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테 콜비츠 [조문객] Der Ttauende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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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팬지들은 잎과 꽃이 달린 풀줄기를 인간에게는 극히 낯선 '장거리 후각 도구'로 사용한다. 침팬지들은 제인 구달의 주머니 속에 그런 풀줄기를 조심스럽게 밀어넣었다가 다시 끄집어내어 킁킁 냄새를 맡곤 했다. 제인 구달의 주머니 속에 바나나가 숨겨져 있는지 알아내기 위해서였다. 침팬지들은 풀줄기를 통해 바나나 냄새를 맡으면 구달에게 달라고 사정을 했다. 아이들을 좋아하는 아주머니 침팬지가 어미가 직접적인 접촉을 금하는 갓난 새끼의 냄새를 맡고 싶을 때도 이 '장거리 후각 도구'를 사용한다. (53)

-비투스 B. 드뢰셔 [휴머니즘의 동물학] (이마고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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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인들은 미국인, 영국인 및 기타 유럽인들이 19세기 내내 발휘해 왔던 기술--'열등 문화' 인종의 절멸을 재촉하는 기술--을 습득했음을 보여주었다.

북아메리카의 사례를 쫓아 헤레로인(Herero, 남서 아프리카의 나미비아에 사는, 반투어를 쓰는 종족)을 보호구역으로 쫓아냈고, 그들을 목초지는 독일인 이주민들과 식민 회사가 접수했다. 헤레로족이 저항하자 아돌프 레브레흐트 폰 트로타(A. L. von Trotha) 장군은 1904년 10월에 헤레로인들을 절멸시키라는 명령을 내렸다. 독일 국경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헤레로족은 무장 여부에 관계없이 사살할 작정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헤레로족은 폭력 때문에 죽은 게 아니었다. 독일인들은 단지 그들을 사막으로 몰아내고 국경을 봉쇄했을 뿐이었다.

스타프 장군은 이 전쟁을 다음과 같이 공식적으로 설명하였다. "아주 철저하게 한 달 간에 걸쳐 사막 지역을 봉쇄하여 절멸의 작업을 완수했다. . . 사람들이 그르릉거리며 죽어가는 소리와 그들이 내지르는 미친 듯한 분노의 비명이. . . 무한대의 장엄한 침묵 속에 울려 퍼졌다." 나아가 스타프 장군의 설명은 "판결은 시행되었고, 더 이상 헤레로족은 독립된 인종이기를 멈추었다"고 보고한다.

스타프 장군이 자부심을 가질 만한 성과였다. 군대는 전국민으로부터 감사의 인사를 받았다.

우기가 시작되자 독일 경비병들은 마른 웅덩이 주위에 쓰러져 있는 해골들을 발견했다. 이 웅덩이는 깊이가 7~15미터에 이르렀고, 헤레로족이 부질없이 물을 찾으려고 판 것이었다. 인종 전체--약 8만 명의 인간들--가 사막에서 죽었다. 겨우 몇천 명만 남아서 독일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중노동형에 처해졌다.

그리하여 1896년 쿠바의 스페인 사람들이 고안하고, 미국인들이 영어화하고, 보어 전쟁(1881년과 1899~1902년 동안 트란스바알의 금과 다이아몬드를 둘러싸고 보어인과 영국군 간에 벌어진 전쟁) 동안 영국인들이 다시 사용한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말이 독일 언어와 정치에 들어오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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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프 장군은 반란의 원인을 '헤레로족의 호전적이고 자유를 사랑하는 성격' 때문이라고 했다.

헤레로족은 그렇게 호전적이지 않았다. 그들의 지도자인 새뮤얼 마헤레로(S. Maherero)는 20년도 넘게 독일인들과 하나하나 조약을 맺어나갔고, 전쟁을 피하기 위해 토지의 대부분을 양도하였다. 그러나 미국인들이 인디언들과 맺은 조약에 구속감을 느끼지 않았듯이, 독일인들 역시 고등 인종으로서 원주민들과 맺은 조약을 지킬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북아메리카에서처럼 세기 전환기에 있었던 독일의 이주 계획은 원주민들이 가치가 있는 토지를 포기하는 것이 전제였다. 그러므로 반란은 '헤레로 문제를 해결할' 기회로 환영을 받았다.

