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폭력에 맞서다 - 사례·담론·전망
이미경 외 지음, 한국성폭력상담소 기획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1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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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간단하게 작성한 내용인데 더 많은 분들이 읽었으면 하는 바람에 다시 올린다.>

 

성폭력 가해자의 의도가 실패했을 때의 상황을 떠올려봅시다.

 

 버스에서 누가 내 엉덩이에 자기 페니스를 문지르고 있습니다. 그 남자는 '나보다 어린 여자니까 내가 엉덩이 좀 만져도 가만히 있겠지'라는 메시지를 몸으로 보내는 것입니다. 그 남자는 이제까지 자기가 버스에서 만지고 추행했던 여자들이 별 반응 없이 부끄러워하면서 가만히 있거나 황급히 버스에서 먼저 내리는 것을 봤기 때문에, 자기 경험칙에 근거해 액션을 하는 겁니다.

 

 그런데 이번에 자기가 엉덩이를 은근히 비비고 있는 이 여자는 다른 여자들처럼 가만히 있지 않을 것입니다. 욕을 할 수도 있고, 신발로 상대의 발등을 찍을 수도 있습니다. 뒤꿈치로 상대의 정강이를 때릴 수도 있고, 페니스를 꽉 잡아버리거나 사람들에게 "여기 이 사람이 자기 꼬추를 내 엉덩이에 비비고 있어요."라고 알리는 등 여러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이 여성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은 그 남자의 메시지에 '사람 잘못 골랐거든? 나는 당신이 생각하는 그런 몸이 아니야'라고 대응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행동이 마음을 먹는 것만으로 실행에 옮겨질까요? '감히 나를 건드려?'라는 생각은 있으나, 남자 페니스를 움켜쥐고 고통을 느끼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군가를 때려본 적도, 욕해본 적도 없다면 그 상황에서 상대에게 욕을 하거나 발등을 찍는 것도 쉽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그런 행동을 해본 적이 있고, 페니스에 대한 공포감보다는 나의 분노를 표현하는 것이 더 익숙한 사람은 이런 행동을 반사적으로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공격은 보통 '여성적'이라고 여겨지는 몸의 모양새, 행동과 반대되는 것으로 보입니다.

 

 피해자에게는 여자다운 규범이 요구되고 가해자에게는 남자다운 규범이 요구되는 톱니바퀴가 어긋나면 톱니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성추행을 하려고 했던 상대의 의지는 실패하게 됩니다. 가해 의도를 갖고 나를 공격하는 상대에게, 그 상대가 예상하지 못했던 행동과 말을 함으로써 여성들은 성폭력상담소에 찾아오지 않고도 이런 상황을 종료시킬 수 있습니다.

 

 이런 문제의식은 지하철 성추행 같은 사건들을 상담할 때 어떻게 현실화될 수 있을까요? 어떤 메시지를 어떤 내용으로 여성들에게 전달할  수 있을지는 모든 상담원들이 생각하는 과제입니다. 모든 여성에게 "그때 왜 이렇게 하지 않았어요?"라고 말하는 것이 상대의 행위를 비난하는 것처럼 들릴 위험요소가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다음에 똑같이 누군가가 나를 성추행하려고 할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상담하러 찾아온 여성에게 (중략) 가해자를 처벌할 수 있는 정보를 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피해를 입지 않을 수 있는 훈련을 함께할 수 있는게 더 중요합니다. 체육관에서 몸을 사용해서 훈련할 수도 있고, 머릿속으로 모의 상황을 만들어볼 수도 있습니다. "내가 공격당했을 때 몸이 어떻게 반응하나? 이제까지 어떤 반응이 자연스럽게 나왔나? 그때 상대의 반응은 어땠나?' 같은 질문을 해보면서, 지금까지 내 몸이 상대가 기대하고 예상하는 반응만 보였다면, 이제 상대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반응하는 겁니다.

