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맑은 햇살이 쨍쨍―우리 눈을 부시게 하자, 다들 이렇게 탄식해. 아, 햇볕이 이렇게 좋은 것이었다니! 아열대로 기후가 변해서 이젠 여름은 구름과 비로 뒤덮이고, 가끔 이렇게 이탈리아의 8월 햇살이 우릴 기쁘게 해주는구나.

 그래서인지 오랜만에 방충망에 붙어 몸통을 흔들며 울어대는 매미가 아주 반가워. 날씨가 급변해서일까. 화음을 맞추는 걸까. 유혹에 경쟁이 붙은 걸까. 교미의 신음일까. 낯선 침입에 떠는 걸까. 나도 실바플라나의 호숫가에 멈춰선 니체처럼 그들의 오케스트라에 잠시 귀 기울였더니 한참 이상한 생각에 빠져들어. 사마귀나 풍뎅이에겐 어떤 연민도 생기지 않지만, 괴성을 질러대는 매미에겐 왠지 끝없는 연민이 피어올라. 왜 그럴까.

 어릴 때, 한쪽 날개를 서로 포개고 X자로 얽힌 두 매미의 정사 장면을 본 적 있어. 그리고 매미들이 7일 만에 죽는다는 얘길 들었을 때, 그 모습이 어찌나 슬프던지. 하물며, 7년 땅속에 있다가 나온 그 매미, 7일간 쉴 새 없는 정사를 벌여야 하는데, 그 소통의 소리를 완전히 묻어버린 올해 7일간의 장맛비는 그들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결국, 다 허무한 것일 뿐일까.

 니체를 읊조려서인지 지금은 조금 생각이 달라. 어쩌면, 200억 우주의 역사 중 티끌에 지나지 않는 100년의 인간사가 그토록 큰 의미인 것처럼, 7년의 인생 중 일주일의 바깥나들이는, 크게는 덧없지만, 어쩌면 그들에겐 길다면 긴 자기만의 생의 리듬일지도 모른다고 느껴지거든.

 만약, 비 때문에 그 소중한 7일을 놓쳐버린 그 매미에게 다시 태어날 기회를 준다면, 또 매미로 태어나고 싶어 할까. 나는 차라투스트라가 10년 면벽 수도 중에 이런 질문을 거듭했을 거라고 봐. 무언가를 깨친 차라투스트라가 속세로 내려와 처음 꺼낸 화두는 “신은 죽었다!”였어.

   
  인간이 신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아니면, 신이 인간의 실패작에 불과하냐!  
   

 실제로 부처든, 예수든, 마호메트든 신의 대명사들은 다 죽었어. 하지만, 그 그림자들은 여전히 존재해. 즉, 신은 죽었어도 신앙은 남은 거지. 그 신앙은 경배할 대상을 계속 찾는 거고. 정말로 영원불멸하는 건 신이 아니라 우리들의 신앙이 아닐까? 니체는 신보다 신앙이 더 오래된 것이고 더 오래갈 것이란 걸 알고 있었어. 신이 있어서 신앙이 생긴 게 아니라, 신앙이 있어 신이 생긴 거니까.

  이 화두에는 플라톤의 ‘이데아’든, 칸트의 ‘물 자체의 세계’든, 죄 많은 ‘이 세계’와 천국이라는 ‘저 세계’라는 형이상학적인 이분법에 대한 짙은 혐오가 깔려 있어. 근데, 여기서 이 선언은 단순히 한 우상의 몰락이 아니라, 신앙 자체의 몰락, 즉, 인간의 죽음이고 동시에 새로운 인간형의 탄생을 뜻한 거야. 자신 이외의 기준에 복종해서 노예로 살아온 인간이 스스로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선언이란 말이지.

  차라투스트라가 아무리 외쳐도 사람들은 쉬 이해하지 못했어. 인간들 앞엔 몇몇 치명적인 방해물이 있었거든. ‘선하고 의로운 자들’이 도덕 교사로 나서서 내린 처방이 그 중 으뜸이야. 시대, 공간, 종족, 문화에 따라 수없이 많은 선악의 기준이 존재함에도, ‘일반화할 수 없는 것까지 일반화시킨’ 기괴한 모습의 도덕 말이야. 여자가 가축과 같은 재산 목록에 지나지 않았던 시절의 십계를 지금 그대로 들이미는 것이나, 자민족에게 선이라고, 타민족을 억압하는 수많은 전쟁처럼 말이야. 그런 도덕을 무기로 내세운 자들은 스피노자의 말처럼, 무엇이 악인지 알려주고, 공포를 줘서 그 악을 피하게 하는, 즉, 가치 ‘창조’에 대한 판단을 포기시키고, 기존 가치에 대한 ‘복종’만 훈련하거든. 그 결과 독재 권력을 압도적으로 지지해 온 민중들의 배신이 역사 속에 수두룩하게 발견되잖아.

   
  그대 살았으면 죽지 않았고, 죽었으면 존재하지 않거늘, 죽음이 뭐 그리 두려운가.                         
                                                                           「에피쿠로스」
 
   

  또 다른 방해자들이 있어. 바로 에피쿠로스를 경멸하는 ‘죽음의 설교자들’이지. 그들은 이 세상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지겹도록 강조해. 결국, 사람들은 극단적인 피로감을 느껴. “빨리 끝났으면……” 하고. 인간들에게 일시적 위안을 주면서 근본적으로는 생의 피로감을 더욱 확장시키는, 이 ‘죄’라는 바이러스 공급자들의 모토, 그건 바로, “생은 고통일 뿐이다!”야.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외치는 자들한테 소원대로 빨리 이 세상을 뜨라고 얘기해. “이런 동굴과 참회의 계단을 꾸며내는 자야말로 맑은 하늘 보기를 부끄러워하는 자들이 아닌가?” 맞아. 사실 인간들이 바보이긴 하지만, 죄인은 아니잖아! 내가 딛고 선 ‘이 세계’를 무시하고 증명할 수도 없는 ‘저 세계’를 만들고, 예정된 끔찍한 보복에 짓눌려 겨우 견디면서 동시에 영생을 꿈꾸는, 그런 어리석은 자들에게 니체는 따끔한 충고를 날려.

   
  삶에 대한 사랑은 대부분의 경우 긴 삶에 대한 사랑의 반대이다. 모든 사랑은 순간과 영원을 생각한다. 그러나 결코 ‘길이’를 생각하지 않는다.  
   

  또 다른 방해자가 있어. 냉혹한 사기로 우리를 속이는 무시무시한 괴물, 바로 국가야. 순진하고 귀 얇은 자나 근시안만이 무릎을 꿇는 게 아니고, 영웅들도 수없이 무릎을 꿇었어. 사람들이 교회에 바친 우상숭배를 똑같이 자신에게 해주길 바라고, 자유보다는 복종, 생명보다는 죽음을 부추기는데도, 진심 어린 봉사를 끌어내는 그 모순적인 존재, 국가한테 말야.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독배를 들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좋은 사람, 나쁜 사람을 가리지 않고 모든 백성이 자신을 잃게 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서히 자신의 목숨을 끊어가면서 ‘생’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말하는 곳, 그곳을 나는 국가라고 부른다.” (『새로운 우상에 대하여』) 차라투스트라는 신이 사라진 자리를 차지하려는 국가에 대해서는 경계를 늦추지 말라고 했어.

  헌데, 히틀러의 독일군들은 어째서 배낭에 이 차라투스트라를 한 권씩 넣고 다녔을까. “전쟁을 일으키는 삶을 살라! 낡은 삶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이런 아포리즘이 전쟁 찬가로 쓰인 건데, 사실 이 말은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는 일에 성자가 될 수 없다면, 최소한 그것을 위한 전사가 되어야 한다는 뜻이지, 아무리 봐도 인종 청소로 새 삶을 찾으라는 뜻은 결코 아니잖아?

   
  인생이 견디기 힘들긴, 개뿔! 사람이 견디기 힘든 거지.  
   

  이제, 가장 큰 방해물을 제거해야 해. 뭐냐고? 바로 인간적인 인간이야. 스피노자는 『에티카』에서 세계에 대한 목적론적 해석이 경직된 도덕화를 가져왔다고 했어. 벌레는 왜 태어난 것일까? 새한테 잡혀먹히려고! 방충망은 왜? 여름 매미를 위해! 질문이 흐르다 보면 궁극적으로 세계가 왜 창조됐을까? 에 닿게 돼. 답은, 인간을 위해서! 그렇다면, 선악도 분명해. 인간에게 이로운 게 선, 해로운 게 악. 그러니까, 지진과 해일도 누군가 죄를 지어서! 라는 판단이 내려지는 거지. 대체 인간이 얼마나 대단하기에?

  “숲 속 개미도 숲의 존재 목적이 자기 자신이라도 믿고 있을 것이다.”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지구가 인간을 낳으려고 그 많은 시간을 보내왔다고 믿을 수 없듯, ‘인간이 만물의 척도’라는 건 받아들이기 어려운 오만한 발상이야.  

   
 

존재 자체를 자기 저울대 위에 올려놓는 세계의 심판자 인간. 이런 태도가 얼마나 비정상적이고 어처구니없는가를 생각해보라. 우리는 ‘인간과 세계’라는 말에 웃음을 터뜨린다. 마치 인간과 세계가 ‘과’라고 하는 귀여운 글자에 의해 나란히 서 있을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가. 그 작은 글자에는 인간의 뻔뻔함이 들어 있다.
 
