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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 블랙피쉬 / 2018년 1월
평점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 감정 오작동 사회에서 나를 지키는 실천 인문학』
오찬호 지음
부끄러워하고 눈물 흘리며 아무 말도 못하게 입을 막고 있는 모습을 담고 있는 책 표지를 보고 도대체 이 책은 어떤 내용을 담고 있기에 이런 표지를 택한 것인지 궁금해졌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기에 나만 부끄러운 거냐고 묻는 건지, 책 속에 열거된 상황들이라면 당신도 부끄럽다고 느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미의 이 질문이 책을 펼쳐들게 했다.
저자 소개를 보니 저자는 작가로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몇몇 텔레비전 방송에 출연하며 모두가 살기 좋은 곳으로 사회를 바꾸기 위해 열심히 활동하고 있는 것 같다. 아쉽게도 나는 이제서야 이 책을 통해서 저자를 알게 되었는데, 그가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을 보면서 사고의 폭을 넓힐 수 있었고 많은 것들을 깨닫고 생각해볼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었다. 또한 저자의 다른 저서들도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PART 1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만
PART 2 그게 다 강박인 줄도 모르고
PART 3 불균형 사회, 나와 너를 성장시키는 법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어서 생활을 하고 있고, 따라야 할 법과 규칙이 있다. 그리고 때론 법이 아니더라도 서로 간에 지켜야 할 예의와 배려가 있다면 좀 더 건강하고 행복한 사회를 만들며 살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 책에서는 그렇지 못한 경우들 때문에 생기는 문제들과 그것을 바라보는 한국인의 시선과 사회풍토에 대해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었다. 이런 이야기들은 내 생활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음에도, 그동안 크게 문제시 삼지 않았던 혹은 그냥 원래 그런 것이라고 치부해버리거나 '지금은 바쁘니까 나중에'라며 밀어두었던 것들이기도 했고, 때론 생각조차 하지 않았던 것들도 있었다. 내 모습을 보고 있는 것 같은 글도 보이고, 내가 그랬던 적이 혹시 있지는 않았는지를 뒤돌아보기도 했다.
"(상략) 기어코 열린 공청회장에서 장애인을 자녀로 둔 부모들이 무릎을 꿇고 '제발 허락해 달라'고 애원해도 세상을 비장애인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들은 콧방귀다. '연민'은 인간의 보편적 정서라는데 틀린 말이다. 사람들은 상대를 가려서 연민한다."
사실 책의 내용은 쉬웠지만 또 쉽지 않았다. 저자의 말처럼 모두가 잘 사는 사회,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면 님비현상은 있어서는 안될 집단이기주의로 보는 것이 맞고, 그런 행동을 하며 자신의 사적 재산권을 지키려는 사람들에 의해 타인의 권리가 짓밟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책에서는 장애인 학교 설립과 관련된 문제를 예로 다루었지만 만약 내 집 앞에 나와 내 가족의 건강을 위협하는 원자력, 고압전류 등의 위험한 시설이 들어온다고 한다면 나 역시 피켓을 들고 서있게 되지 않을까 싶다. 모두를 위해 필요하지만 모두가 다 꺼리는 시설, 하지만 누군가는 공공의 이익을 위해 피해를 보면서 희생하고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 사익추구를 위한 것이 아님에도 공익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개인의 권리와 삶이 짓밟혀도 된다는 것 또한 민주주의라는 이름의 다른 문제점이 아닐까 싶었다. 다수를 위한 소수의 희생. 나와 내 가족의 삶과 건강을 위해서 최대한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의사를 표현했을 뿐인데 마치 이것을 집단이기주의라 칭하고 님비현상이 문제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그럼 "너희 집 앞에 이 시설을 세워라"라고 하면 "얼씨구나 좋다!"라며 말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이것을 그저 자신들의 사익을 위해 타인의 권리를 빼앗는 집단이기주의로만 볼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좀 더 깊이 있는 논의가 필요한 부분이다.
"하지만 객관적 공포는 예외적인 경우에 덮인다. 유리천장에 신음하는 평균적인 여자를 말할 때 ㅡ 직장 내 성폭력의 피해자가 늘 여성인 이유는 여성들의 노동의 지위가 항상 '을'이기 때문이다 ㅡ 그걸 뚫은 누군가를 굳이 언급하면서 한국 사회에 남녀 불평등이 어디에 있냐고 말하는 사람이 많다. 흑인이 미국의 대통령도 하는데 인종차별이 웬 말이냐는 논리와 흡사한데, 여성차별 문제는 객관적으로 존재하지만 주관적으로 부정되는 대표적인 사례다."
