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 왔던 기술--'열등 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Herero, 남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사는, 반투어를 쓰는 종족)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을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 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A. L. von Trotha) 장군은 1904년 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단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스타프 장군은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설명하였다. "아주 철저하게 한 달 간에 걸쳐 사막 지역을 봉쇄하여 절멸의 작업을 완수했다. . . 사람들이 그르릉거리며 죽어가는 소리와 그들이 내지르는 미친 듯한 분노의 비명이. . . 무한대의 장엄한 침묵 속에 울려 퍼졌다." 나아가 스타프 장군의 설명은 "판결은 시행되었고, 더 이상 헤레로족은 독립된 인종이기를 멈추었다"고 보고한다.

스타프 장군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성과였다. 군대는 전국민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약 8만 명의 인간들--가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1881년과 1899~1902년 동안 트란스바알의 금과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보어인과 영국군 간에 벌어진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2

스타프 장군은 반란의 원인을 '헤레로족의 호전적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헤레로족은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자인 새뮤얼 마헤레로(S. Maherero)는 20년도 넘게 독일인들과 하나하나 조약을 맺어나갔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토지의 대부분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인디언들과 맺은 조약에 구속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독일인들 역시 고등 인종으로서 원주민들과 맺은 조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세기 전환기에 있었던 독일의 이주 계획은 원주민들이 가치가 있는 토지를 포기하는 것이 전제였다. 그러므로 반란은 '헤레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로 환영을 받았다.

영국인, 프랑스인 및 미국인들이 대학살을 변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주장이 독일어로도 표현되었다. 파울 로르바흐(P. Rohrbach)는 베스트셀러 저서인 [세계의 독일 사상] (German Thought in the World, 1912)에서 이렇게 썼다. "가치 있는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존재물들은 인종이든 개인이든 상관없이 생존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로르바흐는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 이주 문제를 담당하는 수장으로 있을 때 식민 철학을 배웠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부족의 보존이. . . 위대한 유럽 민족들과 백인종 일반의 확산보다 인류의 미래에 더 중요하다고 잘못된 철학이나 인종 이론이 아무리 떠들어도 지각 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원주민이 고등 인종을 위해, 즉 고등 인종과 그 자신의 진보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법을 배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도덕적 생존권을 획득한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야만의 역사] 한겨레신문사 2003 (2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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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칸다하르]를 촬영하던 어느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 팀은 손전등을 비추며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곳곳에 마치 사막에 버려진 양떼처럼 무리 지어 죽어 가는 난민이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콜레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볼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러나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사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면서 나는 자신이 무엇인가 먹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 .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관련해 UN에서 인도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말 호세인 박사가 2000년 여름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10년 동안을 계속해서 UN에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말했다. . .

불법 이민자로 가득 찬 자볼 근처의 한 난민촌에 갔을 때였다. 그곳은 난민촌인지 감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기아를 피해서 혹은 탈레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친 아프간 인은 다 수용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모두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절차 같았다. 어떠한 이유든 불법 입국자로 입국이 거부당한 사람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아로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거기서 영화에 등장할 엑스트라를 골랐다. 난민촌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 예산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 주일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한 달 된 아기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은 어린이들로 어머니의 품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기절해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울면서 빵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당국은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예산이 승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난민의 수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자신의 자연, 역사, 경제, 정치 그리고 이웃의 몰인정에 의해 파괴된 한 나라의 이야기이다.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된 한 아프간 시인은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다하르] 삼인 2002 (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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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5-0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아프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군요 ...

killjoy 2004-05-1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맞습니다.
 

《녹색평론》제75호 2004년 3-4월호    

 

  새로운 미국의 세기

   아룬다티 로이

 

  2003년 1월 우리들 수천명은 전세계에서부터 브라질의 포르투 알레그레에 모여 "또다른 세상은 가능하다"라고 되풀이하여 선포하였습니다. 포르투 알레그레에서 북쪽으로 수천마일 떨어진 워싱턴에서 당시 조지 부시와 그의 참모들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프로젝트는 세계사회포럼이었고, 그들의 프로젝트는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라고 명명했던 계획을 구체화하려는 것이었습니다.

