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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
박세연 지음 / 북노마드 / 2012년 1월
평점 :
절판
내게 있어 컵이나 잔은 그냥 물이나 커피를 담을 수 있는 도구일 뿐이다. 예쁜 컵이 있으면 예쁘네~ 하고 한번 더 들여다 보지만 거기에 크게 매달리지는 않는다. 그런데 누군가는 이 잔에 열광하며 집착할 수도 있다. 이 책에 소개된 골동품들을 보고 있자니 그들의 집념이 이해가 가기는 한다. 누구든 어디에든 꽂힐 수 있는 법이니까.
저자는 여러 잔에 얽힌 이야기들을 소소하게 담아냈는데, 사진으로 찍어놓은 사진보다 일러스트로 그려놓은 그림이 더 예쁠 때가 많다. 본업이 그림을 그리는 것이니 작가님께는 그 편이 더 좋은 것일까?
작가님의 오피스텔 맞은편에 작고 예쁜 카페가 하나 생겼다 한다. 이름은 '제리코'
백마담이라 불러 달라고 하는 도도한 매력의 여사장이 운영하는 이곳에 독특한 손님들이 단골이 되어 모여들었다.
'접다'라는 표현은 누가 어떻게 쓰기 시작한 걸까요?
정확한 표현에 감탄하며 저도 제 마음을 '접기로' 했습니다.
표현에 걸맞도록 우아하게 반만 접으면 좋으련만
꼬깃꼬깃 여러 번 접게 되네요. -55쪽
종이를 접는 것과 마음을 접는 것은 의미가 크게 다른데 둘 다 '접다'라는 표현을 쓰니 어쩐지 닮은 것처럼도 보인다.
제리코의 단골이었던 영국 손님이 한국을 떠나면서 망가진 기타를 두고 갔다고 한다. 마침 기타 배우고 싶다고 한참 조르던 저자가 이 기타를 넘겨받게 되었다.
서툰 솜씨로 기타를 치며 가을에 제리코에서 기타 공연을 하기로 했다.
이제 겨우 코드를 외우기 시작한 시점에서 무모하지만 용감한 도전이었다.
작고 아담한 카페에서 아마츄어들이 열정으로 시작하는 연주회라니, 상상으로도 얼마나 근사한가!
제리코에선 종종 벼룩시장도 열렸다. 옷가지와 구두, 가방, 책, CD 등을 가져와 파는 것이다. 마감녀(번역가)는 읽지 않는 책들을 갖고 나와 권당 천 원에 팔고는 누군가 내놓은 '제주 소년'의 CD를 샀다. 서니 부부는 아름다운 원피스와 구두를, 미에코 상은 파이어킹 그릇 몇 개와 사발처럼 생긴 카페오레잔을 가져왔다. 저자 박세연은 헤어진 남친에게서 받았던 물건들을 처분했다. 백마담이 내놓은 빈티지 원피스는 인기가 없었지만 그녀는 노리다케 그릇 세트를 획득했다며 좋아했다. 그리고 코파카바나 부부는 벼룩 시장 한쪽에 간이 의자를 놓고 앉아 장이 끝날 때까지 기타를 쳤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토요일 오후인가!
마음 맞는 사람들끼리 작은 공간에서 이렇게 서로의 추억과 필요를 나누는 게 참 보기 좋다. 그 자리에 생음악을 제공해주는 예술가까지 있으니 그야말로 금상첨화!
벼룩시장이 있던 날의 풍경이다. 저 아리따운 뒷태의 여인은 누구란 말인가. 제리코 단골 중 하나일 텐데... 설마 박세연 작가님 본인???
뭉터기로 모아놓았지만 저마다의 개성을 자랑하는 그릇들일 것이다.
문득 영화 앤티크가 떠오른다. 원작 만화를 영화로 옮겼는데, 당시 언니가 운영하던 가게 근처에서 촬영을 했다. 진짜 골동품을 가져다가 영화를 찍었는데, 당시 그릇들 보험료가 어마어마했다는 기사가 기억 난다. 두달 동안 반짝 영화를 찍고, 영화 촬영 마치자마자 세트를 모두 허물어서 좀 섭섭했더랬다. 정작 영화 촬영 중에는 근처에도 가보지 못했지만...
