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증명 - 상 해문 세계추리걸작선 29
모리무라 세이치 지음 / 해문출판사 / 2003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엄마, 내 그 모자 어떻게 됐을까요?
그해 여름, 우스이에서 기리즈미로 가던 길에
골짜기에 떨어뜨린 그 밀짚모자 말예요.
엄마, 그건 참 멋진 모자였어요.
그때는 정말 약이 올랐더랬어요.
하지만, 느닷없이 몰아닥친 돌개바람은 어쩔 수 없잖아요?
엄마, 그때 건너편에서 다가온 젊은 약행상 기억하세요?
감색 각반에 팔목받이를 했던......
모자를 주워 오려고 무척이나 애를 썼었죠.
하지만 끝내 실패하고 말았죠.
깊은 골짝, 빽빽히 우거진 숲에 손을 들고 말았어요.
엄마 그 모자 정말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때 길섶에 피어 있던 들백합은 오래 전에 오래 전에 시들어 버렸겠죠.
가을이면 회색 안개에 젖던 그 언덕,
그 모자 밑에서는 밤마다 밤마다 귀뚜라미가 울었을지도 몰라요.
엄마, 지금쯤은
오늘밤쯤 그 계곡에는 분명 소리 없이 눈이 쌓이겠죠.
그 옛날 반짝반짝 빛나던 이태리 밀짚모자와
그 속에 내가 써 둔 Y. S 두 글자를 묻어 버릴 듯이, 조용하고 쓸쓸하게......

이 시는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는 사이조 야소라는 일본 시인의 <밀짚모자>라는 제목의 시다. 후기에 작가는 이 시를 감동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내가 읽어도 어릴 적 아련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시다.

이 작품은 좀 묘한 작품이다. 가해자가 피해자로, 피해자가 다시 가해자로 만나게 되는 반복되는 인연을 나타낸 작품이다.

작품의 줄거리는 한 호텔 스카이 라운지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에서 칼에 찔린 채 죽은 흑인 남자의 살인범을 찾는 것이지만 등장 인물들인 일본 패전 직후부터 몇 십 년의 세월을 전쟁이라는 것 때문에 자신들도 알게 모르게 누군가의 가해자와 피해자로 서로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가 사건을 통해 다시 운명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사이가 된다. 형사는 패전 직후 미군들이 대낮에 성폭행 하려는 여자를 도우려다 맞아 죽은 아버지에 대한 원한이 남아 인간들을 모두 증오하게 되고 그 증오가 범인들을 잡는 힘이 되었다. 그때 자신을 대신 해서 봉변을 당한 남자를 외면한 채 도망을 가 버린 여자는 대단한 스타가 되어 있지만 보이는 것만큼 평탄한 것은 아니다. 또한 형사의 아버지를 때려죽인 미국인은 미국에서 형사가 되어 공교롭게도 자신도 모르는 피해자의 아들을 돕게 된다.

이 작품의 주제는 인과응보라는 느낌이다. 마지막 켄의 무의미한 죽음에서 그가 예전에 자신이 무의미하게 구타하고 모욕했던 일본인에 대한 죄의 대가라고 느끼는 것이 작가가 말하고 싶었던 것이라면 그들은 왜 죄를 뉘우치지 않는지, 어쩌면 작가가 국수주의자거나 아니면 소수의 양심있는 작가 둘 중 하나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내 개인적인 생각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그... 상황이 조금 달랐더라면...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일본이 가당찮게도 전쟁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일본인 입장에서 패전을 하지 않고 승전을 했더라면(우리 입장에서는 끔찍한 일이지만)... 서로 만나지 말았더라면... 잘 살 수 있었더라면... 지금의 위치가 아니었더라면... 그때 그곳을 지나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그들은 시험에 들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증명이라... 참 거창한 제목이다. 하지만 충분히 인간들의 나약함을 이해할 수 있다. 죄 있는 자 돌을 던지라고 했다던가... 인간이란 오히려 이런 존재일 수밖에 없는 증명하고 자시고 할 것도 없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인간이기 때문에 자식을 놔두고 도망을 가기도 하고, 인간이기 때문에 매 맞는 이웃을 구경하는 것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을 모욕하는 것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자식도 죽일 수 있는 것이고, 인간이기 때문에 죄를 짓고 도망가고 적과 손을 잡기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짓이다. 인간이 아니라면 어떤 존재가 이런 일을 매일매일 반복하며 살 수 있겠는가...

표면적인 것은 사건 해결이지만 내재된 것은 인간의 악연의 해결에 있다. 책을 다 읽은 지금에도 인간의 증명이란 정확하게 어떤 것을 작가가 표현하려고 한 것인지 잘 이해가 안 되지만 나름대로 인연을, 악연일지라도 자꾸만 만들어 가는 것이 인간 스스로가 자신을 증명하는 방법이 아닌가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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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솔로 2006-06-22 1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소설도 멋지지만 다케노우치 유타카가 나온 드라마도 참 재밌게 봤습니다.

물만두 2006-06-22 10: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은 드라마도 좋을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5년전에 다른 곳에 올린 리뷴데 생각난 김에 올렸습니다^^;;;

비로그인 2006-06-22 1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아직 책은 못 봤지만 드라마는 봤는데요..마지막에 너무 슬펐어요 ㅠ_ㅠ 저 시 너무 좋아요.

물만두 2006-06-22 12: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돈토코이님 책을 읽어보세요^^

아영엄마 2006-06-23 15: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머나~ 이런 책도 있군요.. ^^

물만두 2006-06-23 15: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영엄마님 왜 이러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