                                                                          『
즐거운 지식』

 
   

즉, 우리가 인간적이라고 자부심을 품는 모든 것을 되돌아보고, 스스로에 대한 부끄러움을 느껴야만 극복할 수 있다는 거야. 이 가르침의 핵심은 '인간에 대한 경멸'이야. 대지의 피부병 중의 하나에 불과한 인간 말이야. 여기서 '인간을 넘어서기', 또, '새 인간 낳기'에 대한 테마가 펼쳐져.

  누군가 “유일신이 왜 위대해졌는지 아는가?”라고 물으면 “그건 인간들이 왜소해졌기 때문이다.”라고 대답할 수 있어. 인간은 목적이 아니야. 과정이자 몰락이지. 그래서 위대하고 또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거지. 니체는 다윈을 존중했지만, 진화라는 것이 결국 저급에서 고급 유형으로의 발전이라는 개념이니까, 그것과는 다른 개념을 취했어. 초인이 된다는 건, 종착역을 향한 진화가 아니라, 철저한 몰락을 거친 변신이라는 거야.

   
  “순종하느니 절망하라!”
“죽는 법을 배워야 한다.”
 
   

  풋과일처럼 나뭇가지에 매달리려고 집착하지 말고, 새 생명을 위해 익어서 떨어지라는 이 말. ‘인간적인 것을 넘어서기’와 ‘인간적인 것으로부터 변신하기’라는 미션은 바로, ‘정체성을 극복하는 것으로만 정체성을 갖기’ 프로젝트인 셈이야.

  결국, 다시 돌아가서, 세상에게 “왜?”라고 신성한 목적을 캐묻지 말자는 거야. 그냥, 그게 세상이 노는 방식이니까. 우리는 우울해할 필요가 없어. 태어난 게 ‘죄’고 죽는 게 ‘벌’이라는 말에 속을 필요 없어. 영원한 게 없다고 비통해할 필요 없어. 탄생과 죽음, 생성과 소멸이 만들어내는 이토록 찬란한 다양성. 그곳에 무슨 도덕적 책임이 있겠니. 왜 그러냐고 묻기 전에, 이 모든 게 하나의 유희라고 생각해보자는 거야. 세상엔 우리의 침울한 두 눈으로 발견할 수 있는 이상의 행복이 있는 법이니까!

   
  참된 철학자는 가장 깊은 의미에서 비시대적이다.  
   

  니체는 자기 시대의 습한 공기와 접촉하는 한, 최소한의 가치밖에 가지지 못하므로, 위대함이란 바로 비시대성에서 나온다고 생각했어. 즉, 시대에 순응하는 자의 것이 아니라 시대를 거스르는 자의 것이라는 거지. 사실 미쳤다는 건, 길들지 않았다는 뜻이잖아. 즉, 당대의 보편적 신념을 공유하지 않으면 그건 남들과 다른 시계를 차는 것일 뿐. 그 시대가 포착하지 못하는 광기, 탈주, 예외 등은 바로 시간상의 불일치라는 깨달음이 차라투스트라에겐 소중한 위로가 돼. 그에게 미래는, 오지 않은 시간이 아니라, 와 있지만, 오해되는 시간이니까. 자기 시대와 일치하지 않는 시간, 때에 맞지 않는 것으로 존재하는 시간이니까. 물론, 이건 시대에 대한 반대, 즉, 반시대성은 아니야. 대립만으로는 넘어설 수가 없거든. 반시대 역시 결국 시대적이니까. “네가 아직도 적대 받는 한 너는 너의 시대를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너의 시대가 너를 전혀 알아볼 수 없어야 한다.”

  여기 그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타임머신의 비밀이 있어. “미래를 창조할 것, 이미 있던 모든 걸 (파괴라는 형식의) 창조로 구제할 것” 그러니까, 과거의 구원을 위한 수수께끼의 정답은 창조와 생성에 있다는 거지. 그게 시간 자체를 만드는 방법이라는 거야. 이게 바로, 시간과 동시대인이 되는 것, 시간을 뛰어넘는 시간을 갖게 되는 비밀. 그리고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되는 비밀. “보라! 시간만이 나의 유일한 동시대인이 아닌가.”

  니체의 단순한 비유는 여기서 빛이 나. 앞선 퀴즈의 답을 가르쳐 줄게. 차라투스트라가 제시하는 정신적 변화 방향의 단계야. 낙타―사자―[ ? ]. 빈칸은 ‘아이’야. 낙타는 무릎이 닳도록 복종에 익숙하면서도 반항 안 해. 그 착한 동물이 자기 삶에 얼마나 못된 고문을 가하는 걸까. 인생은 고되게 견뎌야 할 것이다, 라는 진리를 받들고 살고 있잖아. 사자는 낙타와 달리 강요되는 의무에 용기 있게 ‘아니오!’를 이야기할 수 있어. 그에게는 자유가 있어. 하지만, 싫어하는 걸 알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선 알지 못하는 자유야.

   
  어린 아이는 천진난만이요, 망각이며, 새로운 시작, 놀이, 자신의 힘으로 굴러가는 수레바퀴, 최초의 운동, 거룩한 긍정이다.  
   

  니체는 아무리 반복돼도 피곤해하지 않고 즐겁게 노는 아이들처럼, 자기 욕망에 충실해서 도덕과 법률, 제도가 심판할 수 없는 행위를 하는 자. 즉, 도덕이 필요 없고, 갖고 있지도 않은 비도덕적인 존재, 그것도 웃으면서, 춤추면서 창조할 수 있는 존재가 돼야 한다고 주장해. 그리고 이런 아이가 보고 싶거든, 낳아라. 자기 아이를 낳으려면 사랑해야 한다. 네 삶을 사랑해야만 한다고 얘기해.

   
  세상의 많은 것들에서 고약한 냄새가 나는 데에는 깊은 뜻이 있어.
고약한 냄새는 구역질을 나게 하지.
사람은 구역질 때문에 날개를 창조해 내는 거야.
사람은 구역질 때문에 ‘샘물을 찾아내는 능력’을 창조해 내는 거야.
 
   

  세상은 헛된 거라고, 나무 위에 올라가 물고기를 찾는 격이라고, 산다는 건, 자신을 불태우지만, 스스로는 따뜻해지지 못하는 격이라고, 고약하게 썩은 현세를 포기하라는 엉터리 신의 명령에 맞선 니체. 그는 대신 ‘삶의 친구들’을 늘 찾았어. 그건 삶을 사랑하는 동류의 인간들에 대한 지칭이야. 참된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스스로 창조해. 즉, 삶을 아름답게 재창조하는 것, 그게 바로 삶에 대한 사랑이라는 거야. 니체는 이걸 ‘운명애(Amor Fati)’라고 불렀어. 이건 운명과 맞서 싸운다거나 그것에 복종한다거나 하는 게 아니야. 거부도 순종도 아닌 예술적 창조에 대한 예찬이야. 단, 이 창조에 따르는 고통을 인정해야 해. 즉, 재창조를 위해 하나의 삶은 다음 삶에 자리를 내줘야 한다는 조건이 있어. 파괴가 새로운 창조로 이어지지 않으면 그건 범죄행위일 뿐이잖아. 새로운 창조가 한 번에 그친다면, 그것 또 어느새 낡은 기득권이 되어버리잖아. 그러니까, 끝없는 창조, 즉, “한 번 더”라는 영원한 생성에 대한 욕구가 중요해. 이건, 지금의 삶을 “그래!”라는 무한한 긍정으로 받아들이고, 다시 살게 돼도 똑같은 삶을 원하는 욕구 말이야. 나아가 삶이 ‘영원히 반복된다는 것’을 확신하는 거지. 이 변형된 윤회에의 희구가 차라투스트라의 천로역정의 종착점이자, 새로운 출발점이야. 긍정, 또, 긍정의 축복.

  “이것은 나의 아침이다. 나의 낮이 시작된다. 솟아올라라, 솟아올라라, 너, 위대한 정오여!”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하고 동굴을 떠나. 자신을 옭아매고 있던 마지막 굴레인 연민을 벗어던지고 진정한 초인으로 거듭나 세상을 향해 힘찬 발걸음을 내디뎌. 신은 바로 인간의 그림자야. 그림자가 사라지는 위대한 정오. 그림자의 그림자로 존재했던 인간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그 순간의 예찬이야. 여기서 「스페이스 오디세이」의 그 장면이 겹치지 않니? 유인원에서 인간으로 거듭나는 그 장면은 인간이 초인으로 거듭나는 것과 본질적으로 같은 차원의 비약을 그려내고 있잖아!

  그럼에도, 모든 결정적인 것은 ‘그럼에도’ 오고야 만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극적으로 완성된 이 『차라투스트라』. 완벽한 멜로디를 구사하는 게 아니라 끊임없는 멜로디를 구사하고 싶어 했던 니체는 정말이지 온화하고 미묘한 가락에서 귀를 찢는 듯한 팡파르에 이르기까지 모든 음역을 구사했어. 하지만, 너무 일찍 왔기 때문인지 독자들은 철저히 외면했어. 그래도 니체는 여유로웠어.

   
  나의 모든 작품은 낚싯바늘이다. 나는 그 누구보다도 낚시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다 해도 내 잘못은 아니다. 왜냐하면, 거기엔 물고기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만인을 위한 그러나 누구를 위한 것도 아닌 책’이란 부제를 달았어. 만인을 친구로 삼고 싶었지만 아무나 친구로 삼지는 않는 책. 무슨 뜻일까. 이 책은 아무나 읽으라고 썼지만 특별한 능력이 있어야만 읽어낼 수 있는 글이란 뜻 아닐까? “영혼의 운명은 바뀌고 바늘은 앞으로 움직이며 비극이 시작되리라.” 니체가 『차라투스트라』에게 무모하게 도전하는 독자에게 던진 말이야. 어때? 그에게 한 번 낚여 인생의 시곗바늘이 바뀌고 몰락을 경험할 용기를 내보는 건. 물론, 낚이지 않아도 돼. 왜냐면 그게 감수성이든, 용기든, 낙관이든, 긍정이든, 결국 제멋대로 소화하고 자기 삶에 응용할 수 있는 사람, 나아가 전혀 읽지 않고도, 전혀 지지하지 않고도, 삶을 긍정하고 아름답게 가꿔가는 사람이라면 이미 니체를 기쁘게 해줄 훌륭한 독자이며, 니체의 열렬한 팬이라고 생각하니까.

