 그 조건의 불가능성을 폭로하는 자리다." 이 '집 아닌 집'에 사는 이들이 형성하는 '정서적 (비)공동체'의 사연을 담은 몇몇 이야기가 떠오른다. 김애란의 <노크하지 않는 집>, 일드 <라스트 프렌즈> 등등. 부동산 투기가 들끓는 한국에서 청년들의 '집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슬프게도 흥미롭다.

 

3. <분노하라>(스테판 에셀, 임희근 역, 돌베개) 

'분노하라'. 미쳐라, 목숨 걸어라, 뭐해라... 등등 예전에 나온 그 어느 명령어보다도 따르고 싶어진다. 아니, 사실 그런 명령어투를 쓰지 않아도 절로 분노하게 되는 사회에 살고 있다. 한진중공업, 홍대, 강정 해군기지... 그 얼마나 많은가, 분노할 일들. 불과 30여 페이지 밖에 안 되는 이 작은 정치 팜플렛이 가져온 나라 안팎의 '사회적 분노'의 결과들을 볼 때, 우리는 놀란다. 그리고 곧 알게 된다. 그 분노 신드롬이 실은 이 책 한 권이 야기한 결과가 아니라, 그동안 우리가 냉소와 무관심으로 가장한 채 억압해왔던 '변혁'에 대한 열망들의 집합임을. 이 책에서 저자는 레지스탕스 정신의 핵심을 이루었던 '불의에 대한 불복종'을 호소한다. 93세 노장의 '분노론'은 이런 것이다. '분노'는 '격분'과 다르다는 것. 진정한 분노는 '비폭력', 즉 '자기 자신을 정복한 후, 타인의 폭력 성향을 정복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하여 오직 '희망의 폭력'만이 가능하다는 것. 그리고 그것의 실현태는 '투표'와 '참여'라는 것. 어떤가, 마음에 드시는지. 21세기 한국의 '다중'이 내린 결론과 견주어보고 싶어 진다.

 

  

4. <소금꽃나무>(김진숙, 후마니타스) 

 183일째다. 김진숙 지도위원이 85호 크레인에 올라간 지 말이다. 비도 엄청 오는데 그 검은 구름 아래서 끝내 버틴다. 폭력과 배신과 거짓말의 드라마, 직무유기를 밥먹듯 하는 한국 언론을 정면으로 내려다보며, 오직 심장처럼 깜박이는 트위터만을 등대 삼아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2007년에 출간됐던 <소금꽃나무>의 한정판이  올해 6월에 다시 나온 건, 바로 그녀를 지지하고, 그녀와 연대하기 위해서다. 같은 책을 두 권 갖게 된 것, 처절한 불행이다. ... ... 그러나, 같은 책이지만 같지 않다! 희망버스는 연이어 내려간다. 그녀는 "강제로 끌려내려가지 않는다." 김진숙의 인생, 한국 노동운동의 역사, 어떻게 봐도 '소금꽃'투성이인 그 시간들에 대한 이야기. 다른 어떤 저명 인사의 추천사도 필요 없다. 그녀를 아는 사람들은 온 마음으로 이 책을 추천할 거다. 영웅도, 작가도 아닌 그녀는 내가 아는 그 어느 작가보다 글을 잘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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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과학 분야의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1. 문화는 정치다(장 미셸 지앙, 목수정 역, 동녘) 

"문화는 정치다". 온갖 질문들이 빗발치게 하는 제목이다. 이 책의 키워드는 '문화정치'로 설정되어 있으며, 이 책의 소개란에는 '문화'와 '정치'의 생소한 결합에 대해 말하는 것이 저술의도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문화'와 '정치'의 결합은 사실 하나도 안 생소하다. 아마 "정치는 문화다"라고 말해도 이의가 거의 없을 정도로, '문화'와 '정치'의 상호보족관계에 대해서는 익숙하다. 그렇다면, 이 책이 '문화정치'를 어떻게 정의하고 있는지부터 물어야겠다. '문화정치'란 말은 이미 '1910년대의 무단통치에 이어, 3.1운동의 영향으로 수행된 1920년대 일제의 통치양식'을 일컫는 말로 학술적 시민권을 얻었다. 그런가 하면, 최근에는 TV와 영화, 음악과 공연과 같은 대중미디어를 다룬 비평들 또한 '문화정치'를 화두로 삼고 있다. 과연 '문화정치'란 무엇인가. 이 책은 이 물음의 답을, 최근 정치적으로 가장 '뜨거운' 나라인 프랑스의 역사로부터 찾는다. 물론 역자는 아주 적실하게도 최근 가장 '선동적인' 여성 칼럼니스트 목수정이다. 

