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트남 전쟁은 실로 복잡한 전쟁이었다. 이걸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근대사를 알아야 한다.
프랑스의 식민지 시대에 일어났던 많은 민족 독립운동가 중에서 가장 두각을 나타냈던 인물은 응우옌아이꾸옥이었다. 그가 바로 후일 호찌민으로 알려지는 지도자이다.
그는 프랑스로 건너가 선진 문물을 익히다가 모스크바로 들어가 사회주의 혁명의 세례를 받고 1930년에 홍콩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창건했으나 후일 인도차이나 공산당으로 이름을 바꾼다. 또 호찌민은 1941년에 모든 민족주의적 세력을 결집시킨 베트남 독립동맹인 베트민월맹)을 결성한 후, 프랑스와 새로이 진주한 일본군에 대해 투쟁을 한다.(여기서 유래해서 그 당시 한국에서는 북부 베트남을 월맹이라 불렀고, 남부 베트남을 월남이라 불렀으며 베트남 전을 월남전이라 불렀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후, 프랑스를 대신해 베트남을 점령한 일본군은 명목상 안남 왕국의 황제였던 바오다이를 통일 베트남 왕국의 허수아비 황제로 만든 후, 뒤에서 조종하며 전쟁을 위한 식량 공출을 했다. 그러자 국민들은 분노했고 이런 과정에서 일본군과 투쟁하던 베트민의 세력은 크게 성장하면서 민중의 지지를 받았다.
그리고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패망하자, 호찌민과 공산주의자들은 재빨리 행동을 개시해 북부와 중부 지역을 장악한 후, 1945년 9월 2일에 하노이에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선포했다.
그러나 이들의 군사적, 정치적 실력은 충분하지 않았고, 특히 남부에서는 영향력이 약했는데 이들의 독립을 강대국들이 방해했다. 미국은 호찌민이 공산주의자라는 것이 탐탁치 않았고, 프랑스는 식민지를 다시 지배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한 채 무력으로 북부 베트남을 장악한다.
결국 협상은 실패하고 호찌민은 프랑스에 대항해 무력 투쟁을 시작한다. 게릴라전을 펴던 베트민은 보응우옌잡 장군의 지휘 아래 1954년 5월 7일 디엔비엔푸 전투를 벌인다. 전투는 치열하게 전개되었는데 베트민군은 5만 명의 병력으로 프랑스군을 포위했고, 수만 명의 농민들이 등짐으로 중화기와 식량을 날랐으며, 중국에서도 수백 톤의 화물 자동차를 지원했다. 프랑스는 미국에 지원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이를 거절했다.
이 당시 남한의 이승만은 향후 미국과의 군비 협상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프랑스군을 돕기 위한 한국군을 파병하겠다고 미국 측에 제안했지만, 미국 측이나 프랑스 측이나 원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국 프랑스군은 패했다. 3천 명이 사망하고 3천 명 정도가 부상당했으며 8천 명이 포로로 잡혔는데, 포로 중의 반은 60일간 행군하던 중에 사망했다.
이렇게 대승을 거두었지만 베트남의 독립과 통일은 아직도 요원했다. 프랑스는 북베트남에서는 물러났지만, 남쪽의 지배권은 끈질기게 포기하지 않으려 했다. 베트민도 무력으로 남쪽까지 치고 내려갈 실력이 없었기에 협상을 해야만 했고, 결국 1954년 7월 21일, 제네바 협정에 의해 베트남은 17도를 경계로 남북이 분단된다.
2년 후인 1956년 7월에 베트남 전체에 걸쳐 통일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약속했지만, 프랑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총선거를 할 경우 전 국민의 존경과 사랑을 받고 있던 호찌민에 대항할 남부 베트남의 인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한편 프랑스는 이미 1949년 6월 홍콩에 망명 중인 전 황제 바오다이를 불러 들여서 프랑스 연방 내 베트남 왕국의 원수로 추대했다. 이는 허수아비를 내세워 국방과 외교권은 프랑스 정부가 장악하고, 프랑스 군대는 베트남에 기지를 영원히 보유하려는 속셈인 것이다. 바로 이 국가가 나무 베트남, 즉 우리가 월남이라 부르던 나라의 시발점이다.