얼마 전에 읽은 폴비티의 『배반』이 생각나는 구절이었다. 흑인이 대통령을 하는 시대가 왔다며 이제 흑인차별은 없다는 듯 말했던 그때처럼, 우리나라도 이제 여성이 대통령을 하는 시대가 왔다며 여성차별은 없다고 말하지만 실상 중요한 것은 대통령의 피부색이 어떻든 성별이 어떻든 그것과는 관계없이 인종차별과 성차별은 만연해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것이 차별인지 모르고 누군가에게 끊임없이 피해를 주는 태도이다. 이것이 저자가 말하는 부끄러움이고,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도 괜찮지 않다는 것이다.
성차별과 관련하여 추가로 덧붙이고 싶은 것은 교과서에서는 성차별을 둔 삽화를 제거했다고 하지만, 아직도 아이들이 자라는 동안 만나게 되는 환경 속에 성차별은 존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지금 현재 우리 아이가 보는 동화책에도 아빠는 신문을 보고 엄마는 요리를 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아빠가 요리를 하고 엄마는 책을 읽으면 안 되는 이유가 뭘까? 아이가 보는 육아 프로그램의 한 에피소드는 가족 모두가 새로 생긴 백화점에 놀러 갔는데 아빠는 도착하자마자 자신의 취미활동을 위한 매장으로 가면서 이따가 만나자고 이야기하고 엄마는 알았다고 다녀오시라며 아이들을 챙긴다. 알게 모르게 육아는 엄마의 전유물이고 아빠는 보다 자유롭고 적극적으로 개인을 위한 여가활동과 사회생활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아이에게 전달되는 것이다. 로봇을 좋아하는 여자아이는 특이하고, 인형 놀이를 하는 남자아이는 비판을 받는다. 어릴 때부터 성차별에 대해 몸소 체득하며 익히니 이것이 성차별인지조차 모르는 것이 당연하고 당연하게 받아들이니 이상하게 바라보는 사람이 더 이상한 사회가 되어버렸다.
노키즈 존에 대한 이야기와 봉사활동에 대한 성차별에 대한 저자의 설명은 지금까지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에 대한 깨달음이자 일침 같았다. 봉사활동을 하며 받았던 성차별에 대해 호소하는 남성들이 사실상 취업 시에는 성차별을 당했기 때문에 역차별을 할 수 있게 되는 아이러니한 구조는 허탈감마저 들게 했다. 청년취업률이 바닥을 기고 있는 이 시대에 여성이든 남성이든 스펙을 쌓기 위해 많은 이들이 노력을 하고 있는데 그 노력 자체를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성에 의해 나눠지고 평가절하시켜 여성의 사회진출을 막는다면 그것이 진정한 성차별이 아니고 뭐겠는가. 결국 회사에서 원하는 인재(결혼, 임신 등으로 휴직을 하지 않고 가정에 얽매이지 않고 오래 일할 수 있는 사람, 즉 남성)을 뽑는 기준 중 하나로 작용하고 있었다니.. 봉사활동 하나에도 그 이면에는 이런 깊은 속 사정이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아이를 키우는 부모지만 노키즈 존에 대해 책에서처럼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노키즈 존이라는 것이 있다고 들었을 때 카페에서 책을 읽고 싶을 때 조용하고 사람이 없는 한적한 카페를 찾듯이 아이들에게 방해받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찾는 장소 정도로 가볍게 여겼는데, 노키즈 존이 생기게 된 배경과 인식, 그리고 그것이 끼칠 영향과 미래에 대한 이야길 듣자니 가볍게 생각할 게 전혀 아니었던 것이다. 사회적 강자(어른)가 만들어 놓은 사회적 약자(아이)에 대한 차별이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당당하게 팻말을 내건 "노키즈 존"은 결국 이곳은 "아이들과 아이를 키우는 부모를 차별하는 곳입니다"라는 선언이고, 결국 누군가의 이익을 위해 또 다른 누군가는 이유 없이 문전박대를 당하며 피해를 봐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는 것을 사회적으로 용납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표방하지만 모두가 평등하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나아가 자신만 생각하는 특정 소수에 의해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차별을 받는 사회를 당연시 여기고 살아가고 그들 또한 차별을 일삼게 될 거란 생각에 폭력이 폭력을 부르고 차별이 차별을 부르는 악순환이 생겨나는 사회구조를 하나둘 만들어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대한민국은 꼰대 천국이다. 꼰대는 어디서나 일관되게 산다.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어린 사람을 하대하고, 남자라는 이유로 여성을 우습게 여기며, 직급이 높다는 이유로 아래에게 무리한 요구를 하는 전통적 꼰대들은 누구나 생애 과정에서 마주친다. 내가 만난 꼰대를 당신도 만날 수밖에 없다. 돈 좀 많이 번다고 저임금 노동자에게 훈계하고, 손님이랍시고 일하는 사람에게 막말을 하고, 어른이랍시고 '나도 다 참고 살았다'라는 말을 조언이라며 건네는 꼰대를 만나지 않고 한국에서 살기란 어렵다.
