엣지 오브 투모로우 : All You Need is Kill - 개정판
사쿠라자카 히로시 지음, 김용빈 옮김 / 학산문화사(단행본)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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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쿠라자카 히로시, 김용빈 역, [엣지 오브 투모로우], Premium extreme novel, 2014.

Sakurazaka Hiroshi, [ALL YOU NEED IS KILL], 2004.

이런 책도 있구나... 도서관의 일본소설(?) 코너에서 우연히 발견했다. 톰 크루즈 주연의 영화 <엣지 오브 투모로우>(Edge of Tomorrow, 2014)의 원작인데, 일본 작가가 쓴 소설이다. 나무위키에서는 라이트노벨 - SF - 루프 물로 분류하는데, 그렇다면 처음으로 읽은 라노벨이다. 일러스트를 포함한 원작은 [올 유 니드 이즈 킬]이라는 제목으로 2004년에, 국내 번역은 2007년에 출간했다. 영화 개봉과 함께 일러스트 없이 [엣지 오브 투모로우]라는 제목으로 2014년에 재출간했다.

죽음이라는 존재는 당돌하고, 눈 깜짝할 사이이며, 용서를 모른다.

그나마 생각할 틈도 없이 목숨을 빼앗기는 자는 행운아다. 수많은 병사들은 뼈가 부러지고, 내장이 파열되고, 자기 몸 아래에 커다란 피 웅덩이를 만들고도 괴로워한다. 배후에서 사신이 다가와 얼음장 같은 손으로 목을 조를 때를 진흙 속에서 호흡하면서 고독하게 기다리기만 하는 것이다.

만약 천국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곳은 틀림없이 차가운 장소일 것이다. 틀림없이 어두운 장소일 것이다. 틀림없이 외로운 장소일 것이다.

나는 공포에 떤다.

떨리는 팔로, 굳어 버린 손가락으로 방아쇠를 당기고 달아오른 총탄을 흩뿌리며 사신을 쫓아낸다.(p.9)

공상과학? 환상문학? 어쨌든 가볍게 읽으려고 했는데, (생각하고 다르게) 시작부터 전장의 공포와 죽음에 관한 문장은 절대 가볍지 않다. 키리야 케이지는 훈련소를 갓 나온 초년병이다. 통합방역군JP 301사단 장갑화 보병 12연대 3대대 17중대 146명은 코토이우시 섬의 북단을 방어한다. 복합장갑으로 만든 기동 재킷을 입고, 20밀리 기관총과 로켓 런처... 등으로 무장하고 작전에 투입된다. 그들의 적은 기타이라고 불리는 괴물이다.

키는 인간보다 작다. 재킷병의 어깨 정도다. 사람을 수직으로 세운 봉이라고 한다면, 키타이의 외형은 항아리다. 거기에 팔다리가 네 짝, 꼬리가 한 짝 붙어 있다. 부풀어 오른 개구리의 익사체가 떠오르는 것 같다고 우리는 늘 말하곤 했다. 생물학적으로는 개구리보다 불가사리에 가깝다고는 하지만.

이놈들은 사람보다 사이즈가 작아서 공격을 해도 맞히기가 어렵고, 그러면서도 인간보다 중량이 더 나간다... 짧은 팔을 한 번 휘두르기만 해도 사람의 몸은 가볍게 산산조각 난다. 분출공이라 불리는 구멍에서 쏴대는 스피어 탄은 40밀리 기관포와 동등한 위력이다.(p.16-17)

기타이는 고통과 죽음의 공포를 몰고 다니는데, 인류는 첨단 과학으로 무장하고도 괴생명체와 싸우는 것은 힘겹다. 리타 브라타스키는 US특수부대 소속의 정예병으로 전신을 붉게 칠하고, 배틀 액스를 휘두르며, 전장의 암캐라고 불린다. 맹렬한 적의 공격으로 케이지가 쓰러졌을 때 그녀는 다가와 엉뚱한 질문을 한다. "일본의 레스토랑에서는 밥을 먹고 나면 그린 티를 공짜로 준다고 책에 쓰여 있던데, 사실인가?" 뭔가 강렬하면서도 우스꽝스러운 만남이다.

베갯머리에 있던 유성 펜으로 왼쪽 손등에 '5'라고 썼다.

이 작은 숫자가 내 싸움의 시작이다.

