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의 악함은 견뎌도 약함은 견디지 못한다.

  
정혜윤(CBS 라디오 프로듀서) 

 

  안녕. 별. 별. 별. 요번에 너의 편지는 온통 별 투성이네.

 네 글을 읽고 난 그만 깜짝 놀라고 말았어. 너와 나 사이에 장난꾸러기 요정이 끼어든 걸까? 바로 며칠 전에 내 책이 새로 한 권 나왔어. 『여행 혹은, 여행처럼』이란 제목의 책이야. 그 책에는 태양의 뒷면을 찍은 사진이 있어. 태양의 뒷면을 자세히 보면 작은 점이 하나 있어. 얼핏 보면 한 척의 나룻배 같아 보여. 하지만 그건 우주 왕복선 아틀란티스호야. 그 우주 왕복선은 바로 지난주에 지구로 돌아왔어. 태양의 뒷모습과 우주 왕복선을 함께 보는 것은 내겐 무척 감동적이고 신비로운 일이었어. 마치 영원히 끝나지 않는 여행을 보는 것 같았어. 시작은 미약한 여행. 외로운 여행, 그러나 어떤 꿈을 품은 여행, 끝은 알 수 없는 여행.

 그 책에는 중요한 모티브가 두 가지 있었어. 그런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오스카 와일드의 행복한 왕자야. 이야기는 이렇게 시작돼. 내가 파리의 페르라세즈 오스카 와일드 무덤을 찾았을 때 나는 어떤 부부를 만나. 남편은 아일랜드 사람, 아내는 한국인 입양인. 그 둘은 함께 우산을 쓰고 있었고 해바라기 한 송이를 들고 있었어. 그들은 오로지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려고 파리에 온 거야. 둘만의 비밀스런 하지만 행복한 약속을 가슴에 품고 돈을 모은 지 몇 년 만의 일이야. 그들은 왜 그렇게 오스카 와일드를 만나려 했을까? 그 비밀이 동화 행복한 왕자에 있었어. 너에게 책을 보냈으니 아마 네가 이 글을 읽을 때쯤이면 너도 그 부부의 비밀을 알게 될 거야. 그 둘을 만나고 나서 나는 나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져 봤어. 너에겐 꽃 한 송이 들고 갈 여행지가 있는가? 너의 여행은 너의 삶과 어떻게 연결되는가? 나는 그 부부를 보고 인생과 여행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던 거야. 우리는 왜 여행을 떠날까? 왜 인생을 여행이라고 했을까? 예로부터 내려오는 지혜는 우리는 여행자, 순례자라고 끝없이 속삭이고 있어. 난 그 생각을 하다가 아예 이번 생을 여행자의 태도로 살아보면 어떨까 생각해 봤어. 인생은 여행에게 배울 것이 있어. 그 목록은 마치 별의 목록이 그런 것처럼 무한해. 나는 그 책을 다 쓴 다음에 휘트먼의 이런 시구를 발견했어.  

‘나도 다른 누구도 당신을 위해 저 길을 여행할 수 없다.
당신은 당신 스스로 그 길을 여행해야 한다’  

그래. 바로 이 시구 같은 이야길 난 쓰고 싶어 했던 거야.