커피잔에 꽃잎 두 개 띄워 놓은 게 그 자체로 하나의 그림이다.
차에 쓸 수 있는 꽃을 보관하려면 어떻게 닦아야 하는 것일까?
먼지 많은 서울에서 딴 꽃은 설마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잔을 받친 식탁보도 눈에 들어온다. 이 모든 게 조화를 이루어 멋진 티타임을 만들 것이다.
꽃놀이를 못간다면 이렇게 꽃무늬 찻잔에 꽃이라도 띄우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우리네 집 조명이 너무 환해서 신혼여행 때의 분위기가 안 산다고 김정훈 교수가 방송해서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정말 너무 환한 불빛에만 익숙해진 것이 아닐까. 저렇게 은은한 불빛 안에서도 충분히 적응하고 살 수 있는데 과도하게 밝은 불 아래에서 과하게 드러난 얼굴에 괜히 불편해하는 것은 아닌지... 책 읽는 데에 문제만 없다면 저런 정도의 조명도 좋아 보인다. 기왕에 스탠드는 가구 색과 어울리는 걸로 고르고!
제리코 백마담과 함께 강릉으로 떠났던 커피 여행에서 찍어온 사진이다. 저토록 파란 하늘과 커피라는 글자가 참 잘 어울린다.
세번째 사진은 이 책의 앞뒤 속표지 그림인데 파란 바탕에 은색 그림이건만 사진을 찍으니 저리 어두운 색으로 변하고 말았다.ㅜ.ㅜ
그림 그리는 사람답게 물감 풀어놓은 접시들을 포착했다. 알록달록 색색이 물감들이 예쁘다. 저 색깔 속에서 이토록 예쁜 색깔과 질감의 그림들이 나온 것이구나. 유에서 또 다른 유를 창조해 냈다.
파란 하늘과 빨래의 조화도 신선하다. 저렇게 바닷가에 빨래 널어놓으면 소금기 묻은 채로 건조되는 게 아닐까 싶은데, 그래도 바람이 있으니 쓸만한 거겠지?
여행지에서 만난 한국인의 친절함에 반해 한국에 들어왔던 프랑스 청년 노엘은, 악덕 사장 밑에 취업했다가 유치장에 일주일 갇히는 신세가 되어 분개했다. 노엘은 일자리를 구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고, 거기서 한국인 피앙세를 만나 프랑스로 갔다. 거기서 게스트하우스를 차린다고...
노엘에 얽힌 이야기, 노엘의 친구가 한국 와서 팥빙수에 꽂힌 이야기, 그리고 저자의 유학 시절 이야기, 기타 등등 제리코 단골 손님들이 여러 나라에서 겪은 이야기들이 소소하게 소개되었다.
이 부분을 읽고 외출했다가 올해 들어 첫 팥빙수를 먹었다. 팥이 너무 적은 게 흠이었지만 녹차빙수를 맛있었다. 올 여름이 기다려진다면 그것은 순전히 팥빙수 때문일 것이다.
제리코에 드나드는 사람들 이야기가 참 좋았는데, 안타깝게도 제리코는 경영난을 이기지 못하고 문을 닫았다. 문 닫기 전 마지막 행사로 기타 연주회를 가졌다. 축복의 시간이 될 줄 알았는데 고별의 연주가 되다니... 참으로 알 수 없는 우리네 인생사다.
마감녀는 작별의 편지를 읽었고, 써니 부부는 시를 낭송했다. 오보에를 연주하는 이도 있었고, 샹송을 노래하는 이도 있었다고...
음악과 차와 향기가 가득한 곳에 서로의 추억을 묻었다. 내가 다 아쉽다.
내가 유일하게 집착을 보인 컵이 있다면 바로 저 머그컵들이다.
꼭 책 사면서 받아야 하고, 색깔도 맞춰야 했던 나의 집착들.
작년 겨울부터 내내 저 머그컵을 쓰고 있다.
안으로 오목한 컵이 사용감은 더 좋지만, 색깔만은 최고로 마음에 든다.
이 책에 소개된 섬세한 컵과 잔에는 못 미치지만 내게는 의미있는 컵들임에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