가져가 주마. 이 세상에서 최고의 물건을 다음 날로 가져가 주마. 적탄을 종이 한 장 차이로 피하고, 기타이를 한 방에 보내 버리겠다. 만약 리타 브라타스키가 엄청난 전투 기술을 몸에 익힌 인간이라면, 무한의 시간을 써서 나도 거기까지 도달해 주마.(p.90)

의식의 소멸 후에 다시 시작하는 하루... 케이지는 시간의 반복에 갇힌다. 하루 훈련과 다음 날의 실전, 죽으면 시간은 리셋된다. 같은 날의 반복... 케이지는 왼쪽 손등에 반복의 횟수를 쓰고, 루프(loop)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를 한다. 그리고 158번째 반복된 전쟁터를 누비고 있을 때, 전파를 타고 들어온 리타의 목소리... "너 지금 몇 번째냐?" 159번째 반복에서 케이지는 그녀를 찾아가 "일본 레스토랑의 그린 티는 분명히 공짜다"라는 말을 한다.

나는 기타이의 꿈을 옆에서 훔쳐보고 있었던 거나 마찬가지라고 한다. 리타에게 도움 받은 첫 번째 전장에서 나는 우연히 서버라고 불리는 기타이를 쓰러뜨렸다. 두 번째부터 158번째까지 기타이 서버를 쓰러뜨린 것은 리타다. 하지만 나와의 사이에 전기적인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기 때문에 루프에 휘말린 것은 그녀가 아닌 나였다.

기타이의 반복은 자신들에게 유리하도록 미래를 바꾸는 능력이다.(p.222)

20년의 전쟁, 우주에서 날아온 생명체는 심해에 자리잡고... 기타이는 토양을 파먹으며 유해물을 배설한다. 지구 생태계를 파괴하는데, 토지는 사막화 바다는 탁한 녹색으로 변한다. 처음에 지상에 올라온 기타이는 강력한 존재가 아니었지만, 내성과 진화를 거듭하며 인류의 존망을 위협한다. 그들은 시간을 되돌려서 미래를 유리하게 바꾸는 능력이 있다.

영화가 유럽을 배경으로 윌리엄 빌 케이지의 루프와 괴생명체를 물리치는 이야기-전쟁에서의 승리라면, 소설은 일본을 배경으로 키리야 케이지와 리타 브라타스키의 얽힌 루프에서 탈출하는 내용-전투에서의 승리이다. 전쟁의 여신이 되기까지 리타의 과거를 자세히 볼 수 있고, 영화하고는 전혀 다른 결말이다(영화의 속편이 만들어진다면 리타를 중심으로 한 프리퀄이 아닐까? 한다). SF 묘사는 일러스트를 포함하면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있다. 소설과 영화의 각본을 비교하는 재미가 있었고... 드물게 원작보다 영화가 더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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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스벨트 게임
이케이도 준 지음, 이선희 옮김 / 인플루엔셜(주)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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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케이도 준, 이선희 역, [루스벨트 게임], 인플루엔셜, 2020.

Ikeido Jun, [ROOSEVELT GAME], 2012.

"8 대 7일세.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가장 재미있는 스코어라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지. 일명 루스벨트 게임(한국에서는 '케네디 스코어'라는 말로 알려져 있다)이라고 한다네."(p.280)

야구와 경영을 접목한 소설이다. (일본에서 실제로 쓰는 말인지 모르겠...;;) 제목인 '루스벨트 게임'은 "야구에서 가장 재미있는 게임 스코어는 8 대 7이다"라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말이라고 한다. (제목이 스포일러이고...;;) 야구의 데이터 분석과 기업의 경영철학이 맞물려... 생존을 위한 기업 간의 투쟁과 승리를 향한 야구팀의 분투를 박진감 있게 이야기하고 있다. 기업이라는 소재로 꾸준히 글을 쓰는 작가의 능력이 놀랍다.

"지금처럼 불경기가 계속되면 언젠가 워크셰어링도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앞으로 정규 직원의 급여나 고용에 칼을 들이대려면, 그에 상응하는 비용 절감의 노력을 보여주어야 하겠지요. 야구팀에 3억 엔을 사용하면서 직원들에게 월급을 줄이자고 말하면 씨도 먹히지 않을 겁니다."(p.23-24)

"영업을 하러 돌아다니다 보면 우리 같은 전자부품 제조업체는 이름도 모르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하지만 사회인야구를 하는 덕분에 '아하! 회사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많지요. 이건 영업할 때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야 예전에는 성적이 좋았으니까 그렇지."(p.25)

아오시마제작소는 중견 전자부품 제조업체로 연 매출은 500억 엔이고, 경상이익은 약 40억 엔이다. 여기서 매년 사회인(실업) 야구팀 운영에 3억 엔을 지출하고 있다. 한때는 호황으로 경영이 안정적이고, 야구팀 또한 연승을 달리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현재는 금융위기와 함께 경기 침체로 경영이 악화되고, 야구팀은 연패로 위축되어 있다. 더구나 감독은 팀의 에이스 선수 두 명을 데리고 경쟁사인 미쓰와전기로 가버린 상황... 새 감독을 뽑았지만, 회사 내에서는 구조조정과 야구팀의 해체를 논의한다.