  니체는 1900년 8월 25일. 숨을 멈췄어. 하지만, 육체의 시계는 이미 멈춰져 있었어. 자신이 쓴 모든 글을 다 잊어버린 채 거의 식물인간으로 말년을 보냈으니까. 그를 동정해야 할까? 우리는 식물인간과 얼마나 다를까. 기존 관습이 억압하는 대로 정해진 길에 매달려 죽음보다도 비참한 삶을 살고 있지는 않은 걸까. 수없이 질문을 던진 니체처럼 매 순간 주인으로 살아가는 걸까. 2011년 8월 25일이 되면, 111년이 돼. 그날엔, 저 매미의 절절한 외침이 울음소리가 아니라 노랫소리, 웃음소리로 들릴 거야. 또 그날엔, 비록 잠시 헤어지지만, 아직 우리에겐 더 많은 여행이 필요하다는 너의 속삭임이 어느 때보다 감미롭게 들릴 거야. 죽음에 대고, 삶에 대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용기와 깨달음을 찾기 위한 여행일 테니까. “몇 번이라도 좋다. 이 끔찍한 생이여, 다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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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지음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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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8-24 23: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 글은 저에게 많이 힘이 되네요 ㅠ
민규동 감독님 알라븅 ㅋㅋㅋㅋㅋㅋㅋ
 

 

  이탈리아 기행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동쪽별

 잘 있었어? 어떻게 지냈니? 감독들은 어떻게 지내세요? 라고 물으면 영화 준비 중입니다, 라고 대답한다고들 하지. 너는 어떠니? 7월 말에 글을 쓰고서 처음 쓰는 거니까 나로선 아주 오랜만에 컴퓨터 앞에 앉은 셈이고 그래서인지 손가락이 좀 제멋대로 움직이는구나. 이상한 질문들을 손가락이 막 던지네. 너 진짜 만들고 싶은 영화는 뭐니? 내가 알기로 넌 순진한 얼굴과 침착한 음성 뒤에 하드보일드한 열정을 갖고 있는데 그런 영화는 왜 안 만드는 거니? 너 나랑 책 읽는 게 솔직히 즐거웠니? 이런 질문들은 손가락이 제멋대로 던지는 거야. 양식 있는(?) 나라면 이미 대답을 안다는 듯 혹은 중요한 것은 대답이 아니라든 듯 차마 물어보지 않았을 거야. 손가락을 깨물고 제정신이 되도록 손가락을 야단친 다음에 다시 질문을 던지면 이런 질문이 가능할 거야. 언젠가 네가 파리의 골목길을 잘생긴 폭주족의 오토바이 뒤에 타고 달리는 기분을 전해준 적 있는데 네가 그렇게 해볼 날이 다시 있을까? 한밤중에 친구들이랑 가자! 강릉으로 외치고 취중에 달려갔다는 이야기를 들려줬는데 요새도 지금 당장 떠나야 하는 순간이 너에겐 있을까? 아니다. 이런 질문들도 이상하다.

 그래. 내가 오늘 이상한 것은 이 편지가 당분간 네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기 때문이야. 한없이 이상하면서도 한없이 아쉬워. 우린 그 사이 할 말을 다했던 걸까? 하지 못한 말도 있는 걸까? 우린 왜 싸우지 않고 언성을 높이지 않았을까? 왜 무엇인가에 죽도록 괴로워하지 않았을까? 책을 읽는 동안 우린 성장 했을까? 서로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을까? 넌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어 죽을 지경이야. 파브르는 일찍이 천 겹 파리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우리는 몇 겹의 눈을 가진 걸까? 한 겹만으로는 세상을 잘 볼 수가 없을 거야. 아무래도 그럴 수가 없는 거야. 그렇지?

 그래. 난 이번 이탈리아 여행에서 미켈란젤로를 눈여겨봤어. 그리고 미켈란젤로가 사랑한 도시 피렌체의 야경을 생각해봤어. 피렌체 미켈란젤로 광장에 앉아서 꽃의 성당 두오모와 지오토의 종탑을 내려다볼 때 붉은 지붕 위로 해가 지고 종소리가 울렸어. 피렌체에서 시에나로 이어지는 구릉에 사이프러스 나무가 머리를 질끈 동여매고 하늘로 올라가는 영혼처럼 서 있었어. 그리고 사이프러스 나무와 소나무 사이에 한 채씩 붉은 지붕집들이 서 있었어. 그 붉은 집들에 차례차례 불을 들어올 때 아르노 강을 밤바람이 흔들었어. 그 바람은 보티첼리 그림에서 비너스가 태어나던 순간에 비너스를 육지로 밀어주던 그날에 그랬던 것처럼 서풍이었을까? 그래 서풍이었단다. 감미로웠고 어딘가 자존심 강한 그 도시의 성격을 닮았어. 나는 미켈란젤로 언덕에서 피렌체의 야경을 내려다보면서 진정 아름다운 야경은 부분을 보면서도 전체를 생각하게 한다는 걸 깨달았어. 미켈란젤로는 밤에 대해서 무언가 과한 것을 더도 아니고 덜도 아니고 딱 맞게 덜어내는 것이라 했어. 그래서 정수를 보게 하는 게 밤이라고 했어. 그러고 보니 지난 팔 개월 동안 우리도 밤마다 꼬박꼬박 책을 읽고 글을 썼구나. 나로선 그 시간이 정직하고 성실한 시간이었단 점에는 후회가 없단다. 별아! 라고 부르면서 말을 걸 수 있었던 것이 좋았단다. 네 이름에 ‘별’자가 들어주게 지어준 너의 부모님 또는 조부모님 또는 작명가 일동에게 고마움을 이 자릴 빌려서 표해. 어쨌든 우리에게도 밤이 있었어. 그 시간에 우리가 서로를 조각하고 있었길 바라. 인간은 언제나 영원히 진행형이란 것은 나의 믿음이야. 인간은 자신이 되고 싶어 하는 그 인격체가 사려 깊기만 하다면 꾸준히 노력하기만 한다면 될 수 있다는 것 또한 나의 믿음이야. 나는 이 밤에 내가 너와 책을 읽는 동안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가? 그 사람이 되는 것에 얼마나 근접했나, 나 자신에게 되묻고 있어.

 언젠가 만난다면 나의 이탈리아 여행 이야기를 좀 더 들려주고 싶어. 하지만 오늘은 내 이야기 대신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을 소개할게.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은 젊은 베르테르의 작가로 이미 유명해진 괴테가 1786년 9월 3일 새벽 3시에 카를스바트를 몰래 빠져나오는 데서 시작해. 그는 여행 가방과 오소리 가죽 배낭만을 든 채 단신으로 우편 마차에 올라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에 대해선 내가 하도 여러 번 언급해서 가장 좋아하는 부분 딱 한군데만 소개할게. 괴테는 이렇게 말해. 너는 읽자마자 어느 도시 이야기인 줄 금세 알 수 있을 거야.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가운에 나는 곤돌라에 올랐다. 두 명의 가수는 배의 앞쪽과 뒤쪽에 각각 앉았다. 이들은 노래를 시작했고 번갈아가며 한 소절씩 불렀다……. 폐부를 뚫고 들어가는 목소리로—그는 섬이나 운하의 물가에 대 놓은 나룻배에 앉아 목청껏 소리가 울려나가게 한다. 그러면 노랫소리는 잔잔한 수면 위를 퍼져 나간다. 그 선율을 알고 가사를 이해하는 어떤 사람이 멀리서 노래를 듣고 이어지는 시구로 응답한다. 여기에 다시 먼젓번 사람이 응답한다. 이렇게 한 사람은 늘 다른 사람의 메아리로 기능 한다. 노래는 며칠 밤이나 계속되고 이들은 지치지도 않고 응답을 거듭한다……. 멀리서 밀려오는 그 목소리는 슬픔이 없는 탄식처럼 아주 이상야릇하게 들렸다. 그 속에는 눈물이 나게 감동적인 것까지 무언가 믿을 수 없는 요소가 담겨 있다. 나는 기분 탓으로 돌렸지만 늙은 하인도 이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저 노랫소리가 이상하게도 사람 마음을 뒤흔드네요. 들으면 들을수록 더욱 감동적인데요.” 그는 내가 리도의 여인들, 특히 말라모코와 펠레스트리나 출신 여인들의 노래도 들어보기를 바랐다……. 게다가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그 여인들은 남편들이 바다로 고기잡이를 나가면 바닷가에 앉아 폐부를 찌르는 목소리로 이 노래가 울려 퍼지게 하곤 합니다. 그러면 남편들도 멀리서 아내들의 목소리를 듣고 그런 식으로 서로 대화를 나눈다고 합니다.”

 이 노래에 담긴 의미는 너무나 인간적이고 진실해서……. 어느 고독한 자가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듣고 응답하도록 저 멀리 드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노래이다.”

