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
장하준 지음, 김희정.안세민 옮김 / 부키 / 2010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지금 한국의 '통큰'이나 '착한'이라는 수사는 본디 사전적 의미와 다르다고 봐야할 것 같다. 거대 할인점을 중심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이들 수사는 말하자면, '비용 대비 효용' 혹은 '인풋 대비 아웃풋'이 크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비자들 역시 이런 수사에 쉽게 넘어간다. 당장 가격이 싸거든. 이만큼 소비 욕망을 자극하는 것도 드물다. 

 

시장주의가 만연한 사회에서, 저렴한 가격 혹은 가격 할인은 소비자의 이성을 마비시킨다. 본능적으로 소비 욕구가 피어난다. 거칠게 말해서 섹스나 술, 마약이나 마찬가지다. 더구나 '통큰'이나 '착한' 등의 수사는 자극의 강도를 한층 높인다. 할인점들은 유통혁명이니 가격혁명이니, 택도 아닌 말을 써서 자신들의 싼 가격을 획기적인 것으로 포장한다.

 

술이나 담배, 혹은 마약에 중독되는 것처럼 저가에 마음을 뺏기면 다른 요인들은 마음에서 지워진다. 왜 이것이 싸고 저렴할까, 에 대한 생각을 않는다. 가격이 싼 만큼 누군가의 몫이 줄어든다는 사실을 잊는다. 유통 과정의 누군가가 고통을 당하거나 싼 가격으로 인해 누군가가 피해를 받을 것이란 생각에 이르지 못한다. 

 

물론, 그 피해가 거대 할인점 당사자인 경우는 '절대' 없다. 그들은 절대 손해를 보지 않는 슈퍼갑이다. 소비자가 갑 아니냐고? 에이, 당신의 (마트)소비 형태를 보라. 당신의 욕망이 온전하게 작동하는 것인지, 마트가 진열해 놓은 상품의 유혹이 더 강한지. 그러니 마트 갈 때의 목표 상품만 사오는 경우가 있던가? 그들은 소비자 앞에선 갑임을 숨기지만, 우리의 욕망을 조정한다는 점에서 그들은 갑이다.

 

거대 마트는 모든 것을 공산품으로 전락시킨다. 저가를 불신했던 과거와 단절시켰다. 내구성과 장인을 중시하던 전통도 지워버린다. 이것은 다른 문제를 차례로 유발한다. 싼 가격을 위해 노동력이 싼 지역(국가)로 생산라인을 돌림으로써 지역사회의 황폐함을 유발한다. 싼 가격에 납품받기 위해 생산업체에 비용을 전가한다. 자연적으로 그것은 구조조정이나 임금의 하향조정을 부른다. 부채는 늘고 소득은 주는 악순환. 배 부르는 것은 오로지 거대 마트다. 때론 상품이 어디에서 어떻게 오는지도 지운다.

 

장점도 일부 존재하겠지만, 거대 마트는 신자유주의의 첨병이다. 단순히 재래시장을 죽이는 존재로서가 아니라, 그곳엔 신자유주의의 작동시스템이 축약돼 있다. 장하준은 '통큰'의 문제와 관련해, 사회적 합의를 거치지 않은 점 등을 들었다. 즉, 복지국가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복지정책이 잘 돼 있었다면, 충분히 좋은 타결을 볼 수도 있었고, 사회적으로 추가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될 문제임을 지적한다. 문제가 생기면 세금을 통해 희생 당한 사람들에게 재기의 기회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복지정책은 그러므로 노동자를 위한 파산법이다. 기회가 있거나 주어진다는 것만으로도 사람들은 관대해지고, 사회적으로도 비용이 덜 든다.

 

그러나 부를 장악한 대부분의 기득권은 그것까지 생각하지 않는다. 복지국가는 그들의 기득권을 위협하는 무엇으로 간주한다. 아마도, 함께 잘 살기 싫은 거겠지. 잘난 맛에 살아야 하는데 말이지.  

 

장하준의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경제(학)의 위키리크스다. 폭로랄 것도 없다.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하거나 사유가 미치지 못한 부분을 건드린다. 혹은 잘못 알고 있는 부분에 대한 수정을 요구한다.

 

물론,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가 완벽한 책이라는 것은 아니다. 책의 미덕을 꼽자면, 사유를 촉발한다는 것이다. 지금의 경제 체제는 우리 모두를 위해 바람직한 것인가. 쉽게 말해 미국식 자본주의, 약육강식과 무한경쟁으로 대변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관에 메스를 댔다. 좀 더 까놓고 말하자면, '돈 넣고 돈 먹기'식의 '무조건 돈만 많이 벌면 미덕'이라고 강요하는 '팍스 이코노미카'(모든 것은 돈으로 통한다)의 거짓을 폭로한다.

 

경제학자로서 당연한 제기다. 무릇, 경제(학)는 '모두가 부유하게 사는 것'이 아니라, '누구도 가난하지 않는 것'에 초점이 맞춰져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대한민국 사회는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체제의 도래와 함께, "부자 되세요"라는 주술이 장악했다. 죽지도 않았건만, 경제는 늘 죽어있던 존재였고, 알맹이가 없음에도 "경제를 살리겠다"는 구호를 내건 작자를 대통령으로 꼽기까지 이르렀다.

