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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감옥에서 - 어느 재일조선인의 초상
서경식 지음, 권혁태 옮김 / 돌베개 / 2011년 3월
평점 :
품절


“‘재일조선인들이 이렇게 어렵게, 곤란하게 사는지 몰랐다’ ‘관심이 모자랐다, 반성한다’ 이런 성실한 얘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런데 제가 진짜 말하고 싶은 것은 그런 게 아니거든요. 우리가 얼마나 억울한 상태에 있는지, 얼마나 일본인들한테 멸시받으며 살았는지 그런 게 아니에요.”

_ 박권일 ‧ 서경식, 「디아스포라로 살아가는 건 나의 숙명」, 󰡔󰡕 240호, 2006. 6, 49면.

 

2006년 6월,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서경식은 자신이 쓰고 있는 재일조선인 문제나, 국가주의 ‧ 민족주의 비판과 같은 내용들이 한국의 독자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궁금하다며 위와 같이 말했다. 이 말은 우리가 ‘서경식’이라는 텍스트를 읽을 때 쉽게 만나게 되는 의외(意外)의 지점이 무엇인지를 말해준다. 2011년 봄에 출간된 서경식의 새 책 󰡔언어의 감옥에서󰡕다시 한 번 내 이야기를 꼼꼼히 들어보라고, 그리하여 이 “성실한 오독”에 내재된 (무)의식과 피하지 말고 맞서보라고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책에서 새삼 알게 되는 놀라운 점은 식민 지배에 대한 증언과 청산, 해방과 동시에 ‘과거형’이 되었어야 할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이, 실은 해방 이후에도 얼마든지 지속되었었다는 사실이다. 이 책에서 꼼꼼히 적고 있는 것과 같이, 1890년 10월 30일에 발포되어 조선인을 ‘충량한 신민’으로 정의했던 식민지배의 명제인 ‘교육에 관한 칙어’가 공식적으로 폐기된 것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3년이나 지나서인 1948년 6월 19일이었다. 그리고 자신이 일본군 위안부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증언한 사람이 나타난 것은 그보다 훨씬 오랜 후인 1991년의 일이다. 이는 우리가 흔히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자마자 그 이전과는 판이한 세계가 펼쳐지거나, 그렇지는 않더라도 엄청난 변화와 갱신의 역동적인 움직임이 쏟아졌으리라는 우리의 상식적인 믿음과는 배치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그간 ‘해방’을 낭만적으로 사유함으로써 식민주의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하는 피식민자의 욕망을 충족시켜 왔던 일례로 읽힐 수도 있다.

 

  이 ‘유예’된 청산과 증언의 시간이 우리에게 말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해방 이후 ‘즉각적으로’ 행해졌어야 할, 식민주의를 직시하고 그것에 균열을 내려는 작업들이 일어났던 것이 불과 얼마 전의 일이라는 것이라는 점은 우리에게 무엇을 시사하는가. 법적인 식민지배는 끝났지만, 해방 이후에도 ‘식민주의’는 엄연히 지속되었다고, 여기 그 시간을 온몸으로 살아온 ‘산 증인’이 있다고 저자는 말한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재일조선인의 삶이며, 이 책은 무엇보다 ‘재일조선인’의 육체에 각인된 명백한 ‘식민주의’에 대한 고발이다.

 