"이 팀에는 훌륭한 선수들이 많아. 그들의 힘이 백이라면, 지난 몇 년간은 50퍼센트밖에 사용하지 않았지. 그걸 백 퍼센트까지 끌어올리는 게 내 역할이야."(p.40)

뒤떨어진 기술력을 영업력으로 만회하고 있다는 뒷이야기를 들을 만큼 미쓰와전기의 영업조직은 굳건한데, 그런 조직을 강력한 리더십으로 이끌고 있는 사람이 바로 반도였다.(p.134)

작업복을 입고 등장한 감독 다이도는 대학에서 스포츠과학-야구통계학을 공부하고, 고등학교 야구부를 지도하다가 처음으로 아오시마제작소 실업팀을 맡게 된다. 실력이 알려지지 않은 감독은 아마추어 이상, 프로 미만의 실력을 지닌 비정규직 선수들을 데리고 데이터 야구를 시작한다. 고참 선수와 신참 선수를 구분 없이 대하고, 스코어북 데이터를 세심하게 기록하며... 타율보다 출루율을, 수비 실책보다 타점 능력을 보고... 약한 투수력을 타격전으로 극복하려고 한다.

아오시마제작소는 탄탄한 기술력을 기반으로 하고, 규모가 있는 미쓰와전기는 폭넓은 영업력을 기반으로 하는 회사이다. 전자부품 생산, 이미지센서 납품 등으로 경쟁 중이고, 야구도 라이벌이다.

"하지만 우리 회사와 미쓰와의 문화는 너무나 다릅니다."

똑같이 전자부품을 취급하는 회사이지만, 아오시마제작소는 지금까지 항상 새로운 제품을 추구해왔다. 한편 미쓰와전기는 앞장서서 새로운 제품을 만들지 않고, 잘 팔리는 타사 제품을 모방한 유사품을 만드는 방법으로 성장해왔다.

세상 사람들이 받아들일지 말지 모르는 위험을 감수하면서까지 신제품을 개발하기보다, 다른 회사가 먼저 개발해 좋은 실적을 거둔 제품의 유사품을 만드는 편이 저렴한 비용으로 돈을 벌수 있기 때문이다. 미쓰와전기뿐만 아니라 세상에는 그런 회사들이 적지 않다.(p.156)

그는 사장이 되어도 컨설턴트 시절과 똑같은 사고방식으로 회사를 보았다. 그곳에는 실적을 나타내는 숫자는 있어도 직원들의 인생과 미래를 바라보는 따뜻한 시선은 없었다. 그것이 창업자인 아오시마와 호소카와의 차이였던 것이다.

일하는 것은 살아 있는 사람이지 부품이 아니다. 모두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지금까지 모든 것의 효율만 따졌는지도 모른다......(p.217)

불황은 생산 축소, 납품가 하락, 은행권 압력... 등으로 이어져 기업의 존속마저 위태롭게 한다. 구조조정과 야구팀 해체는 기정사실이 되고... 이러한 때 미쓰와전기는 아오시마제작소에게 합병을 제안한다. 하지만 서로 다른 기업문화... 호소카와 사장은 회사가 돈을 벌어도 직원이 불행하면 의미가 없고, 직원을 행복하게 만들어야 비로소 경영이 성공한 것이라는 창업주의 경영이념을 깨닫게 된다. 효율과 실적이라는 숫자 뒤에는 사람이 있다.

어디라고 단정 지어 말할 수 없지만, 문득 떠오르는 이미지는... 글로벌 기업 중에서 기술과 혁신으로 새로운 제품을 생산하는 기업이 있고, 모방과 유사품으로 성장하는 기업이 있다. 설마 내가 생각하는 두 기업(?)을 모델로 하지는 않았겠지...;;ㅋㅋ

야구팀은 단순한 취미 생활도, 쓸데없는 비용도 아니다. 아오시마제작소에 필요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다. 야구팀은 아오시마제작소의 정체성에 커다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그 정체성은 내적인 것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외치는 회사의 방침이자 중요한 철학이다.

하지만 그것을 은행이 이해하도록 만들기 위해서는 명확한 숫자로 나타내야 한다. 아오시마제작소에 야구팀이 얼마나 공헌하고 있는지, 금액으로 확실히 증명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을 어떻게 증명할 수 있을까?(p.333)

"내가 야구팀을 만들기로 결심한 건 회사를 만든 지 7년째였지. 운 좋게 고도성장기의 파도를 타고 작은 차고에서 만든 영세 기업이 성장의 계단을 뛰어오를 때였네. 그때는 5백여 명의 직원들이 매일 땀투성이가 되어 아침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일했지. 밤늦게까지 야근하거나 휴일에도 회사에 나오는 건 늘 있는 일이었다네. 그래도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모두 열심히 일했지. 그런 직원들에게 보답하고 싶어서. 어떻게 하면 그들을 즐겁게 해 줄 수 있을까 생각했다네. 그 결과 야구팀을 만든 걸세."(p.341-342)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한 쉽지 않은 결정을 하고... 늘 그렇듯이 기업은 회생하고, 야구 시합은 이긴다. 클리셰 남발과 뻔하고 뻔한 이야기지만, 과정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아오시마제작소의 야구팀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 아니라 기업의 역사이고, 가치이고, 철학이다. 길고 장황한데,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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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도관의 눈
요코야마 히데오 지음, 허하나 옮김 / 폭스코너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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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코야마 히데오, 허하나 역, [교도관의 눈], 폭스코너, 2022.