 그런데 지금은 『별에서 온 아이』에서 기억에 남아있는 글 중 하나를 소개하고 싶어. 생일을 맞은 스페인 공주 이야기야. 내가 그 이야기를 읽은 지 벌써 많은 시간이 흘렀으니까 지금 내가 하는 이야기가 조금은 틀릴 수도 있어. 하지만 난 내 기억 속의 이야길 들려주고 싶어. 그러니까 공주의 아버지인 왕은 공주를 사랑했으나 그 어여쁜 소녀를 차마 똑바로 볼 수가 없었어. 왜냐하면 공주는 죽어버린 그의 아내. 즉 왕비를 똑 닮았기 때문이야. 공주를 볼 때마다 살아 있는 아내를 보는 것 같아서 왕은 몹시 괴로웠고 그래서 공주를 보려 하지 않아. 대신 공주는 삼촌이 돌봐줘. 그가 왕의 동생인지 형인지는 기억이 나질 않아. 그건 중요하지 않으니 넘어갈게. 공주의 생일이 되자 삼촌은 공주를 즐겁게 해주려고 수많은 지체 높은 가문의 자제들을 부르고 어릿광대 난쟁이도 불러. 난쟁이는 그때까지 숲에 살았기 때문에 공주처럼 아름다운 소녀를 본 적이 없었어. 공주는 난쟁이를 보고 무척 즐거워하며 친절을 베풀어. 내 기억이 맞는다면 공주는 난쟁이에게 장미꽃도 선물하고 궁을 떠나지 말고 내 곁에 머물러 달라고 부탁도 했을 거야. 난쟁이는 그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겠지. 저토록 고귀하고 아름다운 공주가 날 사랑한다니. 난쟁이의 가슴은 기쁨으로 터질 지경이었어. 난쟁이는 공주를 기쁘게 해주려고 온갖 재주를 부렸어. 한참을 깔깔 거리며 웃던 공주는 그래도 금세 싫증이 나서 지체 높은 귀족의 자제들과 어디론가 사라져 버려. 난쟁이는 이 방 저 방 공주를 찾으러 다녀. 그러다가 어떤 넓은 방에 들어가. 그리고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혀. 난쟁이는 그 방에서 끔찍하게 생긴 괴물을 본 거야. 난쟁이는 너무나 무서웠어. 그래서 달아나려고 해. 그런데 그러자 그 괴물도 달아나려 해. 난쟁이는 괴물을 위협하는 동작을 취해봐. 그랬더니 그 괴물도 그렇게 해. 난쟁이는 용기를 내서 그 괴물에게 다가가. 그러자 그 괴물도 그렇게 해. 그 괴물은 난쟁이를 그대로 따라 하는 거야. 그 괴물은 뭐였을까? 바로 거울에 비친 난쟁이 자신이었던 거야. 난쟁이는 어느 순간 퍼뜩 그 사실을 깨달아. 난쟁이는 너무나 슬퍼져. 내가 괴물처럼 생겼다니? 저토록 끔찍하게 생겼다니? 난쟁이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어. (나도 어렸을 때 숟가락에 얼굴을 비춰보다가 저 입이 튀어나온 사람이 바로 나란 말인가 놀라서 쓰러져버릴 뻔한 적이 있긴 있어.) 하여간 난쟁이는 계속 생각해. 그렇다면 공주의 빛나는 미소는 다 뭐였을까? 난쟁이는 수치스러웠어. 난쟁이는 가슴을 쥐어뜯으며 슬픔으로 쓰러져. 그리고 숨을 거두고 말아. 한참을 신나게 놀던 공주는 거울 방에서 쓰러져 있는 난쟁이를 발견해. 공주는 난쟁이가 자신을 즐겁게 했던 것을 기억해. 그리고 누워있는 난쟁이에게 다시 자신을 즐겁게 하라고 명령을 하지. 그렇지만, 난쟁이가 어떻게 그 명령을 따를 수 있겠니? 공주는 화가 나서 삼촌에게 난쟁이를 때려 주라고 해. 그러자 삼촌은 난쟁이의 심장에 귀를 대봐. 그리고는 그 난쟁이 심장이 이젠 공주의 명령을 들을 수 없게 되었다고 대답해. 그러자 공주는 이렇게 말해. 나를 즐겁게 하려는 자는 심장이 없어야 해.

 아까도 말했지만 이 이야기는 내 기억 속에서 조금 변형되었을지도 몰라. 하지만 난 이 이야기를 자주 생각해. 나를 즐겁게 하려는 자는 앞으론 심장이 없어야 해. 그 말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니? 너는 그 심술궂은 공주처럼 말하지 않을 자신이 있니? 우린 다른 사람의 악을 견뎌낼 힘은 가지고 있어도 다른 사람의 심장을 견뎌낼 힘을 가지고 있진 못할지 몰라. 그렇지 않고서야 우리가 명백히 약자라고 판단되는 사람한테 이유 없이 잔인하게 대하는 것을 설명할 방법이 있니? 난 강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이야기, 더 나아가 약자가 약자를 괴롭히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아프고 궁금해. 우리 인간성 안에는 무엇이 있을까? 동쪽별, 정말 우린 다른 사람의 악함은 견뎌도 다른 사람의 약함은 견디지 못하는 걸까?

 노르웨이 테러 사건 이야기와 드라큘라와 북유럽의 뱀파이어 이야길 하려 했는데 결국 꺼내지도 못했네. 난 매번 본선 진출에 실패하는 선수 같구나. 어쨌든 노르웨이의 악당 역시 다른 사람의 심장을 견디지 못한 병에 걸렸을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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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에서 온 아이> 

   오스카 와일드 지음 / 김전유경 옮김  

   펭귄클래식코리아 / 200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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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arover 2011-07-30 17: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난쟁이는 약했던 걸까.

삽하나 2011-07-31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 따라 거울 속의 제 모습이 저를 너무 얕잡아 보는 것 같아 속상하네요

마욤 2011-08-01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많은 생각이 절로 일어나게 하는 한 주 인 것 같습니다. 인간에 대해서 늘 다시 한번 생각하는.... 요즈음엔 더 더욱... 8월 무사히 지나가도록...

마리벨 2011-08-01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 악함도 ㅡ 약함도 다 힘들어요 ㅜ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