  그러나 저자에게 ‘재일조선인’은 언제나 놓을 수 없는 키워드이지만, 그는 이 존재가 딜레마적이라는 것을 안다. 한국에도 익히 잘 알려진 이양지라는 작가의 (무)의식을 통해 그가 밝히려 하는 것은, 우선 재일조선인 스스로 ‘재일조선인’이 아포리아의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고 감당해야 하는 고통과 그 윤리이다. 그것은 ‘재일조선인’ 자신이 스스로 소수자로서의 삶을 연민하고, 타자에게 동정을 호소하는 것과는 다르다. 그렇다고 자신의 존재를 통째로 부정하고, “완전한 일본인”이나 “완전한 한국인”이 되는 것만도 능사는 아니다. 저자는 이 아포리아에 정면으로 맞서는 것만이 “재일조선인의 숙명”이라는 점을 아프게 묘사하고 있다. 그가 이양지를 “여동생”으로 묘사함으로써 ‘가부장적 비유’라는 비난을 받게 될 것마저 감수하면서도 이와 같은 발언을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이양지는 그녀의 작품 󰡔유희󰡕에서 모국 ‘조선’의 소음에 동화되지 못하고 계속 거리감을 느끼면서도 끝내 조선에 붙들리듯이 매여 있는 재일조선인 상을 그렸다. 그러나 서경식이 보기에 이때 이양지는 “한국 사회의 시끄러운 소음과 목소리라는 표상”을 통해 ‘가난한 서민은 시끄럽다’는 일종의 계급적 스테레오 타입을 무비판적으로 되풀이함으로써 민족적으로는 연대하지만, 계급적으로는 연대하지 않는 재일조선인의 상을 그린 것이다. 이를 통해 저자는 이양지가 재일조선인 상에 투영된 자기상을 나르시시즘적으로 극복하는 것을 경계한다.

 

  1부의 끝과 2부의 첫머리로 이어지는 프리모 레비와 장 아메리, 파울 첼란에 대한 글들은 한반도와 일본 열도로부터 가장 멀리 있는 텍스트를 다룬 글이지만, ‘지금-여기’의 식민주의에 대해 가장 치열한 사유를 보여준 이 책의 ‘절정’이다. 그리고 동시에 ‘디아스포라의 언어’라는 관점으로 이들이 겪은 고통을 이해하려는 가장 새롭고도 성실한 시도이다. ‘모어 공동체’가 파괴되지 않았기에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돌아갈 곳이 있었던 프리모 레비, ‘모어 공동체’를 적에게 빼앗기고, ‘적’의 언어와 문화만이 남겨진 장 아메리, ‘모어 공동체’ 자체가 이미 다언어 ‧ 다문화가 혼재하는 곳이었던 첼란에게 겹쳐지는 ‘디아스포라’의 삶과 그 운명에 대해 논한 이 글들은 ‘일본적(日本籍)’과 ‘한국적(韓國籍)’, 그리고 사실상 난민과 같은 ‘조선적(朝鮮籍)’이라는 허구적 선택지에 의해 ‘절멸’되는 재일조선인의 삶과 적절하게 유비된다.

 

  ‘월경(越境)의 상상력’이 학계의 대안이자 유행이 되면서, ‘호모 사케르’라든지, ‘난민’이라든지 하는 말이 흔하게 되었지만, 한편으로 이 말들은 저자의 서술대로 마치 집시나 유목민(nomad) 혹은 코스모폴리탄 지향의 미래적 존재들로 낭만화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호모 사케르가 특정한 존재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제국주의와 자본주의가 공모하여 초래하는 인류 공동의 존재 상태를 칭하는 데 반해, ‘난민’이 실재하는 존재라는 점은 잘 고려되지 않는 것 같다. “현대 세계는 ‘국민’만을 정회원으로 하는 회원제 클럽 같은 곳”이라는 저자의 말처럼 ‘난민’은 명백히 제국과 자본이 초래하는 폭력과 소외의 산물이며, 바로 그것을 존재 그 자체로 증언하는 ‘희생양’이자 ‘산 증인’이 바로 ‘재일조선인’으로 대표되는 디아스포라의 삶이다.

 