Yokoyama Hideo, [KANSHUGAN], 2004.

갑자기 추워진 날씨하고 어울리는 책을 읽고 싶었다. 좋아하는 작가이고, 강렬한 제목이 붙은 일본 미스터리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하지만 살짝 어긋난 기분...;; 소설 [교도관의 눈]은 교도소하고 관련 없는 6개의 단편 모음이다. 혹시라도 드라마 <슬기로운 감빵생활> 같은 위트나 감정을 파고드는 뭔가를 예상하면 안 된다. 괜한 헛발질은 싸늘함과 우울함을 남기고, 씁쓸한 삶의 이야기는 마음을 더 춥게 한다.

교도관의 눈

자서전

말버릇

오전 다섯 시의 침입자

조용한 집

비서과의 남자

모두 다른 이야기지만, 등장하는 주요 인물은 하나같이 열등감과 자격지심 비슷한 것을 지니고 있다. 직업이든, 감정이든... 자기가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감정을 제어하지 못하니 실수를 범하고 문제를 확대한다. 일을 바로잡는 과정에서 자기반성과 성장을 이루어 가는데, 현실은 그리 녹록지 않다. 욕망과 책임 사이에서 방황하는 인간의 본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곤도는 삼십팔 년간의 근무 중 이십구 년을 유치장 교도관으로 지냈다고 한다. 순사(한국 경찰의 순경에 해당한다-옮긴이)로 임명되었을 때부터 일관되게 형사과를 지원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다. 결국 교도관 인생을 걷게 된 것도 형사가 되는 꿈을 포기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유키코는 말했다.(p.21)

"사무직원은 경찰서에서 일하지만, 경찰관이 아니잖아. 경찰관들의 속내는 당연히 모르지. 그래도 괜찮아. 경찰관의 가족, 그 정도 마음만 있으면 돼."(p.42)

'교도관의 눈'에서... 현경 교양과에서 사무직으로 일하는 야마나 에쓰코는 또래 경찰관을 의식한다. 경찰에서 삼십팔 년 중 이십구 년을 유치장 교도관으로 있었던 곤도 미야오는 은퇴를 앞두고도 형사과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평범한 불행이네.

중학교에 입학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때의 일이었다. 집단 괴롭힘을 당했다. 명찰을 잡아 뜯겨 발로 짓밟히고, 이유도 모른 채 무자비하게 괴롭힘을 당했다. 그곳에 혼자 남아 울면서 명찰을 주웠다. 다다노 마사유키. 눈물로 글자가 흐려진 탓에 '마사유키(正幸)'가 '후코(不幸)'로 보였다. '다다노 후코(직역하면 '평범한 불행'이라는 뜻. 동음이의어와 유사한 글자를 이용해 스스로를 자조하는 말장난이다-옮긴이).' 그걸 바라보고 있자니 웃음이 복받쳐 올랐다. 소리 없이 웃던 다다노는 이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상하게 우스웠다. 다섯 살 때 어머니에게 버림받았던 일마저 납득되는 듯한 기분이었다.(p.71-72)

"나는 사람을 죽인 적이 있다... 삼십 년가량 전의 일이다. 사랑하는 여인을 내 손으로 죽였다."(p.92)

'자서전'에서... 방송국에서 계약직 구성작가로 일하는 다다노 마사유키는 개편으로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게 된다. 때마침 효도전기 효도 고자부로 회장의 자서전 집필 의뢰가 들어오고, 그는 삼십 년 전의 살인에 관해서 듣게 된다.

그까짓 일로...

귀에 젖은 말이 유키에의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랐다.

재작년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입버릇이었다. 당차고 자존심도 세고 자식 교육에도 엄격한 분이셨다. 끙끙거리며 속앓이를 하고 있을 때면 늘 그 말을 들었다. 그까짓 일로 울긴 왜 울어. 그까짓 일 따위 얼른 잊고 정리하렴.

