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의 일
히라야마 유메아키 지음, 윤덕주 옮김 / 스튜디오본프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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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기억에 작가의 작품 <유니버설 횡메르카토르 지도의 독백>은 공포와 광기의 소품집이었다. 다른 작가에 비해 더 잔인하거나 그로테스크하지도 않았고 과도한 광기에 집착한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작가는 그저 적절하게 현대 사회의 모습을 어두운 쪽에서 그려냈을 뿐이다. 세상을 밝게 보는 건 동화책이면 충분하다. 로맨스 소설도 있다. 그러니 어둡게 보는 것도 있어야 균형이 맞는다. 그 작가가 이번에는 좀 더 의미심장한 제목인 <남의 일>이란 작품을 보여주고 있다.  

<남의 일>은 교통사고를 당한 남녀가 사람을 발견하고 도움을 청하는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차에 다리가 끼어 운전석에서 나올 수 없는 남자와 다친 여자, 밖으로 튕겨져 나간 딸 아이를 걱정하는 모습과 그런 그들의 애원을 남의 일로 치부하고 도와주지 않는 남자의 모습은 현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모습이다. 그들의 모습속에서 보이는 것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일 것이다.

<자식 해체>는 자식이 커서 은둔형 외톨이가 되어 부모를 구타하는 지경에 이르자 자식을 살해하려고 모의하는 부부의 모습을 담아내고 있다. 남편은 돈 버느라 힘들게 살았다는 이유로 아내와 아들을 구타하고 그것을 합리화하는 인물이다. 그정도는 누구나 하는 일이라고. 아내는 남편에게 맞고 살았는데 아들에게까지 맞고 산다고 한탄을 한다. 하지만 여기에는 기막힌 반전이 마지막에 등장한다. 자식 해체가 아닌 가정 해체라는 현대 사회의 문제점을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이 작품과 더불어 <정년 기일(忌日)>은 회사에서 정년 퇴직을 하자마자 부하직원들에게 그동안 자신이 그들에게 했던 것에 대한 앙갚음을 당하는 씁쓸한 퇴직자를 등장시키고 있다. 그렇게 맞고 도망치듯 나온 뒤 앞서 정년을 맞이한 친구를 만난 주인공이 그에게서 들은 이야기는 더욱 놀랍다. 가정과 회사에서 모두 설 자리를 잃어버린 아버지들의 이야기와 그들 삶이 왜 이렇게 되었는지를 역설적으로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다. 거기에 늘어나는 노인 인구를 달갑지 않게 생각하는 사회와 국가의 모습은 곧 우리에게도 닥칠 현실이라는 불안감을 안겨준다.
 
<딱 한 입에......>는 마치 스탠리 앨린의 <특별 요리>, 로알드 달의 <맛>, 던세이니의 <두 병의 소스>를 생각나게 만드는 작품이다. 한 노인이 자신의 딸을 유괴했다고 집으로 쳐들어 온다. 그 집은 요리 평론가의 집이다. 아내는 남편의 비평에 망한 요리사라고 생각한다. 역시나 남자는 자신의 요리를 남편이 맛보면 딸을 돌려보내주겠노라고 한다. 그리고 아내는 맛없는 그의 요리를 맛보고 남편이 혹평은 당연했다고 생각한다. 남편도 그의 음식을 맛본다. 그리고 딱 한 입에 알아낸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추리소설다운 작품이었고 마지막까지 오싹한 여운이 남는 작품이었다. 

<포비아 소환>은 한 조직 폭력단에서 외국인 노인과 소녀에게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거나 말썽을 피운 사람들을 제거하는데 이용하는 이야기다. 소녀는 순식간에 사람을 넋 나간 사람으로 만드는 재주가 있다. 이것은 그녀가 인간 누구에게나 하나쯤 있는 공포를 조종할 줄 알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인간이 자신이 두려워하는 끝없는 공포속에 갇히게 된다는 생각만으로도 소름이 돋는데 그런 공포를 이용하는 자들이 이미 세상에 너무 많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개인이 아닌 집단의 공포를 조종하고 악용하는 일 말이다. 

<레저레는 무서워>는 한 특별한 아이들만 다니는 사립 고등학교에서 레저레가 무서워서 자살하겠다는 편지를 받은 담임이 학교와 상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는데 이 작품은 정말 우리 사회가 계급 사회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하고 있다. 눈 가리고 아웅하고 있는 계급으로 이미 나뉘어 버린 사회에서 무엇을 외치고 있는 것인지 나도 저 레저레가 무섭기만 하다. 

