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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양장)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윤옥 옮김 / 현대문학 / 201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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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어린 시절엔 유독 환상적인 이야기에 마음이 끌린다. 혹시 나도 ‘소공녀’가 아닐까, 하고 꿈꿔보지 않은 아이가 있을까. 어딘가 나의 진짜 부모가 나를 위해 기적 같은 미래를 준비해두었을 것이라는 상상. 그 상상은 마치 장래 희망이 연계도 없이 여러 개로 바뀔 때처럼 매력적이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서-아마도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우리는 현실에 대해 배운다. 우리가 속한 우주는, 그저 세계 속에 이름도 없는 작은 모래성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우리는 더는 존재 자체만으로 환영받던 아기가 아니다. 웃고 걷고 말하는 것으로는 어른들의 찬사를 받을 수 없다. 우리는 뭔가를, 더 많은 것을 해내야 한다. 결정적인 깨달음은, 소공녀가 되는 건 아주 소수의 사람들일 뿐이라는 거다. 그래서 기적 이야기에 더는 전처럼 열광하지 않게 된다. 불가능하거나 환상적인 기적보다는 차라리 로또 같은 현실적인 기적을 꿈꾸는 ‘속물’이 된다. 항상 위를 동경하면서, 나란히 걷는 사람들을 질시하며, 자기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을 투명 인간 취급하는 우리, 속물들. 그러나 어쩌면 위를 향한 동경은 인간의 본능인지도 모른다. 소공녀를 꿈꾸듯이, 기적을 꿈꾼 건 자연스러웠으니까. 그러나 어떤 인간도 온전히 극악하거나 극선하지는 않다. 우리 모두는 경계를 산다. 어쩌면 진짜 기적이라는 건, 그 경계에서 일어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은, 사실 좋아하는 스타일의 소설은 아니다. 히가시고 게이고가 이런 소설을 썼다는 사실에도 놀랐다. 그의 소설을 관통하는 사상이 ‘휴머니즘’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사실 ‘미소 시리즈’의 냉소가 더 좋았다. 휴머니즘은 그저 착한 사람들을 그리는 것으로만은 성립하지 않는다. 사실 선함을 자발적으로 실천하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많은 사람들은 ‘악한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스스로 선하다고 자부한다. 그러나 냉정하게 말해, 우리가 악하지 않은 건 악한 일을 할 만한 절묘한 상황에 처하지 않았거나, 악을 행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자살을 하는 것보다 남을 죽이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어떤 영화의 대사도 떠오른다. 우리는 무위함으로써 스스로의 정의를 정당화한다. 그건 우리가 이 세상을 바꿀 결정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주장할 수 있기 때문이며, 우리 대신 누군가가 공적 의무를 대신해도 이 사회가 충분히 유지된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를 기본적으로 믿지 않는다. 그런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충분히 위로와 공감이 된다고 해도, 누군가는 다른 이로부터 구원을 받는다고 해도, 여전히 구원받지 못하는 사람들이 훨씬 많다고 느낀다. 물론 이건 적선의 딜레마와도 같다. 걸인에게 당장 몇 푼을 적선해서 그가 술을 사먹는 꼴을 보더라도, 내가 그를 도울 사회적 위치에 오를 가능성이 없다면, 차라리 그게 더 인간적인 게 아닐까. 답은 여러 개 있을 수 있다. 물론 누군가에게 아주 작은 도움이라도 주었다면, 그 의미를 깎아내릴 수는 없다. 대가를 바라지 않은 자발적인 도움, 심지어 그 자신의 만족을 위한 것도 아닌 선행을 비아냥거리지는 못한다. 누군가가 내민 손을 잡은 경험은 우리에게도 한번쯤은 있으니. 어쩌면 그것이 소공녀의 기적이 아니라 우리 삶의 진짜 기적일지도 모르니까 말이다.

히가시노 게이고의 이 소설은 그런 ‘작은 도움’이 만들어내는 기적을 퍼즐처럼 끼워맞추고 있다. 인물들 사이의 관계가 너무 가깝지 않나 싶다가도, 소도시의 작은 잡화점에서의 일이니 크게 개연성이 떨어지지는 않아 보인다. 나미야 잡화점은 이미 33년 전에 문을 닫은 곳이다. 주인인 나미야 유지가 별세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내가 세상을 떠난 후 상심에 젖어 있다가, 우연히 장난스런 질문을 받는 상담을 하면서 새로운 삶에 눈뜬다. 처음에는 아이들의 농담 같은 질문에 재치 있는 답을 써서 가게의 벽에 붙이는 것에서 시작했다. 할아버지는 어떤 질문도 무시하지 않고, 답을 주었다.

