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으로 읽는 신약성서>>는 “신약성서 및 성서의 특정 본문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신약성서를 “’손으로’ 읽는다 함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었던 편견과 선입관을 잠시 접어두고 성서가 무엇을 말하는지를 한 단어 단어에 손끝을 대고 진지하게 듣는 것이다.” 이러한 손으로 읽기는 “신약 본문의 사회정치학적인 함의”를 파악하고 “신약성서를 오늘날의 정황과 연결지”음으로써 “성서가 우리의 신앙실존에 지속적인 영향력을 주”게 한다.

신약성서의 적지않은 본문들이 무지와 오해 혹은 착각으로 인해 본래의 뜻과는 다르게, 경우에 따라서는 “정반대로 해석되고 선포되어 왔다.” 이러한 사태의 배후에는 “일선 교회 지도자들의 신학 폄하나 불신임이 도를 지나친 경우가 있을 뿐 아니라 교회에 적대적인 신학도 한 구석에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신학과 교회 사이에 존재하는 “비호의적인 무관심의 거리”를 좁히기 위해서는 “천천히, 정확히” 성서를 읽는, 즉 “그것을 ‘손으로’ 읽는 것이 가장 유력한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

‘손으로 읽기’는 성서의 구절들이 “전체적인 맥락 안에 놓여 있고, 따라서 이 맥락을 고려하여 이해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성서의 오용, 남용, 악용은 “문맥을 떠난 단장취의(斷章取義)”와 “개역 성서의 모호한 번역”이 무지와 착각, 또는 욕심에서 비롯된 편견과 선입관을 만날 때 발생한다. 편견과 선입관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성서 구절들의 전후 문맥을 살피는 것과 더불어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이라는 역사적, 지리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예수 및 그의 제자들이 활동하던 1세기 팔레스타인은 “’폭력의 만세반석’ 위에 터를 잡고 지중해 역사상 가장 큰 제국을 이룬 로마”의 지배를 받고 있었다. ‘예수’라는 이름의 의미에 포함된 “죄로부터의 구원”은 “일견 종교적이고 도덕적으로 보이지만, 1세기 그레코-로마 세계에서 이러한 말들은 다분히 정치적이고 군사적인 의미 역시 띠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대에 예수가 선포한 복음을 믿고 따르는 일 또한 “단지 신앙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정치학적인 함의를 띨 수밖에 없는 결단”이었다.

신약성서가 기록되던 시대와 오늘날을 비교했을 때 폭력의 주체가 로마제국에서 탐욕적 자본으로 바뀌었을 뿐 힘의 논리에 의해 작동하는 억압적 구조는 변하지 않고 있다. 성서의 말씀들은 “어떤 교리적 세부지침을 주기보다는 항상 새로운 시대의 청중들에게 그들의 신앙을 고백하도록” 이끌어 준다. 성서적 조망에서 세상을 해석하고 이를 바탕으로 실천적 삶을 살고자 하는 신앙인은 “손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짚어가며” 성서를 읽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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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자가 되려는 욕망으로 가득한 오늘날 한국에서 교양인이 되려면 “스스로 방법을 터득하여 인문학을 공부하는 수밖에 없다.” 교양의 기초라 할 인문학 고전은 “일종의 통합교과적 텍스트”이기 때문에 “이것을 읽으려면 … 통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서구 정치사상 고전읽기」는 인문학 고전읽기와 글쓰기를 통한 ‘통합적 인문학 공부 방법’을 가르쳐준다.

인문학이 대학 교양과목이긴 하나 이미 “비즈니스맨 트레이닝 센터”로 변질된 한국의 대학에서 인문학은 그저 애물단지일뿐이다. 그러나 인문학 몇 과목 수강한다고 교양이 쌓이는 것도 아니니 교양을 습득하는 일이 어렵게 된 책임을 대학에만 떠넘길 수도 없다. 이래저래 인문학을 가까이 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지금이라도 교양을 쌓고자 한다면 평생에 걸쳐 “책을 읽고 정리하고 글을 써야”한다.

