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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의 묘지 1
움베르토 에코 지음, 이세욱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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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알고 있는 것, 그것이 과연 진짜인가?

에코는 이런 물음에서 소설을 시작한다. 문득 최근에 읽은 다른 소설, 우부메의 여름에서 교고구토의 장광설이 떠올리며 겹쳐졌다. 우리가 가진 상식이란, 지극히 편협하다. 우리는 무언가가 진짜라는 걸 어떻게 인식하는가? 내가 겪지 못했던 것을, 우리는 교육 혹은 독서라는 이름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승자의 역사이며 패러다임은 늘 바뀌었다. 지식을 편찬하는 권력을 가진 자들은 얼마든지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 그 왜곡은 언제 어디서든, 지금 이 순간에도 일어나고 있다. 에코의 말마따나, ‘시모니니는 우리 곁에 있다’.


에코는 이 소설에서 유럽의 역사를 종횡무진으로 드나들며 픽션과 역사의 경계를 허문다. 거기다 이전 소설에서와 마찬가지로 해박한 종교(비교나 밀교까지 포함해서), 문화적 지식을 자랑하며 혀를 내두르게 한다. 특히 주인공 시모니니를 제외한 모든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던(즉 기록에 남아 있는) 인물이라는 점이 이 소설의 흥미를 돋운다. 에코는 실로 보르헤스적인 수법으로 이야기를 펼친다. 진짜 사료(책이나 잡지, 떠도는 이야기, 전설, 신화 등)를 가상 인물이 이용하는 사실적 환상주의, 실존 인물과 가상 인물이 함께 겪는 사건과 가짜 대화, 그들의 얽힘으로 벌어지는 새로운 사건, 실존하는 인물에 대한 가상 서술, 실제 사건에 대한 다른 언급 등등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러나 그 경계 허뭄이야말로 이 소설의 주제이다. 우리가 픽션이라 부르는 것과 역사는 정말 얼마나 다른가? 어쩌면 ‘역사’는 만들어졌기 때문에 존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무언가가 발화되었을 때, 그것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하지 않다. 더구나 인간은 기본적으로 믿기를 좋아하는 종족이다. 사기꾼 탁실의 입을 통해 에코는 말한다.


사람들은 무엇이든 믿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게 인간의 주된 특성이죠. 하기야 교회가 거의 2천년동안을 버틸 수 있었던 것도 너나 할 것없이 그런 맹신의 경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511)


믿는 것, 그것은 어쩌면 생존을 위한 도구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의심하는 자는, 살아남는 데 오히려 불리하다. 모든 것을 평가하고 비판하는 자는, 결정을 내리기 못한다. 사실 우리가 내리는 결정은 대부분 감정적이다. 뇌의 감정을 담당하는 부분이 다친 환자들은, 결정을 내리지 못한다. 그들은 너무 많은 가능성을 고려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우리는 확신과 믿음이 있어야 선택을 하고, 앞으로 나아간다. 그러지 못하는 인간은 도태될 뿐이다. 이 믿음이야말로 우리 인간이 기본적으로 종교적인 존재라는 것을 보여준다. 우리에게는 인과관계가 필요하다. 삶이 우연에 의해 지배된다는 것을 모르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는 우연이나 운명에 순응하는 척 하지만, 뚜렷한 이유를 찾으려 애쓴다. 그 과정에서 종종 희생양이 필요하다. 우리는 고통받도록 태어난 것이 아니라, 누군가로 인해 고통받은 것이다. 그 편이 자신의 무능과 운명을 인정하는 것보다 훨씬 매력적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자들에 대한 숱한 음모론은 이를 뒷받침한다. 


적이란 결국 민중의 벗입니다. 자기가 가난하고 불행한 것은 자기 잘못이 아니라 어디가 다른 데에 분명한 이유가 있다고 느끼려면 언제나 증오할 사람이 필요합니다. 증오는 그야말로 원초적인 열정입니다. 사랑이란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나오는 감정이죠. 그리스도가 죽임을 당한 것도 그 때문입니다. 인간의 본성에 어긋나는 것을 가르치신 것이죠. 누군가를 평생토록 사랑할 수 있을까요? 그건 이룰 수 없는 희망입니다. 그래서 간통이며 모친 살해며 친구를 배신하는 일 따위가 생겨나는 겁니다. 반면 누군가를 평생토록 미워하는 것은 가능합니다. 그자가 우리곁에서 계속 증오심을 부추기기만 한다면 말입니다. 증오는 심장을 뜨겁게 하죠.(600)