저도 모르게 그 말투를 물려받은 유키에도 매서운 어조로 자주 사용했다. 집에서만 큰소리치는 두 딸에게. 사회에서 도망치려고 한 남편에게. 그리고 몇 번이나 좌절할 뻔했던 스스로에게도.(p.125-126)

남편은 학교에서 무리하게 '열정적인 선생님'인 양 행동했던 것 같다. 6학년을 맡아 졸업시킨 다음 해에 2학년 담임을 맡게 됐다. 몹시 산만한 아이가 여럿 있어서 요즘 말하는 학급 붕괴 같은 상황에 부딪혔던 모양이다. 수업이나 생활지도는 마음대로 되지 않고, 교장의 질타나 학부모의 압박에 시달리던 중 몸에 이상이 생겼다.

자율신경실조증. 의사에게 병명을 들었을 때의 남편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안도하는 표정이었다. 그럴듯한 병명이 붙은 사실을 기뻐하고 있었다. 이걸로 더 이상 학교에 가지 않아도 돼. 그 교실에서 벗어날 수 있어. 일순 그렇게 생각했던 거다.(p.154)

'말버릇'에서... 가정법원의 가사조정위원인 세키네 유키에는 남편을 돌보며 두 딸을 키웠다. 요즘 우리 사회의 문제로 떠오른 학부모 갑질 논란은, 이미 일본에서는 2000년대에 성행했었나 보다. 그녀는 새로운 이혼 조정 건에서 아는 얼굴을 만난다.

범인이 저지른 일은 '부정 접속 행위 금지 등에 관한 법률'에 저촉되는 명백한 범죄행위였다. 하지만 S현경에는, 아니 이 방 안에는 피해자라고 일컬을 만한 사람이 존재하지 않았다. 피를 흘린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재산이나 생활도 침해받지 않았다. 피 흘릴 일이 생기는 건 이 일이 매스컴에 알려졌을 때다. 그때 처음으로 피해자가 발생하게 된다.

-어처구니없는 이야기다.(p.200)

기호...

마찬가지였다. 다치하라도 줄곧 그렇게 살아왔다. 공무원. 돈. 방 세 개짜리 관사. 너그러운 아내. 두 딸. 적성에 맞는 일. 기대 이상의 계급... '행복의 기호'를 모아왔다. 언제나 그 수를 세고 확인했다. 늘어나면 늘어난 만큼 과거에서 멀어질 수 있다고 믿었다.(p.223)

'오전 다섯 시의 침입자'에서... 현경 정보관리과에서 인터넷 홈페이지를 관리하는 다치하라 요시유키는 오전 다섯 시에 크래커에 의한 홈페이지 바꿔치기, 사이버테러를 발견한다. 황급히 서버를 분리하고 복구 절차를 진행하지만, 네 명의 접속자가 있었다. 책임 논란이 커지기 전에 범인을 찾아야 하고, 네 명의 입을 막아야 한다.

"어쩌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수도 있어요. 지역면이고, 작은 기사니까."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그 말은 천사의 음성 같기도 했고, 악마의 음성 같기도 했다.(p.243)

다카나시는 벽에 눈길을 줬다. 스무 장쯤 되는 패널에는 무지개와 구름이 다양한 배합과 앵글로 찍혀 있었다. 언제, 어디에 나타날지도 모르는 무지개를 카메라에 담는 건 분명 대단히 고생스러운 일일 터. 하지만 시선을 잡아채는 사진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평가해서, 아마추어 수준에서 벗어나지 못했다.(p.254)

'조용한 집'에서... 현민일보 본사 편집국에서 지역면 편집을 하는 다카나시 도루는 16년간 외근 기자로 일하다가 내근직으로 옮긴 지 3개월이다. 기자 경력하고 비교해서 편집 감각은 신입에게도 밀리는 상황인데, 지역 무명 사진작가의 25일까지 전시회를 26일 오늘까지로 기사를 내었다. 뒷수습해야 한다.

마치 연애와도 같이 농밀한 교제를 해온 만큼 두 번에 걸친 거절은 구라우치를 번민하게 했다. 어르신에게 미움받았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모르지만, 어르신과 구라우치의 관계에 금이 가게 만든 '원인'은 짐작되었다. 사무실에서 나온 뒤부터 줄곧 가부키의 오야마(가부키에서 여성 역을 연기하는 남성 배우-옮긴이)를 연상시키는 희고 갸름한 얼굴이 머리에서 아른거리며 떠나지 않았다.