 

2. 다미가요 제창(정영혜, 후지이 다케시 역, 삼인) 

   이 책 제1장에는 저자의 에누리 없이 완벽한 논리가, 가장 아름다운 문장으로 번역되어 있다. "결국 피차별자가 그 차별을 고발하는 것은 단지 자기 자신에 대한 의무이기 때문이다. 차별을 방치하지 않기 위한, 스스로 내면화하지 않기 위한 의무 말이다. 결코 차별을 없앨 책임을 혼자 도맡아서가 아니다. 그런데 ‘다수자’들은 이러한 ‘소수자’의 고발을 <지원>한다는 형태로 반차별의 태도를 취하려고 한다. 그러나 차별과 싸우는 주체가 되고 차별을 없애는 데 사회적 의무와 책임을 다해야 하는 것은, 오히려 차별하는 사람들이지 피차별자가 아니다. 그런 것을 ‘다수자’가 ‘소수자’를 <지원>한다고 하는 순간, 그 책임은 교묘하게 ‘소수자’에게 전가되고 ‘해주기’, ‘받기’라는 상하관계가 생겨나 다시 ‘다수자’가 우위에 선다. 이러면 차별 구조를 똑같이 덧칠하는 것밖에 되지 않는다." 최근 한국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재일조선인의 문제의식이 강상중, 서경식과 같은 남성의 것이었다면, 이 책에서 2.5세 여성 재일조선인인 저자는 인종주의와 국가주의의 공모에 '젠더 정치'마저 가세한 차별의 구조를 사정 없이 파헤친다. 그리하여 "다미가요 제창", 기미(君, 군주)를 다미(民, 민, 백성)로 바꿔 국가로 정해진 기미가요 대신 다미가요를 부름으로써, 강요된 국민국가의 국민 위치를 넘어서자는 결의가 담겨 있는 제목을 달았다 한다. 너무 익숙한 결론인가? 그 아쉬움이 바로 '다문화주의'에 대한 우리 사회의 사유가 이제 막 시작된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과 유관한 것이 아니겠는가. 

 

3. 느낌의 공동체(신형철, 문학동네) 

  기어코 '추천'을 하고야 말게 만드는 게 신형철의 힘이라면 힘이다. 신형철이라는 눈에 띠게 똑똑한 사람이 이 미치게 찌질한 시대에마저 그렇게 열심히 읽고 쓰지 않았다면 문학 따윈 옛날에 버렸을 거다, 라고 말하게 만든다. 내가 신형철에 대해 가지고 있는 믿음과 실망은, 그가 고백하는 문학에 대한 애증, 그것과 약간 닮았다. (물론 나는 그처럼 열렬하게 고백하지 않을 것이고, 최대한 계산하며, 끝내 숨길 것이지만) 아직 잊지 않고 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그가 쓴 문장들의 울림을. 그때 '다시' '미문'이 가진 위안을 힘을 믿기 시작했다. ('미문'에 대해 주관적으로 재정의하게 해줬다는 점에서 그에게 조금 감사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지혜와 성실에 대한 찬탄을 들을 때면 '나도 조금은 그렇게 느껴', 라고 동의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온갖 시와 소설집 머리말과 뒷표지에 예의 그 '미문'으로 된 주례사 멘트를 쏟아낼 때는 숱하게 실망도 해봤다. 이제부턴 미워하겠다고 '거의' 다짐도 해봤다. 내가 보기에 그는 '문학'에 대해서는 '급진적'이고, '정치'에 대해서는 '온건한' 듯 했다. 그런 이분법이 어디서 튀어나왔는지, 그런 걸 왜 싫어했는지 가끔은 나도 스스로에게 묻고 싶다.  그런 걸 다 걷어치우고, 위악과 교만, 과장과 허영 없이 마음을 건드리는 문장들이 요즘 내게 필요하다. 그가 적은 서문의 말대로 "느낌의 공동체", 그 소박한  공동체에 가끔은 귀속되고 싶단 말이다. 