 

 "어머, 왜 이러세요"라고 눈물 흘리는 것이 아니라, 대차게 소리를 질러보는 연습, 욕을 해보는 연습을 같이 해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가해자가 의도한 의사소통이 실패하는 일이 많이 생겨날수록, 여성들에게 자행되는 성폭력 피해는 줄어들고 많은 여성들이 자기만의 자랑스러운 무용담을 갖게 될 겁니다. "그때 나 만만하게 본 자식들이 있었는데 이렇게 했더니 뼈도 못 추렸지"라거나 "전에는 몰랐는데 나 전생에 싸움닭이었나봐. 너무 잘 싸워"라는 식의, 자기 몸과 자신에 대한 새로운 인식과 그로 인한 자신감이 싹트기 시작합니다.

 

 70~71p

 

 

 사단법인 한국성폭력상담소에서 성폭력 사례와 담론, 전망에 대한 책을 냈다. 이 책은 피해자-가해자의 정형화된 이미지를 다루지 않는다. 피해 후 대응이 아닌 피해를 당하지 않는 법, 여성의 몸과 구조화된 성별 질서에 대해 얘기한다.  성폭력은 어떤 '미친 사람'이 성욕 때문에 저지른 '우발적인' 범죄가 아니라 성별 역할이 정해진 사회에서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일이다.

 

 피해자를 위로하고 조심하라는 수동적이고 틀에 박힌 이야기 대신 어쩌면 이 책의 질문은 도발적일 수도 있다.  성폭력을 당한 사람에게 당신이 진정으로 두려워하는 건 뭐냐고, 왜 성폭력이 죽고 싶고 함부로 살고 싶을 정도로 절망적인지 생각해볼 것을 요구하니 말이다. 다시 그런 상황이 생기면 어떻게 할건지, 사회적으로 세련됐다는 몸으로 사는건 진짜 내가 원해서있는지를 묻는 책. 섹슈얼리티 강의2만큼 실질적이고 전복적이며 '재미있다

 

 예전에 알던 사람은 밤늦게까지 술을 먹고 택시를 타는 나보고 겁대가리 없다는 말을 했다. 자신이 사귀던 여자가 밤에 택시를 탔다가 성폭행을 당해서 그냥 막 살았다며. 여자가 어디든 다닐 수 있는 자유를 말하며 꼭 성폭행 당한다고 막 사는거 아니라며 그 사람의 입을 막았지만 내심 불안했다. 혹시, 나에게 그런 일이 생기면 어떡하지 싶어 걱정됐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사람의 발화는 순전히 감히 여자가 늦은 시간까지 술먹고 택시 타는게 용납되지 않아서일 확률이 더 높다. 나 괜히 쫄았다.

 

 심하게 구타를 당한 사람에게 왜 그런 상황에 그런 대처밖에 못했냐고, 그게 그렇게 고통스러운 이유가 뭐냐고 묻는 것만큼 바보 같은 질문은 없을 것이다. 개인에 따라 '페니스'의 의미는 다를 것이며 성폭력의 정도가 아니라 각자가 갖고 있는 생각에 따라 의미와 고통은 천차만별일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고통에 몰두하는 순간, 고통을 빌미로 성폭력을 할 수 있는 각본이 짜여진건 아닌지 고민해야 한다.

 

 그런 고민을 할 수 밖에 없는건 개인적인 경험도 한몫한다. 지하철에서 손이 아닌 페니스를 엉덩이에 비비는 새끼, 지나가다 덜렁거리는 손을 툭 치고 앞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 슬쩍 날 확인하던 새끼. 헤어지자니까 자기가 분이 풀릴 때까지 맞고서 헤어지자던 놈. 그때 정말 난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페니스를 확 낚아채서 부랄을 찔러서 내가 수치스러운만큼 숨이 턱 막히게 하지 못했다. 내릴 곳도 아닌 곳에 밀려나듯 내려서 눈이 찢어진 성추행범을 째려볼 수 밖에 없었다. 지나가던 새끼를 쫓아가 멱살을 잡지 못했다. 마찬가지로 째려볼 수 밖에. 혹시나 가던 길을 되돌아 나한테 해코지를 하면 어쩌나 살짝 불안해하면서. 나를 때리겠다며 끌고간 새끼한테는 그 흔한 욕 한번 못하고 엉엉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었다. 그런 상황보다 그렇게 무기력하고 나약한 내가 정말 싫었다.