바로 가쓰라기 도시카즈다.(p.295)

인정하고 싶지는 않지만, 마음속 응어리는 감출 길이 없었다. 가쓰라기에게 질투하고 있었다. 초봄부터 줄곧 그랬다. 응어리가 점차 부풀어 올라, 몸이 뒤틀리는 듯한 기분도 맛보았다. 오십 대 남자의 질투. 젊은 부하에 대한 질투. 겉으로 드러낼 수 없는 감정인 만큼 유독가스처럼 속에 가득 차서 구라우치의 마음을 계속 오염시켜나가고 있었다.(p.296)

'비서과의 남자'에서... 지사실 비서과 과장인 구라우치 다다노부는 일찌감치 자신은 주인공이 아니라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는 쪽이라는 것을 깨닫고, 모시는 일을 한다. 다른 동기에 비해 빠른 출세, 나름의 승승장구로 현지사의 직속 부서장이 되었다. 그런데 새로 뽑은 젊은 감각의 비서에게 어르신의 관심이 쏠리는 것을 질투한다.

불운한 과거를 만회하기 위한 현재의 (집착에 가까운) 노력은 오히려 발목을 잡기도 하고, 나도 모르게 습득된 버릇은 대물림을 한다. 가정을 지키고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 있고, 시간차 트릭의 전조를 볼 수 있다.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자격지심'과 '질투심'을 떠올렸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는 '자아 성찰'과 '역지사지(易地思之)'가 생각난다. 피해자이고 동시에 가해자인 세상,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생각하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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짚의 방패
키우치 카즈히로 지음, 최재호 옮김 / 북플라자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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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우치 카즈히로, 최재호 역, [짚의 방패], 북플라자, 2020.

Kiuchi Kazuhiro, [WARA NO TATE], 2007.

경찰의 보호막은 정녕 짚으로 만든 방패인가!

참신한 소재와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일본 미스터리 특유의 긴장감을 잘 드러낸다. 키우치 카즈히로는 만화가이고, 영화감독이고, 소설가이다. 소설 [짚의 방패]는 2013년에 동명의 영화로 제작되었다. 개인적으로 일본 배우의 과장된(?) 연기를 좋아하지 않아서... 영화는 별로였고, 늘 그렇듯이 원작의 재미는 기대 이상이다. 작가에 대한 관심으로 찾아보니 다른 번역은 아직 없다.

<이 남자를 죽여주세요>

신문 한 면을 거의 가득 채울 만큼 거대한 검은색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 밑에는 커다란 얼굴 사진과 '키요마루 쿠니히데, 34세'라는 글자가 있었고, 다시 그 밑에는 '보상으로 100억 원을 드리겠습니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맨 아래에는 '니나가와 타키오카' 회장의 서명과 홈페이지 주소, 그리고 전화번호가 있었다.(p.22)

그 홈페이지에 의하면, 키요마루를 살해하여 100억 원의 보상을 받는 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키요마루 쿠니히데에 대한 살인죄 또는 상해치사로 유죄판결을 받은 자(여러 명 가능)

둘째, 그 외 키요마루 쿠니히데를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 사실이 공개적으로 인정된 자(여러 명 가능)

조건을 만족하는 사람이 여러 명이라고 해도 각각 1인당 100억 원이 지급된다고 했다.(p.28)

도쿄에서 초등학생 여자아이가 살해된다. DNA 감식으로 용의자를 확정하는데, 이미 7년 전에 비슷한 범행을 저질러 형을 살고 최근에 출소한 키요마루라는 자이다. 사건의 잔혹함뿐만 아니라 세상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은 죽은 소녀가 대기업 회장의 손녀였고, 재계의 거물인 니나가와 회장은 이 살인마를 죽이는 대가로 100억 원이라는 현상금을 내건다. 비참하고 참담한 피해자는 거액을 제시하여 사적 복수를 하려 하고, 누군가는 인생을 바꿀 기회로 여기고 달려든다.

SP란 시큐리티 폴리스(Security Police)의 약자로, 내각 총리를 포함해 각급 장관, 국회의장, 헌법재판소장과 대법원장, 각 정당 당수, 도지사나 전경련 회장 등 요인(VIP)의 경호를 주 업무로 하는 경찰이다.

SP 중에서 기동경호대에 소속된 SP는 평소 어떤 요인을 경호해야 하는지 정해진 담당이 없는 SP이다. 가령, 미국 대통령 방문과 같은 대규모 국가행사가 있을 때나, 각 요인을 담당하는 SP가 어떤 사정으로 결원이 발생할 때를 대비해 만들어진 예비부대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상 업무는 주로 대기였다. 그저 할 일이 없이 대기만 하면서 지내면 된다.(p.26)

국가의 공권력, 즉 경찰력에 대한 신뢰는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 만에 하나, 돈에 눈이 먼 인간이 니나가와의 광고를 보고 키요마루를 살해하면 어떻게 될까. 경찰에 맡기는 것보다 현상금을 거는 편이 가해자를 잡기에 더 유효하다는 결론이 된다. 돈이면 무엇이든 되는 세상, 천민자본주의가 승리한 셈이 되고 말 것이다.