이 작품의 큰 줄기는 ‘프로토콜’, 일명 ‘시온의정서’가 탄생하는 과정에 대한 허구적 재구성이다. 에코는 지극히 편협하고 비인간적인 반유대주의에 의해 ‘프로토콜’이 탄생하는 과정을 시모니 시모니니라는 망측한 주인공을 통해 흥미진진하게 서술한다. 주인공의 이름 자체가 유대인을 증오하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성 시모니노’는 유대인에게 납치되어 토막난 아기 순교자이기 때문이다. 이 이름을 지은 것은 철저한 반유대주의자인 그의 할아버지이며, 실존 인물이다. 이름에 각인된 증오, 누군가가 주입한 증오가 그를 평생에 걸친 유대인 혐오자로 만든 셈일지도 모른다. 이 뿌리깊은 증오는 그로 하여금 어떤 문서를 위조하더라도 유대인의 은밀한 음모가 숨어 있다는 단서를 심게 했다. 그 철저한 증오는, 사랑보다 증오가 더 위대하고 깊은 감정이라는 주장을 뒷받침한다. 


그러나 시모니니라는 이 인물은 사이코패스라는 말로밖에 설명이 되지 않는 위인이다. 그러므로 증오가 인간의 본성이라는 식의 결론을 이끌 필요는 없다. 시모니니는 전형적인 사이코패스의 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유럽에서 일어난 프라하의 묘지 논쟁에서, 시모니니의 논리를 수긍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주장에 대해 에코가 ‘변태적’이라며 일갈한 것도 그렇기 때문일 것이다. 시모니니는 쾌감과 증오를 위해 존재하는 인간이다. 그가 사랑하는 건 미식과 그를 지불하기 위한 돈뿐이다. 여자와 권력도 그에겐 추구 대상이 아니다. ‘나는 증오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그의 선언에서부터 알 수 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돈벌이를 위해서라면 어떤 짓이든 마다하지 않는다. 시모니니에게 여러 수사를 붙여보자. 이탈리아, 프랑스, 프로이센, 러시아의 첩보원이자 이중간첩, 문서위조꾼, 협잡꾼, 거짓말쟁이, 살인자, 사기꾼, 공갈협박꾼. 무엇이 더 필요한가? 기막히게 머리가 좋고 위조 재주가 뛰어난 그는 친구든 은인이든 가리지 않고 처단한다. 방해자를 자신의 계획에 도구로 쓰고, 버린다. 아무 죄도 없는 사람에게 죄를 뒤집어씌운다. 서로 적대적인 양쪽 모두에게서 이익을 보기도 한다. 프리메이슨을 고발하는 사람과, 그 고발을 통해 자신들의 신앙을 증명하려는 사람. 프리메이슨과 유대인을 동시에 공격하는 것도 쏠쏠한 돈벌이가 되었다. 더구나 반유대주의는 ‘공인된 광맥’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이고 열광적으로 조작에 끼어들었다. 어쩌면 ‘프로토콜’에서 주장하는 유대인의 음모는, 이런 자들의 음모라고 말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울지 모른다. 더구나 우리는 ‘프로토콜’이 한 미친 독재자에 의해 세계를 광기로 몰아넣은 요인 중 하나였다는 걸 알고 있다. 그렇다면 에코는 소설로 또 하나의 음모론을 창출한 셈이다. 유대인의 음모를 밝히는 문서를 쓴 자의 음모를 밝힌 소설이라. 이 얼마나 보르헤스적이며 메타소설적인가! 


한편 시모니니가 밝힌 가짜 문서의 원칙도 매우 흥미로웠다. 이는 평소에 위서에 많은 연구를 쏟은 에코의 결과물이리라. ‘흑과 백, 선과 악이 분명해야 하며, 악당은 딱 하나만 있어야 하는 것’(182)이다. 또한 ‘이야기의 모든 요소가 아귀가 맞고 사실임직하게 보이면 오히려 거짓’(184)이라고 믿게 마련이다. 적절하게 거짓을 섞어야 한다. 또한 원본으로 거슬러 올라가지 못하도록 새로운 방식으로 구성해야 한다. 에코는 그런 유명한 증거로 동방 박사 이야기를 든다. 오로지 마태복음에서만 살짝 언급된 동방 박사 이야기는 비기독교인에게도 유명한 이야기다. 이름도 명수도 구체적으로 기록되지 않은 풍문이 많은 이들에 의해 덧붙여져 결국 설득력을 얻은 셈이다. 전승되는 상식의 유래 따위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는가. 또한 ‘어떤 위험에 관한 사람들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면, 천의 얼굴을 가진 위험을 찾으면 절대로 안 된다. 위험은 단 하나의 얼굴을 가져야 하며,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의 관심이 흐트러진다. 한 불에 고기를 너무 많이 올려놓으면 안 되는 법’(387)이라는 원칙도 밝힌다. 시모니니는 이러한 원칙에 따라 자신의 숙적을 결국 세계를 지배하려는 간악한 무리들로 탁월하게 묘사해낸다.