"(상략) 나이가 젊다고 다 꼰대가 아닐 이유도 없다. 자유라는 명목으로 주변의 타당한 비판에 귀를 닫거나 개성이라는 달짝지근한 단어를 남발하며 자신의 기준 '외'의 것을 다 구린 것으로 바라본다면 ㅡ 특히나 '옷'처럼 도무지 사람의 격을 판단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기준으로 ㅡ 그 사람이 꼰대다."
일반적으로 꼰대라 하면 나이 든 사람이 자신의 경험담이라며 자신의 생각을 젊은 사람에게 반강제적으로 주입하는 사람이라 생각했는데 참으로 꼰대의 영역도 넓고 종류도 다양하다. 하지만 을의 입장에서 당했던 수모들을 단지 갑이었던 그들이 꼰대였기 때문이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없을 것이다. 책의 도입부에 나왔던 A의 악에 받친 몸부림을 보며 충분히 이해가 가는 상황을 만드는 이 사회가 참으로 씁쓸했다. 누군가에게 의해 자존심과 자존감이 짓밟히는 순간, 나 역시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내가 성공해서 날 깔봤던 그들을 뭉게버려야겠다는 생각을 왜 해보지 않겠는가. 을이 갑이 되는 순간을 성공이라 여기며 앞을 향해 힘차게 나아가는 그들이 결국 갑의 위치에 올라 또 다른 갑의 횡포를 일삼고 "나도 다 그러면서 살았고 그러면서 컸다"라며 또 다른 억울한 을을 양산해내는 악순환의 구조를 만들어낸다. 결국 을은 갑이되고 또 다른 을이 만들어지면서 평등은 꿈꿔볼 수 없는 수직적인 사회관계만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자괴감에 괴로워하며 우울증을 앓다가 결국 힘든 결정을 내린 자들을 보며 남겨진 우리는 그들의 삶을 통해 사회의 부조리한 단면을 찾고 바꾸려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서도 그들을 비난하길 일삼는다. "그러니 그것밖에 못되지"라며. 나는 그런 위험한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을까. 없었길 바란다.
"이 놀이터는 차별의 시작이 '분리'로부터 시작됨을 간과한다. 차별의 해소는 차별이 발생하는 곳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장애를 가진 아이가 집 앞 놀이터에서 여러 차별을 느낀다면 '누구나 갈 수 있는' 그 놀이터가 변해야 한다. 이를 무시하고 '저기 어딘가' 놀 만한 곳을 만든다고 사회는 달라지지 않는다. 오히려 일상적인 놀이터에서 발생한 차별은 면죄부를 받는다.
무장애 놀이터가 있다는 사실은 보통의 놀이터는 '비장애인 전용', 즉 '노(No) 장애인 존'이 되어도 문제가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 준다. (하략)"
무장애 놀이터가 있다는 사실도 책을 통해 처음 알게 되었다. 장애인들을 위한 놀이터가 결국 비장애인과 장애인을 구별하는 차별에 기반을 둔 발상이라는 것을 아마 이 놀이터를 만든 사람들은 깨닫지 못했을 것이다. 현재 장애인이 이용 가능한 놀이터를 만들어보자는 취지에서 가볍게 생각하고 만든 것은 아니었을까. 하지만 이런 생각이 결국은 "이곳은 장애인들만 이용하는 놀이터입니다"라는 건 차별을 만들어냈고 저자가 말했듯이 "다른 놀이터는 장애인들이 이용하면 안 되는 놀이터"가 돼버린 셈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이런 안일한 생각으로 만들어진 무장애 놀이터를 보며 "과연 장애인을 위한 복지정책에 장애인의 의견이 얼마나 반영이 되는 것일까?"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다. 비장애인은 장애인들이 겪는 불편을 알 수 없다. 그저 비장애인의 시선에서 보는 생각이고 정책일 뿐이다. 장애인을 위한 정책을 비장애인이 만드는 순간 차별은 시작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브래들리 타임피스라는 시계는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누구든 사용 가능하도록 만들어졌다. 하지만 처음 이 시계를 만들었을 때는 지금과 모양이 달랐다고 한다. 결국 비장애인의 생각이 장애인의 충고를 거쳐 누구든 사용할 수 있는 시계로 탄생하게 된 비화가 숨어있다. 모두가 함께 할 수 있는 사회는 강자가 약자를 위해 배려하는 차원 정도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강자든 약자든 다수든 소수든 누구나 다 목소리를 내고 그것을 최대한 조율하며 수용할 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닐까.