  몇년 전이라면 사람들이 이런 얘기를 귀엣말로만 속삭였을 유럽과 미국의 대도시에서도 지금은 공공연하게 제국주의의 이점과 무질서한 세계를 단속할 강력한 제국의 필요성에 대해 떠들고 있습니다. 새로운 사절단들은 정의를 팔아 질서를, 존엄을 팔아 규율을, 그리고 나아가 어떤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패권을 얻고자 합니다. 때때로 우리들 중의 누군가는 다국적 미디어가 마련한 소위 중립적이라는 토론장에서 이런 이슈에 대해 논쟁하도록 초대되기도 합니다. 제국주의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는 것은 마치 강간에 대해 찬반토론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것을 진정 그리워하기라도 한단 말입니까?

  어쨌든 신제국주의가 이미 우리에게 닥쳤습니다. 신제국주의는 과거 우리가 알던 제국주의의 최신식 모델입니다. 역사상 처음으로 반나절이면 전세계를 쓸어버릴 수 있는 무기로 무장한 한 제국이 단극적인 경제적·군사적 헤게모니를 완성하였습니다. 그 제국은 각기 다른 시장의 문을 쳐부수기 위해 다른 무기들을 사용합니다. 신이 돌보는 이 지구상에서 미국의 크루즈 미사일과 국제통화기금(IMF)의 수표장이라는 두 십자망에 걸리지 않는 국가는 없습니다. 신자유주의의 포스터를 돌리는 전단팔이 소년이 되고 싶으면 아르헨티나가 그 모델이 될 것이고, 신자유주의의 망나니가 되고자 한다면 이라크가 그 예가 될 것입니다. 제국의 입장에서 볼 때 지정학적·전략적 가치가 있거나, 어떠한 규모건 시장이 존재하거나, 또는 사유화할 기간시설이 있거나, 혹은 설마 싶지만 석유, 금광, 다이아몬드, 코발트, 그리고 석탄과 같은 값어치가 나가는 자연자원이 있는 가난한 나라는 어느 나라든지 제국이 시키는 대로 하든가 아니면 제국의 군사적 목표물이 되어야 합니다. 자연자원 매장량이 풍부한 나라들이 가장 위험합니다. 이들이 자국의 천연자원을 기꺼이 기업기계들에게 내놓지 않는 한 사회불안정이 조성되거나 아니면 전쟁이 일어날 것입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전부가 아닌 이런 새로운 제국의 시대에서는 관련 기업의 경영자들이 외교정책 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도록 허용되고 있습니다. 워싱턴에 있는 '공공 청렴 센터'에 따르면 적어도 부시 행정부 내 '국방정책위원회' 위원 30명 가운데 아홉명이 2001년에서 2002년 사이에 760억달러에 달하는 군 관련 계약이라는 선물을 받은 대기업에 연루되어 있습니다. 전 국무장관 조지 슐츠는 '이라크 해방위원회'의 의장이었습니다. 또한 슐츠는 벡텔그룹의 중역으로 재직하고 있습니다. 슐츠는 이라크에서 전쟁이 일어날 경우 '이해관계의 상충'에 대해 질문을 받고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는 벡텔이 특별히 어떤 이익을 얻게 될지 잘 모릅니다. 그러나 무슨 할 일이 있다면 나는 벡텔이 그런 일을 수행할 수 있는 기업이라고 봅니다. 그러나 아무도 거기서 뭔가 이익을 얻는 것이라고는 보지 않을 겁니다." 그러나 벡텔은 2003년 4월 이라크 재건사업을 위한 6억8천만달러짜리 계약에 서명하였습니다.

  이런 식의 야만적인 청사진이 남미와 아프리카, 그리고 중동과 동아시아에서도 계속해서 사용되고 있습니다. 수백만명의 목숨이 그 대가로 치러집니다. 제국이 일으킨 전쟁은 항상 정의를 위한 전쟁이 됩니다. 이것은 대부분의 경우 기업화한 미디어의 역할 덕분입니다. 기업화된 미디어들이 그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를 지지하는 정도만이 아니라는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들 자체가 바로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입니다. 이것은 도덕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구조적인 것이며, 매스미디어가 작용하는 경제원리에 본질적으로 내재된 것입니다.