 

4. 포 피시(폴 그린버그, 박산호 역, 시공사) 

 '올해의 가장 멋진 책표지' 같은 걸로 뽑아줘야 할 것만 같은 책(당연히 한국어판 말고 원서의 것) <포 피시>의 네 주인공은 연어, 농어, 대구, 참치다. 헛, 다 맛있는 것들!!! 생선 그림을 보고 거의 파블로프의 개처럼 반응하고 있을 뻔한 순간에 이런 문장이 눈에 들어왔다. "영국 정부에서 권장하는 것처럼 일주일에 두세 번씩 생선을 먹어서 영양을 섭취해야 한다는 기준이 전 세계인에게 적용된다면 지금보다 바다가 서너 개는 더 있어야 한다" 아, 이 책은 강제 양식과 남획을 자행하는 인간의 탐욕에 의해 파괴되는 해양현실을 조명한 책인가보다. 그래서 이 책은 서두에서 '단 한 번이라도 물고기를 식품 아닌 생명으로 여긴 적 있는가'라는 질문을 던졌다. 전에 나온 또 하나의 좋은 책, <헝그리 플래닛>(윌북, 2008)도 이 물음에 대해 생각해보라며 독자에게 '얼굴을 가진 동물들'을 보여줬었다. 또랑또랑한 눈을 가진 소와 돼지, 양들이 네모 반듯하게 잘라져 부위별로 포장되는 과정은, 적어도 그걸 보는 그 순간에는 '불편한 진실'로 다가왔었다. 그런데, '물고기'는 얼굴을 가졌나? 식물에게서 '얼굴'을 찾지 않듯, 물고기의 '통각(痛覺)'도 조금 상상하기 힘들다. 그래서인지 이 책은 그 문제에 답하기 위해 '물고기의 생명'에 집중하기보다, '식량자원과 환경파괴'의 문제로 다뤘다.  이 책을 읽으면서 두렵도록 검푸른 바다와 물고기의 얼굴들을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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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고쿠도 2011-06-08 10: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문화는 정치다>를 갖고 있습니다. 아직 읽지 못했지만...
재일조선인이 쓴 <다미가요 제창>이 참 끌리네요.

윈터 2011-06-08 20:48   좋아요 0 | URL
앗, 교고쿠도 님 반갑습니다.
<문화는 정치다>는 순전히 '문화정치'에 대한 오랜 관심과, '목수정'에 대한 최근의 관심, 그리고 '프랑스'에 대한 일시적 관심에 의해 선택했습니다 ㅎㅎ 읽어보고 싶어요.
<다미가요 제창>은 저도 기대가 되는데요. '재일조선인'이라는 카테고리 안에서 남성의 목소리들과 동질화되었던 '여성' 재일조선인 학자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을 거라 여겨집니다. 이미 일본에서는 많이 읽히고,여러 독자들에게 귀감이 된 책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역자의 성실성과 영민함에도 깊은 믿음을 가지고 있고요. ^^

교고쿠도 2011-06-08 21:17   좋아요 0 | URL
사실 일본의 천황제 자체를 회의적으로 보고 있는 저로써는(저는 재일조선인들과 비슷한 정서를 갖고 있는듯 합니다), 저 책 반드시 읽어봐야겠어요. 서경식, 강상중, 이양지, 현월, 유미리, 양석일, 원수일, 이회성 등의 재일조선인이 쓴 책들을 서재에 한가득 꽂아두고 있습니다. ^^
(오죽했으면 도일해서 재일조선인 문학을 연구하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습니다. 한국에서는 국문학을 전공했지만...)