학교폭력 자체가 잘못된 것이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을 묵인하지 못하도록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행동해야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되지 않는지를 가르치는 교육. 가해자를 처벌하는 것이 아니라 피해자에게 너에게도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닌지 살펴보라는 사람들의 인식이 잘못된 것임에도 우리는 그 잘못을 모르고 피해자를 두 번, 세 번 죽이고 아무렇지 않아 한다. 정말 부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이들은 치열한 경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친구인 듯 친구 아닌, 적인 듯 적이 아닌 교우관계를 유지하고 짓밟히지 않으려면 짓밟고 올라서야 한다. 인성교육은 사라진지 오래다. 이렇게 인간다움이 사라진 아이들이 자라서 자기 중심의 편파적인 생각을 하고 타인의 고통은 무시하며 감정이 메말라버린 차가운 회색도시를 만드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결과가 아니겠는가.
잘못된 교사의 방침에 대한 이야길 꺼낸 학부모가 오히려 다른 학부모들로부터 질타를 들었다는 이야기에 앞으로 부모로서 아이를 어떻게 키워야 할지, 그리고 학부모로서 교사와 학교의 방침에 대해 어떻게 받아들여할지 정말 영리하게(이해득실을 잘 따져서)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씁쓸한 현실이다. 아이를 학교에 보내놓은 부모는 언제나 을의 입장이다. 내 언행 때문에 혹시라도 내 아이가 교사로부터 학교로부터 다른 학부모로부터 다른 학생들로부터 차별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닐지 언제나 노심초사다. 그런데 교사의 잘못을 지적한 학부모를 지지하는 것이 아니라 교사의 심기를 건드렸다며 다른 학부모들이 그 학부모를 비난했다고 하니, 어른들의 이런 잘못된 행동과 변하지 않는 잘못된 제도 때문에 피해를 보는 건 아이들이라는 걸 왜 모르는 걸까. 그리고 이렇게 자란 아이들이 또 다른 악순환을 이어간다는 사실을 왜 모른는 걸까.
자신의 권리를 위해 타인의 권리는 무시하는 사람들, 자신의 성공을 위해 남을 힘들게 하는 사람들, 약자에게 폭력과 차별을 일삼는 사회와 그게 문제인지조차 의식하지 못하는 사람들, 편견을 편견이라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만을 주장하는 사람들 등 책을 읽으면서 공감을 하는 부분도 있었고, 미처 생각지 못한 부분도 알게 되었으며, 혹시 나 역시 그런 꼰대 같은 사람이고 가해자가 된 적은 없었는지,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살아오진 않았는지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안면조차 모르는 누군가를 위한 착한 소비를 하며 선행이 또 다른 선행으로 이어지고, 잘못된 제도를 바꾸기 위해 시민들이 힘을 모아 소리를 내기도 하는 우리 사회를 보면서, 아직은 부조리하고 불평등한 모습이 사회 전반에 걸쳐 더 많이 보이지만 우리 사회가 좀 더 밝고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져본다. 모두가 차별받지 않고 평등하게 법의 테두리 안에서 자신의 권리와 자유를 누릴 수 있고 사회적 약자도, 소수의 집단도 모두가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사회가 되는 그날까지 끊임없이 고뇌하고 변화를 꾀해야 할 것이다. 살기 좋은 사회를 만드는 것은 결국 우리 모두가 살기 좋아지는 것이고 우리 아이들이 살기 좋아지는 세상을 만드는 것임은 틀림없는 사실일 테니까.
타인의 얼굴을 붉히는 일을 만들었거나, 타인의 눈에 눈물나게 한 적이 있는 사람, 반대로 타인으로 하여금 얼굴을 붉힌 적이 있거나, 타인으로 하여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는 사람, 내가 한 말이 다른 사람의 가슴에 비수가 되어 꽂히는지조차 모르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꼭 읽어보길 권한다. 난 꼰대도 아니고 가해자도 피해자도 아니며 다른 사람을 차별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고 깊이 반성해보길 권한다.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는 세상에서 많은 사람들이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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