  그래서 서경식은 ‘국민을 그만두거나, ‘국민’으로서 국가를 바꾸는 권리이자 의무를 행사하는 것’이 가능한 답안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국민’을 그만두는 것은 ‘국민’이 되는 것보다 더 어렵다. 그리고 ‘탈국민주의’를 상상하는 것과, ‘국민’으로서 타자에 대한 책임을 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그것은 윤리의 문제다. 와다 하루키, 우에노 지즈코, 하나자키 고헤이, 박유하 등에 대한 비판은 이를 세심하게 의식하며 행해진, ‘일본’이라는 국가에 귀속된 존재로서 자신의 아이덴티티를 ‘국가’와 동일시하는 내셔널리즘을 비판해온 ‘시민 리버럴’ 세력의 논리에 대한 비판이다. 이들은 일본 극우파가 아니라 소위 ‘양심적 지식인’이라고 불리는 이들인데, 이들에 대해 저자가 비판의 칼날을 들이대는 이유는 자명하다. 이들의 논리가 ‘식민주의’에 대한 제국 일본의 책임 문제를 논할 때면, “내셔널리즘 비판과 전후 책임 회피의 뒤집어진 결합”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한국 독자의 입장에서 볼 때, 박유하 현상은 특히 문제적인 것으로 여겨진다. 박유하는 한일 간의 ‘화해’를 가로막는 것은, 일본의 불충분한 사죄 때문이라기보다는 한국의 내셔널리즘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서경식이 보기에 이는 일본 출판계에서 상품성을 획득함은 물론, 국가주의와 공모하는 일본 시민 리버럴리스트들에게 자기긍정을 확인시키는 역할을 자임하는 것으로, 피식민자에게 내면화된 명백한 식민주의적 현상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더 문제가 되는 것은 박유하가 화해의 주체로 상정하는 ‘우리’로부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재일조선인이 완전히 빠져 있다는 사실이다.” 저자는 박유하의 이러한 주장을 가장 합리적이고 성숙한 것으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일본 지식인들의 인식체계 이면에는,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똑같이 ‘내셔널리즘’이라고 칭함으로써 양자의 공모 지점을 흐려버리는 반지성적 욕망이 개입되어 있음을 예리하게 지적한다. 그리고는 ‘‘국가’로부터 자유로운 ‘리버럴리즘’이 있을 수 있는가’라는 일본 시민 리버럴리스트들이 의도적으로 방기하고 있는 질문을 드러냄으로써 그들이 주장하는 논리의 기만성을 에누리 없이 드러낸다.

 

  이 책이 나온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교수신문󰡕 4월 18일자(「서경식 교수의 ‘일본 리버럴’ 비판, 이의 있다」)에 박유하의 반론이 실렸다. 서경식의 책에 대한 리뷰의 형식에 매여 있는 이 지면에서 박유하의 반론을 언급하는 일이 적당치 않을 수 있지만, ‘충실한 서평’으로서 ‘연루된’ 텍스트를 읽는 정도로 박유하의 글을 언급해두고자 한다. 이 글에서 박유하는 서경식이 지적한 ‘화해의 논리’에 대한 재반박은 하지 않은 채, 그녀의 책이 ‘한국측에 일본의 상황에 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차원에서 쓰여졌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녀는 일본측이 법적 책임은 지지 않았지만, 대신 ‘도의적 책임’을 지기 위해 ‘아시아여성 국민기금’이라는 만들어 위안부 피해자의 절반 정도가 보상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한국측이 모르고 있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이 기금의 의도에 개재된 ‘정치성’에 관해서는 논란이 있을 수 있으며, 서경식의 주장은 그 의도를 식민주의적이라며 비판하는 측에서 제기된 것이라는 점이 그녀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서경식이 앞서 제기한 것과 같이, 이 기금의 정치적 의도, 그리고 법적/도의적 책임이라는 구도를 사유하는 방식에 대한 문제 제기야말로 박유하가 답해야 할 문제일 텐데 이 글에서는 그것을 찾아보기 어렵다. 또한 그녀는 곧 ‘일본 우파’를 비판하는 책을 쓸 예정이라며 ‘균형적 시각’을 강조했는데, 이 역시 서경식이 지적한 ‘일본 우파를 비판함으로써 실은 그를 배척하면서도 그와 공모하는 일본 시민 리버럴 세력의 요구에 부응한다’라는 지적에 대한 답변은 아니다. 게다가 서경식은 그녀의 한국어판 책과는 달리 일본어판에는 “일본의 지식인이 자신에 대해 물어오던 만큼의 자기비판과 책임의식은 지금껏 한국은 가진 적이 없었다.”라는 문장이 첨가된 것을 들어, 그녀의 책이 일본의 자기긍정 욕망에 영합할 의도가 있었음을 지적한 바 있는데, 박유하의 반박문에는 이 문제에 대한 언급 자체가 없다.