 그래. 네가 짐작한 대로 베네치아 곤돌라 이야기야. 이런 질문을 너에게 던져보고 싶어. ‘고독한 자가 자신과 같은 기분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듣고 응답하도록 저 멀리 드넓은 세상으로 보내는 노래’ 같은 게 혹시 너에게 있니? 아마 있다면 영화겠지. 그렇지?

 나로 말하자면 나는 어쩌면 무심코 곤돌라 가수들과 그 아내들을 모방하며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어. 나와 같은 기분을 느끼는 다른 사람이 듣고 응답하도록 저 멀리 드넓은 세상으로 내 보내는 노래. 그것이 나의 글쓰기, 책 읽기, 편지일 거야. 이해하니? 그러니 우리 서로가 서로의 메아리가 되자! 라고 나의 마지막 인사를 대신할게. 당분간, 너무 오랫동안은 말고, 나 없이 잘 지내고 있어. 나로선 너의 안녕을 비는 것이 빌지 않는 것보다 백만 배 쉬우니까 안녕을 빌고 있을게. 이렇게 장난치며 웃으며 안녕!

 ------------------------------------------------------------------------  

 

  <이탈리아 기행 1, 2> 

   요한 볼프강 폰 괴테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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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하나 2011-08-23 17: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 돌아오실거여요 ㅠㅠ 어엉어엉.
동쪽별님 말고도 많은 분들이 기다리고 있다는 거 기억해주세용 !

두근두근 2011-08-23 17: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당분간 편지를 쓰지 않는다니, 조금 슬퍼집니다. T^T
이탈리아 여행 묘사하는 부분에서는, 가보지 않았는데도 눈에 그려지듯 풍경이 보이고 마음이 편해지네요.
또 좋은 글로 돌아오시길 기다리겠습니다.

마리벨 2011-08-23 18: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언제나 동경하는 이딸리아~~~~ ㅋㅋ
로마,밀라노, 베네치아,나폴리등등~
빨리 돌아오세여~

al. 2011-08-25 2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어느 곳에서 어떤 방황을 하실지는 모르겠지만 보람찬 시간 보내시기를 바랍니다. :)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몇 번이라도 좋다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보고 싶어. 그대가 휴가를 떠나 지구 반대편에 있다고 생각하니 그리움이 어느 때보다 더하구나. 로마의 풍경은 어떠니. 아씨씨의 향취는 어떠니. 한가로이 시에스타를 즐기고 있니. 얇고 짭짤한 피자 조각을 음미하고 있니. 어떤 사물에 낯설어하고 있고, 어떤 사연에 잠 못 이루고 있니. 돌아올 때 그곳 고요하고 평화로운 공기 한 움큼이라도 내게 전해줘. 그때까지 난 네가 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의 책 커버를 확 펼쳐놓은 채 가상의 여행을 하고 있을게. 우주왕복선 아틀란티스 호처럼 태양을 등지고 우주의 심연으로 떠나는 상상을 해 볼게. 내 보잘것없는 인생의 조각들을 무중력의 공간으로 둥둥 띄워놓고 넉넉히 관조해볼게. 나 자신이 세상에서 유일한 여행지가 되는 순간을 찾아보고 있을게. 언젠가 단 한 번 본 널, 한번 보고 매혹됐으나 다시는 보지 못한 여행지의 풍경처럼 그리워하고 있을게.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무엇에 의해서? 어디로? 어디서? 어떻게 아직도 살아 있다니, 어리석지 않은가? 아, 벗들이여, 나의 내면에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은 저녁이다. 나의 슬픔을 용서하라! 저녁이 되었다. 저녁이 된 것을 용서하라!  
   

 자, 오늘도 니체가 말한 저녁이 되었어. 난 하루의 여행이 끝나갈 저녁 무렵이면 고개를 떨구고, 나의 인생이 왜, 어떻게, 지금 이런 모습이 되어 버렸는지, 나만이 대답할 수밖에 없는 그 질문에 또 귀 기울여봐. 매번 내게 돌아오는 그 깊은 침묵은 늘 나의 인내를 시험해. 난, 결국 ‘모든 게 헛되구나!’라고 탄식하며 하루를 마감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힘겹게 버티는지 몰라. 그나마 우리가 잠시 함께 했던 이 고전 여행 덕에 난 얼마나 즐거이 버티었는지 몰라. 하지만, 네가 너무 바빠진다고 하니, 한동안 힘겨웠지만, 오늘 저녁, 이젠 널 놓아줄 마음의 준비가 되었단다. 어떻게 그게 쉽게 가능했느냐고? 오랜만에 니체를 찾아 지혜를 여쭤본 게 도움이 됐어. 현재의 동행을 과거로 마무리 짓고, 새로운 미래의 여행을 꿈꿔야 할 때, 차라투스트라의 설교만큼 짜릿한 게 또 있을까.

 아, 먼저 내가 언제 니체를 처음 만났는지 이야기해 줄게. 20년 전에 본 영화인데, 스탠리 큐브릭 감독의 걸작, 「2001년 스페이스 오디세이」에 이런 장면이 나와. 유인원이 뼈 무더기에서 굵은 뼈다귀를 골라내. 어떤 깨달음 때문인지, 분노인지, 환희인지, 그의 포효는 점점 거세져서 뼈 무더기를 마구 내려쳐. 그런 와중에 하늘로 치솟아 오른 뼈 하나가 우주선으로 연결돼. 인류의 기원에서 미래로 단번에 연결되는 놀라운 비약의 순간이야. 그때, 먼 지진의 울림처럼 현들이 떨리고, 서서히 다가오는 어두운 오르간 소리 위로, 금관과 팀파니의 강렬한 난타가 이어져. 그 절정의 화음 속에서 여러 단계의 진화를 체험하는 인간의 운명! 영화만이 표현할 수 있는 그 찬란한 이미지에 전율했었어. 하지만, 지나고 생각해보면, 내 감각의 저편 구겨진 주름을 쿵쾅쿵쾅 펴줬던 건, 실은 조숙했던 천재,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교향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음악 때문이었어. 난, 그 당시 난 마르크스에 대한 맹목적 사랑에 빠져 있을 때였어. 유물론자가 아닌 철학자라면 오로지 경멸의 목적으로만 들여다보던 시절이었어. 그렇게 보이지 않는 샛길 한 귀퉁이로 일찌감치 밀쳐놨던 그 기묘한 철학가의 이야기가 어떻게 이 영화와 음악에 맞닿아 내 인생으로 깊숙이 침투하는지, 난 그 숨은 연결 고리를 찾아내고 싶어 안달이 났었어. 난 그렇게 우연히 니체를 만났고, 고백하자면, 금세 감전돼 버렸어.

   
 

너에게로 가는
그리움의 전깃줄에
나는






                                                                          고정희,「고백」

 
   

 난, 니체의 책들이 교과서에나 나오는 낡은 고전에 다름없다고 생각했었어. 하지만, 그와 대화를 시작하면서부터 바로 알게 됐어. 그 책 속에 숨은 불명예스러운 곰팡이 냄새는 누군가의 모함이란 걸. 그의 책이 ‘모든 사상가는 자기 시대의 아들’이라는 전형의 감옥에 갇혀 있는, 특정 시대만 대표하는 늙다리 고전이 아니라, 지금 이 시대, 나의 문제, 우리의 문제를 함께 되짚어나갈 때, 실시간 채팅처럼 전혀 시차 없이 대화할 수 있는 젊고 건강한 책이란 걸 알게 됐어.

 헌데 우린 왜 니체를 떠올리자마자 겁을 먹을까. 왜 그는 우리에게 예외적인 위험인물로 자리 잡고 있을까. 그가 평온하게 인습에 길들어 있는 우리를 순식간에 전복시킬 자세를 취하고 있기 때문 아닐까. 언제든 틈만 나면 궂은살로 살짝 막아놓은 안일한 사고의 정곡을 향해 비수를 날리기 때문 아닐까. 맞아. 그는 언제든 우릴 불편하게 할 준비가 되어 있어. 왜냐면, 그는 현재의 생각을 뒤집으라고 얘기하거든. 지금의 가치를 전복시키라고 얘기하거든. 정해진 답에 꿰맞춰 진 삶을 살고 싶어 하는 우리에게 예리한 의문 부호를 들이밀고, 그 두려운 미지수 속으로 우릴 끌어들이고, 정답 없는 삶의 지도 위로 우리를 밀어버리거든. 두렵다고? 귀찮다고? 하지만, 우리가 믿는 인생의 정답이 만약 오답이라면 어떡하지. 아니 아예 정답도 오답도 존재하지 않는 거라면 어떡하지. 도대체, 어떻게 살아야 하는 걸까. 저녁마다 찾아오는 이 질문에 대답이 될 수 있는 일말의 비밀이라도 엿듣고 싶다면, 난, 니체를 읽어보라고 얘기해주고 싶어.

 난 언젠가부터 책상 위에 니체의 책을 아무렇게나 펼쳐 놔. 괜한 공상에 젖은 사이 바람결에 페이지가 넘어가도록 내버려둬. 컴퓨터를 부팅할 때 그 지겨운 기다림의 시간 틈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 봐. 마치 시집을 열어볼 때처럼, 내켜지는 페이지가 보여주는 임의의 문장들에 날 링크시켜 봐. 아, 멋진 문장들! 난 그가 시인이라는 걸 금방 알아챘었어. 평생 두통에 시달린 미치광이 시인. 짝사랑의 실패 후 벼락같은 영감을 얻었던 시인. 그래. 여느 시처럼 특별한 맥락 없이 내 마음대로 접속하고 반응하기. 난 이게 니체와 나누는 가장 편안한 대화법이라고 생각해.