이처럼 남부 베트남 정권은 탄생부터가 잘못된 나라였다. 자유와 민주라는 가치를 실현하기 위한 나라도 아니었고, 다만 프랑스 식민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지배를 연장한 또 다른 식민지였을 뿐이다. 이렇게 만들어진 남북 분단은 공산주의와 반공의 대립이라기보다는 독립과 외세의 지배라는 대결 구도를 형성했다.
이런 정국은 해방 후의 한국과 비슷했지만 한편 다른 모습도 갖고 이TEk. 베트남에서는 식민국이었던 프랑스가 돌아왔고 그 앞잡이들이 남부에서 계속 지배권을 공공연하게 행사한 반면, 남한에서는 옛 식민국 일본이 패전으로 쫓겨 갔고 북쪽에는 소련군이, 남쪽에는 미군이 해방군이라는 이름으로 진주했다는 점이 다르다. 그리고 후일 남쪽에서 친일 청산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은밀하게 친일파가 세력을 다시 잡았다는 점이 비슷하다.
또한 호찌민과 김일성은 공산주의자고 무력 투쟁을 했다는 점에서 같으나, 호찌민은 프랑스와 미국과 투쟁하는 가운데 공산주의자와 민족주의자 등 모든 민중으로부터 존경을 얻었다면, 김일성은 점령군인 소련군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다른 파벌의 공산주의자, 민족주의자를 누르고 정권을 잡았다.
또 바오다이 황제나 이승만은 자본주의 세력의 지원을 받았으며 부패했고 내치에 무능했다. 옛 식민지 세력들을 등용해서 민족정기를 흐린 점은 같았지만, 바오다이는 옛 식민 지배자인 프랑스의 허수아비였고, 이승만은 일본에 대한 원한이 사무친 사람이었으며 미국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휘둘리지 않는 고집을 갖고 독재를 해서 미국의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이렇게 출현한 정통성이 없고 허약한 남부 베트남의 국가를 프랑스, 미국 등 서방에서 독립국으로 이정했고, 반면에 공산주의 국가들은 북부 베트남, 즉 베트남 민주 공화국을 독립국가로 인정한다. 결국 외세에 의해 분할이 된 것이다. 미국은 서서히 프랑스를 대신해 베트남 남부에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고, 반면에 미국과의 대결을 피하던 소련이나 공산화된 중국 역시 베트남의 통일보다는 분할을 선호했다. 국제사회에서 이데올로기는 다만 명분이었고 모든 결정은 철저히 강대국의 국익에 맞춰 결정된 것이다.
이런 가운데 북부 베트남의 국민은 지도자 호찌민을 믿고 따랐으나 많은 남부 베트남 국민은 허수아비 황제며 프랑스의 괴뢰였던 바오다이를 배척했다. 북베트남에서는 사회 개혁이 진행되고 있는데 바오다이 황제는 사이공에서 5백km나 떨어진 그의 산장에 틀어박혀 호랑이 사냥이나 하고 있었다.
프랑스를 대신해 베트남에 점점 깊숙이 개입하던 미국은 무능한 바오다이 정권에 실망했고, 결국 민족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을 대통령으로 추대하기로 한다. 미국은 응오딘지엠을 남부 베트남의 ‘이승만’으로 만들고 싶어했다. 미국의 지원 하에 응오딘지엠은 1955년 10월, 남부 베트남의 국민투표에서 바오다이를 물리치고 베트남 국가 원수가 되었다.
