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올리언스에 가기로 했다
이인규.홍윤이 지음 / 버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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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규, 홍윤이, [뉴올리언스에 가기로 했다], 버터북스, 2023.

올해는 순문학을 포함해서 일본소설에 집중하려고 했다. 하지만 여기저기에서 들려오는 여행 에세이(와 미술 에세이)의 유혹을 참지 못했다. 다행히 집에서 가까운 도서관이 '여행 및 지리 분야 특성화'라서 읽을 책은 충분하다. 북아메리카 대륙, 미국 남부, 루이지애나 주, 뉴올리언스가 눈에 들어왔다. 외국으로... 나라가 아닌 특정 도시로 떠나는 여행, 그것도 반복해서 찾는 곳이라는 게 흥미롭다.

여행지에서 버스킹하는 뮤지션들을 마주할 때면 마음이 스스로 무장해제되었고, 이왕이면 더 많은 음악을 느슨하게 듣는 여행을 해보자고 생각했다.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곳에서 얽매이지 않는 자유를 느껴보고 싶었다. 그렇다. 나는 뉴올리언스에 가고 싶었다.(p.15)

여행에서 가장 우선적으로 준비해야 하는 건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다. 여비나 일정 같은 건 마음이 준비되면 따라오게 돼 있다.

...

우리는 2017년에 처음 뉴올리언스를 여행했다. 그리고 뉴올리언스를 잊지 못해 각자 한 번씩 더 방문했다. 이 책은 우리가 따로 또 같이 뉴올리언스를 여행하는 틈틈이 쓰였지만, 함께 여행한 첫 여행에 무게를 더 싣고자 했다. 출간 시점을 기준으로 달라진 상황은 추가 여행과 취재를 통해 보완했다. 이 책을 시작할 때 서점에는 (어린이책 한 권을 제외하면) 제목에 '뉴올리언스'가 들어가는 책이 없었다.(p.24-25)

이인규는 엔터테인먼트에서, 홍윤이는 디자인하고 관련한 일을 한다. 두 여자가 함께 또 따로 여행한 뉴올리언스는 입체적이면서 다양한 시각을 제공한다. 죽기 전에 꼭 가야 하는 유명한 여행지가 아니라 즉흥 연주가 흘러넘치는 곳에서 자유로운 여행을 말하고 있다. 여행의 준비는 떠나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한다. 어쩌면 내가 이 책을 읽는 이유인지 모르겠다. 코로나19 이후 어딘가로 떠나는 것을 두려워하는, 닫힌 마음을 두드리고 있다.

지금은 꽃과 음악으로 가득한 평화로운 광장이지만 과거엔 피로 가득한 공개 처형장이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 식민지였다가 스페인 식민지로, 다시 프랑스 땅이 되었다가 결국 미국 땅이 되기까지의 아픈 역사까지 고스란히 받아들이기 위함일까. 이곳에는 프랑스, 스페인, 미국 국기가 모두 게양대에 걸려 있다.(p.36)

케이준과 함께 나오는 연관 검색어가 바로 크리올이다. 크리올은 유럽계와 아프리카계 혼혈을 뜻하는 단어이자, 그들이 먹는 음식을 뜻하기도 한다. 크리올 음식의 정의는 대개 이렇다. '미국 남부 지역의 음식으로 프랑스, 스페인, 서아프리카, 미국 원주민, 아이티, 독일, 이탈리아 음식이 섞인 것.' 이 정의에 슬쩍 다른 나라를 끼워 넣어도 아무도 틀린 걸 못 알아차릴 정도다!(p.138-140)

뉴올리언스(New Orleans)는 미시시피 강변에 위치한 재즈의 고향이고, 프랑스와 아프리카 문화가 융합된 용광로 같은 곳이다. 역사적으로 프랑스의 식민지였다가 스페인의 지배를 당한, 아프리카계 노예의 설움과 흑백 혼혈의 갈등, 마크 트웨인의 소설 [톰 소여의 모험]과 [허클베리 핀의 모험]의 배경, 윌리엄 포크너의 첫 번째 소설 [병사의 보수]를 집필한 그리고 루이 암스트롱까지... 이것은 크레올과 케이준을, 재즈 음악을 비롯한 문화적으로 융성한 도시를 형성했다. 도시 전체가 음악이고, 문화이고, 맛집인 곳이 또 있을까? 글과 사진만으로도 몸을 들썩이게 하는 아주 매력적인 곳이다.