윈터 2011-06-08 22:06   좋아요 0 | URL
네. 이 문제에 관심이 많으시군요. 교고쿠도 님과 앞으로 유익한 이야기를 많이 나눌 수 있을 것 같네요. ^^
 

<오늘의 교육> 2호(2011. 5)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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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이 보낸 ‘475시간’에 대한 기록


 

지난 겨울을 생각하니 벌써 온몸에 으슬으슬 한기가 느껴진다. 한결같은 찬바람을 맞아도 그게 결코 익숙해지지 않았던 겨울이었고, 나는 그때 기상예보를 유난히도 열심히 챙겨 봤다. 약한 바람, 센 바람, 더 센 바람, 비바람……. 나는 바람의 소리와 결, 그 속도와 세기를 열심히 관찰하게 됐고, 그에 따라 사람의 마음도 강해지거나 약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바람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이 이야기를 언젠가 꼭 글로 쓰고 싶었다.

   2011년 2~3월은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들에게 아주 특별한 시간이었다. 뭐부터 써야 할까. 아와 피아彼我, 주관과 객관이 뒤섞인 시간. 먼저 우리의 ‘투쟁 아닌 투쟁’의 경위를 말해야겠다. ‘등록금 투쟁’, 약칭 ‘등투’, 속칭 ‘개나리 투쟁’. 아, 다 아는 얘기인가.

 

전야前夜, ‘마음이 소금밭’

 

   전쟁 같은 학기를 마친 후 겨우 만난 꿀 같은 방학이건만, ‘마음은 소금밭’이다. 휴가를 가거나 귀향한 사람은 없다. 세미나와 논문, 그리고 중단 없는 일, 일, 일……. 4,749,000원이라는 금액이 적힌 등록금 고지서를 받아 든 두 손은 떨렸고, 마음은 급했다. 작년에 비해 4.2% 인상된 금액이었고, 학부 인상률 3%를 훨씬 상회하는 수치였다. (그러고 보니 작년 이맘때도 학교 당국은 학부 등록금은 동결한 반면 대학원 등록금은 5.1%나 인상해 놓고, 등록금 동결을 통해 학생들의 고통을 분담했다며 대외홍보에 열을 올렸다.)

  

   그 숫자는 매우 비현실적으로 보였지만, 우리가 당면한 상황은 꽤 구체적이었다. 누군가는 대출 절차를 알아보느라 분주했고, 누군가는 아르바이트를 한다는 이유로 세미나에 자주 결석했으며, 누군가는 소리도 없이 휴학했다. 그들이 지금까지 대학원에서 보낸 시간과 노력이 아까웠지만, 아무도 그들을 붙잡거나 나무라지 못했다. 교내 장학금은 등록금에 비해 턱없이 적고, 그나마 있던 인문학 장학금 제도도 폐지됐다. 학부 등록금 인상률은 정부 권고안에 따라 3% 미만으로 제한되어 있다지만, 대학원 등록금에 관해서는 아무런 규제도 없다. 그런 가운데 5년간 등록금이 무려 100만원이나 올랐다. 그런데도 달라진 건 없다. 학교 건물은 늘어만 가는데, 연구 공간은 여전히 부족하고, 개설된 수업 수는 적으며, 학생 복지는커녕 도서관에는 책도 없다.

 

   대학원생들이 등록금 투쟁을? 그런 말은 들어본 적 없다. 그나마 조금 불평이라도 할라치면, 곧바로 ‘대학까지는 국민 정서상 의무교육에 가깝다지만, 대학원? 니들이 선택한 거잖아!’라는 핀잔만 돌아올 뿐, 아무도 대학원생에게 관심 갖지 않는다. 한국 사회에서 가장 안 움직이는 나약하고 안이한 부류들. 아무도 안 읽는 글을 읽거나 쓰는 데 홀로 만족하고, 교수의 심부름을 하느라 온 청춘을 다 보내도 끝내 저항하지 않을 자들. 시간강사들의 열악한 현실이 가까운 미래인 줄 알면서도 그저 참는 자들. 대학원에서 공부한다는 것이 꼭 죄짓는 것만 같다.

 

   언제까지 참아야 하나. 등록금을 대기 위해 일하다가 쓰러지거나, 대출 빚을 갚다 못해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다는 보도 기사는 거짓이 아니다. 우리는 죽어 가고 있다. 그래서 어느 날 누군가가 “뭐라도 좀 해봅시다!”라고 말했을 때, 우리는 놀라거나 망설이지 않았다.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 지금 움직이지 않으면 아무 것도 바뀌지 않는다.