 

  서경식의 논리는 자명하다. “그는 국가주의의 폭력을 혐오하면서도, 디아스포라에게 그런 국가의 보호가 또 얼마나 절실한지도 뼈저리게 알고 있다.” (󰡔󰡕 240호, 53면) 요컨대 그는 내셔널리즘 비판 자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내셔널리즘 비판의 관념론적 기만성을 비판하고 있다. “자신의 머릿속에서 ‘국가’나 ‘국민’에 대한 귀속의식을 부정했다고 해서 ‘국민’을 그만둘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에노 치즈코의 논의에서 보듯, 역사성을 고려하지 않은 내셔널리즘 비판은 언제든지 역사를 사상시키려는 ‘극우적’ 주장과 만날 수 있다. 이 지점에 대해 충분히 민감하게 사유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의 논리는 국가와 국민으로부터의 혜택은 누리면서, 국가주의와 국민주의를 비판하는 것으로 현 체제의 안정을 오히려 공고화하는 담론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라는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다카하시 데쓰야는 말한다. “나는 일본 내셔널리즘을 비판하면서 그러나 동시에 일본인으로서의 책임을 지는 것을 긍정하고 싶다. (...) 내가 여기에서 ‘일본이라는 정치공동체’라고 하는 것은 공적 ‧ 정치적 존재, 따라서 우리들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통해 바꿀 수 있는 존재라는 측면을 강조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의문은 남는다. 저자는 한나 아렌트의 ‘죄’와 ‘책임’ 개념을 들어, ‘죄’는 전쟁 당사자들에게 해당하는 것이라 해도, 당대의 무사유(thoughtlessness)한 일상적 개인들, 그리고 후속 세대인 ‘일본인’들 역시 ‘책임’으로부터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이 개념틀은 유보적 혹은 제한적으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문이 든다. 이같은 ‘죄-개인 / 책임-집단’이라는 도식에서 ‘죄’는 ‘법적 개념’으로서만 상정된다. 그러나 ‘개인/집단, 도의적 책임/법적 책임...’ 이러한 이분법적 틀로 한일 간의 청산과 반성의 방식을 고정화시켜 설명해도 되는 것일까. 이 틀은 ‘전범’과, 그와 구분되는 말단 식민관료, 일상인, 당대의 식민지배에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저항’을 했던 개인, 또는 후속 세대 간의 관계를 규정할 수 있는 한 가지 틀은 되지만, 어쩌면 지나치게 도식적이고 관념적일 수도 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전범은 ‘죗값’을 치르고, 나머지는 ‘책임’을 지라고 할 때, 두 가지 문제가 생긴다. ‘죗값’을 치른다는 것은 구체적인 것이지만, ‘책임’을 지라는 것은 추상적인 언설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고, 그렇다면 다시 책임의 소재와 내용 등이 사상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물론 저자는 여기서 ‘책임’이란, “정부로 하여금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보상을 하도록 요구해야 할 정치적 책임”이라고 말하고 있긴 하다. 그러나 이 “정치적 책임”을 지는 주체는 또다시 개인과 집단의 분할을 요구할 것이다. 그는 범국민적 청원운동 같은 것을 상정한 것일까.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라면 다른 어떤 방식이 가능한가.) 서경식은 이 책에서 법적 책임을 우위, 도덕적 책임을 하위로 고정시키는 위계를 주장한 적이 없다. 오히려 “범죄의 책임을 묻고 보상을 하기 위해서는 ‘법’의 상위 개념으로서 ‘도의’를 문제 삼아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이 같은 ‘도의’에 근거해 새로운 법을 세움으로써 ‘도의적 책임론’은 새로운 ‘법적 책임’으로 이어진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때 ‘책임’이 언제나 ‘죄’와 ‘구별’되는 한정적, 분리적 수사로 기능하게 된다는 지적 또한 피하기 어렵다.

