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플리커 스타일 - 카가미 키미히코에게 어울리는 살인
사토 유야 지음, 주진언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06년 8월
평점 :
품절
내가 아무리 추리소설을 좋아한다고 해도 기본적으로 넘을 수 있는 선이 있고 넘기 어려운 선이 있다.
다 읽고 뭐 이런 책이 다 있나 싶어서 놀라는 중이다.
이런 작품이 국내 작가에 의해서 나왔다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가 궁금하다.
재판까지 가지 않았을까 싶은데 일본에서는 상까지 받았다니 역시 멀기는 먼 나라다.
일본이라는 나라는...
정답은 없는 것이 맞기는 하다.
인간이 태어나고 살고 죽는 데 정석도 정답도 없다.
각자 알아서 사는 것이고 거기서 강자는 더 잘 살고 약자는 더 못 살고 그러는 것 뿐이다.
범죄를 저지르는 일, 살인을 저지르는 일도 범죄자야 이유가 있겠지만 당하는 입장에서야 그 이유가 타당하지 않으니 그것은 정답이 될 수 없고 또한 범죄의 성립이라는 면에서 보면 어쩌구 저쩌구 말이 많은데 그 모두가 정답은 아니긴 하다.
그렇다고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범죄인 유괴, 강간, 살인이 용납되는 건 아니다.
그건 어떤 상황, 어떤 조건, 어떤 시대에서라도 절대로 어떤 이유를 붙인다고 해도 정답이 없다고 해도 있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것을 있게 해서도 그것을 정당화하려해서도 안된다.
범죄자의 사형과 비교하는 논리도, 말 한마디로 미래의 운명을 좌지우지해서도 안된다.
용서할 수 없다는 것에도 정답은 없다. 인간이 공통으로 납득할 수 있는 한계가 있고 납득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법이니까.
세상이 백만년은 지난다면 몰라도 지금은 결코 이해될 수 없는 설정이고 역겨움과 억지의 혼합물일뿐이다.
처음 볼 때만 해도 피해자의 입장, 피해자 가족의 입장에서라면 쉽지 않지만 이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말로야 백번, 천번 죽이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거니까.
하지만 뒤로 갈수록 그게 아니다.
번지르르한 말은 단어의 나열일뿐 비슷한 소재로 작품이 이렇게까지 일그러지고 비틀릴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기만 하다.
내가 왜 이 작품을 읽었던가...
요 근래 읽는 작품 가운데 최악의 작품이었다.
좋은 작품, 나쁜 작품에도 정답은 없는 거겠지만 적어도 독자가 납득은 할 수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