그렇게 되면 경찰 공권력의 위신이 실추될 뿐만 아니라 사회 질서도 무너지고 만다.(p.31-32)

경찰은 공권력의 신뢰와 질서 유지를 위해 애쓰지만, 연일 계속된 매스컴의 보도로 온 국민은 감시자가 된다. 얼마 후 용의자 키요마루는 끊임없는 살해 위협을 견디지 못하고 후쿠오카 남부경찰서에 자진 출두한다. 경찰은 그를 체포해서 검찰 송치를 위해 도쿄로 이송해야 하고, 이례적으로 SP를 투입한다. 대기 중이던 기동경호대 소속 메카리 카즈키 경정을 포함해서 SP 2명, 수사본부 형사 2명, 후쿠오카 남부경찰서 형사 1명... 총 5명으로 이송 팀이 꾸려진다. 요인 경호가 아니라 범죄자를 보호해야 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다.

"방금 들어온 소식을 전해드립니다. 후쿠오카 남부경찰서에서 구속 중인 용의자 키요마루 쿠니히데가 경찰관 한 명에게 피습당했다고 합니다."(p.69)

전국의 경찰관은 약 24만 명.

물론 그들이 일으킨 사건은 셀 수 없다.

...

기본적으로 경찰 조직은 자기들의 잘못을 은폐하기 쉬운 조직이다. 그러니 그 와중에 은폐하지 못한 사건들만 따져도 그 정도일 것이다. 경찰이 저지른 범죄 중에서 은폐된 것까지 포함하면, 엄청난 숫자의 경찰관이 법을 어기고 있음을 알 수 있다.(p.70-71)

예상은 했지만, 차마 입에 담지 못한 일이 발생한다. 경찰관에 의한 피습... 100억 원이라는 돈의 무게는 직업윤리, 양심, 신념마저 바꾸어 놓는다. 경찰관에 이어서 치료 간호사, 범죄 조직만이 아니라 일반 시민까지 한탕주의에 빠져있다. 안전한 장소는 없고, 누구도 믿을 수 없는 상황... 후쿠오카에서 도쿄로 이송을 시작한다.

메카리는 키요마루가 죽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적어도 지금은.

하지만 죽어도 좋은 녀석이라고는 생각한다. 아무 죄 없는 소녀를 두 명이나 죽인 녀석이다. 게다가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그런 키요마루를 목숨 걸고 지킬 가치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임무라서인가? 자신이 경찰 조직의 일원이기 때문에?

메카리에게 이런 위험까지 감수해가면서 경찰 조직에 남아 있을 이유 따윈 없었다.

'지킬 가치도 없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었을 때 내 죽음에 대체 무슨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렇게 죽은 나를 아내가 어떻게 볼 것인가. 난 키요마루를 위해서 죽을 수 없다.'

메카리는 그 사실을 명확하게 깨달았다.(p.127-128)

"우리에게 중요한 문제는 키요마루의 목숨 자체가 아닐세. 키요마루가 경찰의 호위 속에서 살해당하는 사태가 발생하느냐가 문제일세... 더구나 경찰관에 의해 살해당한다면 더 큰 문제지."(p.130)

천문학적인 현상금이 걸린 파렴치한을 호송하는 일은 계속된 외부의 위협과 내적인 갈등을 유발한다. 죽이기만 하면, 죽임에 기여하면 큰돈을 만질 수 있기에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는 자들이 있고, 가까이서 무장한 경찰관은 더 위협적이다. 살인마를 목숨 걸고 지켜야 하는 사명, 이 일의 가치문제, SP와 강력반 형사의 입장 차이... 갈등은 극대화되고, 서로를 불신하는 중에 하나씩 쓰러진다.

설정이 기발하고 짜임새 있는 소설을 좋아하는데, 완전히 취향 저격이라고 해야 하나... 영화를 보아서 내용을 알고 있어도 재미있게 읽었다. 어느 순간, 지나치게 짜임새와 구성을 쫓다 보니... 내가 소설을 보는 것인지? 나무위키를 보는 것인지? 헷갈리기도 하고...ㅋㅋ

아, 100억 원이면, 나도 어쩌면...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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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국
도노 하루카 지음, 김지영 옮김 / 시월이일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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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노 하루카, 김지영 역, [파국], 시월이일, 2020.

Tono Haruka, [HAKYOKU], 2020.

제163회 아쿠타가와상

집 근처에 작은 도서관이 있다. 열람실은 없고, 종합자료실만 있는... 그래도 시립이라서 어지간한 책은 다 있다. 좋아하는 일본소설도 꽤 있고... 도서관을 이용하면 구간 도서는 마음대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읽기가 느리다 보니 늘 반납의 압박을 받는다. 모르는 책보다 잘 아는데 궁금한 책을 고른다. 다섯 권을 빌릴 수 있지만, 두세 권을 빌려 한 권도 못 읽고 반납할 때가 많다. 이런 배경에서 읽은 도노 하루카의 짧은 소설 [파국]이다.