  적절하게도, 대부분의 국가는 끔찍한 내부비밀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종종 미디어가 거짓말을 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것을 강조하고 어떤 것을 제쳐둘지 편집만 잘하면 됩니다. 예를 들어, 인도가 정의를 위한 전쟁의 목표물이 되었다고 가정해봅시다. 1989년 이래 인도 방위대가 대부분이 회교도였던 약 8만명의 사람들을 카슈미르 지역에서 살해한 사실이 있습니다(평균적으로 일년에 약 6천명씩 죽인 것이지요). 또 2002년 2월과 3월에는 2천명이 넘는 회교도들이 구자라트 거리에서 살해되었고, 여성들은 윤간을 당했으며, 아이들은 산 채로 화형되었고, 그리고 경찰과 행정당국이 지켜보고, 때로는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있는 상황에서 약 15만명이 자신의 집에서 쫓겨난 사실이 있습니다. 이런 범죄에 대해 그 누구도 처벌받지 않았고, 이것을 지켜본 정부가 다시 재선되었습니다. 이 모든 사실들은 전쟁을 부추기려는 국제신문들의 헤드라인을 장식할 완벽한 기사거리가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그 다음으로 크루즈 미사일이 우리의 도시를 겨냥할 것이고, 가시철망이 우리 마을을 둘러싸고, 미군 병사들이 우리의 거리를 순찰하고,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나렌드라 모디, 프라빈 토가디아, 혹은 우리의 또다른 고집쟁이들도 사담 후세인처럼 미국에 의해 감금되어, 머리에 이가 있는지 없는지, 이빨을 때웠는지 어떤지 체크당하는 모습이 텔레비전의 황금시간대에 방영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장이 열려있는 한, 그래서 엔론, 벡텔, 할리버튼, 아서 앤더슨과 같은 다국적기업들이 우리의 기간시설을 마음대로 차지하고 우리의 일자리를 뺏어갈 수 있는 한, 민주적으로 선출된 우리 지도자들은 아무 두려움 없이 민주주의와 다수결주의, 그리고 파시즘 간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어놓을 수 있습니다.

  인도정부가 비동맹이라는 자랑스러운 전통을 겁에 질려 기꺼이 버리고,?완벽한 동맹국 되기'의 줄에서(최신 유행어로는 이것을 '타고난 동맹'이라고 하고, 인도, 이스라엘, 그리고 미국을 '타고난 동맹국'이라 부르는데) 서둘러 선두를 차지하려 함으로써, 인도정부는 그 정당성을 훼손하지 않고도 억압적인 정권이 되었습니다.

  정부의 희생자는 정부에 의해 죽거나 투옥된 사람들만이 아닙니다. 쫓겨나고 박탈당하고 평생에 걸친 기아와 궁핍의 형을 선고받은 사람도 그 숫자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개발 프로젝트로 수많은 사람들이 추방되었습니다. 과거 55년간 대형댐 공사만으로도 인도에서는 3천3백만에서 5천5백만명이 자신의 삶터로부터 쫓겨났습니다. 이들에게는 정의에 호소할 방책이 없습니다. 지난 2년 동안 인도 경찰이, 대부분 아디바시(토착민, 빈민)와 달리트(불가촉천민)로 된 평화로운 시위군중에게 총을 쏜 일련의 사건들이 있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특히 달리트와 아디바시 공동체에 관해 말한다면, 이들은 숲을 침입했다고 해서 죽임을 당했고, 또 댐, 광산, 철강공장, 그리고 다른 개발 프로젝트로 인한 훼손으로부터 숲을 보호하려고 했을 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거의 대부분의 경우 정부는 경찰의 총기발사에 대해, 발포가 폭력행위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말하는 전략을 썼습니다. 총을 맞은 사람들은 즉시 무장폭도라고 불려졌습니다.

  인도 전역에 걸쳐 광부를 포함한 수천명의 무고한 사람들이 '테러방지'라는 이름 아래 체포되었고, 재판 없이 무기한 감옥에 투옥되었습니다. 대테러 전쟁의 시대에는 빈곤이 교활한 방식으로 테러리즘과 연결됩니다. 다국적기업이 주도하는 세계화 시대에는 가난이 범죄가 됩니다. 빈곤이 심화되는 것에 대한 저항이 바로 테러리즘이 됩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의 대법원은 파업에 돌입하는 것도 범죄라고 말합니다. 물론 법원을 비판하는 것도 범죄입니다. 그들은 출구를 봉해버렸습니다.