책, 그중에서도 인문학 고전이라 알려진 책들은 “오늘날의 학문분류와는 다른 방식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문학 고전을 공부하려면 문학, 역사, 철학은 물론이고 정치, 경제, 사회 등 까지 포함한 폭넓은 지식이 필요하다.“ 예컨대 이 책에서 다루는 고전 중 하나인 플라톤의 《국가》의 경우 정치학, 형이상학, 교육학 등에 걸친 다양한 주제를 두루 다루고 있다. 또한 이를 읽고 제대로 이해하려면 역사적 지식도 필요하고 전쟁에 대해서도 알아야한다. “말 그대로 통합적인 지식이 필요하다.”

이처럼 통합적 지식을 필요로 하는 고전읽기는 어떻게 해야 할까. 먼저 저자와 그가 살았던 시대를 이해한 다음 전체를 통독하고 저자가 주장하는 바를 짐작해 보면서 책에 익숙해져야 한다. 그런 다음 책을 본격적으로 읽어 나가는데 “책 전체를 관통하는 질서”와 저자의 “독특한 표현과 비유들”을 찾아보면서 내용을 파악한다. 그리고 마음에 드는 부분을 골라 소리내서 읽어 보고 그 문장을 베껴쓰거나 다시 써보면서 책을 내것으로 만든다. 마지막으로 자신이 파악한 핵심을 추려내 A4 한 장 정도 분량으로 쓴다.

인문학 공부는 고전을 읽고 정리하고 글로 쓰는 통합적 훈련이다. 여기에는 만만치 않은 시간과 노력이 들어가기 때문에 이를 지속적으로 해나가기가 어려울 수도 있다. 그러나 이를 배우고 싶어도 마땅히 배울 만한 곳을 찾을 수 없는 것이 CEO 출신 실용주의자와 속칭 ‘강부자’ 집단이 지배하는 한국의 현실이다. 미련스러워 보이더라도 혼자서 공부하는 법을 터득하는 것 외에 달리 방법이 없다. 막막한 길찾기에 나침반이 필요하다면 이 책이 도움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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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초월적 측면과 사람이 쓴 글이라는 인간적 측면을 함께 갖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권위에 대한 믿음만큼이나 실제 해석 과정에 대한 관심이 필요하다. 우리가 어떤 방식으로 성경을 해석하고 활용하는지 정확하게 드러내는 것은 보다 진솔한 모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자 하는 노력의 일부이며 이는 성경을 제대로 읽을 때 가능한 것이다. 이 책이 제시하는 제대로 된 성경읽기의 핵심은 복음이 드러내는 비틀린 일상에 대한 거부감이라는 내면적 방해물을 발견하고 제거함으로써 성경을 마주하는 나 자신을 해석하는 것이다.

성경에 기록된 예수의 족보나 바울의 행적 등을 살펴보면 서로 모순되거나 일치하지 않는 내용들을 찾을 수 있는데 이는 성경의 인간적인 측면을 보여주는 사례의 일부이다. 또한 성경은 길고 복잡한 정경화 과정을 거쳤으며 현재 원문은 존재하지 않고 필사에 의한 전승 과정을 거치며 변형된 사본들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게다가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모르는 대다수 한국 교인들은 한글 번역이라는 또 한 번의 변형과정을 거친 성경을 읽을 수밖에 없다. 이처럼 우리가 현재 읽는 성경은 인간적 한계에 그대로 노출되어 있는데 이러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고백하려면 그 해석 과정이 투명하게 해명되어야 한다.

우리는 성경을 읽는 과정에서 일부 구절만 따로 떼어내 선택적으로 읽거나 글의 형식과 구조, 논리적 연결 등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주관적으로 해석한다. 이러한 선택적이고 주관적인 성경읽기는 내게 불편한 메세지는 해소해 버리고 말씀의 권위를 빌어 나 자신을 정당화하는 수단이 된다. 이처럼 성경에 대한 우리의 해석이 끊임없이 우리 삶을 방어하고 타인의 삶을 공격하는 부정적 도구로 전락하지 않으려면 철저한 검증과 비평이 필요하다. 해석에 대한 검증과 비평은 말씀의 권위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선택적이고 주관적인 해석에 빠지는 것을 막음으로써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고백을 더욱 확고하게 만드는 것이다.