파국(破局)은? 글자 그대로 판을 깨뜨리다, 일이나 사태가 잘못되어 결딴이 나는 판국, 문학(희곡)에서 비극적인 결말을 이르는 말이다. 아쿠타가와상의 기대감, 현실에서 마주할 수 없는 욕망, 추잡한 인간의 끝없는 추락 과정을 보고 싶었다. 그런데 파국은 무슨? 해프닝, 단순한 우발적인 사건을 과대평가한 아쿠타가와상이 파국이다!

텔레비전에서는 남성 경찰관이 강제추행 혐의로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달리는 도카이도선 열차 안에서 여성의 속옷 안으로 손을 집어넣었다고 한다. 범죄자가 붙잡히는 건 좋은 일이다. 죗값을 치르게 해야 한다.(p.12)

텔레비전의 전원을 켜자, 전 여자친구의 집에 침입해 속옷을 훔친 혐의로 남성 경찰관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 흘러나왔다.(p.20)

자리 간격이 가까운 걸 핑계 삼아, 나는 그 여자에게 일부러 다리를 갖다 대려고 했다. 그렇지만 내가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떠올리곤 그만두었다. 공무원을 목표로 하는 사람이 그런 비열한 행위를 해서는 안 된다. 대신 의자의 위치를 신중하게 조절하는 체하며 그녀의 다리를 훔쳐보았다.(p.32-33)

텔레비전에서는 뉴스가 나오고 있었는데, 여자화장실에 소형 카메라를 설치한 혐의로 남성 경찰관이 체포되었다고 한다.(p.99)

모든 범죄는 죄악이지만, 직업적으로 특히 더 저질러서는 안 되는 사람이 있다. 가령 경찰관이 성범죄에 연관된다든가 하는... 요스케는 평범한 대학생이다. 법학부 4학년,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졸업한 공립 고교에서 럭비부 코치로 활동한다. 근육질의 탄탄한 몸, 남에게 드러내지 않는 성욕... 사회의 질서와 규범 안에서 자신을 잘 통제하며 살고 있다.

나는 마이코와 사귀는 사이니까 더 많이 섹스를 하고 싶다. 사실은 매일 하고 싶지만, 공부도 하고 싶으니까 이틀에 한 번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그러나 마이코가 하고 싶지 않다면 억지로 섹스를 할 수는 없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그건 강간이고, 나는 범죄자가 되어 법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 게다가 나는 마이코의 남자친구다. 마이코가 싫어하는 일은 할 수 없다. 마이코가 목표를 향해 노력한다면, 그걸 응원하는 게 내 역할일 것이다.(p.54-55)

요스케는 여자 친구와의 관계에서도 자신을 억제할 줄 안다. 마이코는 정치 지망생으로, 미래를 위해 늘 분주하고 활발하다. 겉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요스케는 그녀를 응원하면서도 채우지 못하는 욕망이 있다. 이런 요스케에게 동아리 공연에서 우연히 만난 신입생 아카리가 다가온다.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시작은... 탈선? 왜곡된 욕망? 억눌린 사회 규범의 탈출? 이라기보다 그냥 자연스러웠다. 생일에 집에 초대해서 케이크를 만들어주는... 소홀한 쪽보다 관심 주는 쪽으로 기우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내가 예쁘다고 말하자, 아카리는 어리둥절해하며 무슨 말인지 되물었다. 당연히 아키리 얘기라고 하자, 갑자기 무슨 말이냐며 웃었다. 갑자기가 아니라, 말하지 않았을 뿐 계속 생각하고 있었다고 나는 말했다. 그리고 개그 공연에서 봤을 때부터 그렇게 생각했고, 앞으로도 말로 하지 않을 뿐 늘 그렇게 생각할 거라며 내 소견을 말했다. 그러나 방금 전의 말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왜냐하면 내일 일 같은 건 아무도 모르니까. 지금의 내가 아카리를 예쁘다고 생각하고 소중하게 여긴다고 해서 내일의 나도 그렇게 생각하리라고는 아무도 보증할 수 없을 것이다.(p.151)

같이 밥을 먹고, 여행을 가고, 잠을 자고... 열심히 공부해서 시험을 보고, 열정적으로 후배들을 코칭하고... 요스케의 순조로운 일상은 한순간에 깨어진다. 두 여자 사이에서, 배려와 욕망 사이에서, 규범과 일탈 사이에서... 삶은 꼬이고, 멍든 채 끝난다.

일상적이면서 난해하고, 원인과 결과가 불분명해서 아주 불친절하다. 앞뒤로 뭔가 더 이야기의 살이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매력적인 캐릭터와 좋은 글솜씨가 중간에서 뚝 끊긴 기분... 아, 친절한 소설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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