 

 만약 다시 그런 상황이 된다면 나는 다른 몸이 돼서 그 녀석들을 혼내줄 수 있을까. 부랄을 치고 정강이를 걷어치고 고함을 지르고 욕을 하고 지랄발광을 떨면서 그 새끼들을 혼내줄 수 있을까. 주위 사람들한테만 화내지 말고 낯설고 어이없는 상황에서도 화내는 연습을 해야겠다.  저항하고 분노하지 못하는 몸, 실체가 없는 무기력함을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은 어떤게 있을까. 이 책에 나온 것처럼 뱃속 깉은 곳에서 우렁찬 소리를 뽑아내거나 방귀를 뀌면 가능할까. 성폭력의 70% 이상이 아는 사람과의 관계에서 일어난걸 보면 어느 정도 현실적인 방법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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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6-05-12 16: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인용문 참 좋네요. 저도 숱한 성추행 앞에서 크게 목소리 내지 못하고 그저 경찰에 신고하는 게 다였는데요. 이젠 버럭 소리질러서 당황스럽게 해야 겠다고 생각해요. 인용문처럼, 그렇게 버럭해서 당황하게 하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 다음부터 똑같은 짓을 할 확률이 낮아지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드네요. 잘 읽었어요, 아치.

Arch 2016-05-12 16:57   좋아요 0 | URL
저는 한번 소리 질러봤으니 언제든 또 그럴 수 있을거라 생각해요. ^^ 물론 시골에서는 노골적인 성추행은 없지만 관습적인 희롱이 있고 그런건 소리보다 더 짖궂은 농담으로 받아쳐야 해서 살짝 과부하이긴 하지만요.
 
금요일엔 돌아오렴 - 240일간의 세월호 유가족 육성기록
416 세월호 참사 기록위원회 작가기록단 엮음 / 창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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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상, 위로 차원이 아니라 정말 화가 나는 것. 어떻게 이 나라는 꽃같은 아이들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지 않았을까. 왜 이런 사건조차 정치적으로 이용할까. 그리고 왜 이런 일이 계속 일어날까. 참담한 심정으로 읽을 수 밖에 없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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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년식당 - 요리사 박찬일의 노포老鋪 기행
박찬일 지음, 노중훈 사진 / 중앙M&B / 201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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잇태리에서 촐싹맞고 서툴지만 따뜻한 셰프는 어디 갔나요. 그만의 글맛이 전혀 나지 않아서 정말 박찬일인가 다시 확인했다. 오래된 식당, 정말 좋은 컨셉이고 내 취향에도 맞지만 굳이 박찬일이 아니어도 싶다. 들어있을 건 다 들어있지만 점잖은건지 장난기를 뺀건지 글이 밋밋하다.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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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저좋은모리군 2015-03-13 16: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백년식당이 제목에 들어가는 무척 지루한 다른 책을 읽은 적이 있어서 아예 이책은 생각도 안했는데 박찬일씨가 쓴 것이군요. 글 굉장히 잘쓰던데 왜 그랬을까요?

Arch 2015-03-13 16:53   좋아요 0 | URL
박찬일답지 않은거지 책이 나쁘진 않아요. 잇태리 같은 재미를 기대한 탓일지도.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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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 아닌 정희진, 정희진처럼 읽기. 오랜만의 신간이라 반갑고 어떤 메모로 감질나게 읽던 글들을 한꺼번에 읽어서 더 반갑다. 지금 정희진이 중요한 이유는 식상한 얘기도 자기 말로 풀어낼줄 알고 그런 글들로 독자들에게 묵직한 자극을 주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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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행복한 마을은 가능한가 - 마을과 행정 사이를 오가며 짱가가 들려주는 마을살이의 모든 것
유창복 지음 / 휴머니스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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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번 책은 성미산 마을 이야기라서 부럽지만 내가 할 수 없는, 멋진 마을이 있구나 정도였는데 이번에는 서울시 마을공동체지원센터, 민관협력, 행정과 일하기 등 딱히 정말 하고 싶지 않아도 해야하는 일을 슬기롭게 헤쳐나가야 한다는 점에서 좀 더 흥미로웠다. 2장 진도가 안 나가는 건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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