'재즈' 페스티벌과 재즈 '페스티벌'에 가고 싶은 두 사람은 그렇게 재즈 페스티벌을 중심으로 일정을 짰다. 재즈 페스티벌 기간에 뉴올리언스에 가려면 우선 경비가 조금 더 든다. 페스티벌은 매년 4월 말에서 5월 초까지 2주간 열리며 이때가 뉴올리언스 여행의 성수기다.(p.99-100)

뉴올리언스에서는 연간 약 130건 이상의 축제가 열린다. 1년이 약 52주인데 축제가 130건 이상이라니... 역산하면 이곳에선 매주 두 건 이상의 축제가 열리고 있는 셈이다!(p.142)

축제의 도시로 떠나는 여행은... 잭슨 스퀘어, 버본 스트리트, 프리저베이션 홀, 유러피언 재즈펍, 프렌치먼 스트리트, 뮤지컬 레전드 공원, 프렌치 쿼터, 뉴올리언스 재즈 앤드 헤리티지 페스티벌, 레코드숍에서의 재즈를 안내한다. 케이준과 크리올 음식, 굴 축제, 맛없는 검보, 흙 맛 나는 커피와 쿠바에는 없는 쿠바 샌드위치, 카페 뒤 몽드와 카페 베녜에서의 맛 경험은 경이롭다. 로열 스트리트, 현대 미술관, 포크너 하우스 북스, 루이 암스트롱 공원, 스트리트 카, 미시시피 강, 재즈 박물관과 남부 미술관은 꼭 가보고 싶은 곳이다.

여행 이야기가 이렇게 재미있다니... 한동안 잊고 있었던 여행의 즐거움을 일깨워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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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의 정원 -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오늘의 일본문학 17
시바사키 도모카 지음, 권영주 옮김 / 은행나무 / 2016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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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바사키 도모카, 권영주 역, [봄의 정원], 은행나무, 2016.

Shibasaki Tomoka, [HARU NO NIWA], 2014.

제151회 아쿠타가와상

기억과 만남의 이야기라고... 봄이라서 계절하고 어울리는 책을 읽고 싶었다. 당분간 아쿠타가와상하고는 인연을 끊으려고 했는데, 도서관의 일본소설 코너에서 순문학은 전부 문학상하고 연관이 있다. 이쯤이면, 운명인듯하다. 소설 [봄의 정원]은 글로 쓴 사진집이다. 실제로 존재하는 곳인지는 모르겠지만, 중심 내용을 사진(또는 삽화)으로 수록하면 어땠을까? 상상을 자극해서 이런저런 사연을 덧붙이는데, 기억과 만남보다는 헤어짐의 기억에 관해서라는 생각이다.

여자는 이따금 몸을 내밀었다. 그러면 또 얼굴이 보였다. 검은 테 안경에 다소 짧고 어중간한, 굳이 말하자면 단발머리. 2월에 이사 왔다. 연립 앞에서도 몇 번 본 적이 있는데, 서른 살 넘은 나이, 자신과 같거나 약간 연하일 것이라고 어림짐작했다. 키가 작고, 맨날 티셔츠나 트레이닝복 같은 옷만 입는다. 스케치북 너머에서 여자가 목을 쑥 뺀다. 이쪽을 향해 머리를 숙인다. 다로는 그제야 비로소 여자가 보는 게 정면에 있는 주인집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다로의 집이 있는 방향, 주인집 옆집. 물빛 집.(p.8)

다로는, 아버지는 10년 전에 돌아가시고, 아내와는 3년 전에 이혼했다. 그러면서 급하게 이사한 곳이 지금 사는 연립주택 뷰 팰리스 사에키 Ⅲ이다. 2층 끝에는 니시라는 여자가 살고 있는데, 그녀는 베란다에서 맞은편 집을 엿보고 있다. 물빛이 정확히 무슨 색인지 모르겠지만, 물빛 집을 주의 깊게 관찰한다.