그러나 미국의 각별한 지원과 민족주의자들의 기대를 안고 출발한 응오딘지엠 정권은 개혁에 실패한다. 북베트남의 철저한 공산주의 개혁에 놀란 남부 베트남의 지배세력은 공산주의를 극도로 증오했고, 그들의 지지를 배경으로 가톨릭 교도이자 철저한 반공주의자인 응오딘지엠은 토지 개혁 등을 통해 식민지, 봉건사회 등의 모순을 타파하지 않은 채, 비밀조직을 동원해 공산주의자는 물론 자신에게 반대하는 학생들, 시민들, 불교도들을 철저히 탄압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베트남 정권은 1959년 북베트남에서 남베트남까지 등뼈처럼 뻗은 쯔엉 산맥에 호찌민루트를 개통해 북에 있던 남쪽 출신 무장 게릴라들을 남쪽으로 침투시키고, 남쪽에서도 1960년 12월 20알, 남부 베트남 정권에 대항하는 민족해방전선이 결성된다.
민족해방전선의 주도 세력은 공산주의자였지만, 이 안에는 민족주의자, 학자, 종교인 등이 많았으며 이들의 목표는 진정한 독립과 민주화였고 공산화가 아닌 민주 연합 정부의 수립이었다. 응오딘지엠 정권은 민족해방전선과 반정부 투쟁을 벌이는 모든 이들을 공ㅅ나주의자로 몰아붙였지만 이들이 모두 공산주의자들은 아니었다.
이런 모순, 갈등, 극단적 대립 속에서 응오딘지엠 정권은 국민들의 지지를 잃어갔고 미국도 실망했다. 결국 군사 쿠데타에 의해 1963년 11월, 응오딘지엠은 처형된다. 이런 상황에서 국민들의 마음은 남부 베트남 정권으로부터 멀어지고 군사적으로도 위험에 처하게 된다.
결국 남부 베트남이 몰락할 것 같자 1964년 8월 2일, 미국은 북부 베트남의 통킹 만을 폭격하면서 선전포고를 하고 본격적으로 군대를 파병했다. 미국은 이미 1956년부터 군사고문단 수백 명을 파견했고, 차차 수를 확대하다가 마침내 본격적으로 군대를 투입한 것이다. 그리고 미국은 베트남이 공산화되면 전 인도차이나반도와 아시아가 공산화된다는 ‘도미노 이론’을 내세우며, 자유세계를 지킨다는 명분으로 한국군을 비롯한 동맹군들의 참전을 종용했다.
이런 와중에도 남베트남 정권은 몇 번의 군사 쿠데타로 엎치락뒤치락했고, 1967년 응우옌반티에우 중장이 대통령이 되는데, 그 또한 강력한 반공저액을 내세우며 독재를 한다.
베트남전은 더욱 가열되기 시작하여 미국이 베트남전에 사용한 폭탄 양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참전국들이 사용한 총량의 3배였다고 한다. 이것은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자탄 640개의 위력에 해당하며, 가공할 화력이었다.
그러나 미군은 이처럼 막강한 화력과 우월한 장비 덕에 전투에서는 이기는 경우가 많았지만, 전쟁에서는 졌다. 처음부터 잘못된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반공 정책이 베트남에서는 잘 먹혀들지 않았다. 한국처럼 먼저 침공당하여 전 국민이 전쟁의 피해를 입고 피를 본 입장이라면 ‘반공’ 이데올로기가 전후에 강력하게 작용할 수도 있었겠지만, 일반적인 남부 베트남 사람들은 전면전을 겪지 않았기에 반공은 호소력이 약했다. 또한 한국의 박정희 군사정권은 독재였지만 그래도 강력한 경제 성장이 성공적으로 추진된 만면, 베트남의 응우옌반티에우 군사정권은 그럴 만한 능력도 없었다. 남부 베트남의 지식인들 눈에 비친 미국은 프랑스에 이어 자신들의 진정한 독립을 반대하는 세력이었고, 남베트남 정권은 미국의 입장을 대변하는 허수아비였으며 부패하고 무능한 정권이었다.
