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의 계절 1 블랙펜 클럽 BLACK PEN CLUB 1
도나 타트 지음, 이윤기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프롤로그에서 작품은 이미 가해자와 피해자를 밝히고 출발한다. 작가가 자신의 모든 패를 독자에게 보여주고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럴까? 그런 작품이 재미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지 모른다. 이런 작품을 매력적으로 볼 수 있는 포인트는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가해자, 즉 범인이 잡힐 것이냐를 스릴을 느끼며 보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는 그것과 함께 한 가지 더 작가의 의도를 알아내는 것이야말로 가장 매력적인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낄 수 있는 포인트다.

마지막 장에 가서야 이 작품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봐야 하는지를 알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두 번째 책 477쪽에 등장하는 죽음에 대해 줄리언이 말하던 것을 리처드가 회상하는 장면이다.

   
  파장과 에너지가 아니라면 죽음은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아득한 옛날에 사멸한 별에서 지구로 날아오는 별빛 같은 것이 아니면 대체 무엇일 수 있는가?  
   

 

처음부터 예사롭지 않게 시작되는 작품의 종착역은 누구나 품고 있는 죽음이라는 관념적인 고찰에 있었다. 청춘이란 죽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순수하게 죽음에 대해, 그 아름다운 공포에 매혹당하기 쉬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그런 청춘들이 음산한 분위기를 저마다 뿜어내며 만나게 된다.

자신의 위치보다 더 나은 곳에 도달하고 싶어 햄든 대학으로 무작정 와버린 주인공은 그리스어를 배우려 하지만 거절당한다. 그는 그 그리스어 교수와 제자들에 대한 무수한 소문을 들으며 매혹되고 기어코 그리스어 동아리에 들어간다. 그곳에서 그는 괴상한 교수 줄리언과 그의 5명의 동기생을 만나게 된다. 음산한 모습의 헨리, 잘난 척하기 좋아하는 버니, 쌍둥이 남매 찰스와 커밀러, 그리고 프랜시스... 처음 이들은 서로를 경계하지만 어느 순간 그것은 무너져 버린다. 하나의 사건을 공유하고 한 명의 적에게 대항하는 동지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처음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을 때 내 머릿속에 들어온 것은 이 작품을 과연 도스토예프스키의 라스콜니코프와 비교할 것인가 아니면 카뮈의 뫼르소와 비교할 것인가였다. 이 작품의 주인공들은 그들과 동떨어진 인물처럼 보이지만 실상 이들이 하는 행동을 보면 지식은 있으나 인식은 없는, 머리와 가슴이 따로 노는 현대 젊은이들을 묘사하는 것 같아서 한 시대를 대표하는 주인공들과 견줄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3명은 라스콜니코프적이고 2명은 뫼르소적인 면을 보이고 있다.

 

라스콜니코프와 뫼르소가 가난한 배경을 가진 인물이라는 점에서 의외라고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리스어과의 학생들은 모두 부유한 배경을 가지고 있고 자신들을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있다. 또한 화자인 또 한명의 학생도 가난한 배경이 싫어 부유함을 거짓으로 꾸미고 있다. 하지만 이들은 정신적으로 가난하다. 열등함을 배경으로 포장하는 인물들이다. 흔히 청춘이 갖는 우둔함이 이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고 교수 또한 자신이 보고 싶어 하는 것만을 보고 학생들에게서 자신이 바라는 모습만을 바라기 때문에 이들과 다르지 않다. 그들의 비밀의 계절은 가난한 청춘의 계절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라스콜니코프와 뫼르소에 비유될 수 있는 것이다.

미스터리를 표방하는 살인이라는 소재를 품고 있는 비극적 작품은 그 사회와 시대를 반영하는 거울이다. 이 작품에서 보여주는 것은 대학이라는 곳에서 청춘을 보내는 이들의 모습이다. 파티에만 관심을 갖고 술과 마약에 탐닉하는, 아니 그런 것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주변에 널려있는 것이 마치 그 옛날 그리스에서 디오뉘소스 신에게 바치는 축제처럼 난무하게 펼쳐진다. 그 안에 사건이 특별하게 조명을 받은 것뿐이라는 듯, 청춘이라는 불타는 젊음, 붉은 피가 끓는 시절이 그들도 인식하지 못하는 사이 너무도 허무하게 죽음처럼, 유령처럼 사라지고 있음에 대한 자조적인 작가의 너스레를 서글프게 나이가 들어 주인공처럼 회상하는 나 또한 한때 디오뉘소스 신에게 바쳐진 공물의 시간이 있었음을 깨닫게 한다. 세상은 변했지만 인간은 변하지 않았다고 작가는 말하고 있다. 아름다운 것은 공포다. 청춘은 아름답다. 그러므로 청춘은 공포다. 죽음까지도 매력적으로 느끼는, 아니 그럴 수밖에 없는 공포. 그것이 서스펜스로 그려지고 있는 것이다.