 만약, 그를 오해하고 싶다면 우리가 학교에서 배웠던 방식을 쓰면 돼. 자, 문제 나갑니다. 칸트는 정언 명령, 데카르트는 방법적 회의, 스피노자는 범신론, 키르케고르는 죽음에 이르는 병, 그렇다면, 니체는? 혹은 골든벨을 울려볼까. 니체는 자신의 작품 『차라투스트라』에서 인간의 정신적 변화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빈칸에 들어갈 말은? 낙타→사자→[   ]. 아니면, 하겐다스의 철자가 방송국 입사 시험의 단골 메뉴였던 시절처럼, 니체 이름을 원어로 쓰시오! 라고 시험 문제를 내 볼 수 있어. 니체가 궁금해 한때 전문가의 강의를 들은 적도 있었어. 이렇게 얘기해주더라. 차라투스트라의 핵심 개념은 5가지로 정리돼요. 뭐냐면……. 아, 제발 그의 사상을 다이제스트해서 암송하려고 애쓰지 말았으면 해. 다들 그를 제대로 이해 못 할까 봐 전전긍긍하며 두려워하지 말았으면 해. 어차피 니체는 다 알고 있거든. 우리가 오해할 것을.

   
  나에 관해 무언가 이해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누구나 자기 자신의 상으로서 나로부터 무엇인가를 만들어 놓고 있을 뿐이다.  
   

 난 「내 생애 가장 아름다운 일주일」이라는 영화 맨 뒤에 니체의 글 한마디를 인용했었어. 그때 한 평론가가 나에게 냉소를 보내면서 이러더라. “당신은 니체를 몰라!” 니체가 들었으면 한바탕 웃었을 거야. “넌 날 얼마나 아니?”라고 말이야. 난 니체라는 식단이 올라올 때마다 그를 더 잘 안다고 우기는 미식가들을 자주 봐왔어. 하지만, 니체는 자신이 한 곳에 고여 썩은 내를 풍기는 경전이 되는 건 죽는 것보다 싫어했을 거야. 오히려 자신을 마음껏 뜯어 먹고 각자의 피 속에서 제멋대로 체화시키길 바랐을 거야. 난 이렇게 생각해. 니체는 이해의 대상이 아니야, 감흥의 대상이지.

   
  나는 모든 글 가운데서 피로 쓴 것만을 사랑한다. 피로 써라. 그러면 그대는 피가 곧 정신임을 알게 되리라. 다른 사람의 피를 이해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니체의 피는 무엇으로 생겨났고,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까. 그게 궁금하다면 그의 남다른 생애를 돌아보지 않을 수 없어. 슈트라우스의 음악처럼 난해한 격정의 리듬을 갖춘 생애. 실은 너무 이질적인 조성으로 가득해서, 어떤 종류의 음악이라고 한 마디로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생애. 니체는 종종 자신의 글 속에서, ‘난 바그너다.’라고 말해. 혹은 ‘쇼펜하우어다.’라고도 말해. 또 ‘볼테르다.’라고도 말해. 비제, 괴테, 스탕달, 디오니소스, 예수까지 그의 라이브러리는 참으로 다채로워. 니체를 어느 한 인격으로 정의할 수 없게 만드는 이 복합체의 특성이 그를 어려운 존재로 만들어버려. 하지만, 실은 단순한 거야. 말하자면, 니체는 이런 식이었던 거야. “난 끊임없이 변신하고 있어.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날 니체로만 알고 있잖아. 난 여러 인격을 다중적으로 살면서, 내 변신을 끝없이 알려주고 싶다고!” 니체는 스스로 여러 번 태어나고 여러 번 죽었다고 말했어. 예를 들면, 독일적인 미덕에 대한 저항의화신이라고 믿었던 바그너를 흠모했지만, 결국 독일 제국의 우상이 되어버리자, 이내 그를 혐오하게 됐어. 그 순간, ‘바그너의 니체’는 죽어버린 거지. 그토록 존경했던 쇼펜하우어의 부정이, 결국 극도로 피곤한 자가 내뱉는 절망의 신음이라는 걸 알아버리자, 이내 ‘쇼펜하우어의 니체’도 죽어버린 거지.

 니체도 이렇게 보통 사람들처럼 자신을 대변해줄 예술가와 철학자들을 필요로 했어. 하지만, 어느 순간부턴 타인의 정체성이라는 가면을 벗고 누구의 이름도 갖다 붙일 수 없는, ‘니체의 니체’가 돼. 자신이 생각이 남의 작품과 개념을 통해 표현되기엔 너무 커져 버린 거야. 『차라투스트라』의 집필을 앞두고 고유의 니체가 되는 엄청난 도약을 하게 되는데, 그 계기가 뭐였을까.

 니체는 독일적인 것, 부르주아적인 것, 특히 그 배후에 자리한 기독교에 대한 증오심이 극에 달았어. 현세의 삶을 헛된 것으로 부정하고 내세를 꿈꾸게 하는 기독교, 그 연장선상에서 기존 가치와 관습을 맹종하는 위선적인 도덕군자들을 극복하지 않고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게 돼. 그래서 이런 급진적인 질문을 던지게 돼.

   
  모든 가치를 뒤바꿔 버릴 수는 없을까? 혹시 선이란 악이 아닐까? 신이란 단지 악마의 발명품이거나 악마를 더욱 정교하게 해놓은 게 아닐까? 모든 것들은 궁극적으로 거짓이 아닐까?  
   

 니체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의 서문에 이렇게 썼어. 뭔가 단단한 윤리적 기준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는 식으로 우리의 불안감을 파고드는 종교, 편협한 애국심을 강요하는 국가, 시공간에 따라 달라지는 선과 악, 평등과 민주주의에 대한 나약한 기대심리 등, 니체가 보기엔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모든 것들에 대해 심각한 염증을 느껴. 그리고는 이런 기성의 가치들과 혹독한 전쟁을 치러. 하지만, 보통 사람이라면 끄떡없이 버티는 저 현실의벽에 부딪혀 깨지고는, 출구 없는 비관에 허덕이다가 지쳐, 다 헛되다며 고개 젖는 허무주의자로 전락하기 쉬울 텐데, 혹은 결국 진리는 ‘저 너머 세계’에 있다며 거짓된 신앙에 굴복하기 쉬울 텐데, 그는 이 오류에 빠지지 않는 놀라운 항해술을 보여줘. 여기엔 참으로 특이한 비결이 있는데, 그 속에 평생 불운에 떨었던 니체가 남달리 특별한 존재로 거듭나게 되는 비밀이 숨겨져 있어.

   
  내 침대 위에서 내가 본 것. 그것은 바로 죽어가는 사람이었다. 그는 숨이 찬 듯 그렁그렁 거리고 낮은 신음을 냈다.  
   

 이게 열네 살짜리 소년이 쓴 글이라고는 믿기 어려울 거야. 근데, 맞아. 니체는 평생 병마에 시달렸어. 열두 살 때부터 두통과 눈의 통증에 시달렸고, 군대에선 말에서 떨어져 가슴을 다쳤고, 나중에 이질과 목 디프테리아를 앓았고, 끝내 치료되지 않은 매독균의 후유증에 시달렸고, 몸이 안 아플 때도 늘 조울증과 발작에 시달렸었어. 그렇게 고통의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그가 앓던 병의 성격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겨. 그것은 기분뿐만 아니라, 성격, 행동, 표현, 문체, 작품까지 변하게 해. 스스로 그 차가운 전투에서 더는 화약 냄새가 나지 않고 훨씬 사랑스러운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고 느껴.

   
  자유정신의 방식으로 병에 걸려 오랜 세월을 앓다가 그 후에 더욱 건강해지는 것이 모든 염세주의에 대한 근본적 치료법이다.  
   

 그러니까, 니체는 중병을 앓고 있던 어느 시기도 ‘결코 병적이지 않았고 그때만큼 기쁜 적이 없었다.’고 말해. 왜냐면, 병이 습속을 바꿀 권리를 주고, 망각을 허용하고, 조용히 누워 여가를 갖게 하고, 기다림과 인내의 필요성을 일깨워줬기 때문이야. 그러니까, 니체는 아파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순간들을 새로운 사유의 기회로 활용했던 거야. 본성인 척 자리 잡은 ‘나’가 아닌 또 다른 ‘나’를 나서게 하고, ‘나’와 ‘나’의 전면전을 펼친 거야. 그가 『차라투스트라』를 통해 표현한 긍정의 사상들은, 그의 말에 따르자면, 바로 이런 ‘위대한 건강’의 산물이었어.

   
  너는 너 자신을 멸망시킬 태풍을 네 안에 가지고 있는가?  
   

 그는 병에 걸리자, 카오스의 태풍을 만들어냈어. 카오스란 게 길의 ‘소멸’이 아니라 길의 ‘과잉’이잖아. 그러니까, 특정 시각의 맹목성을 지우고, 수많은 대립적 사유에 길을 내주는 치유의 체험을 한 거야. 이 아주 위험한 특권을 제대로 활용한 니체는, 스스로 환자이면서도 의사로서, (더 큰) 병을 치료하기 위해 (더 작은) 병에 걸리는 독특한 삶의 지혜를 발휘한 거야. 의사들은 조울증의 일반적인 증세라고 치부했지만, 실은 니체는 철학의 수단으로서의 질병과치유의 반복적 체험을 했고, 비관론자에서 낙관론자로 점프하는 뛰어난 예술적 수완을 발휘했던 거지.