부지의 3분의 1 정도는 정원이다. 연립에서 떨어져 있는 쪽이라 다로의 집에서 정원은 보이지 않는다. 골목 모퉁이에 해당되는 위치, 담장 안에 커다란 목백일홍이 있다. 나무껍질이 얼룩덜룩하게 벗겨진 매끄러운 줄기 덕에 다로도 바로 알아볼 수 있었다. 약간 거리를 두고 두 그루, 중간 크기와 작은 낙엽수도 보인다. 이 집 앞은 어쩌다 가끔 지날 뿐이지만, 이 목백일홍은 꽃이 자주색, 중간 크기 나무는 흰 매화, 작은 것은 산벚나무 같은 꽃이었다고 기억한다.(p.19)

다로는 출근하는 길에 니시를 보았다. 그녀는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거대한 금고 같은 집을 천천히 돌면서 담장 안을 들여다보려고 한다. 물빛 집은 확실히 눈에 띄는 서양식 저택 같은 건물이다. 적갈색 기와지붕, 스테인드글라스를 한 창문과 현관, 멋과 세월이 느껴지는데, 1년 가까이 비어 있다. 그녀는 왜 그 집에 관심을 두고 있을까?

"혹시 가능하면 그 댁 베란다 난간에 올라갈 수 없을까 하는데요. 원래는 여기 바로 윗집에서 제일 잘 보이겠지만, 아시죠, 벌써 이사 가신 거. 절대 강도질을 계획한다든지 몰카 같은 건 아니고요. 그냥 좀, 음, 그러니까 저 집을 좋아하는 것뿐이에요."(p.32)

그림을 그리는 니시는 물빛 집을 보고 싶다면서 다로에게 말을 건넨다. 그녀의 집보다 그의 집이 물빛 집을 보기에 적당하다고 여겼는지... 어쨌든, 새로운 만남의 시작이다. 그녀는 자신이 왜 그 집을 좋아하는지를 들려준다.

"이 집이 그 집이에요."

큰 판형의 얇은 책은 <봄의 정원>이라는 사진집이었다. 책을 펴자 앨범처럼 한 페이지에 사진 네댓 장이 나열되어 있었다. 대다수가 흑백사진이다.

"보세요. 똑같죠?"(p.38-39)

니시가 보여준 <봄의 정원>은 물빛 집을 찍은 사진집이다. 유리 문안에는 널찍한 툇마루가 있고, 다다미방이 이어진 일본식 구조이다. 집 안의 풍경과 함께 젊고 머리가 짧은 여자와 몸이 마른 장발의 남자가 나온다. 1964년 도쿄 올림픽이 열린 해에 지은, 다양한 요소가 포함된 건축물이다. 사진집 <봄의 정원>은 20년 전에 살았던 부부의 일상을 촬영한 것이라고 하는데, 남편은 광고 감독이고 아내는 소극단 배우였다고 한다. 그러면서 니시는 자기의 이야기... 사진집을 보면서 처음으로 결혼과 사랑을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빈집이었을 때는 정지되어 있던 시간이 움직이고 있었다. 건물 자체는 집 안에 아무도 없었던 일주일 전과 똑같은데, 그곳의 기척이며 색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그곳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있는 데 그치지 않고 집 자체가 별안간 생명을 되찾은 듯했다. 사진과 마찬가지로 언제까지고 바라볼 수 있을 줄 알았던 집이 자기 의사를 가지고 움직이기 시작한 것 같았다. 과장된 표현일 수도 있지만, 인형이 인간이 된 것처럼 살아 숨 쉬는 존재의 느낌이었다. 집 앞을 지날 때마다, 우편함에서 빠져나온 봉투라든지 베란다에 널어놓은 시트가 보일 때마다 누가 몸속을 슥 어루만진 감촉이 들었다.(p.57-58)

물빛 집에 새로운 가족이 이사 왔다. 같은 집이지만, 단 일주일 만에 느낌이 다르다. 멈추었던 시간이 움직이고, 색조가 바뀌고, 이전에는 없던 생명력이 느껴진다. 니시는 친분을 쌓아 집을 구경하고, 다로는 집에 관해서 더 많은 것을 알게 된다.