 

신자유주의(시장주의)의 '돈질'은 이런 것이다. 피자를 시키면, 30분이 표준이 된 마냥, 배달을 완료하겠다는 다짐. 결국 그것은 피자배달원의 죽음을 불렀다. 속도전과 성과 낚시질 시스템을 내포한 신자유주의의 흉포함이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는 그래서, 비밀에 대한 폭로가 아니다. '속지 마, 죽지 마, 저항해야 해'라는 이야기를 품고 있다. 기득권의 알맹이 없는 '경제' 논리에 더 이상 속고만 살지 말고, 의심도 해보고, 경제시민으로서 권익을 지키자는 쪽이다.

 

장하준은 자본주의를 긍정한다. '수많은 문제점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가장 좋은 경제 시스템'이라고 믿는다. 다만 그는 지난 30여 년간 세계를 지배한 특정 자본주의 시스템, 즉 자유시장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문제점을 지적한다. 그것은 부제가 설명한다. '더 나은 자본주의를 말하다.'

 

시장주의는 자본과 이에 결합한 경제학자들이 권력과 손잡고 만든 체제다. 번지르르, 이보다 더 좋은 것이 없는 줄 알았다. 미국은 승승장구했으며, 세계는 풍요를 보장받은 줄 알았다. 그러나 2008년의 금융위기에서 30년 신자유주의 체제는 얼마나 속이 곪아있는지를 드러냈다. 번지르르한 동안 피부인줄 알았으나 과도한 분장이었다. 클렌징 한 번 제대로 하지 않은 채 겹분칠만 한 떡칠 화장술.   

 

그러니 장하준은 청정 클렌징 폼을 뿌린 정도다. 근본적인 문제 해결은 아니다. 이제부터 제대로 알아보자는 사유의 떡밥을 던진 셈이라고나 할까. 성찰이 필요하다는 지적으로 읽어도 되겠다. 신자유주의가 어떤 분칠을 했는지 파악하면서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다.

'나는 어떤 사회에 살고 싶은가?'

'사회적 불평등으로 불안에 떨어야 하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비교적 평등하게 나누고 사는 사회에 살고 싶은가?'

 

책은 시장이 만능이라고 배웠거나 강요받은 자들에게, 그 원칙을 버리자는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장하준이 내세운 근거가 그 원칙에 금이 가게 했다면 성공적이겠다. 그래도 그 원칙을 버리지 못하겠다고 꽁꽁 자신을 가둔다면, 글쎄 그는 시장근본주의자겠지. 혹은 자신의 자본 기득권을 놓기 힘든 사람이거나. 이렇게 규정하는 나도 폭력적일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이라도 세계를 퇴보시키고 재앙의 구렁텅이로 내몰았던 원칙들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다시 예전과 비슷한 대참사들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또 빈곤과 불안으로 고통받는 수십억 인구(개발도상국만 이런 상황을 겪고 있는 것은 아니다)의 처지를 개선할 수 있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게 될 것이다. 이제 불편해질 때가 왔다.(p.341)

 

장하준의 얘기처럼 자유시장은 정치적으로 정의되는 것일테다. 정부가 개입하지 않은 순정한 '자유시장'은 없다. FTA(자유무역협정)가 '자유'라는 말을 달고 있다고, 그런 순진한 착각은 하지 말라. 그 비준을 둘러싸고, 정치가 개입하는 현장을 당신은 끊임 없이 봐 왔잖나!

 

FTA를 하지 않으면 무역을 하지 않는 것처럼, 과거 조선시대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펴는 것처럼 호도하는 자들이 있다. 그것은 자신들의 기득권을 더욱 키움과 동시에 인민들을 공포에 몰아넣고 겁주려고 하는 소리다. 알다시피, 충공(충격과 공포)는 그들의 대표적인 기득권 유지 수단이잖나.

 

부디, 생각을 해야 한다. '통큰'이나 '착한' 뒤에 숨은 것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은 말해주지 않는다. 말하고 싶은 것만 내뱉고, 자신들의 진짜 의도는 숨긴다. 우리의 욕망은 그래서 진짜 우리의 것이 아닌 경우가 허다하다. 실은, 통이 밴댕이 소깔딱지만큼 작고 졸렬해서 그들은 '통큰'이라는 수사로, 그들 자신을 감춘다. 착하지 않아서 그들은 '착한'이라는 수사를 강조한다. 정말로 통크거나 착하다면, 그들이 직접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기 마련이다.

 

아직, 진짜 위기는 오지 않았다.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선 23가지만 말했으니까. 이 책을 통해 색안경을 벗었다면, 우리는 23가지 외에도 그들이 말하지 않는 것을 찾을 수 있다. 아파도 현실을 직시할 때만 우리에겐 진짜 '자유'가 찾아올 것이다. 지금이 위기라고 절감할 때, 가장 힘이 되는 위로는 역설적이게도 '지금보다 더 큰 위기가 올 날만 남았다'는 인식이다. 왜냐고? 간단하다. 지금이 덜 위기에 처해 있어서 더 큰 위기에 대비해 단련하기 좋은 때니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이해하고 내가 말하는 ‘경제 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적극적으로 행사해서, 의사 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에게 올바른 길을 선택하도록 요구하는 데에는 고도의 전문 지식이 필요하지 않다.… 단, 한 가지 전제 조건은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가 씌워 놓은 장밋빛 색안경을 벗어 달라는 것이다. 이 색안경을 쓰고 보면 온 세상이 단순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러나 이제 안경을 벗고 냉혹한 현실을 직시해 보자(p.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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