이런 가운데 1968년 1월 30일, 구정을 기해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들은 약 8만의 병력을 동원하여 남베트남 전역에서 1백 개가 넘는 도시를 기습 공격했다. 이른바 구정 공세(테트 공세)였다. 중부의 도시 후에는 25일간이나 베트콩과 북베트남군에 의해 점령당했고, 사이공에도 베트콩들이 출현해 본격적으로 전투가 벌어졌으며, 미국 대사관에도 게릴라 15명이 침입해 총격전이 벌어졌다.
이 구정 공세로 미군 1천1백 명, 남베트남 정부군 2천3백 명 등이 사망했는데, 북베트남 정규군과 베트콩의 피해는 더 심해서 약 4만 명이 전사했다고 한다. 그 결과 베트콩의 전력은 상당히 손실을 입었지만 미국인들은 이런 대공세에 큰 충격을 받았다.
“아니, 그동안 엄청난 돈과 군사력을 투입해 남부 베트남이 제대로 건설되는 줄 알았는데 저것이 뭔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있는 우리의 미군이 왜 저런 곳에서 희생당해야 하지?”
그동안 베트남전에 무지했던 미국 국민은 그제야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베트남 민중이 자신들을 지지하는 줄 알았는데 목숨 바쳐 달려드는 베트콩과 베트남의 현실을 알게 되면서 급기야 반전 여론이 일어났다. 많은 빈민과 흑인이 징집 당했고 상류층이나 중산층들은 대학에 들어감으로써 징병 연기 혜택을 받는 모순적인 제도 때문에 병사들은 회의하기 시작했다. 결국 전쟁터에서 탈영병들이 생겼고, 소대장들을 수류탄으로 박살낸다는 뜻의 프래깅(fragging)이 성행하기 시작했다.
일의 발단은 이런 식이다. ‘왜 이런 전쟁을 해야 하나’하는 회의 속에서 술을 마시고 마리화나를 피우며 장교의 명령에 불복종을 하기 시작한다. 이런 분위기는 점점 중대 전체에 퍼져 나간다. 그러면 군기를 잡으려는 소대장, 중대장의 다그침이 시작된다. 이런 갈등 속에서 병사들이 소대장을 한방에 날려버리는 것이다.
어느 날 작전을 마치고 온 중대원들 90명이 피곤한 상태에서 모두 마리화나를 피우고 있었는데 한 장교가 그것을 보고 집합시켰다. 그가 엄한 군기로 병사들을 다스리려고 하자 오히려 중대원들이 장교를 총으로 갈겨 죽였고 참호 속에 던져버린 후, 장교가 베트콩의 총격으로 사망했다고 보고했다. 중대원들은 공범이었고 모두 입을 다물었다고 한다.
또 베트콩이 침입했을 때나 혹은 침입했다고 소란을 피우는 사이에 평소에 마음에 들지 않던 장교나 상사 등을 해치웠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1천 명 이상의 장교가 휘하 사병들에게 살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되는데, 미 육군 자료에 의하면 1969년에서 1970년에만 프래깅이 563차례나 있었다고 한다. 결국 베트남전에서 8백~1천 번의 프래깅 시도가 있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렇게 미군은 내부에서도 붕괴하고 있었다.
또한 베트남에서 돌아온 군인들은 환영받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사회에서 비난받고 또 정부 측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해주지 않자, 어떤 이는 반전 데모에 분노하고, 또 어떤 이는 반전 데모에 참가해 베트남전의 부당함에 항의했다.
그러다 1971년부터 징병 연기 제도가 사라져서 중산층 젊은이들도 징집될 형편에 이르게 되자, 이들은 영장을 불태우며 징집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 시절 유행하던 히피 운동과 맞물려 많은 미국의 젊은이가 감옥에 갇히거나 외국으로 도피했다.
결국 미국의 국론은 분명하게 분열된다. 이렇게 국민의 지지를 얻지 못할 잘못된 전쟁에서 발을 빼기로 결정한 미국은 1973년 1월에 파리에서 평화협정을 체결한다. 그 당사자는 미국과 남부 베트남 정부, 그리고 북부 베트남 정부와 남베트남의 민족해방전선, 즉 베트콩이었다. 한국군은 1973년 1월에 철수했고 미군도 뒤이어 소수의 고문단만 남긴 채 철수를 단행한다.