선택적 주관적 해석의 유혹은 어디서 비롯되는 것일까. 익숙하고 편리한 일상의 논리와 어긋나는 것을 마주할 때 우리는 불편함을 느낀다. 복음이 전하는 하나님 나라는 익숙한 우리 일상을 배경으로 그 익숙함 속에 숨겨져 있던 비틀림을 드러낸다. 예를 들어 예수는 양과 목자, 품꾼과 포도원 주인 등과 같은 평범한 일상에 하나님 나라를 비유한다. 그러나 그 이야기들은 한 마리 양을 찾으려고 아흔아홉을 버려두는 목자와 일한 시간에 관계없이 모두 똑같은 품삯을 주는 포도원 주인이라는 일상의 논리와 어긋나는 비틀린 결말을 보여준다. 이러한 비틀림에서 일상과 하나님 나라의 차이가 부각되고 하나님 나라의 본질이 드러나며 이제 우리는 일상과 하나님 나라 중에서 어느 한 편을 선택해야 하는 불편한 갈등을 겪게 된다.

익숙함에서 벗어나 낯선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늘 똑같은 익숙함 속에서는 구원의 희망을 찾을 수 없다. 진정으로 구원을 바란다면 익숙한 일상의 논리를 버리고 낯선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따라야 한다. 오늘날 한국의 주류 개신교는 CEO 출신 장로 대통령 만들기에 성공하고 이른바 ‘고소영 내각’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다. 이들은 ‘비즈니스 프랜들리’와 ‘부자감세’를 경제정책으로 추진하며 노동착취와 복지감소를 익숙한 일상으로 만들고 있다. 우리 앞에 펼쳐진 현실은 비틀린 일상을 드러내는 제대로 된 성경읽기가 왜 필요한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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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는 “고대사에 대한 꾸준한 공부를 통해서 배운 위대한 인물들의 행위에 대한 지식”을 토대로 “군주의 통치를 논하고 그것에 관한 지침을 제시”한다. 군주는 “운명(fortuna)”에 의존하지 않고 오로지 자신의 “역량(virtu)”을 발휘하여 “무장한 예언자”가 됨으로써 새로운 국가를 설립하고 권력의 확고한 토대를 유지할 수 있다. 이때 군주에게 필요한 것은 “마땅히 행해야 할 것을 행해야 한다고 고집하는”것이 아니라 “상황의 필요에 따라서 선하지 않을 수 있는 법을 배워”서 이를 통해 “결과적으로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 번영을 가져오는” 것이다.

 

“이론이나 사변보다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관심을 기울이는” 마키아벨리는 “과장된 구절이나 고상하고 화려한 단어, 그리고 그 어떤 다른 수식이나 외양상의 장식을 하지 않”고 마치 “국가의 지도를 그리는 자들”처럼 객관적인 관점에서 <<군주론>>을 기술한다. 그는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현실 속에 결코 존재한 것으로 알려지거나 목격된 적이 없는 공화국이나 군주국을 상상해 왔”음을 지적하면서 고대사상과의 단절을 시도한다. 그리고 현실 속의 “인간은 거의 항상 선인(先人)들의 행적을 따르며 모방을 통해서 행동하기 때문”에 성공한 군주가 되는 방법에 관한 실제적인 논의를 위해 역사에 기록된 “위대한 인물들의 사례를 인용한다”.

 

그가 인용하는 위대한 인물들의 사례는 “모세, 키로스, 로물루스, 테세우스”로 이들은 모두 “행운 또는 타인의 호의가 아니라 자신의 역량에 의해서 군주가 된 인물들”이다. 이들이 국가를 세우고 “각자 자신이 만든 새로운 정치질서를 오랫동안 보존할 수” 있었던 것은 이들에게 “믿지 않았던 자들에게 믿게끔 할 뿐만 아니라 …… 믿었던 자들의 지지를 유지할 수 있는 수단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수단은 무력과 설득력이라는 군주의 역량으로 군주가 이 두 가지 역량을 모두 갖추고 “무장한 예언자”가 되면 “강력하고 확고하며 존중받는 성공한 지도자로 남아 있게” 된다.

 

“무장한 예언자”가 된 군주는 전통적으로 미덕이라고 여겨져 온 “모든 성품을 실제로 갖출 필요는 없지만, 갖춘 것처럼 보이는 것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는 실제적인 상황에 따라 외양상 미덕으로 보이는 군주의 행동이 공동체 전체에 해를 끼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며, 또한 그가 현명한 군주라면 “그 자신이 미움을 받거나 경멸을 받는 일은 무엇이든지 삼가야”하기 때문이다. 국가의 안정을 위해서는 군주가 자신의 권력을 확고하게 유지하는 것이 필수적이며 따라서 “악덕 없이는 권력을 보존하기가 어려운 때에는 그 악덕으로 인해 악명을 떨치는 것도 개의치 말아야”한다.