다로는 문득 생각나 사 씨에게 물빛 집에 전에는 어떤 사람이 살았느냐고 물었다. 그러면서 사 씨가 이 연립에 17년 살았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사 씨가 이사 왔을 당시 우시지마 다로와 우미무라 가이코는 이미 그 집에 살지 않았다. 사 씨의 기억으로는 미국인 부부가 약 10년, 그 뒤 부부와 중고생 형제가 5년쯤 살았다. 부부와 중고생 형제는 다로도 본 적이 있는 듯했지만 기억이 확실하지는 않았다.(p.74)

누구나 집과 함께한 세월이 있다. 물빛 집은 <봄의 정원> 사진집을 출간한 이후에 행복해 보이던 두 사람은 이혼했고, 미국인 부부가 10년을, 중고생을 둔 가족이 5년을 살다가 나갔다. 이것을 목격하고, 교류한 이웃이 있고... 지금보다 젊은 시절의 추억이 남아 있다. 그때마다 물빛 집은 다른 색을 띠며 시간의 흐름을 맞이했겠지... 새로운 만남은 지나가고, 헤어짐의 기억이 남아 있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인연이 스쳐 지나가고 있을까? 죽은 아버지, 헤어진 아내, 그렇게 살게 된 집... 다로와 니시의 만남은 별다른 진전 없이 끝나고... 또 다른 곳에서 새로운 삶을 이어간다. 시작과 끝이 불분명한 불친절한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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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멘과 모리
요시타케 신스케 지음, 권남희 옮김 / 김영사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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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시타케 신스케, 권남희 역, [메멘과 모리], 김영사, 2024.

Yoshitake Shinsuke, [MEMEN TO MORI], 2023.

메멘과 모리는 엄마와 아들이 아니라 누나와 동생이다! 요시타케 신스케는 유명한 그림책 작가이자 일러스트레이터이다. 일본에서 그림책 서점대상을, 뉴욕타임스의 최우수 그림책상을 받았다고 하는데... 동네 작은 도서관의 어린이 자료실에 50여 권의 책이 있는 것을 보고 인기를 체감했다. [메멘과 모리]는 첫 번째 장편 그림책이라고 하는데, 세 개의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메멘과 모리와 작은 접시

메멘과 모리와 지저분한 눈사람

메멘과 모리와 시시한 영화

일러스트에 관심이 있다면, 작가의 그림을 극찬한다. 세상은 아는 만큼 보인다고... 빠르게 한 번 읽었고, 그림의 설명을 듣고 나서 천천히 두 번을 보았다. 인물의 표정과 몸짓, 얼굴의 방향과 시선, 살짝 번진 듯한 펜의 흐름은 대단한 표현력이다. 나는 글에 관심을 두었는데, 다른 누구는 그림에 초점을 맞춘다.

미안...

누나가 만든 접시를

깨뜨렸어......

어마나......

....음.

괜찮아.

또 만들면 되니까.

하지만

세상에 하나뿐인

소중한 접시인데......

괜찮아!

어떤 것이든 언젠가는

깨지기도 하고, 잃어버리기도

하는 거야.

'줄곧 거기에 놓여 있는' 것보다

'함께 뭔가를 한' 것이

더 중요하잖아?

그림을 빼고 보니 꼭 시를 읽는 기분이다. 어린 동생 모리를 향한 누나 메멘의 따뜻한 조언은 여러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현실적이면서 미래적이고, 무엇을 정해놓기보다는 무한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메시지이다. 동생의 실수를 있는 그대로 받아주는 모습에서 내가 갖추지 못한 성숙한 인격을 배우게 된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지저분한 눈사람이었다는 이야기, 시시한 영화를 함께 보고 난 뒤의 감상은... 접시를 깨뜨린 철부지 모리의 모습을 포함해서 내가 사는 세상을 반영하고 있다. 나이를 먹을 만큼 먹었지만, 여전히 뭔가를 떨어뜨려 깨뜨리고 있고... 지저분한 눈사람으로 아직도 꿈을 좇고 있으며... 이렇게 살다 보면, 결국 시시한 인생으로 끝나는 게 아니냐는 불안감이 있다.

눈사람일 때의 내가 하고 싶었던 걸

하게 해 줄 거야.

그러니까 지금 내가 뭘 하고 싶은지

잔뜩 생각해 두자.