 

  또 한 가지는 이러한 도식이 ‘전범’들을 제외한 그 ‘나머지’들을 동질화하게 된다는 점이다. 당대 일상적 개인으로서 전쟁에 참여한 사람과, 전쟁에 맞서 실질적인 저항을 한 사람들, 또는 당시에 아예 태어나지도 않은 사람들이 ‘국민’으로서 져야 할 어떤 것 등을 모두 포괄하기에 ‘책임’이란 빈약한 개념일 수밖에 없지 않을까. 즉 ‘책임’이란, 식민지배와 무관하지 않음, 즉 ‘연루됨’이라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정당한 개념이지만, ‘죄’처럼 ‘수행성’을 갖지는 못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죄’와 같은 오직 ‘법적’인 행위만이 가시적이고 실질적인 것이라는 뉘앙스를 주는 이 이분법적 개념틀보다 더 적절한 개념을 계발해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서경식의 미덕이자 윤리는 ‘타협하지 않는 것’에 있다. 그는 사과의 윤리에 대해 사고하지 않는 어떤 자유주의적, 포스트모던적 견해와도 타협하지 않는다. 최근 한일 간의 관계를 “서로”나 “공생”과 같은 연성화된 수사들로 갈음하려는 ‘가짜 화해’를 그는 경계한다. 과연 그러한 ‘상호책임’의 수사들을 말하는 주체는 누구인가, 그는 어떤 욕망과 사유의 메커니즘을 통해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를 사유함으로써 그것이 진정한 화해가 아닌 기만과 폭력이라는 것을 밝히는 것. 그래서 이런 ‘화해’란, ‘부족’하거나 ‘불완전한’ 화해라서 나쁜 것이 아니라, 바로 그런 것이야말로 ‘식민주의’의 진화태로서 행해지는 ‘폭력’이라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4부에 실린 최현덕과의 대담은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통일’을 보기 위해 행해진 것으로, 서경식의 ‘꿈’을 엿볼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그는 이 대담에서 ‘단순한 민족통합이 아니라, 언어적, 혈통적으로 다원주의를 채용하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해방된 열린 나라’에 대한 구상을 보여준다. 이에 대해 서문에서 그는 “지나치게 자유로웠”다고 술회하며, 대담자 역시 ‘유토피아’ 같은 이야기라고 말하지만, 우리는 그의 꿈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가 꿈꾸는 그 ‘섞임’과 ‘열림’의 사회란, 실은 그 ‘섞임’ 속에서 강고한 위계질서를 내포하는 미국식 다원주의를 모델로 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이같은 ‘용광로의 정치학’을 경계하는 한, “동아시아의 아지트”를 꿈꿀 수 있는 자격이 ‘조선’에게는 있다는 그의 말은 정당하다.

 

 

  프리모 레비와 서경식의 닮은 점은, 둘 다 역사적 질곡의 산 증인, 즉 ‘디아스포라’의 존재로서 떠맡은 ‘증언’이라는 임무 그 자체에만 있지 않다. 프리모 레비가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스라엘의 행위가 과거 나치의 폭력을 재생산하고 있는 것과 다름없다는 점을 말해야 했던 것처럼(그리고 절망해야 했던 것처럼), 서경식 역시 지금의 한국이 베트남, 그리고 이주 노동자들에게 과거 제국 일본이 행했던 식민주의를 그대로 답습하고 있음을 또한 절망하면서 말하고 있는 존재라는 점에서 그 둘은 같다. 그들이 ‘모국을 향해’ 증언하다가 절망했음에 유의하자.

 

  그의 책을 소개할 때 “재일조선인의 초상”이라든지 “디아스포라의 눈으로 본”이라는 부제가 지니는 ‘상품성’이 시효를 다하는 날을 상상해본다. 가장 위험한 것은 이같은 서경식의 관점을 ‘디아스포라의 관점’으로 분리해서 사고하고 소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디아스포라의 아이덴티티를 지녔다는 점은 부정할 수 없지만, 그가 내놓는 국가주의와 국민주의, 그리고 식민주의에 대한 해석과 비판은 비단 ‘재일조선인’이라는 한 ‘소수자’의 입장을 설명하는 데에만 유효한 방식이 아니라, 바로 우리 모두가 도전하고 있는 그 폭력적인 전장의 최전선에서 제출되는 의견으로 읽혀야 할 것이다. 우리는 그를 프리모 레비처럼 죽게 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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