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 거리에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새벽 거리에서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양억관 옮김 / 재인 / 2011년 9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새벽 거리에서 / 히가시노 게이고 / 재인 (2011) 

히가시노 게이고의 책을 다 읽은 것은 아니지만, 그의 소설을 읽을 때마다 느껴지는 가장 큰 정서는 놀랍게도 따뜻함입니다. 참혹한 살인사건들이 마구 등장하는 스릴러와 미스터리의 대가의 작품 속에서 따뜻함이 느껴진다니. 제가 변태거나 작가가 변태인 걸까요? 아니면 아예 둘 다 변태인 것일까요? 안타깝게도, 아니 다행히도 그렇지는 않습니다. 이토록 사랑 받으며 널리 읽히는 걸 보면 저 말고도 많은 분들이 이러한 느낌을 받은 듯 하니까요.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그의 '잔인무도한' 작품을 읽으면서 이처럼 기묘한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일까요?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단순하게 말씀드리자면, 보편적인 인물들이 등장해 보편적인 감정을 건드리는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처럼 보편적인 인물과 사건들의 중심 키워드는 '평범함'과 '가족'입니다. 이 중 좀 더 중요한 건 물론 가족입니다. 다른 많은 추리소설들에서도 흔히 평범한 소시민이 뜻하지 않게 사건에 휘말리면서 이야기가 시작되곤 하니 '평범함'을 게이고만의 특별함이라고 하긴 조금 힘든 것이지요. 가족 또한 그렇지 않느냐고 반문하실 수도 있겠지만, 게이고가 가족을 이야기 안에서 활용하는 방법은 다른 작가들의 그것과는 조금 차이가 있어 보입니다. 솔직히 그의 전작을 모두 읽은 것이 아니기에 성급한 일반화일수도 있겠지만, '백야행'과 '유성의 인연', 호숫가 살인사건'등 적어도 제가 읽은 작품들 속에서는 이러한 공통점을 쉽게 찾을 수 있었기에 어느 정도는 타당성이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가족. 네 그렇습니다. 게이고의 작품에서 모든 비극의 출발은 가족이며, 사건을 파헤치다보면 밝혀지는 비밀 또한 대부분 가족 내부의 문제에서 연유한 것입니다. 그렇게 모든 갈등의 근원이자 파탄의 원인이 가족인 것이지요. 그러나 반대로 생각해보면 이러한 갈등과 파탄이 가능한 것은 그들이 서로 사랑하며 행복한 일상을 공유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즉, 지키고 싶을 만큼, 잃고 싶지 않을 만큼 그들의 일상은 (가족을 중심으로) 안정되고 평화로웠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어떠한,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그 행복과 평화가 깨어진다면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이 클 수 밖에 없고 그로 인한 상처와 충격 또한 어마어마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백야행'이나 '유성의 인연'이 바로 그러한 유년의 상처를 보듬으며 치유하는 과정을 담은 과거에 방점이 찍힌 이야기라면, '호숫가 살인사건'은 구성원들(부모)의 또다른 구성원(자녀)에 대한 과도한 사랑과 욕심 때문에 가족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주는 현재에 방점을 찍은 이야기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이 또한 대단한 차이점이라 할 수 없습니다. 두가지 경우 모두 현대 일본사회의 가족해체 문제를 다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즉, 게이고의 작품 속에서 가족은 공히 플롯 자체이자 캐릭터 자체, 즉 이야기 자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는 '새벽 거리에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불륜을 소재로 한 이야기라면 남녀 사이의 집요하고 끈적한 치정극이 아닐까, 생각하기 쉬운데 너무나 게이고 답게도 전혀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게이고는 불륜이라는 소재도 철저히 가족 중심으로 풀더군요. '새벽 거리에서'는 주인공인 유부남 와타나베와 아키하의 불륜이 주가 아니라 그 두 주인공을 둘러싼 가족이 주인공인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 중심에는 물론 15년 동안 범인이 밝혀지지 않은 의문의 살인사건이라는 중심플롯이 존재하지만, 이 역시 소설의 중반쯤 되면 가족을 이야기하기 위한 하나의 장치에 불과했다는 걸 알 수 있습니다. 아버지의 불륜과 그로 인한 엄마의 죽음, 그리고 불륜상대인 여비서의 죽음...그렇게 와해되어버린 아키하의 가족. 아이러니하게도 그런 아픔을 간직한 채 성장한 아키하에 의해 무너질 위험에 처한 와타나베의 가족. 소설은 아키하와 와타나베의 이 '위험한 사랑'을 통해 과거의 가족은 어떻게 무너져갔고, 현재의 가족 또한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어떻게 무너져 가는지를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아마도 작가는 전통적인 의미에서의 가족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치는 아키하와 와타나베의 모습을 통해 개인의 솔직한 욕망 발현이라는 현대적 가치와 가족과 공동체의 유지라는 전통적 가치 사이에서 방황하는...현대인이 되지 못한, 근대인으로써의 현대인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요? 물론 그의 소설의 끝이 항상 전통적 가치로의 회귀, 즉 안정과 평화를 되찾으며 끝이 난다는 것은 작가 또한 그러한 부딪힘과 혼란의 끝에서 여전히 전통적 가치를 수호하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는 근대인이라는 반증일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가 느끼는 따뜻함이란 바로 이러한 작가의 '보수성' 때문일 것이며, 이를 따뜻하다고 느낀다는 점에서 우리들 또한 적어도 생활적인 관점에서는 여전히 현재가 아닌 과거에 머물러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겉으로는 파편화된 개인, 차가운 도시인처럼 보이지만 속으로는 여전히 가족과 공동체의 사랑과 관심을 원하고 이제는 돌아올 수 없는 그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는 것이 바로 저이고 여러분인 것입니다. 작가는 바로 그걸 건드린 것이고, 우리는 거기에 자신도 모르게 반응하며 환호하는 것이지요. 이는 좋고 나쁘고의 문제, 혹은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닙니다. 도시를 사는 현대인이 가질 수 밖에 없는 모순이며 양면성인 것입니다.  

가볍고 재밌게 읽을 수 있는 장르소설 한 편 읽고 쓸데없는 말이 길었네요. 언제나 평균 이상의 재미를 보장하면서도 이처럼 간단치 않은 생각거리까지 던져주는 게이고의 이야기, '새벽 거리'에서 였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