요컨대 사람은 '생각이랑 달라!'하고

깜짝 놀라기 위해 사는 거야.

생각과 달라서

세상은 괴롭고, 힘들고,

즐겁고, 기뻐.

조금만 생각을 바꾸어 언젠가 하게 될 일을 생각해 보고, 또 생각하고 달라서 깜짝 놀라는 일이 일어나는... 그래서 삶은 괴롭기도 하고, 즐겁기도 하다는 교훈이 있다. 동화적이기도 하고, 철학적이기도 하다. 아이를 위하기도 하고, 어른을 위하기도 한다. 세상에는 시시한 영화는 없고, 시시한 인생도 없다! 귀여운 그림이 마음에 들고, 전혀 모르는 분야를 알아가는 재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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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엔도 슈사쿠 지음, 이평춘 옮김 / 어문학사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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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도 슈사쿠, 이평춘 역,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 어문학사, 2015.

Endo Shusaku, [KAGEBOSHI], 1968.

전설(?)의 작가를 만났다. 로마 가톨릭 신앙의 소설을 써서 일반 문학을 평정한 엔도 슈사쿠(1923~1996)는 미우라 아야코(1922~1999)와 함께 어렸을 때부터 끊임없이 들어온 이름이다. 일본 대중문화개방(1998~)이 이루어지지 않은 시절에 이미 그의 글과 어록을 인용하고 있었는데, 저작권하고 상관없이 번역했던 것인지 의문이다. 대표작으로 여기는 [침묵](홍성사, 2003. 마틴 스코세이지 감독, 앤드류 가필드, 리암 니슨 주연의 영화 <사일런스> 2017. 원작)과 [깊은 강](민음사, 2007.)(두 권의 책은 1996년 작가가 별세하면서 도쿄 후추시에 있는 가톨릭 묘지에 안장할 때 유언대로 함께 관에 넣었다고...)을 가지고 있으면서, 도서관에서 빌린 단편 선집을 먼저 읽은 것은 (행운, 운명이라기보다) 어떤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생각이다.

그림자

잡종견

6일간의 여행

노방초

나른한 봄날의 황혼

분장하는 남자

흙먼지

만약

[엔도 슈사쿠 단편 선집]은 8개의 단편으로 자전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유년 시절부터 성장 과정, 어머니와 스페인 선교사 신부의 영향, 죽음의 문턱을 오가는 투병 생활, 가톨릭 작가로서의 삶, 결혼 생활과 가족에 관해서... 자기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의 작품은 다신교 사회인 일본에서 일신교인 기독교 사상을 내세워 인간의 죄와 악의 문제를 깊이 있게 다룬다고 하는데, 여기에서는 그런 글이 탄생하게 된 배경... 가톨릭 신앙으로의 귀의, 반항과 방황의 삶, 죽음과의 사투, 죄악과의 투쟁 그리고 인간의 나약함과 신의 은총에 관해서 독백하고 있다.

나로서는 당신이 (나로서는 아직 알 수 없지만) 지금까지보다 더욱 깊은 믿음으로, 더 큰 사랑을 위해 신학교를 버리고 한 여자를 선택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아니 지금이야말로 당신이 옛날보다도 강한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를 바랐습니다. 하지만 그런 어린애 같은 유치한 공상은 깨지고 말았습니다.(p.56)

첫 번째와 마지막 단편 '그림자'와 '만약'은 연관성이 있다. 그의 인생에서 충격적인 배반 사건, 성직자의 환속, 신을 위해 일생 헌신하겠다고 서원한 신부와 수녀가 별 볼 일 없는 여자에게, 병약한 남자에게 빠져 교회에서 떠나는 것을 목격한다. 특히 스페인에서 온 선교사 신부는 30년 이상 신앙의 가르침으로 믿음의 토대를 이루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던 인물이다. 분노와 처참함을 불러일으키는 감정, 그러면서 왜? 라는 의문은 평생의 화두가 되어 그의 작품에서 계속 등장한다. 신앙을 저버린 나약한 인간에 관해서, 더 나아가 배교의 수준으로 확장, 소설 [침묵]에서는 고통받는 이웃을 향한 신의 침묵에 절규하는 페레이라 신부와 로드리고 신부의 모습으로 투영된다.