 그러던 어느 날, 실바플라나 호숫가를 거닐다 ‘영원회귀’라는 영감이 벼락처럼 그에게 떠올라. ‘사상이란 게 원할 때 아니라 그것이 원할 때 찾아 온다’는 말처럼 운명의 섬광이 스친 거야. 니체는 여기서 더 나아가 ‘인간적인’ 질병을 앓지 않는 ‘초인간적인’ 상태로의 변신을 체험하게 돼. 어떤 의미로 너무나 건강해진 니체는, ‘나의 삶이고, 나의 천재성’이라고 표현한 비장의 모토를 찾아내게 돼. 그건 바로 ‘모든 가치의 전환’이라는 사적 혁명의 방법론이야. 니체는 이에 따라 낡은 세계를 가차없이 쳐부수는 용기를 발휘해. 그것도 분노나 원한, 불평이 아니라 선물과 복음의 형태로 말이야. 그러니까, 단순한 부정을 넘어서는 긍정의 파괴 행위, 그것도 웃음과 춤, 놀이의 형태를 띠는 유희의 방식으로 말이야. 어느 순간, 그의 육체는 의미 없는 식물인간으로 초라하게 스러져 갔지만, 실은 훨씬 전부터 그는 치유되어 있었어. 내가 놓치고 싶지 않은 점이 이거야. 자세히 보면 여기엔, 진정 우리가 걸린 심각한 병이 무엇인지, 그 치유법은 또 무엇인지, 우리가 그토록 목말라 애타게 찾는 보물지도가 숨겨져 있으니까.

 니체는 그 폭풍 영감을 풀어헤쳐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라는 장문의 시를 휘갈겨 써 내. 그리곤 대만족했어.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을 쓰는가」라는 낯간지러운 제목의 글을 쓰고, “누군가 내 책 중의 하나를 손으로 받쳐 들고 있다면 그건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드문 존경의 하나다.”라고 얘기할 정도로 말이야. 여기 우리가 니체의 삶과 니체의 글을 따로 봐야 하는 중요한 이유가 있어. “나와 내 작품은 별개다. (…) 난 내가 다른 사람들과 혼동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심지어 나 자신에 의해서도.”라고 얘기했어. 그러니까, 니체는 늘 이런 얘길 하고 싶어 했던 거야. ‘『차라투스트라』를 읽고 나서, 나의 생애에 대해 얘길 듣는다면, 그건 또 하나의 작품을 더 읽은 셈이다.’라고 말이야. 그래서 난, 그의 여러 변신 중의 하나인 『차라투스트라』를 살펴보기 전에, 그 모든 변신의 기록이 담긴 또 다른 한 작품으로서의 『니체』를 먼저 살펴보고 싶었어.

   
  내가 누구인지를 알아차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의 출현은 아직 그때가 오지 않았다.  
   

 니체는 물론 자신의 생각이 당대에 쉽게 파악될 거라고는 믿지 않았어. 실제로 니체는 다양하게 해석됐어. 모든 억압과 구습의 타파를 외치던 극단적 개인주의자부터 자본주의, 제국주의, 파시즘의 옹호자를 넘어 여성 혐오주의자까지. 죽은 지 30년 만에 ‘사상가 니체, 행동가 히틀러’라는 등식으로 나치들에게 우상이 되기도 했었는데, 그 돌아가는 꼴을 봤다면 무덤 속의 니체는 한참이나 시큰둥해했을 게 분명해. 하지만, 다행히도 그의 정치적 초상화는 여러 재해석 속에 의미 있는 변화를 거듭했어. 물론, 니체는 “최소한 300년을 기다리지 못한다면 내 책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라고 미리 여유 있게 투덜거렸어. 하지만, 300년까지나 기다리지는 않게 해주고 싶은 니체의 열혈 팬으로서 분명하게 얘기하고 싶은 게 있어. 그는 안타깝게도 ‘먼저 와 있었지만, 아직 오지 않았던 존재’였다는 사실, 또, 몇 시대를 건너뛰어야만 비로소 들릴 수 있는 그의 속삭임들이 분명히 우리 시대의 복음으로 부족함이 없다는 사실이야!

 자, 오늘도 니체가 말한 밤이 되었어. 『차라투스트라』의 아름다운 몇 소절로 인사하면서, 니체를 읽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독자가 되는 방법. 니체를 지지하지 않으면서도 니체의 팬이 되는 방법에 대해선 다음 편지에서 더 이야기해 볼게.

   
  밤이구나.
샘솟는 샘물은 소리가 더 커지네.
내 영혼도 샘솟는 샘물 같아서.

밤이구나.
사랑하는 연인들 노랫소리만 깨어 있네.
내 영혼도 사랑하는 연인의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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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프리드리히 니체 / 홍성광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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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8-12 0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니체, 참 격하면서도 온순하군.

삽하나 2011-08-14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른 조그만 자취방으로 달려가
잘난척쟁이라고 눈을 흘기며 반도 못읽고 책장 깊숙이 쑤셔 넣은 그에게 용서를 구해야 겠습니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얼른 물어봐야 하거든요. ㅠㅠ

al. 2011-08-14 2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사랑하는 니체~ 여러분들이 많이 읽으셨으면 좋겠어요. 정말 겁먹을 사람 아닌데 ^^

마욤 2011-08-26 1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하... 차라투스트라 도오~저언을 하기 위해 열심히 밑바닥 긁던 생각이 나네요. 결국 민음사 판으로 읽었지만 펭클 책도 좋아보여 도서관서 빌려 비교해 가면서 보긴 했지요. 니체는 좀 더 시간이 지나가야 진가가 발휘되려나 봐요~~

일진 2011-10-26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니체의 저서는 막연히 오래된 서재의 명서나 그냥 일반 집에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한쪽 벽에 붙어 있는 먼지 쌓인 명화쯤으로 알고 있었던 나의 생각에 불을 지폈다.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를 읽어서 무지 했던 나의 감성에 호소 해야 겠다....아직 괜찮다고 내 자신에 미안해 하며....
 

 

 다른 사람의 악함은 견뎌도 약함은 견디지 못한다.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별. 별. 별. 요번에 너의 편지는 온통 별 투성이네.

 네 글을 읽고 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어. 너와 나 사이에 장난꾸러기 요정이 끼어든 걸까? 바로 며칠 전에 내 책이 새로 한 권 나왔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란 제목의 책이야. 그 책에는 태양의 뒷면을 찍은 사진이 있어. 태양의 뒷면을 자세히 보면 작은 점이 하나 있어. 얼핏 보면 한 척의 나룻배 같아 보여. 하지만 그건 우주 왕복선 아틀란티스호야. 그 우주 왕복선은 바로 지난주에 지구로 돌아왔어. 태양의 뒷모습과 우주 왕복선을 함께 보는 것은 내겐 무척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일이었어.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행을 보는 것 같았어. 시작은 미약한 여행. 외로운 여행, 그러나 어떤 꿈을 품은 여행, 끝은 알 수 없는 여행.

 그 책에는 중요한 모티브가 두 가지 있었어.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돼. 내가 파리의 페르라세즈 오스카 와일드 무덤을 찾았을 때 나는 어떤 부부를 만나. 남편은 아일랜드 사람, 아내는 한국인 입양인. 그 둘은 함께 우산을 쓰고 있었고 해바라기 한 송이를 들고 있었어. 그들은 오로지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려고 파리에 온 거야. 둘만의 비밀스런 하지만 행복한 약속을 가슴에 품고 돈을 모은 지 몇 년 만의 일이야. 그들은 왜 그렇게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려 했을까? 그 비밀이 동화 행복한 왕자에 있었어. 너에게 책을 보냈으니 아마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너도 그 부부의 비밀을 알게 될 거야. 그 둘을 만나고 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어. 너에겐 꽃 한 송이 들고 갈 여행지가 있는가? 너의 여행은 너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는 그 부부를 보고 인생과 여행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던 거야.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 왜 인생을 여행이라고 했을까?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우리는 여행자, 순례자라고 끝없이 속삭이고 있어. 난 그 생각을 하다가 아예 이번 생을 여행자의 태도로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 인생은 여행에게 배울 것이 있어. 그 목록은 마치 별의 목록이 그런 것처럼 무한해. 나는 그 책을 다 쓴 다음에 휘트먼의 이런 시구를 발견했어.  

‘나도 다른 누구도 당신을 위해 저 길을 여행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그 길을 여행해야 한다’  