한편 이 소설은 세 명의 화자를 등장시키는 독특한 구성을 취하고 있다. 문체가 상이한(그러니까 폰트가 다른) 세 화자는 각각 시모니니, 달라 피콜라 신부, 전지적 화자이다. 기억을 잃은 시모니니가 자신의 기억을 더듬어 일기를 써내려간다. 회상을 하는 시점에서 그는 자신과 피콜라 신부의 정체성을 의심한다. 앞부분에서 쉽게 짐작할 수 있듯이 피콜라 신부는 그의 분신이다.(이건 목차만 봐도 짐작할 수 있으므로 스포일러라고 생각하는 분들에게는 양해를 구한다.) 그는 모종의 사건 때문에 기억을 잃었고, 기억은 두 명의 인격에게 흩어져 혼재한다. 이 분신 모티브는 소설을 읽는 색다른 재미를 선사한다. 그리고 이 두 명의 화자가 가리거나 미처 이야기하지 않은 부분을, 전지적 화자가 다시 정리해주는 형식을 취한다. 사건은 시모니니가 임의적으로 이용하던 인격으로 분화된 클라이맥스의 날을 향해 달려간다. 그토록 괴물 같은 시모니니에게도, 역린이 있었던 셈이다. 소설의 앞부분에 등장한 유대인 의사 프로이트의 발언은 퍽 유머러스하다. 프로이트가 ‘모든 것을 성으로 귀결시키는 정신분석학의 경향’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시모니니는 그런 프로이트의 내심을 의심하기는 하지만 말이다. 아무튼 프로이트는 끔찍하게 충격적인 일을 겪은 사람은 너무 깊은 곳에 있어 최면을 걸어도 도달하지 않는 곳에 기억을 숨긴다고 말한다. 그 기억을 끄집어내기 위해서는, 끊임없는 대화 혹은 기록이 필요하다. 시모니니의 기록이 바로 그 역할을 대신하는 셈이다. 사건의 정체가 밝혀진 후에도, 시모니니의 엽기행각은 그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더욱 뻔뻔해지기까지 한다. 모든 것을 알면서도 자기 자신에게 태연할 수 있는 것 역시 사이코패스의 특성 중 하나이리라. 에코가 시모니니를 징벌하지 않은 건, 아마도 현실 세계에서 그런 진짜 악당들이 여전히 활개치기 때문이 아닐까. 


또한 간접적으로 시모니니가 창조한 문서의 내용을 통해, 현실 정치를 풍자하고 있다는 점도 아이러니하다. 실제로 그 유명한 괴벨스를 포함해 언론을 대중 장악의 수단으로 이용한 경우는 수없이 많다. 이러한 점 때문에 에코가 이탈리아의 현실을 풍자하고 있다는 해석도 가능해진다. 베를루스쿠니 전 총리도 언론 장악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황금이 이 세상의 으뜸가는 원력이라면 버금가는 권력은 언론이오.(...)언론을 지배하면 우리는 명예와 미덕과 공정함에 대한 대중의 의견을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고, 가족제도에 대한 공격에 나설 수 있을 것이오. 필요한 경우에는 사회의 주요의 주요 현안에 대한 대중의 관심을 축구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를 통제해야 하고, 사회운동단체에 우리 선동가들을 침투시켜 우리가 원하는 때에 봉기를 일으킬 수 있도록 해야 하고, 때로는 노동자들을 거리로 내몰아 혁명의 대오를 짓게 해야 하오.(371)


결국 프라하의 묘지라는 이 길고 장황한, 복잡하고 매력적인 소설에서 에코가 던지는 메시지는 이런 게 아닐까. 깨어 있으라, 의심하라, 당신이 알고 있는 그 모든 것을. 


*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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