 

   가칭 ‘박카스 프로젝트’가 시작된 건 2월 10일 즈음이었다. 모두들 힘들겠지만, 박카스라도 마시고 힘내 보자며 서로를 격려했다. 우리는 대학원생들이 더 이상 학교 당국의 부당한 요구에 순순히 굴복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기로 했다. 그간 읽었던 책에 적힌 혁명과 진보에 대한 앎을 총동원해 우리는 열띤 토론을 벌였다. 1980~1990년대에 격렬했던 투쟁 사례들이 떠올랐지만, 우리는 그 기억에 쉽게 몰입하지 못했다. 우리는 ‘싸움’ 또는 ‘투쟁’이라는 역사적 용어의 사용을 의도적으로 꺼렸고, 대신 우리의 움직임을 ‘운동’이라 부르며 ‘혁명’과 유비했다. ‘투쟁’이 정의에 대한 열정과 특유의 배타적 폭력을 동시에 상기시키는 말이었다면, ‘혁명’은 아직 한 번도 본 적 없는 미지의 것이었고, 그 내용은 우리가 채워 나갈 것이었다. 인문학을 공부하는 대학원생 정서에 걸맞은 변화의 움직임을 만들고 싶었다.

 

   우리는 비민주적이고 불합리하게 책정된 문과대 대학원 등록금액인 4,749,000원에 반대하는 의미로 2월 16일부터 3월 7일까지 ‘475시간’ 동안 릴레이 1인 시위를 하기로 했다. 장소는 학교 본부가 있는 곳이자, 이 학교에서 가장 비싸고 상징적인 건물인 600주년 기념관 앞으로 정했다. 20일간의 짧지 않은 여정이 될 터였지만, 한 명이 하면 475시간, 10명이 하면 47.5시간, 20명이 하면 24시간이다. 그래서 우리는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교대 시간표’라는, 세상에 없는 표를 만들었다. 각자의 시위 시간대가 적힌 네모 칸에 빼곡히 배치된 26명 동학들의 익숙한 이름들이 왠지 다르게 보였다. 그건 시각적으로 무척 아름다웠는데, 마치 세상에서 가장 뜨겁고, 가장 불온한 ‘성좌’처럼 보였다. 이제 준비는 끝났다. 목표는 2011년도 등록금 동결, 대학원 연구 환경 개선, 총학생회의 반성과 쇄신! “춥고, 따분하고, 불쌍해 보일 수도 있지만 ‘즐겁게’ 해보자!”

 

싸움 혹은 축제의 시간

 

   ‘성균관대 국어국문학과 대학원생 일동’의 이름으로 총장 및 각 부서 처장에게 우리의 운동 취지와 요구 내용을 담은 길고도 열렬한 편지를 발송했다. 어떤 말이든 좋다. 일단 답하시라.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일동’이란 정확히 누구를 말하는 것이냐”라는 참으로 촌스러운 물음이었다. ‘주동자’, ‘배후’ 운운하는 걸 보니 근 십 년간, 이 학교의 일천한 운동 역사를 알겠다. 학교 당국이 이런 구닥다리 매뉴얼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를 그동안 우리는 거의 주지 않았던 것이다. 반성하고 또 반성한다.

 

   2월 16일. 드디어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의 시작을 알리는 성명서가 교내 게시판에 나붙었다. 첫 타자가 별 어색함도 없이 거대한 건물 앞 벌판에 홀로 서 있고, 학우들이 “파이팅!”을 외치며 주먹을 불끈 쥐고 지나간다. 좋은 시작이다. 그런 격려가 ‘우리의 힘’이라는 걸 알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록금은 학생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한 ‘등록금심의위원회’(이하 ‘등심위’)와 협의로 결정한 것이니 아무런 문제가 없으며, 등심위 자료 공개는 대학원 총학생회의 소임이므로 학교는 그에 대한 아무런 책임이 없다는 것, 등심위 자료의 산출 근거를 학생들이 알아야 할 이유는 없다는 것, 신임 총장이 부임한 이 시기에 국문과 대학원생들의 움직임은 ‘분위기’를 해친다는 것, 등록금 동결이나 재협상은 절대 불가능하며, 대신 국문과가 원하는 것이 있으면 들어주겠다는 것이 학교 측의 주장이었다. 학교 측은 학생 대표가 제 목소리를 낼 수 없도록 구조화된 등심위 제도를 십분 활용했으며, 학생들의 소통 요청에 대해 고압적이고 불성실한 태도로 일관하거나, 국문과에 특혜를 주겠다는 식으로 우리를 교묘하게 회유하려 했다.