  과거의 제국주의처럼 새로운 제국주의의 성공도 제국에 봉사하는 부패한 현지 엘리트들의 네트워크에 달려있습니다. 인도 엔론사의 더러운 이야기는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마하라쉬트라 주정부가 인도 전체 농촌개발 예산의 60퍼센트에 달하는 이익을 엔론사에게 제공하는 전력 구매 약정에 서명하였습니다. 단 한개의 미국기업이 약 5억 인구를 위한 기간시설 개발비에 맞먹는 이익을 보장받은 것입니다.

  과거와 달리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은 말라리아나 설사, 혹은 조기사망의 위험을 무릅쓰고 적도를 걸어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새로운 제국주의자들은 전자메일로 임무를 수행합니다. 옛날 제국주의의 노골적인 인종주의는 구식이 되었습니다. 새로운 제국주의의 초석은 새로운 인종주의입니다.

  새로운 인종주의에 관한 가장 좋은 우화가 바로 미국의 '칠면조 사면(赦免)'이라는 전통입니다. 1947년 이래 매년 '전미(全美) 칠면조 연맹'이 추수감사절을 위해 미국 대통령에게 칠면조 한마리를 선물합니다. 매년 관대한 예식을 펼치며 대통령은 이 특정 새를 살려줍니다(즉, 다른 놈을 먹습니다). 대통령의 사면을 받은 뒤에 이 선택된 새는 버지니아에 있는 프라잉팬 공원에서 천수를 다하도록 이송됩니다. 추수감사절을 위해 사육된 나머지 5천만마리의 칠면조는 추수감사절날 잡아먹습니다. 대통령 사면용 칠면조 계약을 따낸 콘아그라 식품회사는 그 행운의 새가 고관들이나 학생들, 그리고 언론인들과 얌전하게 접촉할 수 있도록 훈련도 시킨다고 말했습니다(조만간 이 새들은 영어로 말을 할지도 모릅니다!).

  이것이 다국적기업 시대에 새로운 인종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입니다. 여러 나라의 현지 엘리트들, 부유한 이민자 사회, 투자은행가들, 가끔씩은 콜린 파월이나 곤돌리자 라이스 같은 사람들, 일부 가수들, 혹은 나와 같은 일부 작가들처럼 조심스레 사육된 소수의 칠면조들만이 사면을 받고 프라잉팬 공원입장권을 얻는 것입니다. 나머지 수백만명은 일자리를 잃고, 자신의 집에서 추방되며, 단수와 단전을 당하고 에이즈로 죽게 됩니다. 기본적으로 이들은 요리용 칠면조인 것입니다. 그러나 프라잉팬 공원의 운좋은 새들은 잘 지냅니다. 그들 중 일부는 국제통화기금이나 세계무역기구(WTO)를 위해 일합니다. 따라서 이들 중 누가 이 기구들을 반(反)칠면조적이라고 비난할 수 있겠습니까? 일부는 칠면조 선발위원회에서 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합니다. 따라서 이들 중 누가 칠면조들은 추수감사절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자기가 거기에 참여하고 있는데 말입니다. 누가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이 기업 주도의 세계화에 반대한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프라잉팬 공원으로 들어가려고 모두 필사적으로 경쟁하고 있을 뿐입니다. 대부분 가는 도중에 죽는다 해도 어쩌겠습니까?

  새로운 인종주의 프로젝트의 한부분으로 새로운 인종학살이 있습니다. 지금과 같은 새로운 경제적 상호의존의 시대에는 경제제재 조치를 통해 새로운 인종학살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습니다. 새로운 인종학살이란 실제로 나서서 사람들을 죽이지 않고도 대량죽음을 가져올 조건을 만들어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1997년과 1998년 사이에 이라크 담당 유엔복지조정관이었던 데니스 할리데이는(이후 그는 환멸을 느껴 사임하였습니다) 이라크에 가해진 경제제재 조치를 묘사하는 데 인종학살이란 용어를 사용하였습니다. 이라크에서는 이 조치가 50만명 이상의 어린이들의 목숨을 앗아갔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저지른 어떠한 범죄행위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합니다.