그후 미국의 정치 상황은 급변하기 시작한다. 닉슨이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1974년 8월 사임하자, 북베트남 정부는 이런 사태를 예의 주시하면서 미국이 다시 베트남전에 개입하지 않을 거라는 확신을 얻게 된다.
결국 다음해인 1975년 1월, 북베트남 정권은 파리 평화협정을 헌신짝처럼 버린 후, 미군이 개입할 여지를 주지 않기 위해 17도선을 넘어 남부 베트남군을 전광석화처럼 재빠르게 밀어붙였다.
북베트남군은 이 통일 전쟁이 약 2년 가량 소요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남베트남 대통령이 급작스럽게 중부지방을 포기하고 병력을 남쪽으로 빼돌려 전선을 구축하려 하는 바람에 극심한 혼란이 왔다. 그 여파로 남베트남군의 사기가 급격히 저하되면서 방어선은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다. 결국 3개월 만에 사이공은 포위되고, 끝까지 싸울 것이라고 외치던 응우옌반티에우 대통령은 사임한 후 금괴를 갖고 대만으로 도망친다.
그리고 9일 후인 1975년 4월 30일, 북베트남군의 탱크가 대통령궁(독립궁)을 돌파하면서 그 당시 대통령이었던 즈엉반민은 항복했다. 그 후 남베트남에서는 임시혁명정부가 출범했으나 1년 후 북베트남에 의해 통합되면서 1976년 7월 2일 베트남은 공식적으로 통일을 선포하게 된다.
엄청난 피해 끝에 쟁취한 통일이었다. 정확한 통계는 없지만 본격적으로 미군이 투입된 이후 약 11년간의 전쟁 속에서 남베트남 정부군은 대략 22만 4천 명 정도가 사망했고 민간인은 약 41만 5천 명이 사망했다. 그리고 북베트남의 정규군과 베트콩들 모두 합해서 1백 10만 명 이상이 사망했으며 미군은 5만 8천 명 사망, 30만 명 부상, 1,836명이 실종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국군은 약 5천 명 정도가 사망했다.
호찌민은 초창기에 소련이나 중국보다 미국의 인정을 받고 지원 받기를 원해서 독립 전부터 미국 전략 첩보부 OSS와 접촉했다. 그만큼 호찌민의 입장은 절박했다. 늘 자신들을 지배하려 했던 중국에게 기댈 수는 없었고, 또 베트남 독립 당시 소련은 냉담했다.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은 애당초 호찌민을 공산주의자라기보다는 민족주의자로 여겨 상당히 의심했다고 한다.
그러나 미국은 호찌민의 구애를 외면했다. 만약 미국이 좀더 유연하게 호찌민을 받아들였더라면 베트남의 역사는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런 정책은 이데올로기가 휩쓸던 냉전 시대에는 불가능했기에 부질없는 상상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국제정치에서 영원한 동지도, 영원한 적도 없다. 베트남은 통일 후 자신들을 도와주었던 화교들을 추방했고, 같은 공산권 국가인 캄보디아에 침입해서 친베트남 정권을 세웠으며, 또 이를 응징하기 위해 중국은 1978년 말에 베트남을 제한적으로 침공했다.
그리고 한때 총을 겨누고 싸웠던 한국과 베트남은 1992년 12월 22일에 수교했으며, 철천지원수였던 미국은 1994년 2월 베트남에 대한 금수조치를 해제했고, 1997년 4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했으며, 2000년 11월 16일에는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이 베트남을 공식 방문했다. 그리고 현재 한류를 타고 한국의 드라마와 상품은 베트남에서 최고의 인기를 누리고 있다. 참으로 인생무상이고 정치무상이다.
호찌민과 시클로, 27-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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