영국인, 프랑스인 및 미국인들이 대학살을 변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사용해 온 주장이 독일어로도 표현되었다. 파울 로르바흐(P. Rohrbach)는 베스트셀러 저서인 [세계의 독일 사상] (German Thought in the World, 1912)에서 이렇게 썼다. "가치 있는 어떤 것도 생산해내지 못하는 존재물들은 인종이든 개인이든 상관없이 생존할 권리를 주장할 수 없다." 로르바흐는 남서 아프리카에서 독일 이주 문제를 담당하는 수장으로 있을 때 식민 철학을 배웠다.

남아프리카의 흑인 부족의 보존이. . . 위대한 유럽 민족들과 백인종 일반의 확산보다 인류의 미래에 더 중요하다고 잘못된 철학이나 인종 이론이 아무리 떠들어도 지각 있는 사람들은 받아들일 수 없다.
원주민이 고등 인종을 위해, 즉 고등 인종과 그 자신의 진보를 위해 가치 있는 것을 생산하는 법을 배울 때에야 비로소 그들은 도덕적 생존권을 획득한다.

-스벤 린드크비스트 [야만의 역사] 한겨레신문사 2003 (230-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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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칸다하르]를 촬영하던 어느 날 밤을 잊지 못한다. 우리 팀은 손전등을 비추며 사막을 걸어가고 있었는데 곳곳에 마치 사막에 버려진 양떼처럼 무리 지어 죽어 가는 난민이 쓰러져 있었다. 우리는 그들이 콜레라로 죽는 것이라 생각하고 자볼에 있는 병원으로 데려갔다. 그들은 그러나 굶주림으로 죽어 가는 것이었다. 며칠 동안 아사하는 사람을 너무나 많이 목격하면서 나는 자신이 무엇인가 먹는 것을 용서할 수 없었다. . .

방글라데시 출신으로 아프가니스탄 문제와 관련해 UN에서 인도주의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는 카말 호세인 박사가 2000년 여름 우리 사무실을 방문했다. 그는 10년 동안을 계속해서 UN에 보고서를 제출했지만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고 말했다. . .

불법 이민자로 가득 찬 자볼 근처의 한 난민촌에 갔을 때였다. 그곳은 난민촌인지 감옥인지 분간이 안 되었다. 기아를 피해서 혹은 탈레반의 공격을 피해서 도망친 아프간 인은 다 수용되지 못하고 아프가니스탄으로 돌려보내졌다. 그것은 누가 보아도 모두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절차 같았다. 어떠한 이유든 불법 입국자로 입국이 거부당한 사람은 추방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들은 기아로 죽어 가고 있었다. 우리는 결국 거기서 영화에 등장할 엑스트라를 골랐다. 난민촌에서는 그렇게 많은 사람을 먹이기에 예산이 충분치 않다고 했다. 사람들은 일 주일 동안이나 먹지 못했다. 먹을 것이라고는 물밖에 없었다. 우리는 음식을 제공하겠다고 했다. 그들은 우리가 매일 왔으면 하고 바랐다.

한 달 된 아기부터 80세 노인에 이르기까지 약 400명에게 음식을 나누어 주었다. 대부분은 어린이들로 어머니의 품안에서 굶주림에 지쳐 기절해 있었다. 한 시간 동안 우리는 울면서 빵과 과일을 나누어 주었다. 당국은 슬픔을 표시하면서도 예산이 승인되기까지 시간이 걸릴 것이고 난민의 수는 그들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것이 자신의 자연, 역사, 경제, 정치 그리고 이웃의 몰인정에 의해 파괴된 한 나라의 이야기이다.

이란에서 아프가니스탄으로 추방된 한 아프간 시인은 자신의 느낌을 이렇게 시로 표현했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난다.
저금통이 없는 나그네는 떠난다.
인형이 없는 아이도 떠난다.
나의 유랑에 걸린 주문도 오늘 밤 풀리겠지.
비어 있던 식탁은 접히겠지.
고통 속에서 나는 지평선을 방황했다.
모두가 지켜보는 데서 떠도는 사람은
나였다.
내가 갖지 못한 것들을
나는 놓아두고 떠난다.
나는 걸어서 왔고, 걸어서 떠날 것이다.

-모흐센 마흐말바프 [칸다하르] 삼인 2002 (40-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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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lmas 2004-05-02 00: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가슴 아프다고 말하기조차 힘들군요 ...

killjoy 2004-05-12 14: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 맞습니다.
 

GUNTER GRASS (1927-)  Danzig, Germany (now Gdansk, Poland)


"The job of a citizen is to keep his mouth open."

 -시민의 할 일은 계속해서 입을 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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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2004-05-01 08: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퍼갑니다.

killjoy 2004-05-12 0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