  새로운 시대에는 남아공의 인종차별정책과 같은 공식적인 정책은 낡은 것이자 불필요한 것이 됩니다. 국제무역과 금융 기구들은 가난한 사람들이 어느 경우에도 '반투스탄'(남아공의 반(半) 자치 흑인구역)을 벗어날 수 없도록 다자간 무역 규칙과 금융협약으로 된 복합적 시스템을 감독합니다. 그 전체 목표는 불공정을 제도화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왜 미국이 영국산 의류보다 방글라데시에서 제조된 의류에 20배가 넘는 세금을 부과하는 것일까요? 왜 아이보리코스트나 가나처럼 코코아 열매를 재배하는 국가들이 이것으로 초콜릿을 만들려고 하면 중과세하여 시장에서 쫓아내려 할까요? 왜 전세계 코코아 열매의 90퍼센트 이상을 재배하는 국가들이 세계 초콜릿 생산량의 5퍼센트만 겨우 생산할까요? 왜 자국의 농부들에게는 보조금으로 하루 10억 이상을 쓰는 부유한 국가들이 인도처럼 가난한 나라에 대해서는, 전력사용에 대한 보조금을 포함하여 모든 농업 보조금을 철회하라고 요구할까요? 왜 반세기 이상 식민지배 정권에 의한 약탈을 겪은 뒤에도 예전의 식민지들이 같은 종주국에 대해 여전히 빚더미에 빠진 상태이며, 이들에게 일년에 3천8백2십억에 달하는 돈을 지불해야 할까요?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칸쿤에서의 무역협정이 무산된 것은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비록 우리 정부가 그 공로를 차지하려 하지만, 우리는 이것이 수많은 나라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벌인 투쟁의 나날들이 낳은 결과라는 것을 압니다. 칸쿤이 우리에게 주는 중요한 교훈은 실제로 손상을 입히고 급진적인 변화를 얻어내기 위해서는 지역적 저항운동이 국제적 연대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점입니다. 칸쿤으로부터 우리는 저항의 세계화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배웠습니다.

  어떤 개별국가도 기업 세계화 프로젝트에 단독으로 맞설 수 없습니다. 우리 시대의 영웅들이,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부딪치면 갑자기 난장이가 되고 마는 것을 우리는 계속해서 보아왔습니다. 체제에 대해 저항하는, 비범하고 카리스마가 넘치는 거물급 인물들이 권력을 잡아 국가의 우두머리가 되면, 세계무대에서 무기력해져버립니다. 나는 지금 브라질의 룰라 대통령을 염두에 두고 하는 말입니다. 룰라는 지난해 세계사회포럼의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금년에 그는 국제통화기금의 지침에 따라 연금혜택을 줄이고, 노동당의 급진파들을 숙청하느라고 분주합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전 대통령 넬슨 만델라도 마찬가집니다. 1994년 대통령직을 수행하기 시작한 이후 2년 내에 만델라 정부는 '시장의 신(神)'에게 거의 경고 한번 보내지 못하고 무릎을 꿇었습니다. 만델라 정부는 광범위한 민영화와 구조조정을 단행하였고, 그로 인해 수백만명이 집도, 일자리도, 전기도, 수도도 없이 지내게 되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우리가 가슴을 치고 배신감을 느껴봤자 소용없는 일입니다. 룰라와 만델라는, 어느 쪽으로 생각해봐도 대단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야당에서 정부 쪽으로 들어가는 문지방을 넘는 순간, 갖가지 위협, 특히 그중에서도 어떤 정부건 하룻밤 사이에 무너뜨릴 수 있는 가장 악질적인 위협, 즉 '자본이탈'이라는 위협의 볼모가 됩니다. 지도자의 개인적인 카리스마나 화려한 투쟁경력이 기업카르텔의 콧대를 꺾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자본주의가 어떻게 작동하는지, 혹은 권력이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급진적인 변화는 정부에 의해 수행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민중의 힘에 의해서 실현될 수 있을 뿐입니다.

