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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설계도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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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무라카미 류의 ‘노래하는 고래’라는 소설을 읽었다. 27세기를 배경으로 한 야심한 SF 장편이었다. 노화를 방지하는 기술이 개발되어 상류층 사람들은 죽지 않고 젊고 아름다운 외모를 그대로 간직하며 사는 디스토피아 얘기였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풀어가는 과정이 독자 입장에서 매우 고통스러웠다. 새로운 기술이나 과학 얘기가 나올 때마다 작가는 꼼꼼하게 그걸 설명했다. 기술적 상상력에 대한 과시인지, 소설적 장치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지옥설계도를 읽을 때 느낌도 비슷했다. 과학이나 게임에 대한 지식이 소설을 읽을 때 꼭 필요한 건 아니다. 그 기술을 소설적 장치로 얼마나 잘 활용하는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소설의 흐름을 끊으면서 필요한 정보를 하나하나 풀어 설명해준다면, 독자는 이야기에서 급속도로 빠져나온다. 이 소설은 이야기보다 지식을 풀어내는 데에 더 열심인 것처럼 보였다. 다양한 등장인물들도 서로 끈적끈적하게 얽히지 않고 그저 물 위에 뜬 기름들처럼 둥둥 떠다녔다. 꼭 그래야 할 필요는 없겠지만, 중심인물이 이끌어나가는 구성은 독자가 따라가기 편하다. 꼭 주인공이 하나랄 필요는 없다. 그러나 너무 많은 인물이 등장해서 각자의 이야기를 조금씩만 들려주기 때문에 그들 모두가 엑스트라처럼 느껴졌다. 즉 인물들 중 누구에게도 감정이입을 하기 어려웠다. 그들이 범인과 다른 ‘강화인간’이어서인가?


물론 지옥설계도의 구성이나 착상은 매우 놀라운 것이었다. 오랜 전통을 가진 서구 SF작가 소설에 비견해서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기술이나 과학에 대한 상상력이 놀라웠다. 미국과 중국이 인간 이상의 인간인 강화인간을 만들었다. 아무나 강화인간이 될 수는 없다. 약물과 훈련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죽음을 맞는다. 각 거대정부는 그들의 이익을 위해 강화인간을 써먹으려 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영리해진 그들이 보통인간의 명령을 따를 것이라고 생각한 건 순진했다. 그건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그들의 어떤 약점을 잡고 있지 않는 한, 신체적 정신적 능력이 극대화된 강화인간들을 통제할 수 없다. 심지어 그들에게는 어떤 인간적 무기도 그리 효용이 없다. 그들은 고통에서도 해방된 존재들이다. 뇌 기능 강화로 질병과 신체장애를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자기 몸의 호르몬 분비나 신체대사를 의식적으로 조절하는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미래 인간일 것이었다. 그들을 공격할 수 있는 건 총탄보다는 의식적인 교란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테마이자 게임의 무대이기도 한 ‘인페르노 나인’에서 벌어지는 최면 공격이다. 강화인간은 메타포에 약하다. 보통 사람의 수십배에 달하는 이해능력 때문에 교묘한 최면 어구에 걸려 그만 의식의 평형을 잃어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그 최면의 세계는 게임의 세계와도 같았다. 최면을 거는 사람(형성자)이 자신이 만든 최면의 세계로 유도하면, 최면에 걸린 사람(유도자)가 스스로 형성자가 되어 최면 세계의 상상 세계를 건설하는 것이다.


한편 강화인간들은 인간의 진화에 대한 한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뇌가 극도로 발달한 인간들은 자기 이익을 극단적으로 추구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인류’를 꿈꾸었다. 그들이 꿈꾸는 지구의 스케일은 참으로 방대했다. 지식에 특화된 강화인간들이 보기에 지구의 체제는 썩을대로 썩었고, 지구는 ‘자본의 완벽한 독재가 이루어진 세상, 자본은 어디로든 움직일 수 있지만 개인은 어디로도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세상, 절대다수가 실업과 가난과 고통의 집단적 결핍 속에서 살아가는 디스토피아(181)’였다. 대다수의 인간들은 압제와 가난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지구 그 자체의 생태계도 인간이 파괴했다. 이대로 간다면, 지구는 쓰레기별이 될 터였다. 그러나 이 주제가 너무 방대하기에 누구도 언뜻 손을 대려 하지 못한다. 작가는 이 주제를 강화인간이라는 소재와 기묘하게 엮어넣었다. 그들은 공생당을 만들어 전 세계 평화주의자들을 끌어모아서 지하운동을 벌인다. 그들의 모토는 ‘세계 연방, 세계 문화, 완전 고용, 양성 평등, 지구 부활’이다. 이 어찌 거대한 프로젝트가 아닌가. 그리고 이걸 위해 필요한 돈은, ‘단돈 1조 달러’다.


그러나 지구의 실제적 지배자들이 그런 구상을 받아들일 리 만무했다. 지구를 지배하는 건 정치인들이 아니라 거대한 부를 소유한 극소수의 부자였다. 강화인간 1호인 자오얼은 심문 과정에서 ‘자본주의의 원리’에 대해 말한다. 실물 팽창, 금융 팽창 다음에는 전쟁이 따른다고. 전쟁은 미국과 유럽의 제조업을 부흥시키기에 그들에게 나쁜 결과가 될 수 없다고. 금융이 추락하여 전쟁이 나지 못하게 막고 있는 건, 바로 금융을 조달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러므로 공생당은 전쟁을 해야만 했고, 강화인간을 파괴하더라도 그들의 계획을 막아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왜냐하면 진보주의자보다 보수주의자가 더 힘을 갖는 세상이기 때문이다. 지키려는 자는 훨씬 강하고 악착같고 악독하다. 반면 바꾸려는 자는 유연하고 온화하다. 그런 차이는 결국 대개의 혁명이 왜 실패로 끝나는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그 계획과 저지가 이루어지는 과정이 지나치게 복잡했다. 개연성 없는 장면도 많았다. 기획관은 왜 김호에게 그 모든 강화인간에 관한 기밀을 알려준 것인가? 새라 역시 그랬고, 마지막 장면에서도 살아남은 강화인간이 김호에게 그간의 사정을 모두 말해준다. 그건 독자가 알도록 하기 위한 장치처럼 보여 어색했다. 인물들이 그간의 개요를 줄줄 나열하면서 사건을 설명하는 건 액션 장면이 이어지는 장면만큼이나 몰입이 어려웠다. 더구나 작가는 전문지식으로 무장하고 있지만, 스토리와 이어지도록 에둘러 전달하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강화인간 간의 사랑도, 그들의 숭고한 패배도, 주인공 김호의 인생역정도 크게 공감이 가지 않았다. 그나마 소설 속의 소설인 오징어먹물리조트에 등장하는 연인 이야기가 가장 감동적이었을 정도로.


초반에 매우 기대하며 읽었기에 뒷부분의 독서가 어려워서 더 힘들었던 것 같다. 특히 게임 세계가 판타지소설과 유사해서 읽는 데 더 방해가 되었다. 추리와 판타지, 액션과 과학 소설의 면모를 갖추었지만, 관련 지식을 매우 잘 소화하는 사람이 아니면 읽기가 좀 어렵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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