 

   그날 이후, 아침부터 저녁까지 시위하고 밤에 집으로 돌아와 온라인 선전을 하는 날들이 계속됐다. 나는 매일 시위 내용과 그에 대한 소회를 학과 게시판 및 각종 포털 사이트와 블로그, 트위터 등에 기록했다. ‘공감’과 ‘추천’, ‘좋아요’와 ‘리트윗’에 기댄 밤들이 외롭지 않았다.

 

   둘째 날. 영하 2도의 날씨에 시위 현장에 오롯이 서 있자니 어제에 이어 학교 측이 또 부른다. 어제와 똑같은 얘기를 하며 앉아서 커피 좀 마시란다. 하지만 이미 배부른 걸요. 밖에 서 있을 때, 학생들이 주고 간 캔커피를 너무 많이 마셔서요. 3일째 되는 날에는 대대적인 학회가 있었다. 여러 학교에서 오신 선생님들이 행사장으로 들어가며 우리를 본다. 웃으며 눈인사를 나눈다. 평소라면 우리도 학회장에 들어가 선생님들의 논문 발표를 열심히 들었겠지. 그런데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나. 아아, 만물이 흔들리는 금요일이다.

 

   시위가 계속되자, 현장에 놓아둔 서명철에 우리의 운동을 지지하는 이름들이 빈틈없이 적힌다. 낯모르는 학우들이 따뜻한 음료와 핫팩을 슬그머니 쥐어 주고, 홀로 선 내게 이런 저런 말을 건넨다. 그 감동을 전할 길이 없어, ‘1인 시위’ 말고 ‘프리 허그’를 할까 잠시 생각해 본다. 동아시아학과, 철학과, 사학과, 교육대학원 원우들이 앞 다투어 연대를 선언하며 지지성명서를 발표했다. “공부하고 싶다. 먹고는 살아야겠다. 이 어디쯤에 대학원생들의 현실이 있습니다.” ‘날 것’의 분노가 담긴 이 격문과 투서들이 교내 게시판을 사정없이 메웠다.

 

   6일째 되는 날에는 복잡다단한 절차를 거쳐 등심위 회의록을 ‘겨우’ 열람했다. 학교는 학부 3.1%, 대학원 4.1% / 학부 3.0%, 대학원 4.2%의 두 안을 등심위에 참여한 학부 총학생회장과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제시하며 선택을 요구했다. 이 안에 따르면 학부생과 대학원생은 마치 일종의 ‘부채 공동체’ 같다. 학교 측은 대학원 총학생회장에게 ‘선배로서 후배에게 양보할 것’을 제안하고, ‘의좋은 형제’는 그에 따르기로 한다. 뜨거운 모교애와 형제애가 흘러넘치는, 참으로 감동적인 텍스트다. 대학원 총학생회장은 학부 등록금을 3% 이상 올릴 경우, 우리 학교가 정부의 보조금을 받지 못하게 되며, 등심위를 통해 이 사안을 결정하지 못하면 등록금에 대한 의결권을 가진 총장이 더 높은 인상률로 등록금을 책정해버리기 때문에 불가피한 결정이었다고 해명했다.

 

   22일, 졸업식을 앞두고 학교 측은 또 한 번 우리를 부른다. “졸업식 날만이라도 시위를 중단해 달라. 너희가 외롭게 시위하는 모습이 학교의 대외 이미지를 해친다.” ‘브랜드 이미지’, ‘미래지향적 융복합 학문 지향’ 같은 학교의 과잉수사는 언제 들어도 허무개그 같아서 우리에게 아주 작은 충격도 주지 못하지만, 대신 역설적으로 큰 영감을 준다. 그렇다. 외로움은 우리의 무기다. 우리의 외로움이 부를 상식적인 동정과 행동이 학교는 많이 두렵다.