  전세계의 최고의 인물들이 우리에게 닥친 일에 대한 생각을 나누기 위해 세계사회포럼에 함께 모였습니다. 이런 대화는 우리가 싸워 얻으려는 세상에 대한 비전을 가다듬을 수 있게 합니다. 이것은 훼손되어선 안될 매우 중요한 과정입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실제 정치적 행동은 취하지 않은 채 이런 과정에만 모든 노력을 경주한다면, 지금껏 세계적 정의를 위한 운동에서 그토록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세계사회포럼이 오히려 우리 적들의 자산이 될 위험에 빠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당장 논의해야 할 것은 '저항의 전략'입니다. 우리는 진짜 목표물에 초점을 맞추어 진짜 투쟁을 벌여, 실제로 타격을 가해야 합니다. 간디의 소금행진은 단순히 정치적인 쇼만은 아니었습니다. 수천만의 인도인들이 바닷가까지 걸어가서 직접 소금을 만드는 단순한 저항의 행위를 통해 소금법을 박살낸 것입니다. 그것은 대영제국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직접적인 타격이었습니다. 그것은 진짜 행동이었습니다. 우리의 운동이 중요한 승리를 거두어야 하는 반면에, 비폭력 저항이 효과는 없고 느낌만 좋은 정치적 쇼가 되지 않도록 해야 합니다. 이것은 항상 갈고 닦고 새로이 거듭나야 하는 매우 소중한 무기가 되어야 합니다. 단순히 매스미디어를 위한 멋진 장관이나 사진찍기용 기회로 전락되어서는 안됩니다.

  작년 2월 15일 전세계 대륙에서 모인 천만명의 사람들이 이라크전쟁에 반대하여 행진한 것은 공공의 도덕성을 보여준 훌륭한 장관이었습니다. 그것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습니다. 2월 15일은 주말이었습니다. 아무도 자기 근무일을 빼먹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주말 데모로는 전쟁을 막을 수 없습니다. 조지 부시는 이것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압도적인 여론을 무시하는 부시의 자신감에서 교훈을 얻어야 합니다. 부시는 아프가니스탄이 그랬던 것처럼, 티베트가 그랬던 것처럼, 체첸이 지금 그런 것처럼, 한때 동티모르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고 여전히 팔레스타인이 그런 것처럼, 이라크도 점령되고 식민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부시는 자기가 그저 가만히 앉아, 위기를 먹고사는 미디어들이 이 위기를 집어들어 뼈까지 훑다가, 그것을 버리고 다른 데로 갈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곧 그 시체는 베스트셀러 목록에서 떨어져나올 것이고, 격분한 우리들도 곧 흥미를 잃을 것입니다. 혹은, 그렇게 되기를 부시는 바라겠지요.

  우리의 이런 운동은 세계적인 메이저급 승리를 얻어야 합니다. 그저 옳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때때로 우리의 결심을 시험하기 위해서라도 뭔가 이겨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뭔가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인가에 관한 합의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그 무엇인가는 반드시 우리의 분파적이고 논쟁적인 자아(自我)들을 거기에 강제로 꿰맞춰야 하는 어떤 미리 정해진 이데올로기일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은 다른 모든 형태를 배제한 어떤 특정한 형태의 저항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일 필요도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최소한의 의제이기만 하면 됩니다.

  진정으로 우리 모두가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 프로젝트에 맞서고자 한다면, 눈을 돌려 이라크를 봅시다. 이라크는 이 두가지 프로젝트의 필연적인 귀결입니다. 많은 반전활동가들이 사담 후세인이 체포된 이후 혼란을 느끼며 물러났습니다. 사담 후세인이 없으면 세상이 더 나아지지 않을까? 그들은 소심하게 묻습니다.

  한번 이 문제를 똑바로 들여다봅시다. 미군이 사담 후세인을 체포했다고 박수를 치고, 그래서 추후적으로 미국의 이라크 침공과 점령이 정당한 것이었다고 말하는 것은 마치 '보스턴 살인교살자'(1960년대부터 체포 직전까지 13명의 백인 여성들을 모두 잔인하게 목졸라 죽인 유명한 연쇄살인범 앨버트 드 살보를 지칭 ― 역주)의 내장을 난도질했다고 '난자범 잭'(1888년 이후 주로 런던 이스트엔드의 창녀들을 무자비하게 난자하며 다섯번 연속 살해하였으나 끝내 잡히지 않았던 영국의 연쇄살인범 ― 역주)을 우상시하는 것과 같습니다. 더구나 지난 사반세기 동안 저 교살자와 난자범은 동업자였습니다. 그들의 싸움은 집안 싸움입니다. 그들은 더러운 거래를 놓고 다툰 사업 파트너입니다. 잭이 최고경영자입니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제국주의에 반대한다면 우리는 미국의 이라크 점령에 반대하고, 미국이 이라크에서 철수하는 동시에 이 전쟁으로 이라크 사람들에게 가한 피해를 보상해야 한다는 데 동의해야 하지 않을까요?