이렇게 해서 당신과의 길고 긴 만남이 끝났습니다. 생각해 보면, 성애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 병실로 찾아온 것이 첫 만남이었는데, 그동안 30년 이상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졸음이 왔던 당신의 이야기, 버려진 나의 개, 당신과 산길을 뛸 때의 고통, 기숙사에서의 사건, 어머니의 죽음, 그리고 가루이자와에서 버터를 내게 준 당신의 동상 걸린 손, 이러한 추억 하나하나가 내 인생의 강물 속에 소중히 가라앉아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에게 남긴 흔적, 우리는 자신이 타인의 인생에 어떤 흔적을 남기며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마치 바람이 모래사장의 소나무 등을 휘게 하고 가지의 방향을 바꾸어 놓듯, 당신과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은 물론. 나를 현재의 방향으로 바꾸어 놓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당신은 어딘가로 사라져 버렸습니다.(p.57-58)

'그림자'를 읽으면서 적잖이 놀랐다. 그동안 책을 읽으면서 다양한 삶을 보았고, 부분적으로 닮은 꼴이 있었지만, 내 삶의 전부를 고스란히 옮겨 놓은 것은 처음이다. 어린 시절에 아버지를 떠나 어머니와 둘이 살고, 기독교 신앙에 의존하고, 반듯하게 자라기를 강요받고, 아무것도 하지 않은 반항의 세월, 건강의 문제...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나를 지배하는 믿음의 세계, 덫에 걸려 넘어지는 목회자를 수없이 보았고, 아버지와 연을 끊고 살면서 어쩌다 길에서 마주쳐도 못 본 척 지나치는 일 하나까지... 그리고 스페인 선교사 신부의 마지막 모습에서 나 역시 나약한 인간이고, 신의 은총을 간구하고 있음을 보게 된다. 내가 소설만 쓰면 완벽히 일치하는 신비로운 경험이다.

지금도 내 소설에는 이따금 개나 새가 등장하는데, 그것은 단순한 장식이 아닙니다. 그때의 나에게는 다른 사람한테 털어놓을 수 없는 고독을 나눌 수 있는 유일한 대상이 바로 이 개였습니다. 지금도 슬픈 표정을 한, 눈물 고인 개의 눈을 보고 있으면 나는 왠지 그리스도의 눈이 생각납니다. 물론 그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자신감을 지니고 있던 이전의 당신과 같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람들에게 짓밟히며 그 발 아래에서 묵묵히 인간을 바라보는 지친 후미에의 그리스도입니다.(p.23)

'잡종견'은,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개와 새는 나와 동행하는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어렸을 때 키우던 잡종 개는 고독한 그에게 유일하게 슬픔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동반자였다.

"글쎄요. 어머니와 같은 생활 방식...... 부럽기는 하지만, 나로서는 도저히 따라 할 수 없을 것 같아요."

"어째서?'

"한 사람을 행복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을 그만큼 상처 입히잖아요. 역시 나 같은 사람은 그것을 못 견뎌 할 거예요."(p.98-99)

'6일간의 여행'은 어머니의 흔적을 찾아 살던 집, 다니던 교회를 방문하는 이야기이다. 어머니는 누군가에게는 행복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는 상처를 주었다. 우리는 모두 타인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고, 영향을 주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말다툼이 또 시작된다. 아내에게 화를 내면서, 베이루트에서 그냥 비행기를 탔더라면 지금쯤 하네다에 도착했을 거라고 남편은 생각했다. 도쿄에 돌아가면, 또 여기저기 거래처에 인사하러 다니고, 연회에 참석하고, 일요일에는 접대 골프에 갈 것이다.

나무 한 그루에 표찰이 붙어 있는데, 여기는 유다가 목을 맨, 피의 밭이라고 쓰여 있다. 갑자기 어딘가의 라디오에서 재즈 음악이 바람을 타고 들려왔다.(p.133)

'노방초'는, 여행 중인 부부는 요르단에서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하는 중에 일상의 문제로 다툰다.