<인간 실격>은 인간이 어디까지 바닥을 보여줄 수 있을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살을 많잉 하는 다리에서 불치병에 걸려 자살하려는 여자와 동반 자살을 했다 자신만 살아 다시 자살하려는 남자가 만나 서로 먼저 자살하겠다고 한다. 자살 그 자체가 인간 실격일까? 아니면 자살을 구경하는 것이 인간 실격일까? 죽을 사람에게 장난을 치는 것은? 앞에서 등장한 <새끼 고양이와 천연가스>처럼 현실과 게임을 동일시하고 인간의 죽음, 살인은 남의 일이라고 만연된 생각이 남을 불행하게 만들고 남의 불행을 즐기게 만드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나만 아니면 되고 나만 즐거우면 그만인 세상이니까.   

추리소설과 공포소설의 경계는 모호하다. 범죄라는 사건을 바탕으로 하는 추리소설도 그 기반에 공포가 깔려 있기 때문이다. 범죄 자체가 이미 공포인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작가의 작품은 공포소설과 추리소설이 공존하는 범죄소설이고 개인적으로는 현대 사회를 통찰하게 하는 소설이라고 말하고 싶다. 현대인의 심리적 공포는 그 사회에서 기인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현대 심리 소설이라고 해도 좋을 듯 하다. 

작품들은 세상을 '나'위주로 살다가는 큰 코 다친다고 경고하고 있다. 그러면서 남의 불행은 나의 행복이 결코 아니고 '나'와 '남'은 결국 동전의 양면처럼 붙어 있는 존재임을 각인시키고 있다. 공포란 순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그 사회의 문제점이 감춰져 있다가 썩어서 냄새가 나기 시작할 때 등장하는 것이다. 그 형태는 여러 가지로 나타나지만 결국 몇 가지로 요약된다. 가정의 문제, 사회가 가지고 있는 학교와 기업 등의 문제, 그리고 국가의 문제다. 가장 기본은 역시 사회의 최소 단위인 가정, 그 가정을 구성하는 가족의 문제로 돌아간다. 또한 그런 그들 가족의 문제는 사회의 문제가 유입되어 유발된다. 그러니 어느 하나가 아닌 전체 시스템의 문제라 할 수밖에 없다.  

가족에게조차 공포를 느껴야 한다면 이 세상에 무섭지 않은 것이 있겠는가 말이다. 가족의 무관심, 폭력, 냉대는 학교와 사회 생활을 하게 되는 조직에서도 동일하게 표현되는 것이고 그것은 도돌이표처럼 끊을 수 없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다시 돌아와 나를 망치고 남을 방관자로 만들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나를 남으로 만들어 무관심을 확대하고 재생산한다. 현대 사회 그 자체가 문제인 것이다. 공포가 문제가 아니라. 본질을 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작품을 볼 때 겉의 잔인함과 광기, 살인과 엽기적 발상을 문제삼을 것이 아니라 그것이 표현하고자 한 것을 봐야 한다. 그것 자체가 <남의 일>을 남의 일이 아니게 만드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신은 무심한 눈길로 누군가를 그저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가. 남의 일이라 생각하고 비켜 지나가지는 않는가. 그렇다면 누군가 당신을 똑같이 무심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을 것이다. '나만 아니면 돼.'는 결국 '그러니까 너만 아니면 돼.'가 된다는 이기심이 공포인 것이다. 나는 곧 너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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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 2009-09-12 00: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거 재밌나요? 왠지 기대되는데 책 표지가 너무 취향이 아니라 꺼리게 되더라고요.ㅠ ㅠ
저도 횡메르카토르 지도 재밌게 봤는데 이 작품도 꼭 봐야겠어요.^^

물만두 2009-09-12 10:16   좋아요 0 | URL
이 책이 전 더 재미있었습니다.
표지가 별로인 작품이 어디 이 작품뿐인가요?
이 작품은 그나마 양호하다 생각됩니다 ㅡㅡ;;;

세실 2009-09-12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두님 잘 지내시죠?
요즘 통 근황을 몰라서 문득 보고 싶어서 왔습니다.
동갑내기 친구의 우정이어요. 히~~

물만두 2009-09-12 15:55   좋아요 0 | URL
세실니임~ 방가방가요^^
님도 잘 계시죠?
감사합니다.
주말 잘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