  어떻게 저항을 시작할 수 있을까요? 정말 작은 것에서부터 시작해봅시다. 중요한 것은, 미군점령을 반대하는 이라크 내 저항을 지원하거나 혹은 저항하고 있는 것이 정확히 누구인가(그들은 과거의 살인자 바트당원들인가, 아니면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인가)에 관해 토의하는 일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미군점령에 반대하는 범세계적인 저항 그 자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저항은 미국의 이라크 점령의 정당성을 부인하는 데서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제국이 자신의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 물질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군인은 전투를 거부해야 하고, 예비군은 복무하기를 거부해야 하고, 노동자는 무기를 배나 항공기에 선적하기를 거부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미국의 뒤치다꺼리를 위해 인도나 파키스탄 병사들을 이라크에 파병시키려는 미국의 계획을 인도나 파키스탄 같은 국가에서 차단해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의미합니다.

  저는 이라크를 파괴함으로써 이득을 보는 주요 대기업 두개를 우리가 고르자고 제안합니다. 그러고 나서, 이들이 관계하고 있는 모든 프로젝트의 목록을 작성합시다. 우리는 전세계에 걸쳐 모든 나라와 모든 도시에서 이 기업들의 사무소 위치를 알아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무소들을 공격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들을 폐쇄시킬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집단적인 지혜와 투쟁경험을 활용하여 하나의 목표물에 겨냥할 수 있느냐 하는 것뿐입니다. 그것은 이기고자 하는 욕망의 문제일 뿐입니다.

  '새로운 미국의 세기를 위한 프로젝트'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 그게 종말론적인 것이라 하더라도 ― 불평등을 영속화하고, 미국의 헤게모니를 확립하고자 하는 기도입니다. 세계사회포럼은 정의와 생존을 요구합니다.

  이러한 이유들로 해서, 우리는 우리 자신이 지금 전쟁중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박혜영 옮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 인도 작가. 이 글은 2004년 1월 16일 인도 뭄바이에서 열린 제4회 세계사회포럼에서 행한 기조연설문을 옮긴 것인데, 출전은 미국의 시사주간지 네이션(The Nation) 2월 9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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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왜 핵폭탄을 용인하고 있는 걸까요?"
- <해외 칼럼> '핵의 그늘 아래서'

[속보, 세계, 사설/칼럼] 2002년 06월 03일 (월) 16:30

  다음은 인도의 작가이자 시민운동가인 아룬다티 로이의 ‘핵의 그늘 아래서(Under the Nuclear Shadow)' 전문이다. 인도와 파키스탄간 핵전쟁 위협이 고조되고 있는 지난 2일 영국의 라디오4 방송에 발표된 이 칼럼을 통해 로이는 핵전쟁의 허망함을 지적하면서 우리가 진정 지켜야 할 인간적 가치들을 역설하고 있다. 
  로이는 지난 97년 ’작은 것들의 신‘이란 소설을 발표, 영국 최고의 문학상인 부커상을 수상했으나 이후 반전ㆍ반세계화 시민운동에 전념하고 있다. 지난 해에는 그간 시민운동의 경험을 바탕으로 ’파워 폴리틱스‘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편집자
  

  어느새 외교관 가족들과 관광객들은 모습을 감추고, 유럽과 미국 기자들이 벌떼처럼 몰려들고 있습니다. 기자들 대부분은 델리의 임페리얼호텔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그들중 대부분이 저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묻습니다.
  
  “왜 아직까지 이곳에 있는 거요?”
  “핵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없습니까?”
  
  핵전쟁이 실제로 일어날 가능성은 높습니다. 하지만 나는 어디로 가야 할까요? 만일 내가 떠나고 난 다음 모든 사물과 모든 사람들, 친구와 나무와 집과 강아지와 다람쥐, 그리고 새들, 나와 친하고 내가 사랑했던 이 모든 것들이 핵폭탄의 무시무시한 화염에 한줌 재가 돼버린다면 나는 무엇에 의지해 살 수 있을까요? 누구를 사랑하며, 또한 누구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을까요? 어떤 사회가 나를 받아들일까요? 이곳 인도에서처럼 비록 말썽쟁이로라도 나를 받아들일 사회가 있을까요?
  