 

   27일에는 비가 많이 왔다. 텅 빈 교정에서 주룩주룩 쏟아지는 빗소리만을 벗 삼아 서 있자니 누가 시키지 않아도 저절로 비장해진다. 과연 이 짓이 정말 ‘변혁의 무브먼트’인지 아니면 그냥 ‘개고생’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본다. 오들오들 떨며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답이 잘 안 나와서, 일단은 그냥 뜨거운 김이 훅훅 나는 엄마손 칼국수 같은 걸 생각하며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내 앞 주자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릴레이가 끝나면 꼭 물어봐야지.

 

   3월 2일. 믿을 수 없지만 개강이다. ‘학생은 사실 개강을 위해 있는 건데, 난 왜 자꾸 학교가 답답하게 느껴질까. 나쁜 학생! 나쁜 학생!’ 하며 현장에 서 있자니, 신입생들이 와르르 와서 서명철에 꼬물거리는 글씨로 잘 못 알아보겠는 메시지를 써 놓고 간다. 무른 손가락을 가졌어도 실은 제법 단단한 이들이겠지. 한편, 우리의 면담 요청을 한사코 외면하던 신임 총장의 발언이 학교 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려 우리의 전투력을 진작시킨다. ‘등록금 없으면 학자금 대출 받으라’(“비전을 통해 글로벌 리딩 대학으로 도약해야” <성대신문> 2011년 3월 2일)는 말씀. 대출 권하는 대학 총장이라니! ‘글로벌 리더’라서 그런지 과연 범인凡人들의 상식을 초월한다.

 

   드디어 3월 7일. ‘등록금 인상 반대 475시간 릴레이 1인 시위 종료 선언식’이 있는 날이다. 어젯밤에 게시해 둔 3차 성명서의 제목은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 아침부터 집에서 각종 자료를 준비하고 여기 저기 연락하느라 출발이 늦었다. 급히 택시를 잡아타니, 즐겨 듣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내가 좋아하는 노래들이 끝도 없이 나온다. 아, 내리고 싶지 않다!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모든 연대 단위들과 함께할 종료 선언식을 알리는 초대장에 나는 이렇게 썼다. “475시간.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만큼 상식적인 시간 감각을 교란시키는 참으로 신비롭고 이상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또한 추위와 긴장, 침묵과 소란, 분노와 외로움 등 그 시간을 구성하는 그 모든 성분들이 우리 몸에 각인된, 가장 물리적이고 구체적인 시간이기도 합니다. (……) 비바람 몰아치고, 가끔은 엷은 햇볕에 서 있는 등이 따뜻하곤 했던 475시간 동안 우리가 나눈 이야기와 눈맞춤, 그리고 희망을 기념하려 합니다.”

 

   색색깔의 피켓을 들고 도열한 우리 모습은 흔히들 우려했던 것과 달리 전혀 무질서하지 않았고 질서와 조화 그 자체로 보였다.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뜨거운 박수를 보내줬는데, 그래도 그게 끝이라면 아마 울었을 게다. 하지만 우리의 움직임은 교내외에 널리 퍼졌고, ‘등록금 인상을 반대하는 학부생 모임’이 결성되어 우리의 시위를 잇겠다고 하니, 마냥 아쉽지만은 않았다. 내가 600주년 기념관 앞에 언제나 ‘홀로’ 서는 데도, 쉽게 내 자리를 알아보고 늘 같은 자리에 설 수 있었던 건, 그들이 항상 내 옆에 투명하게 함께 서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걸 이제야 알겠다.

 

끝나도 끝나지 않는

 

   “끝나도 끝난 게 아니다!”라고 외쳤지만 그게 말처럼 쉬운 것만은 아니다. 열정은 더디게 자라고 냉정은 빠르게 온다. 이른 봄의 꽃샘추위도 늦겨울의 칼바람만큼 매서워서, 많은 이들이 지치고 상처받았다. 낯선 이들과의 연대에서 오는 긴장감, 점점 제도의 심층으로 육박해 가는 운동 방식, 학업과 생업, 그리고 운동의 병행으로 인한 부담은 누구에게나 버겁다. 누군가에게는 휴식이 필요하고, 누군가에게는 위로가 필요하다.