그는 퇴원한 후에도 한 달에 한 번은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있다. 병원에 갈 때마다, 그는 다시 얻은 자유를 조심스레 되씹으면서 자신이 3년 동안 지냈던 4층을 살그머니 올라가 본다. 그러나 환자의 방에는 들어가지 않는다. 아직 입원해 있어야 하는 사람들에게 퇴원한 자신의 모습을 보여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p.168)

'나른한 봄날의 황혼'과 '만약'은 투병으로 연결되어 있다. 폐결핵으로 3년간의 입원 생활은 본인의 괴로움은 물론이고 가정 경제의 어려움을 초래하기도 했었나 보다. 여성스러웠던 아내는 운전면허를 따고 그가 부탁한 무거운 책을 옮기며 강인한 아줌마가 되어 있었고, 목숨을 담보로 세 번째 수술을 가까스로 성공해서 병원에서 나올 수 있었다고 한다.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순교자들이 있었고, 가족의 평범한 일상이 있다.

"나는 내 작품에서 여자에 대해 쓰지 않아. 아니, 쓰지 않는 게 아니고, 쓸 수 없는 거야."

"쓸 수 있게 된다면, 소설가로서 제 몫을 하는 셈이지."

"그런데 어떨까? 지금까지 소설 가운데 묘사해온 여자는 정말 여자인 걸까? 남자의 눈으로 본, 남자가 상상한 여자가 아닐까?"(p.207-208)

'분장하는 남자'는, 작가에게 있어서 병약함과 3년의 입원은 적지 않은 영향을 주었나 보다. 경험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분장 도구를 구매해 노인으로 변장하고 거리에 나선다. 또 여자로 변장해 보기도 하고... 그가 얼마나 죽음과 가까이 있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나른한 봄날의 황혼'과 더불어 애잔함이 느껴진다.

불쾌하게 느껴졌던 흙먼지가 그렇게 싫게 느껴지지 않게 된 것은 그 이후부터였다. 창틀이나 툇마루에 쌓인 잿빛 먼지를 입으로 불면서, 그는 이것이 조각난 토기를 사용하던 고대인들의 삶의 흔적이라고 걸레질을 멈추며 생각에 잠긴다. 더러는 인생이 끝난 뒤, 그 위에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가 계속 쌓이고 쌓여 흔적도 남기지 않고 모든 것을 지워간다는 사실에 감동마저 느낀다.(p.224)

'흙먼지'는, 도쿄를 벗어난 주택가에 흙먼지가 날린다. 바람에 날리는 흙먼지는 과거의 세월을 포함해서 모든 것을 뒤덮는다.

나의 이러한 생활 태도는 가능한 한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는 마음에서다. A라는 사람이 B라는 사람의 인생을 스쳐 갔기에, B의 인생이 다른 방향으로 휘어버리는 일이 있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 인생의 방향이 바뀌는 경우가 그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왠지 모르게 두려워진다. 그리스도교 신자인 나는 이전에 그것을 '죄'라고 생각하여,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기지 않으려 했다. 혹시 어쩔 수 없이 다른 사람의 인생에 흔적을 남겨야 한다면, 그것은 내 가족만으로 족하다.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나는 오늘날까지 파국을 겪는 사소설 작가들을 흉내 내지 못하는지 모른다.(p.249-250)

하지만 이 '만약'이 없었기 때문에 우리는 결혼하여 지금껏 사는 것이다. 우리 인생에서 이 우연을 빚어내고 있는 존재는 도대체 무엇일까. 우연은 정말로 단순한 우연에 지나지 않는 것일까.(p.252)

'만약'은, 등에 지퍼 자국 같은 수술 흔적을 남긴 치료자들은, 내가 왜 결핵에 걸렸을까? 를 질문한다. 전차나 영화관에서 우연히 옆에 앉은 사람 중에 결핵 환자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답을 듣는데, 여기서 만약이라는 가정을 하게 된다. 만약... 그 사람 옆에 앉지 않았더라면, 결핵에 걸리지 않았더라면, 수술을 결정하지 않았더라면, 아버지하고 관계가 좋았더라면... 인생의 모든 부분에서 선택의 갈림길이 있었다. 무수한 경우의 수를 단순히 우연으로 여길 수 있겠지만, 배후에는 어떤 절대자가 있는 게 아니냐는 생각을 한다. 결혼의 배경과 소설가의 삶을 드러낸다.

