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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의 방패
키우치 카즈히로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3월
평점 :
키우치 카즈히로, 최재호 역, [짚의 방패], 북플라자, 2020.
Kiuchi Kazuhiro, [WARA NO TATE], 2007.
경찰의 보호막은 정녕 짚으로 만든 방패인가!
참신한 소재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일본 미스터리 특유의 긴장감을 잘 드러낸다. 키우치 카즈히로는 만화가이고, 영화감독이고, 소설가이다. 소설 [짚의 방패]는 2013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배우의 과장된(?) 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영화는 별로였고, 늘 그렇듯이 원작의 재미는 기대 이상이다.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찾아보니 다른 번역은 아직 없다.
<이 남자를 죽여주세요>
신문 한 면을 거의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검은색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는 커다란 얼굴 사진과 '키요마루 쿠니히데, 34세'라는 글자가 있었고, 다시 그 밑에는 '보상으로 100억 원을 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는 '니나가와 타키오카' 회장의 서명과 홈페이지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가 있었다.(p.22)
그 홈페이지에 의하면, 키요마루를 살해하여 100억 원의 보상을 받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키요마루 쿠니히데에 대한 살인죄 또는 상해치사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여러 명 가능)
둘째, 그 외 키요마루 쿠니히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인정된 자(여러 명 가능)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여러 명이라고 해도 각각 1인당 100억 원이 지급된다고 했다.(p.28)
도쿄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살해된다. DNA 감식으로 용의자를 확정하는데, 이미 7년 전에 비슷한 범행을 저질러 형을 살고 최근에 출소한 키요마루라는 자이다. 사건의 잔혹함뿐만 아니라 세상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죽은 소녀가 대기업 회장의 손녀였고, 재계의 거물인 니나가와 회장은 이 살인마를 죽이는 대가로 100억 원이라는 현상금을 내건다. 비참하고 참담한 피해자는 거액을 제시하여 사적 복수를 하려 하고, 누군가는 인생을 바꿀 기회로 여기고 달려든다.
SP란 시큐리티 폴리스(Security Police)의 약자로, 내각 총리를 포함해 각급 장관, 국회의장,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 각 정당 당수, 도지사나 전경련 회장 등 요인(VIP)의 경호를 주 업무로 하는 경찰이다.
SP 중에서 기동경호대에 소속된 SP는 평소 어떤 요인을 경호해야 하는지 정해진 담당이 없는 SP이다. 가령, 미국 대통령 방문과 같은 대규모 국가행사가 있을 때나, 각 요인을 담당하는 SP가 어떤 사정으로 결원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예비부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상 업무는 주로 대기였다. 그저 할 일이 없이 대기만 하면서 지내면 된다.(p.26)
국가의 공권력, 즉 경찰력에 대한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만에 하나, 돈에 눈이 먼 인간이 니나가와의 광고를 보고 키요마루를 살해하면 어떻게 될까. 경찰에 맡기는 것보다 현상금을 거는 편이 가해자를 잡기에 더 유효하다는 결론이 된다.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세상, 천민자본주의가 승리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찰 공권력의 위신이 실추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도 무너지고 만다.(p.31-32)
경찰은 공권력의 신뢰와 질서 유지를 위해 애쓰지만, 연일 계속된 매스컴의 보도로 온 국민은 감시자가 된다. 얼마 후 용의자 키요마루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후쿠오카 남부경찰서에 자진 출두한다. 경찰은 그를 체포해서 검찰 송치를 위해 도쿄로 이송해야 하고, 이례적으로 SP를 투입한다. 대기 중이던 기동경호대 소속 메카리 카즈키 경정을 포함해서 SP 2명, 수사본부 형사 2명, 후쿠오카 남부경찰서 형사 1명... 총 5명으로 이송 팀이 꾸려진다. 요인 경호가 아니라 범죄자를 보호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방금 들어온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후쿠오카 남부경찰서에서 구속 중인 용의자 키요마루 쿠니히데가 경찰관 한 명에게 피습당했다고 합니다."(p.69)
전국의 경찰관은 약 24만 명.
물론 그들이 일으킨 사건은 셀 수 없다.
...
기본적으로 경찰 조직은 자기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쉬운 조직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 은폐하지 못한 사건들만 따져도 그 정도일 것이다. 경찰이 저지른 범죄 중에서 은폐된 것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숫자의 경찰관이 법을 어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p.70-71)
예상은 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경찰관에 의한 피습... 100억 원이라는 돈의 무게는 직업윤리, 양심, 신념마저 바꾸어 놓는다. 경찰관에 이어서 치료 간호사, 범죄 조직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한탕주의에 빠져있다. 안전한 장소는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송을 시작한다.
메카리는 키요마루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하지만 죽어도 좋은 녀석이라고는 생각한다. 아무 죄 없는 소녀를 두 명이나 죽인 녀석이다. 게다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그런 키요마루를 목숨 걸고 지킬 가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임무라서인가? 자신이 경찰 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에?
메카리에게 이런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경찰 조직에 남아 있을 이유 따윈 없었다.
'지킬 가치도 없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었을 때 내 죽음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죽은 나를 아내가 어떻게 볼 것인가. 난 키요마루를 위해서 죽을 수 없다.'
메카리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p.127-128)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키요마루의 목숨 자체가 아닐세. 키요마루가 경찰의 호위 속에서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느냐가 문제일세... 더구나 경찰관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더 큰 문제지."(p.130)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린 파렴치한을 호송하는 일은 계속된 외부의 위협과 내적인 갈등을 유발한다. 죽이기만 하면, 죽임에 기여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기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있고, 가까이서 무장한 경찰관은 더 위협적이다. 살인마를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사명, 이 일의 가치문제, SP와 강력반 형사의 입장 차이... 갈등은 극대화되고, 서로를 불신하는 중에 하나씩 쓰러진다.
설정이 기발하고 짜임새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완전히 취향 저격이라고 해야 하나... 영화를 보아서 내용을 알고 있어도 재미있게 읽었다. 어느 순간, 지나치게 짜임새와 구성을 쫓다 보니... 내가 소설을 보는 것인지? 나무위키를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ㅋㅋ
아, 100억 원이면, 나도 어쩌면...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