 

   하지만 분명한 건, 국문과는 이제 더 이상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우리의 운동을 지지해 준 여러 단위들과 함께 ‘성균관대 대학원 등록금 인상 반대 연대회의’를 출범했다. 이 기구는 등록금 최종 납부 기간인 3월 8일부터 11일까지 본부 앞에서 집회를 개최하는 등 2차 행동을 전개했고, 3월 22일에는 대학원 등록금 문제를 사회적으로 환기하기 위해 국가인권위원회에 진정안을 접수했다. 이제 남은 일은 비민주적인 기존 질서와 깊이 밀착되어 개인주의가 극도로 만연한 대학원 사회를 바꾸는 일이다. 식물화된 총학생회에 우리의 권익을 전가하는 것이 아닌, 대학원생 누구나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진정한 학생 자치 기구를 만드는 일이 절실하다. 그리하여 학교와 사회가 조장하는 구조악에 맞서 학생들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을 지속할 수 있어야 한다.

 

   이제 더 이상 각종 미디어가 보도하는 고학생 드라마는 안 봤으면 좋겠다. 대학의 윤리와 정치에 대해 치열하게 사유하고 행동하지 않는 한, 대학원생은 여전히 ‘잉여’의 존재이며 그것이야말로 책에 대한 배반이다. 이것은 역설이 아니라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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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교육 05+06월호 차례

 

 





 

여는 글 선의의 경쟁은 없다  | 박복선

 

이계삼 선생님께 - 창간호 특집 ‘오늘날 학교 현장의 교육 불가능’에 대한 사유‘를 읽고 | 안준철

안준철 선생님께 | 이계삼

바라보다 | 최승훈 기자

‘동시대인’의 죽음, 동시대인의 ‘죽음’ - 당대 정치공동체 구성의 위기로서의 대학의 위기 | 엄기호

 

특집   대학의 교육 불가능

2011년 한국 교육, 야만의 지형도를 그리다 2

 

● 학문하지 않는 대학 | 문수현

● 대학, 악마와 거래하다 | 노영수

● ‘잉여’들의 반란과 명륜동의 봄 | 오혜진

● 공부할수록 가난해지는, 가난할수록 공부할 수 없는 | 서유정

● 괜찮다, 안 괜찮아도 괜찮다 | 최은정 기자

● 기업화된 대학 : 잔인한, 그러나 너무나 정상적인 야만 | 정용주

 

인터뷰  정광필 전 이우학교 교장

이우학교, 8년의 실험을 이야기하다| 박복선, 이진주, 최승훈 기자

진보 교육감 취임 1년, 교육은 진보 중인가- 진보 교육감 시대와 교육운동 | 한만중

 

기획 - ‘가르치는’ 인권을 넘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인권 교육 |민진(한낱)

인권적인 학교를 향한 한 교사의 고군분투기 | 이재익

  어느 새내기 교사의 죽음 | 김요한

학교부터 비정규직 없애야죠? | 조영선

“우린 괜찮다. 괜찮다” | 조용진

필요하면 네 곁에 있어 줄게 | 김윤희

일만 킬로미터를 돌아서, 다시 여기로 | 김정현

바람이 불어오는 곳을 따라 움직인다 | 장덕균

 

리뷰

교육의 역할을 고민하다 -《왜 잘사는 집 아이들이 공부를 더 잘하나?》| 석영

천국으로 가는 모든 길이 천국이다 -《환대하는 삶》| 전성원

교과서 ‘너머’를 위한 교과서 다시 읽기 - 《교과서를 믿지 마라!》| 박진환

‘다른 세상을 위한 수사학’ 사용 지침서 -《다른 세상은 가능하다》| 박보름

슬픈 ‘개쉐이들’의 섬세한 내면, 그러나 까칠한 소통에 관하여 - 영화 〈파수꾼〉| 안정선

 



교실수업 이야기

교과서를 통해 보는 수업 풍경 | 이혁규

 

온고지신

불량정신의 찬란함 - 전쟁 중 ‘비행’에 관하여 | 후지타 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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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4 20: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윈터 2011-06-05 17:19   좋아요 0 | URL
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쓰신다는 책 기대됩니다. 꼭 써주세요! 요즘 불붙고 있는 등록금시위가 더 커져서 큰 횃불이 됐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뭘 더 할 수 있나 고민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