책을 다 읽은 후에는 사소한 문장 하나하나가 되살아나는 진기한 경험을 한다. 단편 '그림자'는 인생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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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이마무라 나쓰코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4월
평점 :
품절


이마무라 나쓰코, 홍은주 역,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 문학동네, 2020.

Imamura Natsuko, [MURASAKI NO SKIRT NO ONNA], 2019.

제161회 아쿠타가와상

표지가 벗겨져서 아무런 정보 없이 제목만으로 운명처럼 읽었다. 작가는 누구이고, 아쿠타가와상을 받은 것을 몰랐는데, 그만큼 보라색 치마를 입은 여자에게 끌렸나 보다. 나는 무엇을 기대한 것일까? 보라색 짧은 치마나 속옷이 아니니 관능미는 아닐 것이고, 치마를 입은 미녀가 아니니 환상 연애는 더욱 아니다. 그냥 보라색 취향을 지닌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일상이 궁금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에 들어가 보고 싶었다.

우리 동네에 '보라색 치마'로 불리는 사람이 있다. 언제나 보라색 치마를 입고 다녀서 그렇게 불린다.(p.5)

보라색 치마가 내 언니와 닮았다면 보라색 치마가 동생인 나와도 닮았다는 말이 될까, 되지 않을까. 공통점이 없지도 않다. 저쪽이 '보라색 치마'라면 이쪽은 이른바 '노란색 카디건'이라 할 수 있으니까.(p.7)

요컨대 무슨 말을 하고 싶은가 하면, 나는 꽤 오래전부터, 보라색 치마와 친구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다.(p.14)

아담한 체형에 푸석푸석한 검은 머리, 뺨에는 드문드문 기미가 있고... 보라색 치마는 일주일에 한 번 상점가 빵집에 들른다. 사람들 사이를 재빠르게 지나 공원에서 크림빵을 먹는다. 보라색 치마는 내 언니를 닮은 것 같고, 내 친구를 닮은 것 같고,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패널을 닮은 것 같고, 동네 마트의 캐셔를 닮은 것 같다. 나는 그녀와 친구가 되고 싶다. 나는 노란색 카디건을 입은 여자이다.

노란색 카디건은 보라색 치마를 뒤따르며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을 설명한다. 표면적으로 둘의 관계는 완벽한 타인이고, 관계는 좀처럼 좁혀지지 않는다. 책을 읽는 내내 어떤 상징성을 떠올리려고 했다. 과거의 나와 현재의 내가 동시에 등장한 것이라는 생각, 타인이 의식하는 나와 내가 의식하는 나라는 생각, 자아의 분열이라는 생각... 그래서 그토록 가까운 친구가 되고 싶어 한 것은 뭔가 어긋난 것을 회복하기 위한 몸부림이라고 판단했다. 어쨌든 마지막에는 보라색 치마가 앉았던 공원의 자리에 노란색 카디건이 앉아 있다.

"미안한데요오, 안 들렸는데 다시 한번 부탁해요오."

사실은 들렸다. 히노입니다, 마유코입니다, 라고 그녀는 확실히 말했다. 일명 보라색 치마라고 합니다, 라고. 노란색 카디건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p.31)

지금 '마유 씨'의 손톱은 새빨갛고 끝이 뾰족하다. 그 뾰족한 손톱으로 '마유 씨'는 공중전화 버튼을 누른다. 누르고는 끊고, 누르고는 끊고를 되풀이한다... 덕분에 나까지 소장 집 전화번호를 외워버렸다.(p.102)

보라색 치마는 호텔에서 청소 스태프로 일하게 된다. 육상부 출신답게 빠른 움직임으로 의외의 적응을 하고, 동료들과 친분을 쌓고, 공원의 아이들과 어울리는 등 생활의 변화가 일어난다. 하지만 가정이 있는 파견업체 소장과 사귀면서 다시 어그러지는데... 외모가 바뀌고, 사내 규정을 위반하고,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고, 관계가 틀어져서 결국에는 호텔에서 도망쳐 나간다. 평범하지 않은 여자의 일상이고, 내가 경험하지 못한 세계가 분명하다. 그런데 재미가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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