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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에는 꽃이 피네 (소책자)
법정스님 지음 / 동쪽나라(=한민사) / 1998년 12월
평점 :
품절
한 수행자가 있었다. 수행하는 데 쥐 한 마리가 계속 얼쩡거렸다. 그래서 쥐를 쫓으려고 고양이를 샀다. 고양이에게 줄 우유가 필요해서 암소도 샀다. 암소를 돌볼 여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결혼했고 아이를 가졌다. 그 여자와 아이가 살 집이 필요해서 집을 지었고, 그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그는 가만히 앉아 수행할 수 없었다.
어리석은 이 수행자에 대한 이야기는 남의 이야기가 아니다. 소유는 소유를 낳는다. 이 집보다 더 큰 집으로 이사가면 가구를 바꾸고, 가전제품을 더 사야지 하고 생각하기 마련이다. 그러고 나면 그 집과 그 물건들을 유지하기 위해 벌이에 더 신경을 쓰게 되고, 벌이가 적어질까 전전긍긍하게 된다. 이 덫에 걸려 들기만 하면 우리가 상식적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 벌어진다. 몇 십 억을 갖고 있는 사람이 세금도 안 내고, 입에는 늘 돈이 없다는 말을 달고 지내면서 한 끼밥을 겨우 먹는 사람의 돈을 몰인정하게 빼앗는다. 그 사람은 본래 나빠서 그런 것인가? 아니다. 바로 소유의 덫에 걸려 들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덫인 줄을 모르면 계속해서 모자라고 모자란 돈을 버느라 무슨 짓이든지 하려고 하게 된다. 그 시작은 쥐 한 마리와 같이 사소한 것이지만 마음이란 놈은 얼마나 광대한지 곧 마을을 채울 소유물을 필요로 하게 된다.
법정 스님이 늘 경계하시는 것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니겠는가 생각해 본다. 스님께서는 감옥에 갇힌 줄 알고, 그곳에서 어떤 일이 있어도 벗어나고자 하는 빠삐용이 되어야 진정한 자유를 맛볼 수 있다고 하신다. 무엇으로부터 갇혀 있는가? 바로 욕망이다. 어쩌면 그 욕망들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해 수행이라고 말하기보다 스님은 자연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다. 필요한 최소한의 것을 갖고 살아가는 동물들처럼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것, 자연과 같이 침묵하는 것, 자연 속에서 홀로 있을 때 샘솟는 존재의 갈망들에 대해 이야기 하신다. 모든 여분의 것은 부자유를 부른다. 소유로부터 자유로와라. 그러려면 마음을 비워라, 맑히라...
자기 마음을 맑히라니 어떻게 맑힐 것인가. 마음을 비우라니 어떻게 비울 것인가. "관념적인 것을 갖고는 마음이 맑아지지 않는다. 물론 참선이나 염불이나 기도를 지극히 해서 마음을 맑힐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에 불과하다. 자칫하면 관념화되기 쉽다. 현실적으로 선행을 해야 한다. 선행을 함으로써 저절로 우리들 마음이 열리고 맑아진다. 마치 시절 인연이 와서 연꽃이 피어나듯이 그렇게 맑아진다"(p.195)
스님은 그 선행의 일환으로 "맑고 향기롭게"에서 활동하신다. 소리도 없이, 있는 듯 없는 듯 자연스럽게 아주 사소한 일부터 마음으로 하신다. 아주 작은 것도 소유하려 하지 않는 마음, 아주 사소한 것을 사랑하는 마음이 세상을 어떻게 바꿀 수 있겠는가, 그저 한 사람의 몸짓에 지나지 않는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니 스님께서 "한 사람의 마음이 맑아지면 그 둘레가 점점 맑아져서 마침내는 온 세상이 다 맑아질 수 있다"(p.196)고 말씀하신다. 한 사람의 마음을 중히 여기는 것이야말로 이 시대가 필요로 하는 그런 생각이 아닌가 싶다. 한 사람 중히 여기는 마음이 소외된 이웃을 둘러 보게 하고, 소수의 무시당하는 사람들을 이해하게 하고, 굶주리는 한 사람의 손을 잡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책 읽는 내내 산 중턱에 걸터 앉아 스님께 이야기 듣는 기분이었다.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을 보니 내가 사랑하는 어린왕자를 사랑하신다고 했다. 그리고 또 이 책을 보니 내가 그 삶을 음미하고, 음미했던 성프란체스코를 친구처럼 여기신다. 사실, 어린왕자나 성프란치스코 같은 사람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나는 굳이 공통점을 발견해 기뻐하며 스님과 가을 바람을 맞고 있다.
훌쩍 떠나고 싶은 가을이다. 단풍 때문도 아니고, 하늘 때문도 아니다. 어쩌면 바람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렇게 서늘하고, 헐벗게 하는 바람이 내게도 절실히 필요한지도 모른다. 불필요한 것들은 가라, 비본질적인 것들은 가라. 이 바람에 날아가 버려라. 나무가 잎을 버려 제 안으로 침잠해 가듯 "황폐한 내부를 숨기기 위해 피워낸 크고 넓은 이파리들"(기형도의 "길 위에서 중얼거리다" 중에서)은 이제 가라. 나는 그만 행복해져야 겠다. "행복의 척도는 필요한 것을 얼마나 많이 갖고 있는가에 있지 않다. 불필요한 것으로부터 얼마나 벗어나 있는가에 있다. 홀가분한 마음, 여기에 행복의 척도가 있"(p.97)으니 그 불필요하고 비본질적인 것으로부터 훌쩍 떠나고 싶은 게다. 떠나야 겠다. 가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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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소책자는 절판되었지만 같은 출판사에서 크기를 다르게 해서 지금도 출판되고 있다.