그래. 바로 이 시구 같은 이야길 난 쓰고 싶어 했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별에서 온 아이』에서 기억에 남아있는 글 중 하나를 소개하고 싶어. 생일을 맞은 스페인 공주 이야기야. 내가 그 이야기를 읽은 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은 틀릴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내 기억 속의 이야길 들려주고 싶어. 그러니까 공주의 아버지인 왕은 공주를 사랑했으나 그 어여쁜 소녀를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공주는 죽어버린 그의 아내. 즉 왕비를 똑 닮았기 때문이야. 공주를 볼 때마다 살아 있는 아내를 보는 것 같아서 왕은 몹시 괴로웠고 그래서 공주를 보려 하지 않아. 대신 공주는 삼촌이 돌봐줘. 그가 왕의 동생인지 형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갈게. 공주의 생일이 되자 삼촌은 공주를 즐겁게 해주려고 수많은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들을 부르고 어릿광대 난쟁이도 불러. 난쟁이는 그때까지 숲에 살았기 때문에 공주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본 적이 없었어. 공주는 난쟁이를 보고 무척 즐거워하며 친절을 베풀어. 내 기억이 맞는다면 공주는 난쟁이에게 장미꽃도 선물하고 궁을 떠나지 말고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도 했을 거야. 난쟁이는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겠지. 저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공주가 날 사랑한다니. 난쟁이의 가슴은 기쁨으로 터질 지경이었어. 난쟁이는 공주를 기쁘게 해주려고 온갖 재주를 부렸어. 한참을 깔깔 거리며 웃던 공주는 그래도 금세 싫증이 나서 지체 높은 귀족의 자제들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난쟁이는 이 방 저 방 공주를 찾으러 다녀. 그러다가 어떤 넓은 방에 들어가. 그리고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난쟁이는 그 방에서 끔찍하게 생긴 괴물을 본 거야. 난쟁이는 너무나 무서웠어. 그래서 달아나려고 해. 그런데 그러자 그 괴물도 달아나려 해. 난쟁이는 괴물을 위협하는 동작을 취해봐. 그랬더니 그 괴물도 그렇게 해. 난쟁이는 용기를 내서 그 괴물에게 다가가. 그러자 그 괴물도 그렇게 해. 그 괴물은 난쟁이를 그대로 따라 하는 거야. 그 괴물은 뭐였을까? 바로 거울에 비친 난쟁이 자신이었던 거야. 난쟁이는 어느 순간 퍼뜩 그 사실을 깨달아. 난쟁이는 너무나 슬퍼져. 내가 괴물처럼 생겼다니? 저토록 끔찍하게 생겼다니? 난쟁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나도 어렸을 때 숟가락에 얼굴을 비춰보다가 저 입이 튀어나온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인가 놀라서 쓰러져버릴 뻔한 적이 있긴 있어.) 하여간 난쟁이는 계속 생각해. 그렇다면 공주의 빛나는 미소는 다 뭐였을까? 난쟁이는 수치스러웠어. 난쟁이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픔으로 쓰러져. 그리고 숨을 거두고 말아. 한참을 신나게 놀던 공주는 거울 방에서 쓰러져 있는 난쟁이를 발견해. 공주는 난쟁이가 자신을 즐겁게 했던 것을 기억해. 그리고 누워있는 난쟁이에게 다시 자신을 즐겁게 하라고 명령을 하지. 그렇지만, 난쟁이가 어떻게 그 명령을 따를 수 있겠니? 공주는 화가 나서 삼촌에게 난쟁이를 때려 주라고 해. 그러자 삼촌은 난쟁이의 심장에 귀를 대봐. 그리고는 그 난쟁이 심장이 이젠 공주의 명령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대답해.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말해. 나를 즐겁게 하려는 자는 심장이 없어야 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서 조금 변형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이 이야기를 자주 생각해. 나를 즐겁게 하려는 자는 앞으론 심장이 없어야 해. 그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너는 그 심술궂은 공주처럼 말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우린 다른 사람의 악을 견뎌낼 힘은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심장을 견뎌낼 힘을 가지고 있진 못할지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명백히 약자라고 판단되는 사람한테 이유 없이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있니? 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이야기, 더 나아가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궁금해. 우리 인간성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동쪽별, 정말 우린 다른 사람의 악함은 견뎌도 다른 사람의 약함은 견디지 못하는 걸까?

 노르웨이 테러 사건 이야기와 드라큘라와 북유럽의 뱀파이어 이야길 하려 했는데 결국 꺼내지도 못했네. 난 매번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선수 같구나. 어쨌든 노르웨이의 악당 역시 다른 사람의 심장을 견디지 못한 병에 걸렸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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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지음 / 김전유경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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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7-3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쟁이는 약했던 걸까.

삽하나 2011-07-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따라 거울 속의 제 모습이 저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아 속상하네요

마욤 2011-08-0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은 생각이 절로 일어나게 하는 한 주 인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늘 다시 한번 생각하는.... 요즈음엔 더 더욱... 8월 무사히 지나가도록...

마리벨 2011-08-01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 악함도 ㅡ 약함도 다 힘들어요 ㅜㅜ
 

 

  와일드한, 너무나 와일드한

  
민규동(영화 감독) 

 

  안녕, 커피진주.
  그대의 글에 취해서인지 오늘 난 장 콕토의 이 짧은 시를 떠올렸어.  

   
  내 귀는 소라 껍데기
바다의 파도 소리를 듣는다.
 
   

  왠지 아편에 취해 쓴 시 같지 않니? 나도 그처럼, 아편과 또 아편 같은 어떤 것과도 뗄 수 없는 인생을 살았던 장 콕토의 숨결에 한참 귀 기울여봤어.   

   
 

이 세상에서 사람이 할 수 없는 일은 없으며,
심지어 사랑이란 이름으로  
급행열차 앞으로 뛰어들어 죽음을 끌어안기도 한다.
하지만, 아편을 피우는 것은 움직이는 열차 밖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것은 삶과 죽음이 아닌 다른 무언가에 자신을 관련시키는 것이다.

 
   

 
나는, 장 콕토의 이 아편 예찬에 유혹당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소개된 아편굴처럼 몽롱한, 한 세기 전의 어느 다락방으로 숨어들어 가봐. 거기엔 숨을 거두기 직전의 한 남자가 뭐라고 속삭이고 있어. "저 벽지와 나는 목숨을 건 결투를 벌이고 있어. 우리 둘 중 하나는 끝장나야 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의 로버트 드니로처럼 낡은 침대 위에 비스듬히 누운 채, 흐린 눈빛으로 더러운 천정에 반사되는 자신의 상처받은 욕망을 되돌아봤을 오스카 와일드의 굴곡진 인생 궤적이 떠올랐어. 꿈꾸는 자가 누구보다 먼저 훔쳐본 새벽 풍경처럼 말이야.

   
  그렇다, 나는 꿈꾸는 자이다. 왜냐하면, 꿈꾸는 자는 오직 달빛으로 자신의 길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며, 그가 벌을 받는 것은 세상 사람들보다 먼저 새벽을 보기 때문이다.  
   

  예술은 본질적으로 부도덕하다고 주장한 오스카는 어떤 의미로든 ‘행복보단 즐거움’이라는 신조를 내세우고 미와 쾌락에 중독된 삶을 살았어. 그래서인지,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방식은 보통 작가와는 다른 거 같아. 그 작가는 많은 책을 쓰지는 않았지만, 대신 수 없는 아포리즘을 남겼거든. 말하자면, 작품보다 이상한 차림새나 빼어난 격언들을 쏟아내는 뛰어난 언변으로 더 유명했었어. “나는 내 천재성은 삶 속에 넣었고, 내 재능만 작품 속에 집어 넣었다.”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이렇게 썼듯, 자신의 천재성에 대해서도 늘 확신했었어. 강연 차 뉴욕에 도착했을 때 세관에서 이렇게 소리쳤대. "난 내 천부적인 재능밖에는 신고할 것이 없소." 이런 식으로 늘 자신이 미와 자아실현 사이의 딜레마를 탐구하기 위한 순례자인 것처럼 요란한 댄디즘을 앞세웠어. 요즘으로 치자면 탁월한 유머 감각으로 무장한 지적인 독설에 해당하는 건데, 그의 말장난에 대한 독특한 욕구는 “세상에서 구설수에 오르내리는 것보다 더 나쁜 건 단 하나, 구설수에 오르내리지 않는 일”이라고 스스로 표현했듯, 세인들의 삐딱한 댓글들을 한 편으로는 즐기면서 살았던 거야. 세상의 눈치를 보기는커녕, 관능적으로 자극하는데 열정을 바쳤던 오스카는 끝내 수습하기 어려운 큰 사고를 치고 말아.

  “결혼은 너무 무거운 짐이어서 때론 세 사람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였을까. 오스카는 결혼 후에도 다른 사람과 사랑에 빠져. 그리고는 모든 걸 잃어. 그가 말했듯, 삶에는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는 비극과 원하는 것을 얻는 비극, 두 종류의 비극밖에 없는지도 몰라. 그는 결국 원하는 걸 얻고 비극으로 막을 내려. "모든 비극은 죽음과 함께 끝나고 모든 희극은 결혼과 함께 끝난다"는 바이런의 저주에 걸려든 것처럼 말이야.

  양성애자인 오스카는 미소년들이 있는 술집을 자주 찾았어. 결혼 후 찾아온 뜨거운 사랑의 주인공도 남자였어. 이탈리아에서 만난 옥스퍼드 대학생 꽃미남 귀족 알프레드 더글라스와 사랑에 빠져. 4년간, 이 어린 연인과 세상을 돌아다니며 향락을 누려. 데이트 비용을 위해 급하게 희곡을 써서 팔기도 할 정도로 푹 빠져 살아. 이 사실을 알게 된 알프레드의 아빠, 퀸즈베리 후작이 오스카를 협박하기 시작해. 친구들의 만류에도, 자기 아버지를 명예훼손으로 고소하라는 연인 알프레드의 말을 실행에 옮겨. 하지만, 재판은 지고, 오히려 그에게 동성애 죄목으로 부메랑 고소를 당해. 작품도 못 쓰게 되고, 재판 비용을 떠안아 파산했고, 가족은 도망가버려. 동성애 금지법 판결 제1호 인물로 영국서 쫓겨난 오스카는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의 어느 호텔 다락방에서 쓸쓸히 죽고 말아.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없는 최대의 실수가 있다면, 그것은 나만의 개성을 끈질기게 추구하는 일을 어느 날부터 그만두는 것이다.  
   

  맞아, 그는 실수 아닌 실수를 했어. 재판에서까지 자신의 입담을 발휘하며 당당하게 자신을 변호했던 거야. 그 오만함의 대가는 참혹했지. 하지만, 난 오스카의 몰락이 ‘퇴폐’나 ‘방종’의 대가가 아니라 ‘편견’이라는 점에 주목하고 싶어. 오스카에게 조롱받던 당시 빅토리아 왕조의 귀족들의 자존심에 대한 상처, 게다가 식민지 아일랜드 출신의 작가에게 느꼈던 앙심 그리고 교양과 품위를 유지하고픈 많은 지성인에게 오스카는 공공의 적이었을 테니까, 이것은 편견의 보복이 분명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이 당시 퀸즈베리 재판정에서 오스카의 문란함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쓰였다고 할 정도니까, 사실 그의 인생은 ‘때를 잘못 만나 잘못 일그러진 잘못된 경우’라고 생각해.