  우리 모두 이곳을 떠나지 않기로 결정했습니다. 우리는 함께 고난을 견뎌 왔습니다.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를 깨달았습니다. 또한 지금 죽는다면 수치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비를 기다리고, 축구를 기다리며, 정의를 기다리고 있는 동안 TV에서는 나이많은 장군들과 철없는 앵커들이 선제공격, 보복공격 능력 등을 열심히 떠들고 있습니다. 전쟁이 마치 재미있는 게임이라도 되는 양 말입니다.

  
  나는 친구들과 히로시마ㆍ나가사키 원폭 투하를 다룬 영화 ‘예언(Prophecy)'에 관해 얘기합니다. 시체가 강을 뒤덮고 살아있는 사람들도 살갗이 벗겨지고 머리가 빠져 고통스러워 합니다. 우리는 특히 건물 계단 위에서 녹아 없어진 한 남자를 기억해냅니다. 우리 자신도 그 남자처럼 계단 위의 자국으로만 남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운 상상을 하면서...
  
  남편은 나무에 관한 책을 쓰고 있습니다. 그중에는 무화과 나무의 꽃가루받이에 관한 부분도 있습니다. 무화과나무마다 서로 다른 나나니벌이 꽃가루를 옮겨준다고 하는군요. 그 종류가 1천여개 가깝다고 합니다. 하지만 핵전쟁이 일어나면 이 나나니벌들은 모두 사라지고 말겠지요. 내 남편과 그가 쓰고 있는 책도 마찬가지일 테지요.
  
  시민운동가인 내 친구는 나르만다 계곡의 댐 건설에 반대하는 무기한 단식투쟁을 벌이고 있습니다. 그녀가 단식에 들어간 지 오늘로 12일째가 됩니다. 그녀, 그리고 그녀와 함께 단식농성을 벌이고 있는 시민운동가들은 날로 쇠약해져 가고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가 학교를 불도저로 깔아뭉개고 숲을 없애며, 수도펌프를 뽑아 없애고 사람들을 마을에서부터 강제로 쫓아내려는 데 대해 저항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대단한 신념과 희망의 행위입니까. 그러나 정부는 이들의 세계는 쓸모없는 것이란 생각에 젖어 있습니다. 과연 그럴까요?
  
  한줌의 테러리스트들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은) 핵전쟁을 불사한다며 서로 으르렁거리고 있습니다. (반면) 비폭력은 멸시받고 있습니다. 강제로 고향을 떠나야 하는 사람들, 가진 것을 빼앗긴 사람들, 굶주림, 가난, 질병, 이런 것들은 이제 만화의 우스개 소재가 되고 말았습니다. 한편 반테러동맹의 유명 인사들은 인도와 파키스탄을 오가며 자제를 설교하고 있습니다. 이제 곧 토니 블레어가 도착해 평화를 설교하겠지요. 다른 한편으론 인도와 파키스탄 양쪽 모두에 무기를 팔고 있으면서 말입니다.
저를 찾아오는 모든 서방 언론인들이 마지막으로 묻는 질문이 있습니다. “이제 책은 안 쓰시나요?”
  
  그 질문은 나를 서글프게 합니다. 책이라니요? 지금은 인류문명의 총화인 음악, 미술, 건축, 문학, 이런 것들이 세계를 움직이는 괴물들에게는 아무런 의미도 갖지 못하는 시대입니다. 나는 어떤 종류의 책을 써야 할까요? 지금, 바로 지금, 나의 최대의 적은 ‘무의미함’입니다.
  
  핵폭탄이 바로 ‘무의미함’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핵폭탄이 실제로 사용되든 안 되든, 그것은 중요치 않습니다. 핵폭탄은 모든 인간적인 것들을 파괴하고, 삶의 의미를 뒤바꾸어 놓습니다.
  
  우리는 왜 핵폭탄을 용인하고 있는 걸까요? 우리는 왜 핵폭탄을 이용해 인류 전체를 협박하는 사람들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일까요?

아룬다티 로이/인도 작가ㆍ시민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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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반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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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나 많은 아이들이 얼마나 많은 교실에서 얼마나 오랜 세기 동안 이 이야기들의 날개를 달고 황홀하게 과거로 행글라이딩해 가곤 했을까? 이제는 폭탄들이 내려와 저 고대 문명을 불태우고 모욕하는데.

아룬다티 로이 "메소포타미아, 바빌론, 티그리스와 유프라테스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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