이런 장난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근본적으로 똑같아.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휑하니 뚫렸고, 거기서 중요한 뭔가가 쏟아져 나온 거야. 그런 편지를 보낸 사람들도 반드시 답장을 받으러 찾아와. 인간의 마음 속에서 흘러나온 소리는 어떤 것이든 절대로 무시해서는 안 돼.(159)

그렇게 인간은 모두 외롭고, 답을 모르고,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애타게 바라고 있다. 할아버지는, 사람들이 사실은 모두 ‘정답’을 알고 있으며, 자기가 정한 답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라는 걸 알았다. 그러나 누군가에게 마음을 의탁하는 것 자체가 그들의 마음을 단단하게 해주는 비료인 것이다. 그래서 ‘마음의 소리’들은 늘 절박하고, 내밀하고, 거칠다. 익명 게시판 같은 데를 구경해보거나 글을 남겨본 사람은 누구나 알 것이다. 우리의 내면은 아주 약한 살갗으로 되어 외부의 약한 자극에도 금방 피가 맺히고 멍이 든다는 것을. 우리는 그걸 숨기기 위해 가면 위에 또 가면을 쓰고 살아간다는 것을. 
 
‘폴 레논’이란 피상담자에게 내밀한 상담을 받은 후부터, 나미야 할아버지는 편지함과 우유상자를 이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때부터는 본격적으로 상담자 역할을 하면서 삶의 의미를 찾는다. 그러나 잡화점의 적자는 쌓이고, 어느날 문득 할아버지는 의문에 휩싸인다. 편지가 끊긴 피상담자들의 현실이 궁금했던 것이다. 내가 과연 제대로 상담을 해준 걸까? 내가 한 상담 때문에 오히려 누군가는 피해를 보지 않았을까? 한편으로 할아버지는 암에 걸려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된다. 여기서 기적적인 일이 벌어진다. 나미야 잡화점의 시공간이 뒤틀리면서, ‘미래에서 편지를 받는 일’이다. 여기서부터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은 한 편의 판타지가 된다. 할아버지는 기괴한 유언을 남긴다. 바로 33년 뒤에, 자신의 메시지를 세상에 전해달라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그런 영감을 어디에서 얻은 것일까? 미래의 어느날, 아들도 아니고 손자가 인터넷 블로그에 올린 글은 다음과 같았다.

“오전 0시부터 새벽까지 나미야 잡화점의 상담 창구가 부활합니다. 예전에 나미야 잡화점에서 상담 편지를 받으셨던 분들에게 부탁드립니다. 그 편지는 당신의 인생에 어떤 영향을 끼쳤습니까?”

아들이 그 약속을 확실히 지키겠다고 다짐한 후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할아버지의 편지함에는, 미래로부터 도달한 편지들이 수없이 도착해 있었다. 장난스러운 질문에 대한 답부터 진지한 편지에 대한 답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공부하지 않고도 시험에 백점 맞는 법을 물은 아이에게 '당신에 대한 시험'을 치라는 조언을 했다. 당신에 관한 문제니까 당신이 쓴 답이 정답이니까. 아이는 자라서 선생이 되어, 아이들과 친해지는 데 그 조언을 활용했다. 또한 할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피상담자의 딸이 뭉클한 사연을 전해주기도 했다. 나를 버린 세상이 사실은 나를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는 걸 확인하고, 삶의 의미를 깨달은 사람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의 상담은, 옳았던 걸까. 상담은 사실 누구에게나 옳거나 그르다고 말할 수 없다. 우리가 결정할 수 있는 건 결국 하나의 선택뿐이기 때문이다. 두 개의 인생을 살아보지 않았기에, 두 가지를 동시에 선택할 수 없기에, 우리는 우리의 선택에 힘껏 책임을 질 뿐이다. 따라서 할아버지는 무죄다. ‘폴 레논’의 먼 미래의 답장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할아버지는 운명과 우연의 힘을 좌우할 수 없다. 그저 그들의 무거운 삶을 함께, 잠시라도 들어줬을 뿐이다. 마치 세상을 짊어진 아틀라스 같은 피상담자 각자의 삶을.