 

마키아벨리는 “인간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전통적인 관점을 버리고 “인간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라는 실제적인 관점에서 역사를 탐구하여 <<군주론>>이라는 새로운 정치 매뉴얼을 작성한다. 국가를 설립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이 매뉴얼에 의하면 정치에서는 도덕이 더 이상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단지 목표달성에 필요한 효과적인 수단일 뿐이다. 도덕마저 수단으로 이용할 것을 권고하는 마키아벨리의 정치사상이 당대에는 물론 오늘날에도 부도덕한 것으로 여겨질 수도 있겠으나 사실상 이것이 고대로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정치라는 “사물의 실제적인 진실”’에 대한 정확한 반영임을 부인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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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 고전 강의》는 공자의 “이 문화”, 즉 “사문(斯文)"이라 할 수 있다. 공자의 사문은 "물려받은 전통에 충실하면서도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이 살아가고 있는 세계에 대한 통찰을 덧붙여 새로운 문화전통으로 발전시키고 그것을 하나의 전통으로 만들어 물려주는 것"이다. 사문을 갈고 닦는 것은 군자, 오늘날로 말하면 지식인이 부여받은 사명이며, 이는 "고전을 스승으로 삼"아 "스승의 말에 귀 기울이듯이 읽는 것"에서 시작된다.

고전은 "인간과 세계를 근원적이고 총체적인 차원에서 바라보"는 텍스트이다. 《인문 고전 강의》에서 읽는 10여 권의 고전들은 "인간과 세계를 분리된 것으로 보지않"던 시대에서 어떤 과정을 거쳐 "자신의 한계를 모르고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다가 “결국 인간성을 벗어난 것, 즉 기계가 되고 만” 근현대에 이르게 되었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우리는 인간의 힘의 약진과 그것의 파멸을 목격"하는데, 그렇다면 우리 삶과 사회의 "최종근거"를 어디에 두어야 이 파멸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 실마리를 얻기 위해 마지막으로 《논어》를 읽는다.

"공자의 최종근거는 ‘인(仁)’"으로서, 이는 "특별히 정해진 상태가 아"니라 ”'의(義)'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를 끊임없이 이겨내고 '예(禮)'로 돌아가는 활동"이다. 기준으로 삼는 '의'는 “올바름, 공정함, 정당한 이치를 말"하며 "외부에서 주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옛 전거를 찾아 오늘날의 상황과 대조해서 연구하는 것"을 끊임없이 해야 한다. 이와 같이 "물려받은 것에 변화된 세계에 대한 통찰을 덧붙"여서 "질적으로 변화된 사문"을 만들어내고 그것을 새로운 기준으로 제시하는 사람이 "군자, 사대부, 지식인"이다.

군자는 "현실의 역사에 자기 행위의 최종적인 준거를 놓"고 "전수받은 당위를 기준으로 삼아” 자기관조를 행하여 “눈앞에 보이는 물질적인 탐욕, 감각적인 것 등을 끊어"내고 '의'가 "몸으로 스며들어 그의 태도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앎과 삶을 일치시킨 사람"이다. 따라서 "사람들에게 자기관조를 촉구하고, 관조할 때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당위(문화)를 제시하는 것"이 오늘날 지식인의 역할이다. "그러려면 항상 스스로를 경계해야"하며, 고전을 읽음으로써 "올바름, 공정함, 정당한 이치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배워야” 한다.

대학에서조차 인문학과 고전이 외면당하고 있는 오늘날 한국사회에서 《인문 고전 강의》가 “40주 동안 매주 2시간씩”, “여러 세대와 직업을 가진 이들이 함께 모여서” 행한 고전 강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은 결코 가볍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세월이 아무리 변해도 고전의 지혜가 가장 지혜롭"고, "당장 눈앞에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 여기고 더 높은 것을 향해 나아가"려는 태도로 열심히 고전을 읽는 것이 "가장 인간답고 나답게 공들여 사는 길이라는 것"이 전혀 "상투적인 이야기"로 들리지 않는다. 고전과 더불어 스승으로 삼아 '雖不敏 請事斯語矣'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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