  그래도 오스카는 끝까지 자존심을 굽히지 않았어. 그를 배신한 알프레드에게 보낸 레딩 감옥의 옥중기에서 자신의 업적에 대해 당당히 이야기하는 걸 보면 알 수 있어.

   
  신들은 나에게 거의 모든 것을 주었다. 나는 천재성, 명성, 높은 사회적 지위, 명석함, 지적인 대담성의 소유자였다. 나는 철학을 예술로, 예술을 철학으로 만들었다. 나는 인간의 마음과 사물의 색채를 변화시켰다. 나의 언행은 언제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  연극, 소설, 운문시와 산문시, 오묘하거나 환상적인 대화 등, 내가 손대기만 하면 무엇이든 미의 새로운 양식으로 아름답게 변했다. 사실 나는 진실한 것 못지않게 그릇된 것도 진실 자체의 올바른 영역으로 끌어들여서, 그릇된 것과 진실한 것이 단순히 지적 존재의 형태임을 보여주었다. 나는 예술을 최고의 현실로, 삶을 단순한 소설 양식으로 다루었다. 나는 이 시대 사람들이 신화, 전설과 같은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도록 그들의 상상력을 일깨웠다. 나는 모든 체계를 하나의 구절로, 모든 존재를 하나의 경구로 요약했다.  
   

  하지만, 이 업적의 대가로 그는 3평 안 되는 흰색 감방에서 2년간 중노동을 해야 했어. 한마디로 신들이 그에게 준 거의 모든 것을 다시 다 빼앗긴 거지. 그는 2년 내내 자기를 방탕의 길로 유인하고 마음을 어지럽혀 집필을 방해한 연하의 연인에 대한 비난으로 밤을 지새웠어. “인간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지나치게 심각하게 생각한다.”라면서, 그 누구보다 진지함의 중요성을 의심했지만, 죽어가는 사형수들을 바라보며 그 숙명의 순간을 체험해서인지, 오스카도 「레딩 감옥의 노래」에서만큼은 꽤 진지했어.

   
  그 남자는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였고,
그래서 그는 이제 죽어야 한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사람을 죽인다.
이는 모두에게 마찬가지이다.
 
   

  동물이면서 천재였던, 특별한 인간 유형의 오스카. 작가로서 유명해지지 못한다면, 스캔들 메이커로서 악명이라도 떨치겠다던 어린 시절의 다짐이 이런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지는 그도 예상 못 했을 거야. 그토록 친했던 앙드레 지드를 포함 파리의 수많은 문인까지 그의 동성애 행각에 대한 혐오감을 토해냈으니까, 마지막 순간은 정말 외로웠을 거야.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보들레르, 랭보 같은 사람들이 가진 ‘그 무언가 패륜적이고, 히스테릭하고, 끔찍하게 저속한, 미치광이 같은 성향’을 대변하면서, 성적, 예술적 자유를 위해 산화한 순교자로 추앙받게 됐어. 쾌락주의의 화신, 말의 감각을 깨우친 탐미주의자라는 새로운 존재형의 살아 있는 본보기가 됐어. 어떻게 보면 이런 특별한 삶의 궤적이 그의 작품들을 부차적인 것들로 만들어 버렸는지도 몰라. 눈물 흘리는 청동상 행복한 왕자의 이야기는 누구나 알지만, 그 동화를 쓴 작가가 오스카 와일드라고는 잘 연상하지 못하는 것처럼 말이야.

   
  나는 삶에 대해 알지 못할 때 글을 썼다. 그러나 이제는 삶의 의미를 알고 있기 때문에 어떤 글도 쓸 수가 없다. 삶이란 쓰여질 수 없는 것이다. 삶이란 그저 살아가는 것이다.  
   

  아나키즘에서 사회주의자를 오간 오스카의 용기와 만용에 찬 역설을 볼 때, 여러모로 그의 삶의 키워드는 미를 향한 ‘Wild Passion’이라고 볼 수 있어. 하지만, 오스카는 노동의 존엄성을 통해 미를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가난한 노동자들의 반체제적 저항을 강조했으니까, 완전 순수하기만 한 탐미주의자는 아냐. 『행복한 왕자』라는 동화를 들여다보면, 그를 단선적으로 바라봐서는 안 되는 입체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어. 그가 말하는 행복이란 뭘까. 보통 동화의 행복과는 조금은 달라 보여.

   
 

어떠한 최소의 행복이든 최대의 행복이든, 행복으로 하여금 행복해지게끔 하는 요인은 언제나 하나이다. 즉, 잊어버릴 수 있는 것, 더욱 학술적인 표현을 빌자면, 일정한 기간 중 ‘비역사적’으로 느끼는 능력이다.
                                                                                       - 니체

 
   

  건전하고 무난하며 화해와 해피엔딩의 강박이라는 디즈니의 주문에 걸려 대부분의 동화가 거짓된 화해를 꿈꾸는 데 이바지해 왔다면, 사유 재산 제도의 비극, 자선과 희생의 허무함을 역설한 오스카의 동화는 어른 세계의 참담한 실상을 솔직히 투사하는 기묘한 태도를 취해. 게다가 이야기의 끝에서 왕자는 재활용될 뿐, 과연 그의 선행과 자비로 말미암아 세상의 진보가 이뤄질까, 하는 회의에 찬 질문을 남겨. 그는 동화라고 해서 절대로 무서운 현실의 긴장감을 놓치지 않아. <별에서 온 아이>까지 그의 여러 동화의 끝자락을 만져보면, 매번 놀라게 돼. 이토록 와일드한 엔딩이 있을까 싶어서 말이야. 그 전복적인 동화의 숨결은 우리가 가지지 못한 것, 그러니까, 실천하는 ‘심장’과 소통하는 ‘날개’의 희생이 여전히 필요하다는 날 선 진실을 강렬히 일깨워줘. 불행과 행복 사이의 단절을 이어주는 제비의 소박한 날갯짓이 그 보름달 위로 날아오르는 부엉이를 꿈꾸는 삶을 가능케 하는 거라고 알려줘. 그래서일까, 보르헤스가 이렇게 감탄했는지도 몰라. “오스카 와일드를 읽고 있으면 그가 1900년에 죽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아요. 여전히 우리를 놀라게 하니까.”

  커피진주. 그대가 『런던을 속삭여 줄게』에서 소개했던 트라팔가르 광장 옆 세인트 마틴 교회 주변에서 이상한 동상 하나를 본 적 있는지 궁금해. 마치 행복한 왕자를 녹여 새로 부활시킨 거 같은 기이한 형상의 주저앉은 동상 말이야. 자세히 들여다보면 오스카가 관 속에서 일어나 앉아 담배를 피우는 모습인데, 그의 한쪽 눈에는 별이 박혀 있단다. 그 관엔 이런 글이 새겨져 있어.

   
  우리 모두가 시궁창에 있지만, 누군가는 별들을 바라보고 있지.  
   

  그가 바라본 별은 어떤 별이었을까. 셰익스피어, 오스틴, 브론테 자매, 디킨스, 캐럴, 로렌스 등 수많은 영국의 문인들이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묻혀 있지만, 그는 예외였어. 게다가 그가 외롭게 죽은 후, 한 세기가 지나서야 겨우 런던의 도로변에 기념비가 세워졌어. 영국이 뒤늦게 관용을 베풀어 그를 받아준 거지. 그래, 아무래도 오스카는 너무나 와일드하게 시대를 앞질러 살았어. “세상은 놀랍도록 즐거운 곳. 그곳에 그냥 머무는 것은 지루할 뿐이다. 하지만, 그곳에 있지 못한다는 것은 정말, 비극이다.” 그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마지막 희극 『진지함의 중요성』에 나온 이 대사처럼 말이야.

  어느 별에서 온 아이인지, 희극인지 비극인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쉽게 짐작하기 어려운 인생을 살았던 오스카가 묻힌 파리 묘지의 비석 뒤편엔 이런 시 한 구절이 새겨져 있어.

   
  쓸쓸한 눈물이 그를 위해 연민이라는 깨어진 낡은 유골단지에 채워질 것이다. 그를 위해 슬퍼하는 사람들은 세상에서 버림받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렇게 버림받은 사람들은 언제나 슬픔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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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 김전유경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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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7-25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희극이 언제나 세상을 밝게만 바라보는 것은 아니다.

삽하나 2011-07-27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스카 와일드처럼 살고싶은 요즘입니다. ㅠㅠ.
아아. 이 못난 세상 같으니.

sheknows2 2011-07-28 0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오스카 와일드가 마지막을 그렇게 보낸건...자신의 오만함 때문이었을까요, 아님 인간의 본능 때문이었을까요?

물방울 2011-07-28 01: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문득 언젠가 읽었던 '어느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라는 책 제목이 생각나네요.
희극인지, 비극인지, 행복했는지, 불행했는지 짐작하기 어렵지만, 삶 자체가 모든 것들이
들어간 삶이기에 그도 그 모든것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마음껏 2011-07-28 14: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행복인지 불행인지, 희극인지 비극인지 모를, 아직은 슬픔의 비율이 더 많다고 생각되는 어렵기만 한 삶. 하루하루를 의미있게 덧입혀나가며 살다보면 그 함유비율을 알 수 있게 되겠죠. 그렇게 생각하며 즐겁게 버텨보려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