할아버지는 일 년 동안 ‘죽은 듯한 잠’에 빠져든다. 그 일 년 동안 나미아 잡화점은 일종의 타임슬립이 가능한 초공간이 된다. 33년 후에, 그 집에 도착한 세 도둑 쇼타, 아쓰야, 고헤이가 할아버지가 미처 답을 하지 못한 질문들에 대해 답을 해주었기 때문이다. 시간 여행에 대해 논리적으로 따지기 시작하면, 아예 이야기 자체가 성립하지 못한다. 할아버지는 누군가, 어딘가에서 자기가 쓰지 못하는 답장을 써주기를 바랐던 것일까. 할아버지가 생명을 다한 9월 13일이 바로 인터넷에 글을 올린 날이며, 마지막 상담을 해준 날인 것이다. 

쇼타, 고헤이, 아쓰야는 환광원이란 고아원 출신으로 좀도둑이다. 그들은 빈집을 털다 실패하고 몸을 숨기기 위해 나미야 잡화점을 찾았다. 거기에서 기묘한 일이 일어난다. 누군가 편지를 편지함에 넣었고, 그들이 토론 끝에 답장을 써서 우유상자에 넣자, 다시 답장이 신비하게 나타났던 것이다. 그들은 공간의 왜곡을 깨달았다. 그런데 좀도둑이며, 루저이며, 삶에 의미를 두지 못한 그들은 왜 상담을 해주는가. 가장 냉소적인 아쓰야는, 필요 이상으로 타인과 엮일 필요가 없다고 말한다. 경찰에게 걸릴 만한 짓을 왜 하느냐는 것이다. 이유는 그랬다. 

“누가 우리한테 그런 상담을 하겠어. 아마 평생 그런 일은 없을 거야. 이게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남을 위로하는 건 특별한 일이다. 자기 앞가림도 못하면서 남의 상담을 하겠다는 건 우스운 노릇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편지의 답장을 쓰기로 마음먹는다. 아마도 무언가 가치있는 일을 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고 싶었을 것이다. 이들은 나미야 할아버지와 같은 연륜이나 지혜, 삶의 깊이도 없다. 그들의 상담은 거칠고, 직선적이며, 비아냥거리며, 냉정하다. 하지만 그들은 33년 전의 인물들에게 조언을 하는 것이다. 어쩌면 할아버지보다 더 유리한 위치인지도 모른다. 달 토끼, 생선 가게 뮤지션, 길 잃은 강아지와 상담을 나누면서 그들은 미래의 지식을 통해 그들에게 용기를 준다. 특히 달 토끼의 이야기가 인상깊었다. 달토끼는 상담을 하면서도 진짜 자신의 마음은 드러내지 않았다. 즉 ‘포기하고 싶은 마음’을 숨겼던 것이다. 그래서 오히려 강하게 반응하는 삼인방을 통해 자신의 내면을 발견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 뒤에는, 정말 해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모든 환자처럼, 피상담자는 상담자를 속인다. 때로 우리는 우리 스스로에게조차 진실하지 않다. 그것을 좀도둑 삼인방의 ‘거친 조언’으로 이끌어낸 것이다. 그 결과 달토끼는 자신의 결정에 만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소설은, 나미야 할아버지의 피상담자들과 삼인방의 피상담자들의 이야기를 병렬식으로 늘어놓는다. 그 이야기들은 ‘환광원’과 연결된다. 추리소설가인 작가는 휴머니즘을 이렇게 직조한다. 이야기에 등장하는 인물 대부분은 환광원 출신이다. 그러나 마지막 상담자인 ‘길 잃은 강아지’에 이르러서는, 이야기가 지나치게 ‘소공녀’스럽지 않나 싶었다. 미래의 지식을 이용해서 한 가난한 여자에게 돈을 벌게 해주는 이야기는, 손쉬운 발상이었다. 물론 부자가 된 그녀가 마지막 순간에 어떤 깨달음을 얻게 될지 모른다. 그래도 그 이야기는 너무 작위적이었다. 타임슬립의 장치를 좀 더 교묘한 일과 연관시킬 수 없었을까. 사변소설은 아니지만, 미래와 과거 사이의 틈이라는 소재를 너무 쉽게 다룬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소원이 있다면, 히가시노 게이고가 좀 과작을 해서(베르나르 베르베르에게도 간절히 바라건대) 정말 공들인 추리소설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뛰어넘는 것이야말로, 모든 예술가가 바라는 ‘불멸’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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