사건은 너무도 일찍 찾아온다. 그리고 서스펜스는 끝까지 독자를 놔주지 않는다. 미스터리 중에서도 고급스러운 미스터리다. 작가의 데뷔작이라는 사실이 놀라울 따름이다. 하긴 카뮈의 <이방인>도 그의 데뷔작이었으니 천재에게 놀란다는 것 자체가 우습게 느껴지지만 정말 대단한 작품이라는 말 밖에 할 말이 없다.

살의와 살인은 다르다. 어떤 것은 살의만 존재하고 어떤 것은 살인만 존재하기 십상이다. 비중에 대한 이야기다. 그런데 이 작품은 살의에 대한 충분한 검토와 살인에 대한 타당성을 설명하며 그 뒤에 찾아오는 분열과 공포, 청춘의 사멸에 대해 공들여 이야기하고 있다.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고 그 어떤 것도 간과하지 않고 독자에게 차분히 전달한다.

새해 첫 작품으로 읽기 정말 잘한 작품이다. 마치 독자들에게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 것, 경험하고 있는 것, 탐하고 있는 것, 그것들의 이면에 어떤 것이 있는 지 생각해 봤냐고 묻는 것 같다. 어디 한번 가보라고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만 같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죽음을 만들든, 죽음을 맞이하든 살아 있는 한 우리는 추억이라는 유령과 늘 함께 할 것이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도 비밀의 계절과 같은 일들도 있을 것이다. 가끔 그래도 유령 같은 추억을 반추하는 이유는 그것이 유령일지언정 한때 사랑했던 순간이었고 다시 없을 순간이기 때문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카뮈의 사이에 도나 타트를 끼워 넣어본다. <죄와 벌>과 <이방인> 사이에 <비밀의 계절>을 올려놓고, 라스콜니코프와 뫼르소 사이에 이들을 차례대로 불러 본다. 그러고 싶다. 그러고 싶을 정도로 매력적인 작품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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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08-01-04 1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평론 수준의 리뷰입니다. 이주의 마이리뷰 당선되야할텐데...!
정말 읽어보고 싶네요.
어쩌죠? 읽고 싶은 책도 많고, 읽어야할 책도 많고, 읽은 책은 쬐금이고...
올해도 그러면서 한해를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ㅜ.ㅜ

물만두 2008-01-04 10:41   좋아요 0 | URL
저도 쌓인 책이 얼마나 많은지 죽겠습니다.
평론은 무신^^;;
님의 말씀이 맞았으면 좋겠습니다. (므흣)
읽어보세요. 그래도 읽으셔야죠~

순오기 2008-01-04 12: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아~~~~~ 이주의 리뷰에 뽑힐거 같은데요! ^^
멋진 리뷰, 추리 소설의 맛이 확~ 납니다.

물만두 2008-01-04 12:49   좋아요 0 | URL
저 떴다 떨어지면 받아주셔야 합니다^^ㅋㅋㅋ

다락방 2008-01-04 17: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춘이란 죽음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처럼 보이지만 순수하게 죽음에 대해, 그 아름다운 공포에 매혹당하기 쉬운 시절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매력적인 문장입니다.
저도 보관함에 넣었어요. 2008년에 이 작품을 반드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이 리뷰, 정말 좋은데요!

물만두 2008-01-04 18:44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꼭 읽어보세요~

readersu 2008-01-14 14: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제 이 책을 드디어! 다 읽고 리뷰나 써볼까 들어왔다가 물만두님 서평 보고선 포기할까 생각중입니다;;; 서평 멋집니다!! 추리는 잘 안 읽는데 물만두님 덕분에 요즘 추리소설에 자꾸만 눈이 돌아가고 있습니다.-.-

물만두 2008-01-14 14:55   좋아요 0 | URL
무슨 그런 말씀을요. 저보다 훨씬 잘 쓰신다는거 다 안다구요^^
추리소설 많이 보시고 서평도 많이 써주시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